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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없는 젊은이 -4
보통학교를 졸업하는 선출이는 서울에 있는 고등보통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아들이 서울에 있는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자 도시오는 서울 북촌에 집을 한 채 마련하였다.
보통학교 앞에 옛날 권문세가가 살았던 꽤나 잘 지은 집이었다.
어떻게 도부 상들의 손을 거쳐 돈 있는 거상들이 두어 번 거쳐 간 집을 도시오가 취득하게 되었다.
주인이 귀중한 손님을 모셨던 곳으로 보이는 별채와 규모가 웅장한 안채와 사랑채는 귀족이 살았던 흔적이 역역하나 행랑채는 대부분 헐어지고 도부 상들이 사용한 창고가 있고, 옛날에는 바깥마당으로 사용했음직한 대문 밖의 넓은 터에는 집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게 학생들을 상대로 한 문방구로 지은 허름한 가게가 있었다.
옛날 양반들처럼 하인을 거느리고 살 것이 아니므로 안채와 바깥채 그리고 옛 주인이 영빈관으로 사용했음직한 별채만 남기고 헐리지 않고 남은 행랑과 지저분한 창고를 헐어버리고 넓어진 마당에 연당을 만들고 나무들을 심고 대문을 큰 길 쪽으로 돌려 새로 냈다.
집을 고치고 나니 아주 깔끔해졌다.
구 대문 밖에 문방구로 지어진 허름한 가게도 헐어버리고 가게와 창고로 사용할 신식 건물을 지었다.
큰 집에 아이들만 둘 수 없어 별채는 러시아인 여자가 사용하도록 내어주고 처갓집 식구들을 데려 올 때 자신들의 거처가 고향에 알려질까 봐 연락조차 하지 못했던 갓난이 여동생 김 서방네를 불러 올렸다.
김 서방네가 가게에서 문방구와 잡화장사를 하도록 해 주고 공부하는 아이들을 돌보게 하였다.
가게가 신식 건물이라 다른 가게들에 비하여 넓고 깨끗해서 손님들이 많이 찾았다.
김 서방네 내외도 사람들이 영리하고 언문(言文)도 쓸 줄 아는 편이라 촌에서 올라 왔어도 장사를 제법 잘 하였다.
아내 갓난이가 늘 동생네를 걱정하고 있어 마음에 끼였는데 불러올려 놓고 보니 마음이 편하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더 없이 든든해졌다.
가게 벌이만 해도 동생네가 살기는 넉넉한데도 식량이랑 염장(鹽醬)을 갓난이가 늘 보내주었다.
도시오는 선출이를 고등보통학교에 보내면서 가족들의 이름을 고쳤다.
누가 보아도 천한 티가 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나면 상전들에게 부탁해 지은 이름이라 이름이 이름답지가 못하다.
성 참봉 집에서 집사로 있을 때는 하인들의 이름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 여겼는데 세상에 출입을 하고 보니 이름 하나도 신경이 쓰였다.
큰 아들 선출(先出)이 이름을 살펴보면 먼선(先) 날 출(出) 먼저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작은 아들 후출(後出)이는 나중에 나왔다는 말이 된다.
아내 갓난이는 방금 낳은 아이란 뜻이다.
이름을 되새겨 보면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쌍놈이요.” 하고 있다.
도시오는 자기 성이 왜 손 씨며, 어디 손 씨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가 손가라고 해서 손 씨 인줄 알고 있을 뿐이다.
서울 집을 사면서 옆집에 사는 손 수안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집을 계약한 술자리에서 모두 가고 남아 한잔 더한 그는 취중에 문중 선산 걱정을 했다.
조상님들 5대가 나란히 누워있는 묘소 바로 위에 지방에서 씨족 세력이 좋은 토호(土豪)가 수안씨 네 집안을 무시하고 산주 허락도 없이 자기들 묘를 써 놓아 집안 간에 시비가 붙어 재판 중인데 상황이 좋이 못하다고 하였다.
후지끼상과 같이 경시청에 들렸다가 서울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손수안씨를 초대하여 같이 술을 마시며 선산문제를 물어보았다.
손수안씨에게서 사정이 좋지 못하다고 하였다.
도시오가 손수안씨를 도와주고 싶어 후지끼상에게 조선에서는 남의 산소 위에 묘를 쓰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라며 도와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후지끼는 고등계 형사부장이지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서 조선에 나와 있는 검찰이나 경찰 권부(權府)에 상당한 연을 가지고 있다.
후지끼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시오의 부탁보다 손씨 집안을 자기 끄나풀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즉석에서 후지끼가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구했다.
그 동안 질질 끌며 불리하게만 돌아가던 상황이 후지끼 전화 한통으로 며칠 지나자 쉽게 해결이 되었다.
손 수안씨가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도시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왔다.
웅장한 도시오의 집을 보고 모두 대단한 집안 후손으로 알고 어디 손 씨냐고 물었다.
도시오는 손수안씨가 월성 손 씨란 것을 알고 월성손가라고 대답을 했더니 어른들이 우리 일가라며 모두 좋아 하였다.
집안 내력에 대하여 도시오는 거짓으로 둘러댔다.
증조부가 어릴 때 고조부가 돌아가시고 또 증조부모도 할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가까운 집안도 없고 집안에 선대에 대한 문서도 노일전쟁 때 모두 잃어버려서 부끄럽게도 집안 내력을 잘 모른다고 하였다.
어른 중에서 한분이 도시오에게 “집안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어 오면서도 이만한 자리를 지탱한 것을 보니 자네가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주면서 “우리가 집안에 곧 가책을 새로 만드는데 자네가 원한다면 자네 집안도 같이 올려 우리 서로 가깝게 지내자” 하였다.
도시오도 집안 어른의 의견에 동의하여 족보에 들어가고 항렬자도 수자로 받았다.
항렬을 따서 큰 아들 선출이 이름을 진하(晋河)라 하고 작은 아들 후출이는 진구(晋求)라고 고쳤다.
이참에 아내 갓난이도 고울 선(鮮)자 난초 난(蘭)자를 써서 선란(鮮蘭)이라 로 고쳤다.
도시오는 이제 가족들의 이름 하나에도 인격과 주체성을 찾고 보니 자신도 양반이 된 것 같고 손수안의 일가가 되어 손 씨 집안에 들고 보니 문중(門中)까지 생겼다.
도시오는 이렇게 자신의 집안이 남의 집 하인이란 흔적을 지우려고 몸부림을 쳤다.
1930년 9월 조선공산당들이 많이 활동하는 중국 상하이에 소련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단야가 나타났다.
1921년 3월 상해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 일에 참여했던 김단야는 1922년 4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려고 입국하다가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신의주에서 잡혀 징역 1년 6개월을 살고 나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화요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며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에 힘을 쏟다가 1925년 9월에 조선일보에서 해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기자직에서 해직이 되자 김단야는 그해 12월에 다시 상하이로 가서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 주필을 맡아 활동하다가 1926년 8월 모스코바로 가서 국제레닌대학교 청강생으로 들어가 공부를 했다.
국제레닌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김단야는 코민테른에서 조선 문제 위원회 일을 맡아하다가 1929년 서울로 돌아와서 조선공산당 조직을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의 수사 표적이 되자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모스코바에 있던 김단야가 상해에 나타나자 서울 경시청은 후지끼를 상하이에 있는 일본비밀경찰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여 조선공산당 활동을 제압하라는 특명을 맡겼다.
중책을 맡아 상하이로 가면서 도시오도 같이 가자고 하였으나 도시오는 인간적으로 따라 가고 싶었지만 더는 조선인 독립군이나 공산당을 잡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고 싶어 중국말을 못한다는 핑계로 10년을 같이 하며 형님 같고 스승 같았던 후지끼와 헤어졌다.
후지끼가 떠나자 도시오는 살벌했던 경찰서 일을 그만 두고, 시내에서 가까운 동흥리 작은 마을 앞에 3년 전에 사과나무를 심어놓은 5000평 되는 농장 마을 쪽 들머리에 가족들 살림집과 처갓집 가족들이 살 집을 지었다.
도시오는 새로 지은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처남이 관리하고 있는 사천 농장으로 다니면서 농장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였다.
도시오는 처제와 김 서방이 경영하고 있는 문방구와 창고를 모두 헐어내고 넓은 터에 현대식으로 3층 상가를 새로 지었다.
2층에 처제가 문방구겸 잡화 상회를 만들어 점원을 두고 경영하게 하고 1층에는 동서 김 서방과 같이 곡식과 과일 및 소금을 도매하는 도매상을 열고 젊은 일꾼들이 말 수레로 거래처에 물건을 배달하였다.
다른 도매상과는 달리 개성에서 직접 생산한 과일과 쌀을 값싸게 배달까지 해 줌으로 찾는 거래처가 날로 늘어났다.
40 중반이 된 도시오는 큰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놀지 않고 처남이 관리하는 과수원과 작인들에게 맡긴 논밭을 둘러보며 서서히 장사꾼으로 변신해갔다.
상재(商材)가 있는 것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붐비며 사업은 날마다 번창해 갔다.
도시오는 바쁜 중에도 시간이 나는 대로 태공망의 육도삼략과 손자, 오자, 한비자 같은 병서(兵書)들을 즐겨 읽었다.
전에 읽고 외울 수 있었던 것이지만 나이와 그 동안의 삶의 경륜 탓인지 새로운 철리(哲理)를 터득해 갔다.
조선 사람이면서 조선을 버리고 일본 사람으로 살아왔으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조선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는 자신은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그저 물에 떠다니는 부초(浮草)처럼 여겨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조선이 독립을 하게 된다면 일본 순사 앞잡이로 살아온 자신과 가족을 조선 사람들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일본 사람들을 배신하고 조선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도시오는 그 동안 앞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온 자신의 무모함과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 현실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과거지사는 덮어두고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만일을 위해서 일본경찰 하수인이었던 것을 아는 개성에서 가족들의 주소지도 모두 서울로 옮겨놓았다.
법관이 되겠다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다니는 큰 아들 진하에게 만약에 앞으로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는 날이면 법관이 되어 일본에 충성하한 것이 무서운 재앙이 될 수도 있으니 공부를 마치는 대로 아버지와 같이 장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남의 집 하인으로 살아온 집안 내력에 대한 아픔을 가슴에 안고 있는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 진하는 조선 제일의 지성을 자랑하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법관으로 출세해서 조선의 양반님들을 한번 호령해 주고 싶은 증오심 때문에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에 동의하고 싶지가 않았다.
1931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한학기만 마치면 대학을 졸업하게 될 친구 네 사람이 사천 변에 있는 진하네. 큰 과수원에 몰려 며칠을 놀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열차 안에서 뜻하지 않는 사고가 일어났다.
금촌역을 지날 무렵 진동호가 화장실에 갔다 오다가 일본인 대학생들이 통로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잡답을 하고 있는 옆으로 지나다가 부딪혀서 담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동호가 미안하다고 하려는 찰나에 「이 조선 놈의 새끼가」하면서 일본청년이 어깨를 잡아챘다.
어깨를 잡아채던 연석이 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객차 바닥에 넘어졌다.
다혈질에 공수도 고수인 진동호가 공격을 당하자 동물적인 본능으로 연석의 다리를 걷어차며 주먹을 날렸다.
동료 친구가 넘어지는 것을 보자 일본 학생 둘이 합세하여 진동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공수도 고수인 동호도 당하지 못하고 코피가 터졌다.
이를 본 진하 친구들도 일어나 합세함으로 삽시간에 패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일본 학생들도 주먹께나 하는 실력에 복싱 선수까지 끼어 있어 동호 외에 셋은 주먹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얻어터져 4대 3으로 싸우면서도 수세에 몰렸다.
친구들이 불리해지자 창가에 앉은 채로 싸우는 광경을 보고 있던 진하가 일어나 나오면서 싸움은 반전이 되었다.
진하가 주먹을 날리자 일본 청년들은 피투성이로 변했다.
승무원이 달려오고 열차 안에 있던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서야 싸움이 끝났다.
젊은이들 싸움이라 헌병들이 적당한 훈방으로 끝내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얻어맞은 일본학생 가운데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의 조카 「마스다」가 끼어있었다.
헌병들은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조카가 다친 사건이 되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일본헌병대로 연행되어 간 진하 일행은 헌병들에게 가죽채찍으로 살이 찢어지도록 맞았다.
헌병들은 진하 일행이 「마스다」가 정무총감의 조카인줄 미리알고 고의로 폭행하였다고 몰아,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사상이 불량한 학생들이라며 학교 당국에 공문을 보내 퇴학을 시키라고 하였다.
이럴 때 후지끼가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도시오 혼자서 개성 경찰서를 찾아가 부탁을 해보았으나 정무총감의 조카를 폭행한 사건이 되어서 경찰서에서 나서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10년간 함께한 도시오의 업적을 들어 선처를 구하는 진정서를 올려주었다.
경찰서에서 올려준 진정서 덕택인지 가벼운 벌금을 내고 모두 풀려났으나 학교에서는 그대로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자 진하는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게 되었다.
상놈으로 태어나 조선의 양반님들에게는 인간 대접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상전에게 능욕을 당한 복수심으로 철저한 일본 경찰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일본인으로 살려고 하는데,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헌병대에서 살이 찢어지게 얻어맞고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하자 자신이 아무리 일본이 대려해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가 참봉 어른에게 능욕을 당하는 것을 보던 그때부터 진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동생과 같이 엄마를 따라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던 날 엄마가 참봉 집에서 도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영악하게 철이 들어버렸다.
아버지를 따라 개성으로 와서 보통학교에 들어갔을 때 석이 도련님의 하인이 아닌 당당한 한 사람의 자유로운 학생으로 공부하는 것이 더 없이 행복했고, 상전의 집 행랑이 아닌 경찰서 관사에 살면서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옷에 신발을 신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사천강변에 불하받은 땅에서 많은 논과 밭, 그리고 사과 농장을 만들어 부자가 되어 서울에 있는 으리으리한 집을 마련하자, 성 참봉 댁 석이 도련님의 방보다 더 좋은 방에서 지내게 되자 어린 마음에 한번 뻐겨보고 싶기도 했다.
또한 동흥리 과수원에 가족들이 살 살림집을 짓고 만석지기도 더 되는 부농으로 변신하자 열심히 공부해서 법관으로 출세하여 양반들 앞에서 당당하게 뻐겨보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찍부터 어린 가슴에서 남들보다 더 배워야 한다는 자의식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서울에 있는 고등보통학교 입학을 했을 때는 자신도 크게 출세할 수 있다는 야망을 품고 공수도와 축구 같은 운동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턱걸이기는 하지만 자랑스러운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필자 주 : 경성 제국대학은 일본이 세운 관립학교로 1920년 재단법인 조선교육회가 발기 되어 종합대학인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인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봉쇄할 목적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 사람들에게 독립정신을 일으킬 수 있는 정치, 경제나 이공계 학부는 설치하지 않고 식민지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설치하였다가 1941년에 이공학부가 설치되었다. 1926년 개교 당시 교수 57명 중에 조선인 교수는 5명에 불과하고 학생도 150명 중 47명에 불과하였다.)
하찮은 싸움으로 일본 헌병들에게 조선인이란 이유로 얻어맞고 대학에서 재적까지 당하자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이겨보려고 과수원에 들어가 농장 일꾼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도 해보았다.
(계속)
- 갈등하는 지성 -
사과 밭에서 뜨거운 여름 일꾼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해봐도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배움에 대한 욕구가 진하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였다.
견디다 못해 다시 공부를 하려고 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을 했다.
학교 당국이나 학생들에게서 경성제국 대학에서는 볼 수 없던 민족의식이 곳곳에서 불타고 있었다.
학교 내면에는 교수나 학생 모두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범벅이 되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민족이나 애국 따위는 본래부터 관심이 없는 진하지만 고등보통학교 때와는 달리 공산주의를 하는 비밀 서클에는 호기심이 당겼다.
비밀이 모이는 공산주의 서클인 「신흥청년 학습반」에 가담한 친구가 여러 번 자기들 학습에 같이 나가자고 하였다.
공산주의이란 새로운 사조에 호기심이 당기던 진하는 자의반 타의반 친구를 따라 한적한 변두리에 있는 규모가 큰 초가집으로 갔다.
신흥청년 학습반에는 전문 학생 10여명과 고등학생이 7-8명이 꽤나 넓은 방에 모여 미모가 뛰어나고 세련된 여자 선생님에게 학습을 받고 있었다.
친구가 진하를 소개하자 학습을 지도하던 여자 선생이 먼저 함경도 억양으로 “나는 손명화입네다.”하고 악수를 청했다.
여자와 처음으로 악수를 한 진하는 약간 쑥스럽기는 했지만 당당하게 “손진하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모인 분위기에 반일감정을 과장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저는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다가, 기차 안에서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조카를 만났습니다. 그 연석을 보는 순간 민족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연석에게 폭행을 하였다가 학교에서 재적을 당했습니다. 두어 해를 쉬다가 배워서 일본을 이기자고 금번에 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는 손진하입니다.”
모두가 일어나 박수로 환영해주며 일일이 악수를 했다.
등사판으로 프린트한 교재를 가지고로 손명화 선생이 마르크스 자본론을 가르치며 원하는 사람에게는 러시아말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진하는 마르크스주의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손명화 선생은 감옥에 있는 박헌영 동지와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김단야와 주세죽동지등 조선공산당 선배들의 공적과 혁명투쟁을 알려주면서 때로는 여러분도 혁명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못되는 진하는 자기 정체성에 고민하다가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 민족이나 국가보다 온 인류가 공동의 하나가 되어 평등하게 살게 한다는 공산주의 세계관을 배우면서 공산주의야말로 내가 바라던 철학이라며 신흥청년학습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학교를 졸업할 때쯤 신흥청년학습반을 통해 상당한 공산주의 이론가가 되었다.
매 주말이면 손명화 선생이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사용하는 러시아어 교재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서울 진하네 집 별채를 빌려 지내던 러시아인 여의사를 통해 고등보통학교 2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수시로 러시아 말을 배웠다.
천부적으로 어문학에 소질이 있는 진하는 초보적인 대화를 할 수 있고 쉬운 러시아 동화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손명화 선생을 만나면서 러시아 말도 진보가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두어 번 손명화 선생이 집으로 초대 하였지만 그 때마다 사정이 생겨서 손 선생의 집으로 가보는 영광은 누리지는 못했다.
졸업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일본 관료가 되지 말고 과수원이나 관리하며 평화롭게 살자고 하셨다.
서울 대학에 다니던 때는 출세욕이 넘쳤지만 신흥청년 학습을 받으면서 공산주의 혁명가의 꿈이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1935년 연말 진하는 진동호를 비롯한 일곱 명의 친구들이 관수동에 있는 깨끗한 선술집에서 망년회를 가졌다.
주모와 같이 술상을 들고 미소를 머금고 들어오는 색시가 황홀할 정도로 예뻤다.
예쁘게 생긴 이 작부를 어디서 많이 본 것만 같았다.
어디서 보았을까?
상양하고 영리하게 생긴 계집이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낮 익었다.
망년회 내내 색시에 대한 궁금증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스무 두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요염하게 생긴 계집이 난잡하지도 않으면서 사내들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진하는 지금껏 목로 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지만 선술집 작부들과 놀아본 적이 없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친구들의 요청을 받은 작부가 일어나 붉은 갑사(甲紗)치맛자락을 살짝살짝 벌여 한쪽 허벅지를 보일 듯 보일 듯 내보이며 한창 유행하고 있는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 옛터에)을 흐드러지게 불렀다.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두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어라.
구슬프고 애잔하게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계집을 따라 모두 함께 합창을 하면서 어떤 친구는 눈물까지 흘렸다.
어쩐지 여인의 노랫가락을 듣고만 있어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진하도 눈물을 흘리며 자꾸만 자기에게 이런 여동생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으로 노래를 불렀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으나 선술집 작부의 애잔한 노래 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가슴을 찢어놓는 것만 같아 잠이 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어쩌면 황성의 적은 그 계집을 위하여 만들어놓은 노래만 같았다.
도시오는 개성으로 온 후부터 일본 사람들처럼 조선 사람은 쇠지도 않는 양력설을 쇤다.
진하는 본정통(현충무로)에 있는 미스코시 백화점에 들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일본 정종회사에서 만든 청주와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집으로 내려왔다.
남들은 쇠지도 않는 양력설이지만 동생 진구와 같이 설빔을 입고 차례를 지낸 후에 아버지께 세배를 올렸다.
세배를 마치자 아침상이 들어왔다.
엄마가 끓인 만두 국을 먹던 진하는 깜짝 놀랐다.
아주 어릴 때 일이다.
겨울 날 낮에 순달이와 선출이 형제는 엄마가 퍼주는 만두를 넣어 끓인 떡국을 먹었다.
참봉 어른이 만두를 넣은 떡국을 좋아하셔서 겨울이면 자주 끓어먹었다.
다섯 살이던 순달 이가 자기 그릇에서 굵은 만두를 하나를 건져서 “이거 오빠 묵어” 하면서 선출이 그릇에 넣어주었다.
진하는 어릴 때 보았던 순달이의 모습은 기억에 나지는 않지만 순달이 기억에 선술집 그 작부 생각이 났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여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서울로 갔다.
약력 설을 쇠는 사람은 일본 사람들 뿐이어서 개성은 물론이고 서울의 거리도 공휴일이라는 것 외에는 평일과 같았다.
관수동 선술집은 한 낮이라 그런지 한가로웠다.
선술집으로 들어서다 방에서 나오는 색시를 보고 “안녕하십니까?” 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색시는 진하의 이런 행동이 장난스러워 보였는지 빙그레 웃으며 “서방님 어서 오셔요.” 하며 자리를 권했다.
진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색시가 시키는 대로 가게 나무 의자에 앉았다.
주모가 아직 숫되어 보이는 진하를 아래위로 흩어 보다가 술집 출입이 서투른 것 같으나 차림새로 보아 제법 돈푼이나 있어 보이자 공손한 태도로 “아이고 서방님 안방에 술상 차려 드릴게 안방으로 들어가셔요.” 하며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를 했다.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진하는 어떨 결에 주모가 시키는 대로 들어가니 지난번에 망년회를 하던 방보다 많이 작아도 깔끔하고 깨끗했다.
주모가 “조금만 기다리시면 술상차려서 색시를 보내드리겠습니다요.” 하고 수다를 떨며 나갔다.
철부지 봉이다 싶은지 주모가 앞에서 슬데 없는 너스레를 떨며 진하가 보아도 제법 걸게 차린 술상을 색시와 같이 들고 들어왔다.
색시는 조금 전에 입었던 옷을 갈아입고 “서방님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라.” 하며 웃음을 쳤다.
그저께 보았을 때 보다 화장기가 부드럽고 더 어리게 보였다.
색시 모습에서 순달이의 기억은 찾을 길이 없지만 어쩐지 순달이 같이만 느껴졌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모가 “서방님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셔요.” 하고는 나갔다.
색시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귀여운 미소를 흘렸다.
진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채워놓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고 경황없이 “색시 오늘 자고 가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자기가 말을 해놓고도 봐도 황당했다.
“아이고 대낮부터 웬 주무시기는요? 그러다가 댁에 가셔서 아씨마님에게 쫓겨나시려고요”
색시는 진하 말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안주를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말을 하고 보아도 염치가 없는 말에 더욱 할 말이 막혔다.
만약 순달이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
비록 술집 여자지만 이렇게 혼자서 여자와 같이 해보기는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하다.
색시가 말이 없는 진하를 보며 속으로 아직 경험이 없는 총각이라 그러려니 여기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술잔을 채웠다.
정종을 서너 잔을 거푸 마시고 난 진하는 색시에게 황성의 적을 한번 불러 달라고 했다.
색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저 그 노래 몰라요.” 하고 은근히 뒤로 뺐다.
진하는 어색함이 조금 살아지면서 특유의 자신감이 살아나 “그저께 망년회를 할 때 색시가 황성에 적을 어떻게나 잘 부르는지 그 노래가 듣고 싶어서 오늘 이렇게 찾아왔소.” 했다.
망년회에 왔다고 하자 색시는 그 망년회가 기억이 났는지 “어머! 그날 그 망년회 때 오셨던 서방님이셨구나? 그래 어디서 보았다 싶더라.” 하고는 넘어 가려고 했다.
진하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색시도 진하를 따라 같이 불렀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진하는 노래를 멈추고 눈을 감고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두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어라.
여자는 혼자서 간드러지게 불렀으나 지난번처럼 애잔하거나 구슬프지는 않았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는 진하를 보더니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방님 왜 눈물을 흘리시나요.” 하더니 옆으로 와서 명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제가 노래를 잘 못 불렀나요.” 하면서 처다 보았다.
진하가 계집의 손을 잡았다.
여자가 손을 빼려하자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용기를 내어 「순달아!」 하고 불렀다.
참봉 댁에서 손 집사 가족들이 없어지자 큰 난리가 났다.
검찰에 넘어간 참봉 어른을 구명한다며 토지를 팔던 손 집사가 가족을 데리고 살아졌다.
손 집사가 없어지자 마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소란을 떨다가 몸 저 눕고, 참봉어른은 6개월 만에 벌금형을 받아 집으로 왔다.
손 집사 일로 화가나 참봉어른은 집에 있던 하인들을 모두 내 쫓았다.
아무런 대책 없이 쫓겨난 순달네는 사방 흉년이 들어 식모 살 곳도 없어 거지 생활을 해야 했다.
김해 등지로 유랑하며 모진 겨울을 견딘 모녀는 입춘 무렵 진주까지 흘러가 어느 선술집으로 밥을 한술 얻어먹으러 들어갔다.
추운 날씨에 거지 모녀가 불쌍했던지 주모가 손님도 없는 가게에 앉혀놓고 솥에서 끓고 있는 시래기 국에 식은 밥을 말아 뜨겁게 해서 주었다.
배고픔과 얼어 죽을 고비를 넘겨온 순달이는 주모가 말아준 국밥을 오래간만에 배가 부르도록 먹고는 따듯한 아궁이 앞에서 잠이 들었다.
겨울 추위에 피부가 시커멓게 언 어린 순달이를 불쌍하게 본 주모가 딸애를 데리고 다니지 말고 자기에게 수양딸로 주고 가라고 했다.
순달이 엄마는 어린 딸이 배를 곯지 않고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주모가 시키는 대로 순달이를 수양딸로 주고 떠났다.
잠에서 깬 순달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자 주모가 며칠 있으면 엄마가 온다고 달랬다.
날마다 엄마를 부르며 울었지만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를 부르며 울던 순달이도 여러 날 지나자 엄마를 체념하고 수양엄마에게 부침을 하며 명랑해져갔다.
겨울 내 갈아입지도 못한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켜 새 옷을 입혀놓으니 아이가 예뻤다.
수양엄마는 친딸처럼 사랑하며 이름을 혜숙이로 고쳐 학교에 넣어주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개 잘 사는 양반집 아이들이다.
수양 엄마는 혜숙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빠지지 않게 옷을 단정하게 입혀주었다.
머리가 좋은 것인지 공부를 열심히 한 탓인지 혜숙이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줄곧 일등을 하였다.
수양엄마는 사람들에게 혜숙이가 일등을 했다며 자랑을 하더니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여고보에도 보내주었다.
여고보 3학년이던 가을날 음식을 잘못 먹은 수양엄마는 설사병을 얻어 보름이 넘게 고생을 하다가 풀벌레 소리가 처량한 달밤에 순달이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았다.
55살의 수양엄마는 선술집을 하던 집과 집에 따른 밭 여섯 마지기를 남겨놓았다.
수양엄마가 남에게 빌려준 돈들이 제법 있었지만 찾아와 돈을 돌려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17살의 혜숙이가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막연했다.
낮에는 술을 팔고 밤이면 늙은 영감님들의 잠 시중까지 드는 수양엄마 밑에서 오직 듣고 보고 배운 것은 술장사뿐이다.
수양엄마는 혜숙이에게 “야 이년아 너는 이 담에 어떤 일이 있어도 술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 어미가 몸뚱이를 이놈 저놈에게 굴린다고 따라 배우지 말고 이다음에 못나도 한 사내만 만나 평생을 살아야 한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가계에 들어가 설거지를 하는 것도 못하게 하였다.
수양엄마가 죽고 없어도 술손님들은 찾아들었다.
술장사를 그만 두려 해도 생계가 막연한 혜숙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술을 팔아야만 당장 먹고 살아갈 수 있었다.
해가 일찍 저문 겨울저녁 혼자서 술을 마시던 마을 사내가 가지도 않고 계속 술을 마시더니 손님이 뜸해지자 어린 혜숙이를 덮쳤다.
소리를 질렀지만 술집에서 여자 비명소리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일곱 어린 소녀의 순정을 밟아 뭉개놓은 사내 연석은 염치도 좋게 드나들며 제마누라처럼 괴롭혔지만 주변에서는 다 큰 계집애가 술장사 하면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보호해 주는 이 하나 없어 어린 혜숙이로는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당해야만 했다.
사내놈의 마누라가 알고는 찾아와서 어린년이 벌써부터 꼬리를 친다며 혜숙이를 때리고 분탕을 쳤지만 사내는 계속 찾아와서 싫다는 혜숙이를 주먹으로 때리며 자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사내 마누라가 찾아와 문 밖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견디다 못한 혜숙이는 집과 밭은 이웃집 아저씨를 통해 헐값에 팔고 수양엄마가 남겨놓은 패물들을 챙겨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관수동 선술집에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손 집사가 아니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원망하며 가까이 있다면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으나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상것들의 한이 무엇인가를 알아지면서 손 집사도 얼마나 서러웠으면 그렇게 했을까 생각하니 오히려 보고 싶고, 어릴 때 오빠라고 부르던 선출이가 무슨 큰 혈육이나 되는 것처럼 그리웠다.
앞에 앉은 사내가 오입 나온 부잣집 풋내기 도련님으로 알고 술을 권하며 요염을 떠는데 「순달아!」하고 불렀다.
진주 수양엄마가 혜숙이라고 불러준 후 십 수 년을 스스로도 잊어버린 이름 순달이를 이 하늘 아래 누구 하나 알 리 없는데 어떻게 이 사내가 불러준단 말인가?
엄마도 잃어버리고 혈혈단신 외로운 몸 선술집에 앉아 웃음을 파는 혜숙이의 본명을 불러주는 이 사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깜짝 놀란 혜숙이는 “당신 누구세요?” 하며 얼떨결에 잡은 손을 뿌리치고 일어서는데, 사내가 잡은 손목에 힘을 주며 “네가 순달이가 맞았구나?”
“그렇지 순달이 맞지?”
혜숙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순달이라 이름을 불러주는 이 사내를 상상할 수가 없다.
천리타향 서울 바닥에서 혜숙이로 살아가는 순달이의 본명을 십 수 년 만에 처음으로 불러주는 이 사내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놀라는 순달이를 빤히 처다 보며 목이 메어 “순달아 선출이 오빠를 기억하겠느냐?” 하는 진하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여인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파르르 떨며 주저앉으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내들에게 능숙하고 농익었던 작부의 모습은 사라지고 죄를 짓다가 오라비에게 들킨 순박한 시골 처녀처럼 측은한 모습을 한 여인의 손을 꼭 잡으며 “너였구나? 순달아 오빠다!” 하는 진하의 눈에서 달구 똥 같은 눈물이 흐르며 목이 메었다.
“정말 선출이 오라버니가 맞나요?” 겨우 말문을 열며 처다 보았다.
“순달아!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그래 내가 선출이 오빠다.” 하고 오빠란 말에 힘을 주었다.
순달이는 그제야 믿어지는지 “오라버니!!” 하며 진하의 품으로 덥석 안기며 대성통곡을 터트렸다.
그간의 모든 설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진하 품에 안겨 통곡하는 순달이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으로 퍼졌다.
진주에서 사내에게 비록 몸을 더럽혔으면서도 밤손님을 받지 않는 혜숙이를 주모 욕심에는 젊을 때 밤손님도 받아 재물을 모으면 좋겠는데 어리석은 년이 누가 저를 요조숙녀로 알아주기나 하는 듯이 사내를 받지 않는다며 한 번씩은 술김에 욕설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혜숙이가 기특하여 딸처럼 사랑했다.
낮부터 두 남녀가 술상에 마주 앉은 것을 보고 나온 주모는 혼자 어차피 웃음을 파는 주제에 무슨 놈의 몸을 그리 아끼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나무라며 한 번씩 다녀가는 영감님들과의 잠자리를 생각하며 행복한 환상에 젖어 있다가 혜숙이가 통곡하는 소리에 놀라 달려 들어와 보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렇게도 사내놈들이 치근대도 꿈적도 않던 혜숙 년이 사내놈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지 않는가?
주모는 저녁 술 손님을 받지 않고 문을 닫아걸었다.
혜숙이가 오빠를 만난 경사를 위해 하루 장사를 접고 일찍부터 저녁상을 준비했다.
울어 눈이 부은 순달이가 오빠를 위해 시장을 보아오겠다고 나섰다.
진하가 말렸으나 기어이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진하가 주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순달이를 데려가겠다고 했더니 “도련님! 혜숙이 저애가 팔자가 더러워서 그렇지 참 아까운 아이요. 제발 데려가서 우리 혜숙이를 잘 좀 거두어주시오.” 하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진하는 주모에게 순달이에 대한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아팠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순달이는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느냐? 우리가 만났으니 이제부터는 울지 말고 웃자구나? 앞으로 오빠가 너를 지켜주마!”
“내일 일찍 개성으로 가서 엄마와 아버지를 만나서 인사하고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제가 무슨 얼굴로 어른들을 뵐 수 있겠어요. 여기서 엄마와 같이 살겠어요.” 하고는 머리를 숙였다.
주모가 옆에서 “혜숙아! 그게 무슨 말이냐? 도련님을 따라 가거라. 친정오빠나 진배없는데 따라가서 어른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너도 이제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아라. 내가 우리 혜숙이 잘 되라고 나도 부처님께 빌어주마. 그 동안 네가 고마웠다” 하고 눈물을 훔쳤다.
“순달아 우리는 가족이야, 아버지와 엄마도 너를 보시면 반가워하실 거야?”
큰 과수원 안에 궁궐 같은 기와집을 보더니 “여기가 오라버니네 집인가요” 하며 놀랐다.
진하는 눈빛으로 대답을 하며 큰 소리를 엄마를 불렀다.
방에서 쉬고 있다가 진하가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에 “어제 서울에 간애가 웬일로 일찍 와서 애들처럼 큰 소리로 부르고 야단이야?” 하고 구시렁거리며 방문을 열다가 낮선 색시와 같이 선 진하를 보고 놀랐다.
“처자는 누고?”
“엄마 순달이야!” 진하는 흥분해서 숨 가쁘게 말했다.
순달이란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엄마 선란이가 “뭐라고? 순달이라고 했나? 범어리에 순달이말이가?” 하고 반문했다.
“엄마 그래 범어리 순달이다.” 진하 대답에 놀란 선란이는 맨발로 마당까지 뛰어내려와 “뭐라고 순달이가 어째 왔나?” 하며 손을 잡았다.
순달이 이름을 듣자 대번에 기억하고 달려 나와 손을 잡으며 이름을 불러주는 선란이 품에 안기며 “아지매요!” 하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이개 어찌 된 일이고? 순달아! 네가 어째 여기를 다 찾아 왔나?”
선란이도 잃었던 딸을 만난 듯이 순달이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선란이 품에 안긴 순달이는 반가움과 그간의 서러움이 북받쳐 통곡을 하며 울었다.
진구와 같이 과수원을 둘러보고 들어오던 도시오가 난데없는 울음소리에 “진구야 이거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 아니가?” 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는 집으로 뛰어갔다.
놀란 도시오도 진구 뒤를 따라 바쁜 걸음으로 마당에 들어서니 아내가 낮선 색시를 끌어안고 같이 울고 있다.
놀란 도시오가 진하에게 어찌 된 일이냐? 고 물었다.
“아버지 순달이가 왔습니다.”
도시오는 순달이가 생각나지 않는지 “순달이라니 순달이가 누고?” 했다.
“아버지 범어리에 순달입니다.” 진하 대답에 그제야 도시오도 알아차리고는 “뭐라고? 이 처자가 순달이란 말인가?” 하고 반문했다.
진하가 엄마와 순달이를 진정시켜 방으로 들어갔다.
도시오와 선란이는 순달이 절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잃었던 딸이 돌아 온 것처럼 기뻐하였다.
“달아! 어디 네 손을 한번 만져보자.” 하고 도시오가 다가앉으며 순달이 손을 꼭 잡고 목 메인 소리로 “달아!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내가 살아서 너를 다 만나다니 꿈만 같구나?” 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억수로 흘렀다.
순달이도 울며 “아제요!” 하고는 혈육처럼 안겨 울고 선란이와 진하도 같이 울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진구도 순달이를 기억 하고는 손을 잡으며 누님이라고 불렀다.
도시오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더니 쇠고기와 일본에서 들어온 비싼 과자들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외삼촌네 식구들까지 와서 같이 저녁을 먹으며 집안에 큰 잔치를 벌였다.
저녁을 먹고 사과와 배를 가져다가 깎던 선란이가 순달이 엄마 생각에 과일과 칼을 내려놓고 “형님(순달이 母)을 어야머(어떻게 하면) 좋을꼬? 순달아 어야꼬? 어야꼬? 아이고 어야머 좋으나? 우리 형님을 어야꼬?” 방바닥을 치며 통곡을 하는 바람에 다시 온 가족들이 통곡을 하며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시오는 진하가 전문학교를 졸업 한 다음날 식구들을 모두 개성으로 보내고 진하만 좀 남으라고 했다.
「용바우는 어릴 때부터 사대부 양반님들처럼 여자 정조를 순결로 여기지 않았다. 천출로 태어난 용바우네 선조들 모두는 몰라도 할머니 일을 들어 알고 어매가 참봉 방을 죽지 못해 드나드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리고 아내까지 참봉에게 짓밟혔다. 특히 할머니는 양반집 하녀가 주인의 씨를 받아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지도 못하고 종노릇하다가 이복 오라비인 주인 아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나서 범어리 성 진사 댁 종놈인 용바우 조부와 결혼했다. 조선에서 천출로 태어난 여자가 조금만 예쁘면 어디 순결을 지킬 수 있었던가? 순달이네 부모와 용바우네는 한집에서 누대로 하인노릇을 하며 서로의 부끄럽고 욕된 사정들을 다 알고 서로 덮어주며 가족처럼 살아왔다. 용바우는 두 달간 순달이와 같이 지내면서 보니 아이가 예쁘고 지혜로우며 사랑스럽다. 만일 옛날처럼 양반집 하녀였다면 주인이 그냥 둘 아이가 아니게 예쁘고 사랑스럽다. 양반들에게 동문학습의 벗이 있다면 용바우에게도 한집에서 하인으로 태어나 함께 동고동락을 하던 순달이 에비 봉술이 형님과의 우정이 있다. 어릴 적에 아이들과 싸울라치면 세 살 위인 봉술이 형님이 용바우 편이 되어주었다. 어매가 목매 죽고 나서 저녁마다 혼자 우는 용바우를 봉술이 형님이 달래주며 나도 아지매가 참봉어른 때문에 자진하신 줄 알고 있다. 그래도 네가 그 표시를 하면 큰일 난다. 어쨌든지 살아서 힘을 키워야 한다. 아직은 울 때도 한을 품을 때도 아니다. 하고 도닥여 주였다. 성격이 누그럽고 참을성이 많은 용바우는 봉술이 형님 덕택에 엄마 죽고 난 그 어려운 고비를 잘 견뎌낼 수 있었다. 봉술이 형님이 들에서 일을 하다가 살모사에 물려, 뱀독이 올라 퉁퉁 부어 죽으면서 겨우 나오는 말로 “용바우야! 우리 순달이 부탁하제.” 하고 눈을 감았다. 양반들에게 가문의 뼈대가 있다면 천출들에게는 인간의 정이 있다. 참봉 댁에서 급하게 챙겨 떠나느라 살펴주지 못했던 순달네가 자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일을 생각하니 기가 찬다. 옛날처럼 참봉 댁의 하인으로 살았다면 진하와 순달이를 맺어 주었을 것이다. 순달이의 아픈 지난날들을 진하가 보듬으며 평생 보살펴 주었으면 싶다.」
용바우는 진하와 같이 청요리 집으로 나와 저녁을 먹으면서 진하가 부어주는 고량주를 두 잔 마시고는 “진하야!” 하고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할 듯이 무겁게 아들을 불렀다.
진하가 술을 따르며 “아버지 말씀 하시지요.” 했으나 용바우는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마시고는 안주 먹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순달이가 와서 내가 너무 기쁘다.” 하고 운을 떼더니, “아이가 참 사랑스럽게 컸구나? 순달 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하였다.
진하는 양력 설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순달이가 있는 서울로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작부가 만약에 순달 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천하고 천한 천출로 한 집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놀던 순달이다.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는 순달이를 아이들이 때리기라도 할라치면 대신 때려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순달이가 선술집 웃음을 파는 계집이 되었을까?
우리 가족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성 참봉 집이 망해서 하녀를 팔아먹은 것인가?
내가 순달이와 결혼한다면 아버지와 엄마가 용납해 주실까?
그냥 동생으로 보살펴주어야 하나?
머릿속에서 만감이 교차하며 혼란스러웠다.
한 집에서 두 달간을 같이 생활하면서 보아온 순달이는 여고보 3년 중퇴를 했다고 하지만 전문학교를 나온 사람 못지않게 지식이 풍부하고 영리하다.
진하는 순달이를 아내로 품어주어야겠다고 벌써 마음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아버지 의중을 알아차린 진하는 “아버지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는 말이다, 하늘이 순달이를 우리 식구로 보내주었다고 생각 한다. 너는 어째 생각하나?”
“아버지 좋으신 대로 하시지요.”
“안이다. 나는 네 생각을 묻는다.”
“아버지!”
“그래!”
“어머니가 참봉어른 방에서 능욕을 당하던 그 날 제가 그 창가에 있었습니다.”
진하의 입에서 피눈물이 묻어 나오는 말에 놀란 용바우는 “그랬구나?” 하고는 침묵을 했다.
진하가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가 엄마와 같이 할머니 사연을 말씀하신 것도 제가 다 들었습니다.”
용바우는 더욱 놀랬으나 침착하게 “그랬느냐?” 하고, 진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같다는 생각에 내심 마음이 놓였다.
“저는 지난 설날 아침에 만두 국을 먹다가 옛날 어린 순달이가 제 만두를 내 그릇에 넣어주던 기억이 나면서 선술집에서 보았던 여자가 순달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순달이는 어쩐지 내가 잃어버린 누이 같기도 하고, 남에게 빼앗겨 버린 내 아내 같기도 한 마음에 그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순달이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순달이를 품어 주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합니다. 순달이가 살아 온 세월이 어찌 순달이 탓이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가족들 때문에 당한 고생을 생각 한다면 제가 당연히 순달이를 지켜주어야지요.”
용바우는 아들이 고마웠다.
“네가 그렇게 까지 생각해 주어서 이 에비는 참 고맙다.” 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이 조선에 상것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무슨 욕이 있습니까? 욕이 있다면 양반들의 것이고, 천출들에게는 한 많은 애환이지요. 보통학교를 한 여자도 몇이 안 되는 이 조선에서 순달이는 여고보까지 다닌 신여성에다가 누구 못지않게 아름답고 교양이 있습니다. 순달이를 품어 주지 못한다면 제가 어찌 배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의 양반들에게 사악한 품격이 있다면 우리 천출들에게는 순박하고 착한 품격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순달이를 가족으로 받아주시는 선하고 순박한 이런 품격 말입니다.”
용바우는 아들 진하가 자기를 추켜세우며 순달이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것이 고맙고 죽은 순달이 에비 봉술이 형님에게 우정을 다할 수 있어 마음이 가벼워졌다.
저녁을 먹고 나서 용바우는 아내 선란이와 건너 방에서 오랫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야 애들이 모여 있는 큰 방으로 나왔다.
“오늘 아부지가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신다. 모두 아부지 말을 들어봐라”
선란이 말에 모두 아버지를 처다 보고 있는데, 용바우가 순달이 옆으로 다가 앉으며 손을 잡더니 “달아 아제는 말이다. 네가 우리 식구가 되어 주어 참 고맙구나. 아지매랑 진하도 너하고 평생을 같이 살자고 한다.”
선란이가 옆에서 “달아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마라. 아버지도 오빠도 모두 그렇게 하기로 했단다.” 하고 순달이 어깨를 안아주었다.
순달이는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르고 용바우 딸로 함께 살자는 말로 알아듣고 감격하여 선란이 품에 안기며 “아지매!” 하고 또 울음을 터트렸다.
진하가 엄마 선란이를 밀어내고 순달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순달아 하늘이 너를 내게 보내주셨구나!” 하자 앞에 앉았던 아버지 용바우가 “순달이는 본래 우리 가족이다.” 하셨다.
“순달아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이렇게 가만히 그리고 평생 내 옆에서 나와 같이 있어다오.” 하는 진하의 말을 듣고야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깜짝 놀라는 순달이를 진하가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일어나 안방으로 가시고 진구도 일어나 나갔다.
처음으로 진하 방으로 따라 들어온 순달이는 격앙 된 목소리로 “오라버니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 저는 오라버니와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오라버니도 잘 알고 있잖아요.” 하며 울먹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너와 내가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순달이를 감싸 안으며 “지난날은 우리가 종으로 태어났기에 내 몸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자유 하는 사람으로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알기에 우리는 서로 보듬어 줄 수 있고 용납할 수 있는 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데 우리가 결혼하지 못할게 무어냐? 어릴 때 나는 신랑하고 너는 각시하며 소꿉놀이를 할 때부터 우리는 부부였잖아? 만약 우리가 양반들과 결혼을 해서 살다가 우리의 천출이 알려지면 그때 행복할 수 있겠느냐? 순달이 생각은 용서받지 못할 양반들이나 할 무지하고 부도덕한 생각이다. 신지식을 공부하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할 너와 나는 문명인으로 서로의 아픈 상처를 사매주고 또 우리처럼 천출로 태어나 아직도 천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울이 되어 주어야할 책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순달아! 우리는 이제 미개한 조선의 양반들 보다 새로운 문명으로 계명한 문화인들이야.” 하며 순달이 등을 도닥였다.
진하의 따뜻하고 새로운 가치관에 큰 위로와 용기를 얻은 순달이는 진하를 처다 보더니 “오라버니 고마워요,” 하고는 품에 안겨 흐느꼈다.
순달이는 진하가 하는 말을 듣고 진정한 지성과 문화인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진하는 품에 안겨 울먹이는 순달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행복한 미소를 지소를 지었다.
가족들은 빨리 결혼식을 올리려고 준비에 들어가 분주한데 서울에 올라온 진하는 신설정에 새로 생긴 청요리 집에서 신흥청년 학습소 임원들과 저녁을 먹었다.
임원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진하는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 뒤채다 늦게야 잠이 들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누가 이 밤중에 전화를 했을까?”
잠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있으려니 전화벨은 쉬지 않고 울렸다.
선잠이 깨어 일어나기 귀찮아 짜증스럽게 일어나 불을 켜며 벽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수화기를 들자 개성에서 온 시외 전화라는 교환의 말에 깜짝 놀라 “여보세요!” 하고 불렀더니 순달이가 인사도 없이 다급한 목소리로 “오라버니 큰일 났어요. 아버지가 다쳤어요.” 했다.
졸리던 잠이 확 깼다.
순달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가 비적들의 칼에 찔려 진구와 외삼촌이 손수레에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고 하였다.
급하게 다꾸시 회사로 전화를 넣었더니 한 참 만에야 전화를 받은 기사가 퉁명스럽게 밤에는 대절 비를 갑절은 받아야 한다며 대절 비 흥정을 늘어놓았다.
차비는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빨리 오라고 재촉하여 북촌 보통학교 앞으로 와 달라고 부탁 하고는 옷을 찾아 입고 차가 오기도 전에 마음만 바빠서 샛바람이 차갑게 부는 학교 앞 길로 나가서 기다렸다.
진하 마음은 급한데 다꾸시는 생각보다 한참이나 늦게야 왔어 차비를 선불로 내라고 하였다.
돈을 받아 넣은 운전수는 진하 기분은 아랑곳없이 기분이 좋아 떠들며 자갈길을 달렸다.
뽀얀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데도 더 빨리 가자고 훈전수를 재촉해서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병원으로 갔다.
이른 새벽인데 여러 명의 순사들이 병원 사무실 책상을 하나 차지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호원을 따라 허겁지겁 수술실로 뛰어 들어가니 대 위에는 하얀 보자기가 덮여있고 어머니와 진구가 목 놓아 울었다.
순달이에게 방을 내어준 진구는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외삼촌 집에서 잠을 잔다.
큰 집이라 방이 여유가 있지만 순달이가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진구 스스로가 외삼촌 집에 가서 자고 있다.
도시오와 선란이 순달이 세 사람만 집에서 잠이 든 밤중에 건장한 사내 세 사람이 도시오가 자는 안방으로 들어왔다.
도시오가 놀라 “누구냐?” 하고 일어나는데 긴 일본 칼을 내밀며 “반항하면 가족을 모두 죽인다.” 고 협박을 하며 한 놈이 불을 켜서 등잔에 붙였다.
놈들은 도시오 가슴에 칼을 들이대며 “우리는 조선의 독립군이다. 독립자금 2천원을 협조해 주기 바란다.” 고 위협을 하였다.
놈들 가운데 칼로 위협하고 있는 자가 도시오 눈에 낮 익은 연석이었다.
침착한 도시오는 “당장은 돈이 없으니 한 이틀 여유를 주면 돈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했다.
도시오는 독립자금이란 말을 듣고 진심으로 협조해 주고 싶었다.
개성으로 와서부터 일본 경찰의 앞잡이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만약에 조선이 독립되는 날이면 이에 대한 응징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자신이 무모했다는 생각이 들어 독립운동을 하는 자들에게 인심을 서놓는 것도 좋을 같았다.
그러나 당장 집에는 돈이 없다.
칼로 위협하는 연석이 “당신 아들 결혼 준비를 하는 줄 알고 왔다. 그런데 돈이 없다고 하면 되느냐? 평소에도 돈이 많은 걸로 알고 있으니 결혼자금이라도 내놓아라.” 고 윽박질렀다.
도시오는 집에 돈을 잘 두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에게 기꺼이 협조 하겠지만 지금은 집에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돈은 집에 두지 않고 은행에 맡겨 놓았으니 다음날을 약속하면 준비해 놓겠소. 그렇게 알고 다음에 오십시오.” 했으나 연석들은 “누가 그런 말에 속을 줄 아느냐? 야 - 이 왜놈의 앞잡이 놈아 칵!” 하며 칼로 찌르는 시늉을 하다가 선란이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놈이 비명 소리에 놀라서 그만 칼을 앞으로 확 밀어 도시오 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칼에 맞은 도시오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자 칼로 찌른 놈이 놀란 “어이 그냥 가자.” 하며 뛰쳐나가자 다른 놈들도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겁을 먹고 달아났다.
쓰러진 남편을 붙잡고 “여보! 진하 아버지! 진하 아버지!!” 비명을 지르는 선란이 소리에 대청 건너 뒷방을 사용하던 순달가 듣고 놀라 잠옷차림으로 뛰어나오니 아버지는 쓸어져서 피를 흘리고 갓난이가 솜을 꺼내 지혈을 시키며 정신 차리라고 외쳤다.
선란이는 무서운 광경에 놀라 달려드는 순달이를 보자 빨리 외삼촌과 진구를 부르라고 하였다.
다급하게 부르는 순달이 소리에 외삼촌 가족과 진구가 놀라서 뛰어 나왔다.
가족들이 몰려 들어가자 의식이 돌아온 도시오가 힘겹게 말문을 열어 겨우 알아들을 소리로 “그놈은 허평이다. 허평이” 라고 하셨다.
침착한 순달이가 허평이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김단야” 부하라고 하더니 다시 의식을 잃었다.
진구와 외삼촌이 병원으로 갈 준비를 하는 동안 순달이는 먼저 아버지 책상에서 연필을 찾아 허평과 김단야 이름을 적어놓고 농막에서 자는 머슴들을 깨워 외삼촌과 진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과수원에서 사용하는 손수레에 이불을 깔고 도시오를 눕히고 진구가 끌고 외삼촌과 머슴들이 밀며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까지는 10리가 훨씬 넘는 거리다.
손수레로 자갈길을 달리느라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병원에서 치료를 하는 중에 숨을 몰아쉬고 말았다.
사건 현장을 조사하러 나온 고등계 형사들에게 순달이가 아버지에게 들은 대로 적어놓은 쪽지를 넘겨주었다.
「김단야 부하 허평」이라 적힌 쪽지를 받아든 형사들이 러시아에 있는 김단야(김태연)가 왔을 리가 없지만 혹 왔다 해도 살인을 저지를 무모한 자가 아니므로 한 때 김단야를 따라다니던 허평을 수배하였다.
우수에 내린 봄비 탓인지 샛바람이 불고 쌀쌀한 날에 작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손용바우(도시오) 장례식을 치렀다.
진하는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아버지 이름을 고쳤다.
도시오란 이름을 쓰지 않고 용바우를 한문으로 용암(龍岩)이라 고쳤다.
명정 쓰면서 직함이 없으므로 「學 生 月 城 손(孫) 公 之 柩」라 써야 하지만 진하는 학생 대신에 自由人이라고 섰다.
집사는 성 참봉 집 하인의 직함이고 그렇다고 일본 순사 앞잡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혼백이라도 천출이 아닌 자유인이기를 비는 마음에서 명정에 “자유인”이라고 섰더니 혹자들은 좀 이상하다고 구시렁거렸으나 진하는 괘념하지 않았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난 진하는 너무나 허전했다.
천하고 천한 상놈의 굴레를 씌워놓고 멸시와 천대를 해온 조국이나 민족 따위는 아무런 미련이나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일본 경찰의 앞잡이가 되어 공산당과 독립 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의 뒤 좇아 온 용바우다.
진하도 아버지처럼 민족이나 조국 따위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인간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조국이다.
하인의 아들로 태어나 천출을 경험한 진하는 자기를 멸시 천대한 조국보다야 출세 길을 열어준 일본을 등에 업고 양반들 앞에서 권위를 잡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현실에도 적응할 각오를 했었다.
그래서 상놈의 굴레와 가난을 벗고 살 수 있게 해 준 일본이 고맙고 좋았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일어난 일본 청년들과의 패싸움에서 조선인이라 이유 때문에 헌병대에 끌려가서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 학교까지 재적을 당하면서 새로운 갈등에 빠졌다.
조선을 버렸으나 일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자신의 현실에 갈등하다가 공산주의를 만났다.
세상 경륜이 없는 진하의 짧은 식견으로 국제 공산주의는 사해동포(四海同胞)를 아우르는 위대한 의념으로 믿어졌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를 배우고 붉은 혁명가를 부르면서 젊은 피가 용트림 쳤다.
그 희망의 공산주의 선구자로 알고 있는 김단야 부하에게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를 죽인 허평이 골수 공산주의자인 김단야의 부하라는 사실을 알자 생각이 단순한 진하는 복수심으로 이빨을 악물었다.
손명화 선생님이 그렇게도 위대한 혁명가로 칭송하던 김단야가 부하를 시켜 남의 재산을 탈취하며 살인까지 하도록 사주를 했다.
이제 더는 공산주의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졌다.
어떻게 내 아버지를 죽인 공산주의와 함께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이념이 부족했는지 더는 공산주의가 올바른 사상과 의념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다는 선인(先人)들의 말을 상기하며 공산주의자들을 도륙해야할 적으로 간주(看做)했다.
진하가 꿈꾸던 공산주의 혁명가의 열정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렇게 무서운 적개심으로 변해버렸다.
김단야가 서울에 활동할 때 개풍군에 사는 허평을 자주 찾았다.
한해는 김단야가 고명자와 같이 예성강이 멀리 바라보이는 촌락에서 여름을 보내며 동지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 때 허평이 장소를 주선하고 모임을 준비했다.
이 사실을 나중에 후지끼 상이 알고 허평을 요주의 했다.
러시아에 있던 김단야가 1929년 국내로 잠입한 정보를 입수한 후지끼가 김단야를 잡으려고 경기도 일원에 모든 간자를 동원해 거처를 찾다가 개풍에 나타난 정보를 입수하고 허평을 잡아다가 추궁했으나 허평은 김단야가 서울에 온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날 심문하던 후지끼 상은 결국 허평을 무혐의로 풀어주어야 했다.
도시오는 그때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는 허평을 지나치면서 여러 번 보았다.
김단야가 거물이었으므로 도시오도 관심이 있어 후지끼가 취조한 서류를 관리하면서 허평과 김단야의 사진까지 챙겨보았다.
그러나 허평은 도시오와 직접 대면하지 않았고 도시오가 후지끼 상의 개인 보조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나 독립군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여서 도시오 앞에 맨 얼굴을 찾아오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도시오는 죽기 전에 가족에게 범인이 허평임을 알려주어 쉽게 수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용바우를 장례하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 경찰이 자기를 뒤좇는 줄 모르는 허평은 풍덕에 있는 자기 집에 들어왔다가 잠복 하던 경찰에 잡혔다.
허평은 지난겨울 결빙한 두만강을 건너 모스코바까지 가서 김단야를 만났다.
허평은 영웅심은 있으나 겁이 많고 고등보통학교까지 나왔으나 생각이 단순한 얼뜨기였다.
경찰서에 잡혀온 허평은 쉽게 도시오 집에 들어갔던 일과 김단야를 만난 사실을 실토했다.
김단야가 허평에께 “개성에 일본 경찰에 붙어 반민족 행위를 하며 사천 변에 사과밭과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 도시가 근래에 장사까지 해서 현금이 많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찾아가서 협박을 해서라도 돈을 얻어내라.”고 시켰다.
허평이 협박을 해서라도 돈을 얻어내라는 김단야의 말을 듣고 지혜롭지 못하게 밤에 칼을 들고 찾아가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다가 두려운 마음으로 당황하다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경찰로부터 이런 소상한 내용을 들은 진하는 젊은 혈기에 복수심이 불탔다.
고등학교만 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장에서 일 하던 진구는 허평이를 죽이겠다고 경찰서에 가서 소란을 피우기까지 했다.
진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본주의 모순 내세우면서 평등분배를 통한 프롤레타리아 해방으로 유토피아 세상을 만들자고 선동하는 공산주의를 인간의 본질을 외면한 망상의 철학임을 깨닫게 되었다.
공산주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망상의 철학으로 인류 공영(共榮)에 기여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는 인륜을 저버리고 더 나가서 인류 사회에 무서운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하는 수많은 밤을 새우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프롤레타리아를 읽으면 설렜던 공산주의 혁명가의 몽상에서 깨어났다.
(계속)
-아들의 분노- 6
진동호는 한참 동안 진하가 서울에 나타나지 않자 개성 집으로 찾아 왔다가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진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과 결혼식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친일주구 노릇을 한 아버지가 공산당에게 살해 된 사실을 대부분 사회주의자인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집에 작부로 있었던 순달이를 위해 결혼식도 조용히 치르고 싶었다.
진하 부친이 비명횡사 하신 소식을 들은 동호는 빈소에 들어가 한참을 애곡하고 나와 진하와 같이 봄이 오는 과수원을 걸으면서 그 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순달이와의 인연과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사실에 동호는 놀람과 함께 경외감을 느꼈다.
친구로는 진동호가 진하 결혼식에 참석하는 유일한 한 사람이 되었다.
진하 친구로는 유일하게 사회주의자가 아닌 동호는 진하가 아버지 초상과 결혼식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는 뜻을 이해하였다.
고보시절 학교에 적음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천출의 동질감으로 그림자 같은 친구가 되어준 진하의 아버지 복수는 자신의 일이기도 한 것처럼 여겨졌다.
함경도 변방인 경원에서 소 잡는 백정이었던 진동호 할아버지는 같은 백정이자 친구였던 동호 외할아버지와 사돈을 맺었다.
동호 외할아버지 초춘부는 할아버지 진달구보다 일찍 연해주로 다니며 쇠가죽 무역으로 부를 이루며 새로운 문화에 눈을 떴다.
쇠가죽을 연해주로 가져다가 파고 연해주에서 웅담녹용을 서울로 가져다가 파는 초춘부는 친구 진달구에게 일본 사람들이 많은 서울에 가서 식육점을 하자고 권했다.
함경도 변방인 경원과는 달리 신분의 차별이 심한 서울에서 식육점 하는 것은 내가 백정이요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지만 갑오경정이후로 백정도 당당한 직업인으로 일할 수 있고 남들이 꺼리는 직업이라 돈벌이가 좋았다.
갑오경정 이후로 많은 백정들이 전업을 했지만 초춘부와 진달구는 신분의 차별이 없어진 마당에 남의 이목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친구 초춘부의 권유로 서울에 와서 도살장 허가를 얻어 소를 잡으며 식당이 따른 식육점을 차렸다.
남들이 꺼리는 직업이지만 사람들은 쇠고기를 좋아하고 먼저 개화된 초춘부의 상술 덕택에 상당한 재물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진달구 손자 어린 동호는 학교에서 백정의 아들이라고 놀리는 아이들의 멸시와 따돌림을 견디기 힘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외할아버지를 도와 무역업을 하는 외삼촌 초달호가 서울에 왔다가 조카 동호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데려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조선에서 먹고 살길을 찾아 이민 온 사람들이 대부분 천민들이라 신분의 벽이 없고 이국인만큼 동포들끼리 서로 감싸주므로 천민들은 차라리 조선에서 보다 살기 편하고 좋았다.
동호도 학교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조선에서처럼 백정이라고 멸시하거나 따돌림을 당하지 않고 잘 어울려 놀았다.
러시아가 공산화 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도 소비에트연방이 되어 점점 사업이 힘들어지고 또 조선 사람들의 장래가 어두워지자 보통학교를 졸업하는 동호를 서울로 보내 Y고등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다시 서울에 온 동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말로 공부를 하느라 조선말이 서투른데다가 외삼촌 집에서 듣고 배운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다시 친구들에게 소외가 되는 외톨이 신세였다.
학생들에게 소외되면서도 기죽지 않고 힘이 있어 보이는 동호를 진하가 가까이 하고 싶어 “너 우리 집에 같이 갈래?” 하고 초대를 했더니 “싫어!” 하고 화를 냈다.
조선말이 서툰데 하필이면 함경도 사투리라 말을 하면 친구들이 킥킥거리며 무시하므로 학교 친구들이 싫어서 다시 외삼촌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 싶어 하는 동호는 공격적이고 반항적이었다.
진하가 “야! 우리 집에 놀러가자고 하는데 왜 화를 내느냐?”며 어께를 잡았더니 시비를 거는 줄 알고 확 뿌리쳤다.
동호의 황당한 행동에 화가 난 진하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
친구들과 싸워서 져 본 일이 없는 진하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진하가 공격 자세를 취하자 동호도 지지 않고 덤볐다.
한바탕 붙었으나 진하가 보기 좋게 얻어터지고 말았다.
정권이 턱에 정확히 들어오고 2단 옆차기며 돌려차기 등 속수무책이었다.
입술이 터지고 코에서 피가 흐르자 “야! 진동호 내가졌다. 그렇지만 인마, 친구가 집으로 초청하는데 이러는 놈이 어디 있어?” 하고 따졌다.
얻어맞고도 기세가 등등하게 따지는 진하에게 동호도 지지 않고 “인마 그럼 네가 먼저 우리 집에 가면 될 것 아니냐?” 했다.
동호가 무심코 우리 집에 가자고 하는 말에 진하가 “좋다 그럼 너 네 집으로 가자” 하고는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으며 가방을 들고 동호를 따라 나섰다.
동호는 순간 낭패감이 들었다.
집에서 식육점을 하고 있는 집으로 친구를 데려가는 것은 내가 백정이요 하고 알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친구를 집에 데려갔다가 동호네 집이 식육점인 것을 본 친구들이 백정 아들이라고 놀리며 따돌리는 바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외삼촌 집에 가서 지금까지 자랐다.
동호 속을 모르는 진하가 싸움에서 얻어맞고도 동호네 집으로 가겠다고 따라 나서는 배포에 동호는 아연실색을 하면서 지금은 운동 하러 도장에 가야할 시간이라고 둘러댔다.
동호는 삼촌이 운영하는 공수도 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동호 삼촌은 동호 외삼촌 초달호보다 두어해 후배다.
두 사람이 고향에서 공수도를 같이 배워 모두 고수가 되었다.
동호 삼촌은 서울에 와서 공수도 도장을 열어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외삼촌에게 공수도를 배운 동호는 서울에 와서도 삼촌 도장에서 운동을 한다.
동호 삼촌은 동호보다 20살이나 많지만 백정이란 이유로 실연을 하고는 결혼하지 않고 지내 작은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삼촌이라 부른다.
동호는 도장에서 운동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진하와 헤어지고 싶어 운동을 하러간다고 했는데 그럼 나도 같이 가자하고 따라 나섰다.
동호가 운동하는 것을 알게 된 진하는 이자식이 이런 격투기를 하고 있어서 나를 이겼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격투기를 배우고 싶어졌다.
진하는 모든 운동을 잘 하는 편인데 오늘 동호에게 보기 좋게 터졌다.
진하는 평소에 아버지에게 남자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려면 장정 몇 명 정도는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참에 격투기를 배워두고 싶어 진동호 삼촌에게 인사를 하면서 “동호와 같이 운동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했다.
운동을 하고 싶다는 진하를 반가워하며 “우리 동호와 같이 열심히 해봐라” 하시면서 운동복까지 내 주셨다.
도장을 나오면서 “인마! 무슨 마음으로 운동을 하겠다고 지랄이야?” 하고 동호가 빈정거렸다.
진하도 지지 않고 “인마 네놈하고 싸워서 이기려고 그런다, 왜?”
진하의 소탈한 응수에 동호는 마음이 열려 “야! 우리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 하고 손을 내 밀었다.
“우리 지금 친하게 지내고 있잖아” 하고 진하가 손을 잡았다.
둘은 사이가 좋아졌다.
동호는 자기 집에서 식육점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진하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동호를 따라 식육점 옆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서 진하는 동호네 집이 백정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진하는 진동호 방에 들어가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는 집안 내력을 먼저 토해냈다.
“동호야! 우리 집은 조선에서 천대받는 남의 집 하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조선은 없어지고 대일본제국이야? 양반들의 나라 조선은 없어지고 우리는 이제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이 된 거야! 우리 한번 친하게 지내보자.”
거침없이 자기 집안을 남의 집 하인이었다고 하는 진하를 처다 보고 있던 동호가 와락 껴안으며 “야- 인마! 우리는 벌써 친구잖아?” 하며 기뻐했다.
비천한 신분에 뿌리를 둔 동질감이 두 사춘기 소년을 하나로 묶어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말까지 나누게 하였다.
용바우의 죽음으로 결혼식이 무기 연기 된 진하에게 상복은 입었지만 신부가 될 처녀와 한 집에 같이 있는 처지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옳다며 엄마 선란이는 유교의 인습을 무시하고 서둘러서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불러 5월 13일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양력 5월 13일 아침부터 내리던 궂은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라도 하듯이 오후가 되면서 그치고 햇빛이 났다.
천막을 치고 예식을 하려고 비를 맞으면서 준비를 하다가 햇빛이 나자 천막은 모두 치우고 습기가 있는 마당에 사람들의 신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짚을 깔고 가마니로 덮고 멍석을 펴서, 초례청을 꾸며 놓고 진하보다 먼저 결혼한 진동호가 홀기(笏記)(註:행사의 순서=전통 결혼식의 사회)를 맡았다. 동호가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불러내려 하루 순달이 부모 노릇까지 하게 하였다. 말은 간소하다고 하지만 부잣집 잔치라 마을 사람들이 3일을 먹고도 남을 음식들이 준비되었고, 쇠고기도 많이 준비해놓았는데 전부터 진하를 잘 아시는 동호아버지가 진하 결혼 소식을 듣고는 첫 새끼도 낳지 않는 암소를 한 마리 잡아 화물차에 싣고 와서 귀하디귀한 쇠고기도 나물처럼 풍성했다. 도시오가 경찰서 보조로 있으면서 관공서와 유지들에게 쌓은 인연으로 일본인 경찰서장님을 비롯해서 관내 기관장님들과 유지들이 수 십 명 몰려와서 신부를 외삼촌 집으로 보내고 안방까지 비워 크다고 소문난 진하네 집이 비좁도록 앉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당에 평상과 멍석을 깔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조선에서는 아직 신식 부자들이나 가는 신혼여행을 가려고 하자 어머니는 금강산이나 평양을 다녀오라고 하셨다.
진하는 결혼식 전에 중국으로 가기 위해 미리 출국 허가를 받아두었다.
출국 허가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간 진하는 상하이에 있는 후지끼상의 안부를 물었더니 상하이에서 봉천(심양)으로 옮겼다고 알려주었다.
가족들에게는 순달이와 신혼여행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를 도와주었던 후지끼상을 만나기 위해 보천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본래 배경이 좋았던 후지끼 상은 봉천에서 비밀경찰 간부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비밀경찰의 활동이란 조선인 독립군과 공산당을 좇는 일이지만 봉처에서는 일반 행정과 정치사찰까지도 간섭하였다.
후지끼 상은 봉천가지 찾아온 진하를 반갑게 맞아주며 도시오의 죽음을 듣고는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하며, 진하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로 봉천에 머물 동안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는 고급호텔인 東北飯店에서 묵도록 주선해 주는 등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후지끼 상이 마련해 준 호텔에 묵으면서 진하 부부는 인력거를 타고 심양에 있는 청나라 황성이었던 고궁과 누르하치 무덤이 있는 동릉공원, 조선을 침략하여 인조의 무릎을 꿇게 한 청 태종이 묻혀있는 북릉공원 등을 돌아보니 관리가 되지 않아 지저분했다.
순달이는 거대한 규모에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진하는 조선을 지배했던 거대한 청조의 힘을 느끼면서 이런 힘의 청도 망하고 일본이 이 땅에서 위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서 약자는 세상에서 강자에게 먹혀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확인하였다.
천민으로 힘이 없었던 조상들의 서린 한을 생각하며 자신은 남에게 지지 않을 힘을 기르겠다고 다짐하였다.
여행 중에 흐트러짐이 없고 영리하며 교양 있게 처세하는 순달이가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아버지 장례식 후 공허하던 가슴은 행복으로 가득해졌다.
심양에서 나흘째가 되는 날 저녁 후지끼 상이 집으로 초대하였다.
꽤나 잘 지은 러시아풍의 집 대문 안 쪽에 있는 별관에는 후지끼 상의 비서 겸 경호를 맡은 일본경찰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동안 바빠서 진하에게 소홀했다며 차려놓은 식탁은 정성을 기울인 티가 역력하였다.
집에서 일을 돕는 여자들이 있는데도 불고하고 음식은 요리 집에서 시켜온 것으로 평생 구경도 못해 본 진수성찬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후지끼 부인이 순달이를 데리고 활동사진을 보자고 나가고 2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후지끼 상과 진하는 술상을 마주했다.
후지끼 상이 진하에게 신혼여행으로 나를 찾아 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용무가 있느냐고 물었다.
과연 비밀경찰 간부답게 진하의 심중을 뚫어보았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자식으로 그냥 있을 수 없어 아버지를 죽인 김단야를 잡기 위해 일본 비밀경찰이 되고 싶다고 솔직담백하게 이야기 하였다.
비밀경찰이란 사람의 목숨을 파리 잡듯이 죽여야 하며, 가족을 두고 생명의 위협이 따르는 사지로 찾아다녀야 하는 직업이다.
후지끼 상은 가정을 가진 진하가 첩보원이 되어 모스코바로 가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말렸다.
진하는 후지끼 상의 그런 마음이 고마웠다.
그러나 모스코바로 가서 김단야를 죽여 아버지 원수를 갚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으니 도와 달라고 하였다.
후지끼 상은 여러 말로 일본 비밀경찰이 되려는 진하를 말리며 자네가 하지 않아도 일본경찰이 김단야는 물론이고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 공산당을 소탕할 것이다.
자네가 굳이 복수하지 않아도 일본경찰이 복수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법학을 공부했으니 법관이 되어 보라고 권했다.
비록 일본 경찰이 국제공산당을 소탕하고 김단야를 잡는다 해도 아버지의 원수를 남의 손에 맡겨놓을 수 없으니 러시아로 보내 달라고 애원을 했다.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후지끼 상은 서서히 진하로 하여금 경찰이 되도록 은근히 충동질 하고 있었다.
후지끼 상은 진하가 찾아온 목적을 꽤 뚫어보고 미리 진하를 이용할 계책을 생각해 두었던 것이다.
눈치를 체지 못한 진하는 경찰이 되겠다는 확고한 자기 의지를 보여주었다.
후지끼 상은 갑자기 말을 돌려 김단야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김단야 본명은 김태연이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아버지가 교회 장로로 있는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배제고보를 다니다가 3.1만세 사건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서 만세사건에 가담하다가 잡혔다. 그러나 어린 학생이라 훈방으로 풀러나 그길로 상하이에 가서 고려공산청년회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김단야는 박헌영(부인 : 주세죽), 임원근(부인 : 허정숙)과 함께 화요파의 삼총사로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고향에 있는 본처를 버리고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여자들과 무절제한 관계를 하다가 미녀 고명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기독교회의 장로인 그의 부친은 부인을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으나 기어이 고명자와 결혼을 올렸다. 교회 장로인 아버지는 신앙에 위배되는 부도덕한 아들 김태연(김단야)과 절연하고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 김단야의 새 부인인 고명자는 공산주의 유물사관으로 무장한 혁명 전사로 주세죽, 허정숙과 더불어 시대적 격변기에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하는 3총사다. 제1차 공청 사건으로 새로 결혼한 고명자를 두고 김단야는 서울을 탈출하여 상하이로 가서 모스코바에 있다가 상하이로 온 혁명동지인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과 가까워지면서 박헌영(1933년)을 일본 경찰에 밀고 하여 박헌영이 잡혀서 일본 영사관을 통해 서울로 압송이 되자 주세죽을 데리고 모스코바로 가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김단야는 동지인 박헌영을 배반하고 박헌영의 아내를 차지한 비열한 놈이지만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조직력과 리더십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놈이다. 상당히 옛날이야기지만 1925년(11월 22일) 신의주에서「신만청년회」회원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경찰관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평소부터 일본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청년 회원들이 일본경찰관을 집단으로 폭행하자 화가 난 신의주 경찰서에서 「신만청년회」 회관과 회원들의 집을 고의적으로 수색하다가 김경서 집에서 뜻밖에도 박헌영이 상하이로 보내는 「고려공산당 청년회 중앙 집행위원」명의의 비밀 통신문이 나왔다. 단순한 폭행사건이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바뀌면서 공청을 향한 수사망이 좁혀들자 김단야는 재빠르게 상하이로 빠져나갔다.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청년회」 임시 특별 연락책임을 맡으면서 서울에 있는 「공청후계중앙간부」와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공산청년회」 만주에 있는 「공청만부비서부」세 곳의 조직을 관리하는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다. 1926년에 6.10 만세 사건 때도 상하이에 있으면서 「고려공산청년회」를 통해 국내로 격문을 보내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우뚝 섰다. 6.10 만세 사건 후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과 상하이를 오가며 활동을 하다가 상하이에서 박헌영을 밀고 한 후 다시 모스코바로 가서(1934) 지금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교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소련에서 활동은 괄목 할만 했으나 계속 되는 문란한 사생활과 서울과 상하이에 있는 그의 조직들이 해체되면서 코민테른(주 : 제3 국제당 혹은 제3 인터내셔널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안으로 1919년 3월에 만들어 1943년 5월 15일 해체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국제적인 조직체)으로부터 신뢰도가 흔들리게 되었다. 여기에 불안을 느끼게 된 김단야는 나(후지끼)에게 사람을 보냈더군. 일본 내 공산당 활동과 만주에 있는 중국 공산당 정보를 넘겨주고 공산주의에서 온전히 손을 떼겠으니 중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였다. 여기에 김단야의 다른 술수가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가지 정보에 의하면 그가 소련에서 신뢰를 잃고 불안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 분명해.」
후지끼상은, 김단야에 대한 설명을 마치면서 “김단야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조선에서 활동하는 잔당은 물론이고, 상하이에 있는 조직도 와해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진하가 아버지 복수보다 공산주의자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대국적인 생각으로 김단야를 죽이는 것보다 봉천으로 데려오는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어왔다.
정보세계에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진하는 후지끼 상의 제안이 반가웠다.
일단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서울 경시청에 지금 사람을 모집하고 있으니 내가 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찾아 가라” 하는 후지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이 미소를 보는 순간 진하는 전신에 아찔 하는 전율이 흘렀다.
진하는 정보세계는 일천(日淺) 하지만 순진하기만 한 젊은이는 아니다.
아홉 살에 성 참봉에게 능욕을 당하는 엄마를 보았고, 아버지가 참봉 뒤통수를 치는 통쾌한 복수도 보았다.
열차 안에서 정무총감의 아들과 싸운 일로 일본 헌병에게 조선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무지막지 하게 얻어맞아도 보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진하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후지끼 상을 아버지의 은인으로 믿고 찾아와서 복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면서 경계심 없이 마음을 털어놓았으나 후지끼의 입가로 지나가는 미묘한 미소를 읽으면서 역시 후지끼는 일본인으로 조선 사람은 저들에게 하찮은 이용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아버지를 잃으면서 내 가족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이든 공산주의든 모두 적으로 간주해 버린 진하다.
참봉 댁에서 같이 종으로 살았던 순달이에게 남다른 동질성이 있기에 지난날의 연민을 느끼며 아낌없이 사랑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 도시오 아니 용바우도 순달이가 불행해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진하를 불러 결혼을 종용해 올 만큼 동질성을 귀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후지끼를 아버지의 옛 은인으로 믿고 찾아온 것은 실수였다.
후지끼는 진하를 생각하는척하면서 첩보 세계에 희생물을 삼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후지끼가 이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저를 이용할 수밖에.........,
병법서를 읽으시던 아버지가 대학을 다니다가 제적을 당했을 적에 조선을 조국으로 여기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며 우리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언제 어디서나 모두를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신 적이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 인력거 안에서 영화를 구경하고 기분이 좋아져 있는 아내 순달이를 쳐다보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순달이가 살아온 험한 세월을 갚아주기 위해서라도 후지끼가 생각하는 그런 희생물이 될 수는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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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오랜만입니다...목사님....건안하시온지요....자주 뵈었으면 ...행복하소서..
뵈온지가 어언 몇달이 되었군요..잘 계신지요.시간이 허락되시면 바쁘신 가운데도 문우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시길 바랍니다.
넘 보고싶은디 ㅡㅡㅡ.목회라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