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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 조선의 왕실
<제 1 대 태조>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후에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와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고려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을 하고 공민왕을 도와 고려의 옛땅인 쌍성총관부를 99년만에 회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의 공로로 공민왕으로부터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병마사로 임명되어 최선을 다하다가 병사하고 그의 차남인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장남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뒤(태조4년)이안사는 목왕에, 행리는 익왕에, 춘은 도왕에 추존되었고 이자춘은 환왕에 추존되었다. 그리고 태종 시대에 이르러 선조들이 목조, 익조, 도조에 추존될 때 이자춘은 다시 환조로 추존되었다. 이자춘의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의 귀주동에 있다.
이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담대 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의 뿌리>
조선의 건국자는 다 알다시피 이성계(李成桂)이다. 또한 그가 전주(全州) 이씨라는 사실도 알만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함경도 영흥 호족의 자손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본관과 고향이 다른 경우가 더 많지만, 조선 초까지만 해도 본관이란 바로 고향이었다. 원래 그의 집안은 조상 때엔 전주에 살았다. 신라 때 사공을 지낸 이한이라는 인물이 시조로 돼 있고, 그 17대손인 이안사(李安社)가 이성계의 고조부로 조선 개국 후 목조(穆祖)로 추증되어 임금 대우를 받게된다.
그는 고을의 신임 관원과 불화가 있어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까지 도망을 갔다. 그 이유는 고을의 신임 관원과 불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동원해 보복하려 하자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아서 전주에서 마찰을 빚었던 그 관원이 다시 안렴사(도지사)로 부임하게 되어 다시 북쪽의 동북면(함경도) 의주로 도망을 친다. 그리고는 고려 조정에게 의주 병마사라는 벼슬을 받아 쌍성(영흥)에서 원나라와 전쟁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고 원나라에 항복하고는 두만강 부근의 경흥 동쪽 30리쯤 떨어진 알동 마을의 천호(촌장)로 정착하자 원나라에서는 그를 인근의 다섯 지역 천호를 관할하는 다루가치(지방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안사는 1274년 그곳에서 죽고, 그의 아들이 나중에 익조(翼祖)로 추증되는 이성계의 증조부 이행리(李行里)로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지만, 주변의 여진 계열 천호들이 그를 시기하여 해치려고 하자 식솔과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두만강 중간에 있는 적도라는 섬에 피신했다가 그의 아버지 이안사가 정착했던 의주에서 살게 된다. 이 시기에 두 아들을 낳은 부인 손씨가 죽자, 등주 호장 최기열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이는데 그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椿)이다. 나중에 도조(度祖)로 추증되고, 그는 함흥에서 안변에 이르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그의 아들이 나중에 환조(桓祖)로 불리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으로 이춘의 첫 부인 박씨의 차남으로 이자흥이라는 형이 있다. 이춘이 죽자 관직을 자흥에게 물려주었는데, 자흥도 곧 죽고 말았기에 자춘에게 그 관직이 돌아갔는데 아마도 이 때의 관직은 세습제였나 보다. 아무튼 자춘은 조상들과는 달리 자기 지역에 안주하지 않고, 중앙 무대로까지 행동 반경을 넓혔는데, 그 시작이 1356년의 쌍성 토벌이다. 중앙에서 보낸 장수가 신통치 않자 지방 호족인 이자춘에게 벼슬을 주고 힘을 합치도록 했는데, 그 연합군이 승리를 거둬 함흥 이북의 여러 성을 수복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자춘은 사복시 경의 벼슬을 받고 서울에 집 한 채까지 받아 왜구와의 전투를 치르면서 몇 개의 중앙 관직을 지낸 뒤 근거지인 동북면 지역의 만호 겸 병마사, 나중에는 호부 상서까지 올라갔다. 바로 이 시절에 그의 차남인 이성계가 여러 전쟁터를 따라 다니며 경험을 쌓고, 전투 및 전략에 관한 각종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1361년 이자춘이 죽은 뒤에는 더욱 용맹을 발휘하여 참전하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명성을 얻게 되고, 그렇게 다져진 무력을 바탕으로 고려 말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와 결탁하여 조선을 건국하는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로 전주에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조선의 건국>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방원(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마침내 그해 7월에 공양왕(고려의 마지막 임금-34대)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한다. 처음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그리고 수도를 무학대사의 의견에 따라 한양으로 옮기기로 하고 궁궐건립공사를 1393년에 시작하여 1396년 9월까지 계속하였으며, 미처 궁궐이 완성되지도 않은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새 왕조의 기틀을 다져 나가지만 왕자들 사이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노년에는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게 된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 2명이다. 이들은 조선 개국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 노년의 이성계를 아주 고통스럽게 하였는데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 1차 왕자의난” 과 한씨소생의 왕자끼리 다툰“제 2차 왕자의 난”이 바로 조선개국의 역사를 얼룩지게 만든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는 태조보다 2살아래로 이성계가 벼슬을 하지 못하던시기에 영흥으로 시집와 왕으로 등극하기 1년전에 6남 2녀의 자녀를 출산하고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보다 21세 연하로 1396년 8월 13일 41세를 일기로 갑자기 승하했다.
이 사실들은 전주이씨 왕실계보를 기록한 선원 보감 등에 밝혀져 있다.
신의왕후 와는 달리 권문세가 태생으로 태조의 개국 거사에도 참여 했을 뿐만 아니라 개국 이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으로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아 결국 “제 1차 왕자의난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신덕왕후가 묻혀있는 정릉은 원래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5년(1405) 의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있어서 도성 밖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것은 태조가 8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방원(후에 태종)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자각을 없애고, 홍수에 의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정릉의 십이지신상 등 석물을 실어다 만들게 하였다.
무덤을 옮긴지 수백년간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주인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는데,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정릉이 회복되었다.
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1쌍으로 줄어들고, 무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왕후의 무덤에 비하여 빈약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의 무덤 제도는 고려왕릉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약간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정릉의 사각명등석이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을 규범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산87-16번지. 북악터널을 지나 정릉삼거리에서 우회전하고 아리랑 고개로 진입하면 바로 ‘정릉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좌우의 상점들과 아파트의 좁은 길을 가다 보면 막다른 길목에 이르는데 이곳이 세계문화유산 정릉(貞陵)이다.
29만9574㎡(90,621평)의 사을한(沙乙閑) 산록에 단릉(單陵)으로 조성된 이 능은 태조 이성계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계비 강(康)씨가 영면해 있는 곳으로 사적 제208호로 지정돼 있다.
태조의 원비 신의 황후 안변 한씨의 능은 북한 개성시 상도면 풍하리에 있는 제릉(齊陵)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다.
(황산대첩)
1377년(고려 우왕 3) 3월 왜적이 강화부에 침략해오니 서울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성계와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 등 11원수(元帥)를 시켜 서강(西江)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게 하였다. 5월에 경상도 원수 우인렬(禹仁烈)이 대마도에서 바다를 뒤덮고 건너오는 왜적의 돛대가 바라다보이니 싸울 장수를 보내 달라는 비보(飛報)를 보내왔다. 왕은 이성계에게 가서 왜적을 치라고 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해 가서 지리산 밑에서 적과 싸워 이겼다. 왜적은 험지에 의지해서 경계를 단단히 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이성계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으나, 비장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바위가 높고 험하여 말이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성계가 차남 방과(芳果 : 定宗)에게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눠 주어 그와 함께 가게 하였으나 상황은 여전히 같았다. 그러자 이성계가 “그렇다면 내가 갈 것이니,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도 뒤따라 올라오라.”고 휘하 장졸에게 이르고는 마침내 말을 채찍쳐 달려갔다. 이성계가 그곳의 지세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렸는데, 때는 한낮이라 칼이 햇빛에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 번에 뛰어오르니 군사들이 밀고 당기면서 기어 올라갔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치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과반수 이상이나 되었고 결국 싸움에서 이겼다. 이성계는 평소 에 인심을 얻었던데다가 휘하 장병들이 날쌔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못함이 없었으니, 각 고을에서는 그를 가뭄에 구름 바라보듯, 장마에 무지개 바라보듯 우러러보았다.싸움이 한창 어우러졌을 때에 이성계를 노리고 달려드는 적을 퉁두란(큤豆蘭)이 쏘아죽여 위험을 면했고, 날아오는 화살에 발목을 맞았으나 화살을 빼내 버리고 더욱 용감히 싸우니, 군졸들은 이성계가 화살에 맞았는지도 몰랐다.적의 장수 중에 나이 겨우 15, 16세가 된 자가 있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그가 흰 말을 타고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달려들어 격돌하니, 그가 가는 곳마다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아기발도(阿只拔都)라는 적장으로 군사들이 그를 대적하지 못하고 피하였다. 이성계는 그의 용맹과 날램을 아껴 퉁 두란에게 사로잡으라 명하니 퉁두란이 아뢰기를,“만약 산 채로 잡으려면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기발도는 목과 얼굴을 감싸는 갑옷과 투구를 썼으므로 활을 쏠 만한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두란에게 이르기를,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는 즉시 쏘아라.” 하고 말을 채찍쳐 달려가 투구 꼭지를 쏘아 맞혔다. 투구의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그가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는데, 이성계가 다시 투구를 쏘아 또 꼭지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땅에 떨어졌다. 두란이 즉시 쏘아 죽이니 적군의 기세가 꺾여 패주하였고, 마침내 왜구의 침략은 평정되었다. 이성계가 승전을 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을 하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와 채붕(綵棚)과 잡희(雜戱)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줄 을 지어 서서 영접하였다. 이성계가 말에서 내려 나아가 재배하니, 최영도 재배하고 앞으로 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공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이성계가 머리를 숙여 사례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명을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무슨 저의 공이 있겠습니까?”하였다.최영이 말하기를 “공 때문에 삼한이 다시 일어난 것이요, 그것은 이번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공이 아니면 앞으로 누구를 믿겠습니까?”하였다. 우왕이 금 50냥을 내려 주니, 이성계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을 수행한 것일 뿐이온데 신이 어찌 감히 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한산군 이색이 시를 지어 치하하니, 전삼사좌사(前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과 성균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이에 화답하였다.이 싸움이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이성계의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1388년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이성계 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의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것은 5월이었다. 하지만 장마로 인하여 압록강물이 불어 강을 건널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 할수 없다는 판다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것이 그유명한 “4불가론(四不可論)”으로
1.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3. 요동공격의틈을 노려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염려가 있으며
4.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6월 초하루, 이성계는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주둔하였다. 류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최영이 맞아 싸워 모두 물리쳤다. 이성계가 류만수를 보낼 때에 좌우에게 일러 말하기를 “류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주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그때 이성계는 들판에 말을 놓아 두고 있었다. 류만수가 달아나 돌아오자 좌우가 그 사실을 아뢰었는데, 이성계는 아무 대꾸도 없이 휘장 속에 굳게 누워 있었다. 좌우가 재삼 아뢴 뒤에야 천천히 일어나 음식을 들고 난 뒤, 말에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출동하려 하는데 앉은뱅이 소나무 한 그루가 백보 밖에 있는 것이 보였다. 이성계는 그 소나무를 쏘아 승전할지의 여부를 점쳐서 군중의 마음을 단결하게 하려 하였다. 마침내 한 발의 화살을 쏘니 소나무가 그 자리에서 잘라졌다. 그러자 이르기를, “다시 무엇을 바라겠느냐?”하니, 여러 군사가 모두 하례하였다. 진무(鎭撫) 이언(李彦)이 나와서 꿇어앉아 아뢰기를 “우리 영공(令公)을 모셨사오니 어느 곳엔들 가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성계가 숭인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 좌군과 좌우로 협격하면서 전진하니, 도성 안의 남녀가 앞을 다투어 술과 음식을 가지고 환영하며 위로하였고, 군사들이 수레를 끌고 길을 열었다. 노약자들은 산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좋아라 뛰며 환호하였다. 조민수는 흑대기(黑大旗)를 세웠고 태조는 황대기(黃大旗)를 세웠다. 흑대기는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러 최영의 군사에게 패하여 달아났지만, 황대기는 얼마 후에 선죽교로 해서 남산(南山)에 올라갔다. 최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정병을 거느리고 먼저 웅거하고 있다가 황대기를 바라보고는 무너져 달아났다. 태조가 마침내 암방사(巖房寺)의 북쪽 고개에 올 라가 큰 소라[大螺]를 한 번 불었다. 그 때에 행군하는 군중이 모두 나각을 불었지만, 이성계의 군중에서 소라를 불자, 도성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이성계의 병사인 줄을 알았다. 마침내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에워쌌다. 우왕과 영비(靈妃) 및 최영은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다. 곽충보(郭忠輔) 등 서너 명이 곧바로 전각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으니,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 였다. 최영이 우왕에게 재배를 올리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이성계가 최영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오. 그러나 대의를 거스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이 피로하고 지쳐서 원통하게 여기는 원망의 소리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이었을 뿐이오. 그러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하고 서로 대하고 울었다.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에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으로 고려의 33대왕으로 창왕을 옹립한다.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리판삼사(李判三司 : 이성계)가 모름지기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오.? 라고 했는데 최영이 그 말을 듣고 매우 노하여 감히 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탄식하기를,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하였다. 양 도통사 및 36 원수가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謝)하니, 한산군 이색이 도성에 머물러 있던 나이 많은 재상과 함께 이성계를 알현하였다. 이성계가 이색과 한참 이야기를 하고 군문(軍門) 밖으로 돌아왔다. 전부터 잠저(潛邸) 마을에“서경성(西京城) 밖에는 불빛이 나고 안주성(安州城) 밖에는 연기가 나네. 리원수(李元帥)가 그 사이를 오가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 말씀을 하네.”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회군의 의거가 있었다.
<이 지 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선조들의 행적은 이채롭다. 13세기 중반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본향인 전주를 떠나 오늘날 간도에 해당하는 두만강 하류의 알동(斡東)으로 이주했다. 증조부 이행리(李行里)는 다시 함경도 영흥 부근으로 거처를 옮긴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며 북방을 누비는 과정에서 이씨 집안은 이 지역에 세거했던 몽골·여진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고려 말 동북면 일대에서 활약했던 이성계의 주변에는 많은 여진족 유력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바로 이지란(李之蘭)이다. 북청(北靑) 부근에 살던 여진족으로 본래 성은 동(佟),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였다. 말 잘 타고 활 잘 쏘았던 이성계가 역시 기마와 궁술에 뛰어났던 그를 만나 의형제를 맺은 것은 행운이었다. 이지란은 이후 중요한 고비마다 이성계를 지성으로 보좌한다.
“여인이 이고 가는 물동이에 이성계가 쇠구슬을 던져 구멍을 내니 이지란이 진흙덩이를 던져 구멍을 메우고 물이 새는 것을 막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실제 전장에서도 재현된다. 1380년(우왕 6) 이성계와 이지란은 남원의 황산(荒山)에 침입한 왜구 토벌전에 출전한다. 왜구의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고려군은 두 사람의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 덕분에 승리를 거둔다. 이성계가 적장 아기발도의 황금빛 투구를 쏘아 떨어뜨리자 이지란은 노출된 얼굴을 명중시켜 역전승을 이끌어낸다. 황산전투 승리를 계기로 이성계는 거국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입신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지란은 이성계가 자만할까 경계하여 그에게 “재주를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1392년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개국공신에 오른 이지란의 활약은 더욱 빛난다. 경상도로 내려가 왜구를 막는 대책을 마련하는가 하면 함경도에서는 여진인들을 다독여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훗날 이식(李植)은 “이지란이 태조를 보좌하여 남쪽과 북쪽 지방을 평정할 때 세운 공적은 삼한(三韓)을 뒤덮는다”고 찬양했다.
태조대에 활약한 이민족 출신 인물로는 설장수(偰長壽)도 눈에 띈다. 건국 직후 명과의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한 그는 본래 회골(回鶻:위구르) 출신이었다. 이들을 포용하여 공을 세우도록 이끌었던 이성계의 혜안이 돋보인다. 16세기 이후 여진족을 ‘오랑캐’로 백안시하여 결국 국가적 위기를 불렀던 상황을 돌아보면 더욱 그러하다.
<계비 신덕왕후의 돌연사 후 자식·측근 몰사>
개국 초 조선왕실의 권력 구조는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원비 한씨의 장성한 여섯 왕자가 있었지만 계비강씨는 자신의 소생으로 왕실 대통을 이으려 했다.
이에 동조한 것이 신권주의(臣權主義ㆍ지금의 내각책임제와 유사)를 부르짖던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등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는 데 목숨을 걸었던 정안대군(방원-후에 태종)이 크게 반발했고 왕위 계승에 은근히 뜻을 뒀던 넷째 왕자 방간도 술렁였다.
끝내 태조가 11세의 어린 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안대군은 속이 뒤집혔다.
이런 판국에 계비가 돌연사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야 사후 뒷일을 알 바 아니겠지만 이후 자신의 소생은 물론 자신을 따르던 아까운 인재들도 몰살당했다.
뒤늦게 안 태조가 땅을 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계비를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곳(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장사 지내고 정릉이라 능호를 내렸다.
오늘날 중구 정동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됐다.
자신도 죽으면 함께 묻히려 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릉은 왕릉치고는 초라한 무덤이다. 능을 감싸는 병풍석과 난관석도 없고 석물들도 초라하다. 태종으로 등극한 정안대군이 정릉을 여러 차례 이장하면서 정자각을 헐어버렸다.
석물들은 실어다 광교 돌다리로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이즈음 아무렇게나 옮겨 쓴 자리가 현재의 정릉이니 오죽했겠는가. 풍수에 능한 태종이 미워하는 계비 묘를 명당에 잡을 지관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종 8년(1669년) 우암 송시열의 상소로 종묘에 배향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정릉은 촌부의 무덤만도 못한 잊힌 폐묘였다. 왕실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호(號)를 내렸다.
묘호(廟號)는 임금이 승하하고 조정 대신들이 지어바친 것으로 태조 세종ㆍ영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왕 자신들도 살아서는 몰랐던 것이다.
이와 함께 존호(尊號)는 임금의 덕을 기려 사후에 지어 올린 것으로 왕비는 휘호(徽號)라 했으며 종묘(宗廟)에 모셔진 신주에 새겨져 있다. 정릉ㆍ태릉ㆍ홍릉 등은 능호(號)라 부른다.
이와는 달리 시호(諡號)는 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한테 내리는 칭호로 충무공ㆍ문정공 등이며 문중의 영광이었다.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만남>
능상에 올라 나경으로 좌향을 재 보니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나경은 24방위로 나뉘어 있으며 1방위가 15도씩으로 360도 원을 이루는 풍수 전문가의 나침반이다.
정릉은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안으며 좌측에서 물이 내려와 우측으로 흘러가는 좌수우도(左水右倒)의 국세다.
산 정기를 능으로 밀어 주는 입수(入首) 용맥이 갈라져 능 앞의 바람을 막아 주는 안산(案山)이 형성되지 못했다.
좌청룡이 내려와 작국(作局)한 금대국세(金帶局勢)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남자와 벼슬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여자와 재물을 상징한다.태조가 강씨 부인을 만나던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태조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물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물 한 바가지를 청했다. 버들잎을 띄워 건네 주는 물을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신 뒤 연유를 물으니 “급히 물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돼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 처녀가 바로 정릉에 누워 계신 계비 강씨다.
신덕황후라는 휘호를 되찾아 종묘에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이때의 비를 원을 씻어 주는 비라 해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황후는 후일 고종황제가 추존해 올린 호다. 정릉 기신제향(忌辰祭享)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파 후손들이 매년 9월 23일 올리고 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
정도전은 고려말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 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거서야 비로서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그런연으로 인하여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런 외톨박이 생활이 역성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보다 2년늦게(1337년)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문하에서 글을 배울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정몽주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가 되던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후에 진사시에 붙어 벼슬길에 올랐지만 순탄치는 않았으며, 그후 이성계와 인연을 맺어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고,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주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가 그리던 새왕조의 창조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하지만 이방원의 무력 동원으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은 어린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는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이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린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국건설의 당위성을 주장했다면 무학은 이성계를 일개 장수에서 군왕이 될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끈 사람이었다.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박씨로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법명은 자초이며 18세에 송광사(구 수선사)로 출가하였고 용문산의 혜명스님에게서 불법을 전수 받았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허물 없는 친구 사이로 조선 건국에도 함께했으며 ,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각별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그러나 조선의 중심세력은 성리학자였고, 그것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로 이어졌지만 이런 현실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끝내고 조용히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만 전넘하다 1405년 79세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어느 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나려 무학의 고향인 충청도 태안 땅(본래는 합천이나 부모가 왜구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여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팜) 간월도란 섬으로 찾아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인월 전투에서 격었던 고생담을 서로 주고 받았다. 인월 전투란 고려 말 왜구 장수 아키발도가 500척의 배에 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포( 지금의 군산)에 상륙해서 호남평야 일대룰 약탈함으로써 이를 토벌히려는, 이성계를 장수로 한 고려군과의 전투를 이르는 말이다.
이 때 최무선 장군이 화약을 발명해, 고금동서를 통해 전무했던 대포로 아키발도가 몰고온 500척의 배를 금강 하구에서 수장시키므로 , 아키발도는 하는 수 없이 남원 함양 진주 방면으로 퇴로를 열어 후퇴하면서 갖은 못된 짖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 때 이성계의 고려군과 맞닥들인 곳이 바로 운봉 땅 인월이란 곳이었다.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엄청난 고생을 하게된다. 칼을 주 무기로 싸우는 왜구와 활을 주무기로 해서 싸우는 고려군에겐 야간 전투란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앞이 보여야 화살을 날닐 수가 있는데, 달 마저 없는 야반에 적이 공격 해 오니 고려군은 백전 백패였다.이 전투에서 이성계가 제를 올려 그뭄밤에 달을 끌어올렸다 해서 이 곳의 지명을 인월이라한다. 이성계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발판을 마련하개된다.
무학대사 왈 " 전하! 지리산이 전하를 그처럼 고생을 시켰으면 응당한 벌을 내리셔야지요" 아니 어떻게 산을 벌한단 말입니까?"
"벌주는 방법이야 이 땅의 주인이신 전하 마음대로지요"
이성께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지리산을 귀양 보내 버리시죠"
":아니 ! 귀양을 보내다니?"
" 지금 지리산이 경상도 땅에 있지않습니까? 이 지리산을 전라도 땅으로 귀양을 보내버리면 됩니다."
이성계는 점점 더 무학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학대사의 말인 즉슨 이제까지는 경상도 지리산이라고 불렀지만 앞으로는 전라도 지리산으로 부르도록 명령만 내리시면 된다는 것이었다.그리하여 그날 이후부터 경남 함양 산청 진주 하동 그리고 전남 구례 전북 남원에 자리 잡고 있던, 수 천년 경상도 지리산이라 불리워졌던 이 산이 하루 아침에 전라도 지리산이라고 불리워지게 되고말았던 것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인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사건을 제 1차왕자의난, 방원의난,무인정사, 정도전의난 이라고도 한다.
정도전이 개국과정에서 스스로를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면서 이성계보다 자신이 더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곤 했는데 이는 재상을 최고의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보는 정도전의 정치이념이었다. 또한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하자는 주장등으로 두사람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어 결국 세자 방석의 모친인 강씨가 죽고나자 방의 와 방간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들어 방번과 방석, 정도전등을 죽여버렸다. 태조는 이때 와병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하게 알지 뫃하고, 나중에 강씨 소생의 방번,방석형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는 상심하여 결국 왕위를 내놓고 방원이 실권을 잡기 시작했다.
<제2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복(異腹) 형제간의 싸움인 데 대하여 이는 동복(同腹) 형제간의 싸움이며, 방간이 방원에 대한 시의심(猜疑心) 때문에 일어난 싸움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방간의 난, 박포의 난 등으로도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제1차 왕자의 난의 충격으로 왕위를 정종에게 내주고 떠난 뒤 정종은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태조의 4남이자 이방원의 형 이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기하며 의심하고, 불안한 가운데 있었다. 한편 지중추(知中樞)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는 데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작(賞爵)이 높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이방간이 왕세제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고, 뒤이어 박포까지 돕기로 하자 이방간은 군사를 일으켰다.
개경 선죽교에서 두 병력이 대치하여 전투를 시작했지만 방간은 방원의 상대가되지 못하고 승패는 결정되었다. 전국(戰局)은 방간의 군대에게 불리하여 패주하게 되니, 이방원의 병력은 이방간의 병력을 무찔렀으며 이방간은 묘련 북동으로 달아나다가 탄현문 근처에서 소근, 고신부, 이광득, 권희달에게 추격당해 붙들리고 만다. 거병 작란(擧兵作亂)하여 동기(同氣)를 모해했다는 죄명으로 이방간은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죽주(지금의 충청북도, 영동)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아울러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정종은 하륜(河崙) 등의 주청으로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그해(1400년) 음력 2월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은 뒤 같은 해 음력 11월에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그가 바로 제3대 태종이다
<이성계의 형제들>
환조 이자춘(1315 ~ 1360년)
태조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는 이한(李翰)이다. 이성계의 21대 조상인 이한은 신라 사람으로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아내 김씨는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의 딸이다. 그와 김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자연은 시중 벼슬을 지냈고, 손자 이천상은 좌복야 벼슬을 지냈다.
그 뒤로 이천상은 아간 벼슬을 지낸 이광희를 낳았고, 이광희는 사도 삼중대광 이입전을 낳았고, 이입전 이후로 이긍휴, 이염순, 이승삭, 이충경, 이경영, 이충민, 이화, 이진유, 이궁진, 이용부를 거쳐 고려의 내시집주 이인에 이르렀다. 이인은 대장군 이양무를 낳았고, 이양무가 상장군 이강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안사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태조의 고조부 이안사이다. 이안사는 원나라에 귀순하여 천호 벼슬을 얻었으며, 이후로 이행리, 이춘, 이자춘으로 이어지며 후손들이 벼슬을 대물림했다.
이자춘(李子春)은 1315년에 이춘과 부인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몽고식 이름은 오로사불화이다. 형 이자흥이 일찍 죽자, 그는 어린 조카 이교주(이천계)가 성장한 뒤에 벼슬을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형의 지위를 이었다. 하지만 이교주가 성장한 뒤에 이자춘은 천호의 벼슬을 돌려주지 않았다(실록에는 이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닌 듯하다. 이자춘이 죽은 뒤에 자신이 적장자임을 내세워 이성계를 죽이고 지위와 재산을 되찾으려고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에 귀부하여 관직을 얻었는데, 노비를 죽여 살인혐의로 하옥된 뒤, 사형되었다).
이자춘이 천호 벼슬을 잇게 되자, 자신의 외손자에게 천호 자리를 잇게 하려던 쌍성의 조총관은 이자춘을 몹시 싫어했다. 거기다 당시 원나라는 쌍성 지역에 있는 백성들에게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몹시 불안하게 했다. 이런 일들은 쌍성의 고려인들을 이끌고 있던 이자춘에겐 매우 위협적인 일이었다.
그 무렵, 원나라는 황위 계승권을 두고 다툼이 지속되는 바람에 내정이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홍건적이 일어나 원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렇듯 원나라가 무너지자 새롭게 고려 왕으로 등극한 공민왕은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골격으로 삼아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여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동시에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고려 땅을 지배하고 있던 원나라 총독부인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공민왕의 그런 움직임은 이자춘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총관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이자춘도 고려와 내통하여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결국 1355년에 개성으로 찾아와 은밀히 공민왕을 만난 뒤, 고려 조정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당시 고려의 권력은 원나라 기황후의 족속인 기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공민왕은 우선 그들을 처단하고, 이어 유인우에게 군대를 안겨 쌍성총관부를 공격토록 했다. 하지만 유인우는 쌍성에서 2백 리 떨어진 안변에 진채를 내리고 쉽게 진군하지 못했다. 이자춘의 내응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다.
한편,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사람을 보내 소부윤 벼슬을 내리고 자신의 어대를 징표로 주면서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자춘이 공민왕의 요청에 호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유인우의 군대와 합세하여 쌍성을 공격했고, 마침내 무너뜨렸다. 이후 그 주변 지역을 모두 장악하여 함경남도 일원이 거의 고려 수중에 떨어졌다. 이 지역은 고종 재위 시절에 원나라에 강점되어 무려 99년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다가 이때 회복된 것이다.
이자춘은 쌍성 회복의 공에 힘입어 벼슬이 대중대부 사복경으로 올랐고, 공민왕이 내린 개성의 저택으로 이사했다. 그 뒤, 군기감 판사, 천우위상장군 등을 지내다가 1360년에 영록대부 장작감 판사의 벼슬로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4월에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실록에는 그의 사망 연도를 1361년인 원나라 지정 21년 신축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은 이색의 문집 속에 남아 있는 이자춘의 비문과 정총이 지은 정릉 비문에 모두 1360년 경자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쓰고 있어,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이자춘의 무덤은 함흥 동쪽 귀주동에 마련되었으며, 신도비의 비문은 이색이 썼다가 나중에 환조로 추존된 뒤에 정총이 다시 지었다. 능호는 정릉이다.
이자춘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영흥(화주)의 천호였던 최한기의 딸 최씨이며, 그녀 소생으로는 태조와 정화공주가 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의혜왕후에 추증되고, 무덤은 정릉과 같은 산에 마련된다. 능호는 화릉이다.
나머지 두 부인은 이자춘의 여종으로 첩이 된 여자들이다. 그 중 하나는 이씨로 이름은 내은장이며, 소생은 이자춘의 서장자 이원계이다. 다음으론 김씨가 있는데, 이름은 고음가이며, 소생은 의안대군 이화이다. 김씨는 후에 정안옹주에 봉해지고, 다시 정빈으로 추증된다.
동복누나 정화공주(생몰년 미상)
정화공주는 태조의 유일한 동복 남매로 조인벽에게 시집갔다. 조인벽은 한양 사람으로 함주를 원나라에 바쳐 쌍성 총관을 지낸 조휘의 증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돈의 아들이다.
1356년에 쌍성을 회복할 때에 동북면병마사 유인우를 도운 공으로 호군 벼슬을 얻었다. 1363년에는 김용의 토벌에 공을 세웠고, 그 뒤에 왜구 토벌에 참전하였으며, 1388년에는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삼사좌사 벼슬에 올랐다.
그는 정화공주와 결혼한 까닭에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웠고, 조선 개국 이후에는 용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의정부찬성사를 지낸 조온이 그의 아들이다.
이복형 이원계(1330년 ~ ?)
이원계(李元桂)는 환조 이자춘이 자신의 노비였던 내은장을 취해 낳은 아들이다. 그는 적자인 이성계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성계는 그가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형으로 깍듯이 대접하였다.
이원계는 공민왕 때에 이성계 휘하에 있으면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개경 수복에도 큰 공을 세웠다. 1376년 원나라 황제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양왕 탈탈불화가 군대를 이끌고 입국할 때에 그는 동지밀직 벼슬에 있다가 서북방어군의 조전원수가 되어 그들을 막기도 했다.
1377년에는 나세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1380년에 왜구가 또다시 대대적으로 침입하자, 전라도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 왜구 격퇴의 계기가 되었던 황산싸움에서는 이성계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1388년 요동 정벌 때엔 이성계 휘하의 조전원수로 출전하였고,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하여 1390년에 회군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이렇듯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빈 까닭에 두 사람의 우애는 돈독했고, 이성계는 그의 어머니 이씨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앴다. 이성계는 또 조선 건국 후에 그에게 완산군의 봉작을 내리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각별한 신경을 쓰며 그들에게 모두 ‘군(君)’ 의 칭호를 하사했다.
이원계는 이양우, 이천우, 이조, 이백온 네 아들과 딸 셋을 뒀다. 딸 중에 장녀는 장담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변계량에게 시집갔다가 버림을 받아 유정현에게 재가했으며, 셋째는 홍노에게 시집갔다가 버림받아 변처후에게 시집갔다.
이복동생 이화(1340 ~ 1408년)
이화(李和)는 환조 이자춘이 1340년에 노비 고음가를 취하여 낳은 아들이며, 이성계보다 다섯 살 어린 이복동생이다.
그는 1388년에 이성계를 따라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였고, 그 공으로 회군공신에 봉해진다. 또 1392년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으로 옹립하는 데도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기도 했다. 1398년에는 이방원의 편에 서서 왕자의 난을 도왔으며, 이 공으로 정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을 도왔고, 그 공으로 다시 좌명공신 2등에 올랐다.
그는 이렇게 네 차례에 걸쳐 공신 목록에 오른 덕분에 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총 570결(약 1만 8천 평)의 공신전을 소유하기도 했다.
1407년에는 영의정부사에 임명되어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탄핵하는 데 앞장서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인 1408년 10월 6일에 61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양소공(襄昭公)이며, 의안대군에 피봉되었다.
성격이 순박하고 용감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태조를 무척 따랐으며, 전장에서도 늘 태조 곁을 떠나지 않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의 난 때 이방원 편에 선 까닭에 태조의 원망을 듣기도 했다.
그는 이지숭, 이숙, 이징, 이담, 이교, 이회, 이점 등 7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뒀다. 그의 딸은 처음에 고려 종실 왕아무개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최주에게 재가했다.[출처] 조선 제1대 왕 태조실록
첫댓글 인맥이 복잡해서 그냥 읽어만 봣는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 싸움은 변치 않았네 그려...
어떻게 구석구석 세밀히 조사 하셨누~ 대단하시구료!
또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 주시구려...
내조상인데도 잘모르는 족보를 그리도 소상히 아누 역사공부 많이했네
잘 읽어봤네 어데서 다조사를 했는고 대단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