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그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왔을 때에 그들의 주위에 많은 군중을 보았고 그들을 향하여 토론하는 서기관들을 보았습니다(막 9:14).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산에서 내려와 군중을 향해 온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접근하여 그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마 17:14).
마태복음 17장 15-16절에 “주여 나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가 간질병자고 고난당하기 때문이니 이는 자주 불과 물로 떨어짐이고. 내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며 그들이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비(慈悲)”는 사랑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사랑과 비슷한데, 굳이 둘에 차별성을 둔다면 자비는 불쌍히 여긴다는 개념이 강조됩니다.
“자비”(mercy)는 “연민(憐憫)”이라는 의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 “동정”(compassion)을 의미합니다. “동정(同情)”은 똑같은 감정(感情)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이 불쌍한 처지에 놓인 것을 볼 때에 그와 같은 처지에 놓였을 때 느끼는 감정에 동참(同參)하는 것을 뜻하며 함께 마음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자비(慈悲)”의 “비(悲)”는 “슬플 비(悲)”입니다. 불쌍한 처지를 보고서 같은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착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선”이며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고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인자(仁慈)”, “자애(慈愛)”, “자혜(慈惠)”가 모두 비슷한 단어입니다. 한글개역 구약성경에서는 “인자(仁慈)”라고 더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크리스천은 자비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의 하나님께 자비를 보여 주실 것을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자녀와 친척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병과 치유에 관해서 성경이 명확히 전달하는 사실이 2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병이 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치유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1)
예수님께 접근한 이 사람의 아들은 빈번하게 불과 물로 떨어졌습니다. 악마와 귀신들은 사람들을 파괴하고 만일 가능하면 죽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사람들의 귀를 막고 눈을 막아 못 보고 못 듣게 합니다.
철도 건널목에서 기차가 오는데도 못 보고 가다가 죽은 소년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못 듣고 건너가다가 죽었습니다. 이 소년은 귀신에 홀려 기차도 못 보고 말리는 소리도 못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 아들을 데려왔고, 그들이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마 17:16).
1.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7절에 “오 믿음 없고(faithless) 왜곡된 세대여, 언제까지 내가 당신들과 함께 있고 언제까지 내가 당신들의 참겠습니까, 당신들은 나에게 그를 여기에 데려오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18절은 ‘귀신 축출(逐出)’의 내용입니다.2)
예수님께서는 “오 믿음 없고 왜곡된 세대여”라고 말씀하셨으며, 영어 성경에 “왜곡된”이 “외고집의”(perverse)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 “패역한”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왜곡(歪曲)”이라는 한자어는 “비뚤고 굽음”을 뜻하는 말인데, 그들은 믿음 없는 세대였기 때문에 비뚤어지고 굽은 세대였던 것입니다.
그 세대는 도덕적으로 비뚤어지고 굽어 있었고 부패해 있었습니다.3) 믿음 없는 사람은 겉모양은 선할지라도 비뚤어지고 굽은 자입니다.4) 사람이 자신의 눈에 선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왜곡된 자인 것입니다.
이 아이는 간질병자와 비슷한 발작 증세에 시달리는 아이였습니다.5) “간질(癎疾)”은 의식 장애를 일으키는 발작이 되풀이되는 질병입니다.
이 간질병자는 빈번히 불과 물로 떨어져서 파멸되려고 하였습니다.6)
이 간질병자는 또한 청각장애자였습니다(막 9:25). 복음을 말해 주어도 영적인 귀머거리라서 못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과 영혼이 뒤틀려서 복음을 거부하고서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간질병자는 또한 벙어리였습니다(막 9:25). 그의 아버지는 곤고함에 지쳐 있었습니다.7)
죽음이 다가옴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8) 나이가 들고 늙고 몸이 약하여져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음에도 예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하고 교회에 나오지 아니하고 고집을 피웁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9)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마 17:16). 전에 교회에 출석하기도 하였으나 치료되지 못하였을 수 있습니다.10)
예수님께서 치료하시는 손을 내미시는 때에 그 치료는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영원한 평안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11)
물으시기를 “얼마나 많은 시간부터 이렇게 된 것입니까”라고 하셨으며 그가 말하기를 “어릴 때부터입니다. 그가 죽이려고 불과 물에 던졌으며, 만일 당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으시면 불쌍히 여겨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막 9:21-22).
예수님께 “할 수 있으시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가정입니다.1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기를 “만일 당신이 그것을 할 수 있으시면 모든 일들이 믿는 자에게 가능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23).
“만일 당신이 할 수 있으시면”은 그 사람의 말을 되풀이하신 말씀이며 “모든 일들이 믿는 자에(믿는 자를 위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들이”를 먼저 말씀하심으로써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일들이 믿는 자에게 혹은 믿는 자를 위해(for) 가능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엄위하심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13) 믿음은 불가능할 것이 없습니다(막 9:23).14)
즉시 소리 지른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하였기를, “내가 믿으니 나의 믿음 없음에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막 9:24).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악한 죄인의 구주가 되시기 위함이셨습니다.15) 예수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으시고 고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십니다.16) 마음은 있는데 고칠 힘이 없거나 힘은 있는데 마음이 없을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고치실 능력도 있고 고치실 마음도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영생을 받으려면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영혼을 예수님의 발 앞에 놓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가 어디 있습니까? 병든 영혼을 예수님께로 데려오지 아니한다면 어디로 데려갈 것입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척들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사랑하는 자들을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와야만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합니다.17)
죄는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갈 만큼 강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은 죄의 능력보다 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으로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믿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18) 누구든지 그에게 나아오면 내쫓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예수님께 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빈손 들고 앞에 가서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찬송가 494장).
손에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을 때에 그것을 신뢰하고 삶을 살아갑니다. 움켜쥐고 있던 것이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고 느낄 때에 절망을 합니다. 이때에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고 빈손 들고 심자가 앞에 가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서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간다고 마음 깊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스스로 죄를 깨끗하게 하지 못함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창에 찔리셔서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효험이 있어서 죄를 씻고 정결하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찬송가 494장).
하늘의 상속자들을 습격하는 끊임없는 공격이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이리 떼들처럼 우리 주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육체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악마도 우리를 대적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오는 것입니다.19)
우리에게 열리지 아니하는 은혜의 높은 지점이나 특권은 있을 수 없고 우리도 믿음으로써 사모한다면 은혜의 최고봉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20)
우리가 생각하는 큰 것은 예수님의 식탁의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21) 우리에게는 크게 생각되는 것도 예수님께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크게 생각되는 것도 기도의 응답은 확실합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에, 기도로 하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22)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들이 믿는 자에게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단순성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모든 일들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아닌 우리의 연약한 점을 요구하십니다.23)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구원받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24)
죄로 가득 찼다고 느낄 때에도 예수님의 구원을 믿을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발견합니다. 큰 죄인은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25)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신 것을 나 자신에 적용시켜야 하며,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의 죄책 어린 영혼을 맡길 수 있어야 하며, 나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로 용서되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2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영생을 받습니다.27)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28)
어떻게 믿음이 어려운 일일 수 있는가요? 믿음은 가장 단순한 사상이라서 받아들이기에 가장 쉬운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가 쉽게 보여서 믿음이 어렵게 생각됩니다.29)
믿음은 탁월한 가치를 지닙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께 존귀를 드리는 것입니다.30)
“의롭다고 칭함”을 뜻하는 “칭의”는 믿음으로 신속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을만하시니 그의 말씀도 믿을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진리입니다.31)
믿음과 열매 사이의 구분이 어렵습니다.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이 성화를 성취합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성화의 상태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화의 열매는 믿은 다음에 나중에야 맺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32)
믿는 사람의 믿음 가운데에 성별된 생명이 내재되기 마련입니다. 믿음은 스스로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33)
성령님께서만이 믿음을 쉽게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때에,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것이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34)
예수님의 신적 사역과 그 희생의 완전을 볼 때에 믿음이 커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씻기시면 눈보다 희어집니다. 다른 죄인들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죄인들에게 용기가 됩니다. 세상의 다른 소망에 느끼는 절망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합니다. 모든 처방들이 소용없는 절망의 때에 믿음의 약을 쓸 수 있습니다.35)
그의 믿음은 난제를 이긴 믿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러하였어도 예수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으십니다. 사람에게 절망적인 경우도 예수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망의 예수님이십니다.36)
그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못 고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내가 믿사오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절망의 심연에서도 믿어야 합니다. 고난과 슬픔을 만난 때에도 믿어야 합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로 나와야만 합니다.3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이 넘치게 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큰 것을 의심하지 말고 더욱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38) 사람에게 믿음과 믿음 없음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39)
즉시 소리 지른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하였기를, “내가 믿으니 나의 믿음 없음에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치실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8절에 “그리고 그에게 예수께서 꾸짖으셨고 귀신이 그에게서 나왔고 아이가 저 때에서부터 치료함을 받은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꾸짖으셨습니다.40)
간질병에 걸려서 고난당하는 그가 일부러 불과 물로 떨어졌겠습니까? 그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 병 때문에 불과 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귀신에 의해서고 치료함을 받아야 할 질병이었습니다(마 17:18).
“귀신”은 그리스어로 “다이몬”, 영어로 “demon”[díːmən]이며, “행운의 신(god)”을 뜻하는 히브리어 “가드”를 번역합니다(사 65:11).
사람들은 행운을 가져다줄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신(god)들을 섬기나 사실상 행운의 신(神)이나 행운의 여신은 “귀신”에 불과합니다(마 8:31). 그래서 70인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가드”를 “귀신”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에 귀신 들린 것이 갖가지의 병과 괴로움들과 나옵니다(마 4:24). 사람들이 행운의 신(神)이라고 믿는 존재들은 사실상 귀신들에 불과하며 행운의 신(神)은 사실 행운이 아닌 병과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귀신”(다이모니온)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말하지 아니하며 “귀신”으로 번역된 말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닌 “악마”(demon)입니다. 타락한 천사인 악마를 추종하여서 악한 영(spirit)들이 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올라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기도하시고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치료하셨습니다.41)
이 아이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된 경우였습니다(막 9:21). 어릴 때부터 악을 선택하여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들이 있습니다.42)
여러 유형의 영적인 병자들이 있습니다. 선하다가도 음란성이 엄습하면 거기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의 발작도 있습니다. 그의 성품에는 어떤 희망을 갖게 하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영적 소리에 대하여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43)
귀신은 사람들이 자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의기양양하였습니다. 귀신은 자신이 장악한 사람의 심령을 꽁꽁 결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꾸짖으시면 그는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44)
3. 겨자의 씨앗처럼 믿음을 가지면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너희가 겨자의 씨앗과 같이 믿음을 가질 때에, 이 산에게 ‘여기서부터 저쪽으로 물러가라’고 말하고 그것이 물러가겠고 아무 것도 너희에게 불가능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왜 우리는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마 17:19).
예수님께서는 “작은 믿음 때문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 17:20).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추방할 수 있지 아니하였습니다(마 17:19).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왜 자신들이 추방할 수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작은 믿음 때문이라”고 대답하십니다(마 17:20).
“작은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 없는”이라는 말과 다릅니다.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는 자들은 작은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마 6:30). 폭풍과 파도를 무서워한 자들은 작은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마 8:26).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한 베드로는 작은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마 14:31). 그러나 마태복음 17장 17절은 “믿음 없는” 세대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작은 믿음”으로 인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지(마 17:20), 믿음 없는 세대에 속하였기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겨자의 씨앗”은 매우 작은 씨앗이나 거기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겨자의 씨앗은 매우 작을지라도 그것에는 생명력이 있어 크게 자랍니다. “믿음”을 전혀 가지지 않은 것과 “적은 믿음”이라도 가진 것의 차이점은,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큰 차이점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자랍니다. 믿음은 반드시 자라는데, 참 믿음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은 우리를 가로막는 거대하고 어려운 문젯거리를 뜻할 수 있습니다. “겨자의 씨앗”은 1mm도 채 안 되는 조그만 크기입니다. 조그만 믿음으로도 이 산에게 ‘여기서부터 저쪽으로 움직여라’고 말하고 그것이 움직일 것입니다(마 17:20).
이것은 문자적으로 산이 움직이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45) 산이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아니하다는 금언 표현입니다.46)
산이 움직이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산이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다는 속담적인 표현입니다(마 17:20).
믿음을 가진다면 아무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몰아낼 능력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능력을 받았는데 못한 것은 믿음을 가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능력을 주셨고 귀신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하셨으므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귀신들을 몰아낼 수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지 아니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질 때에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행하면 성취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내가 신념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올바름을 찾으라는 명령에 기준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올바름을 먼저 찾아야 하며(마 6:33), 이 일을 가로막는 문제에게 “저쪽으로 움직이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방해되는 것들을 믿음으로 움직여서 치울 수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왕국이 크게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믿음의 명령”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당신은 깨끗케 되시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들에게 “너희의 믿음대로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9:29). 그리고 죽은 소녀에게는 “아이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룩 8:54).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의 명령으로 명령하면 그 명령대로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작은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47)
우리에게 커다란 믿음이 있으면 죄인이 구원영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두세 사람이 기도하면 그 죄인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불신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이 믿음과 기도로 쫓겨날 것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48)
여러분!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하며 예수님의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교회 안에 머무를 수 없고 교회 밖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올바름을 추구하며 살 때에 큰 산과 같은 큰 방해거리가 우리의 앞에 가로막고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뒤돌아서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방해거리들을 향하여 “물러가라”고 명령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놓인 방해거리들을 옮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의 삶을 다 산 뒤에 빛나는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태양 같이 빛나는 존재들로 바뀌게 될 날까지 우리 앞에 놓인 방해거리들에게 믿음으로 명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내가 원하는 것이면 다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의 뜻대로 하기 위해 명령하는 것은 아무 효력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올바름을 추구하며 사는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에 방해되는 것들을 멀리 옮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방해거리들은 귀신에 의한 병일 수 있고 큰 슬픔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명령하는 때에 병이 물러가고 슬픔이 물러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의 왕국에 방해되는 것에 명령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점점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넓히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가 다 됩시다!
1) 채영삼, “힐링과 설교를 위한 복음서 본문 주해”,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제55호 (2013): 123.
2) David L. Turner, 『BECNT 마태복음』, BECNT 성경주석, 배용덕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551.
3) Turner, 『BECNT 마태복음』, BECNT 성경주석, 551.
4) 박윤선, 『공관복음』, 455.
5) France, 『NICNT 마태복음』, NICNT 성경주석, 773.
6) C. H.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서문강 옮김 (서울: 도서출판 로고스, 2000), 140.
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41-144.
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45.
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46.
1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47-148.
1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56-157.
1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26.
1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27.
1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23.
1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03.
1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05.
1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20.
1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30-233.
1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36-240.
2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42.
2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43.
2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44-245.
2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46-248.
2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59-260.
2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61-262.
2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63.
2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64.
2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67.
2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68-270.
3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71-272.
3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73-276.
3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78.
3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79-280.
3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81-284.
3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85-289.
3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297-300.
3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301-305.
3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312.
3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316.
40) Hagner, 『마태복음 14-28』, WBC 성경주석, 808.
4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65-166.
4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67-169.
4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70-174.
4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83.
45) Turner, 『BECNT 마태복음』, BECNT 성경주석, 553.
46) Matthew Henry, 『마태복음』, 매튜헨리주석전집 16권, 원광연 옮김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650.
4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90.
4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6』,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