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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Marguerite-Continued
Matthew Arnold (1822-1888)
여국현(시인/ 영문학박사)
이번 영시해설에서 다룰 시는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의 「마가렛에게-이어서」“To Marguerite-Continued”입니다. 아널드가 스위스를 여행하다 만난 여성 마가렛Marguerite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진 후 쓴 8편의 ‘스위스 시들’ 가운데 다섯 번째 시입니다. 시를 다루기에 앞서 매슈 아널드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시인으로서 뿐 아니라 공교육 매체로서 (영)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학비평의 역할을 우리 삶에 대한 전반적인 비평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아널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기(1832~1901)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아널드는, 사립학교인 <럭비 학교> 교장이었던 부친 토마스 아널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교육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옥스포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수학하고 나중에 옥스포드 대학의 시학교수가 되었으며, 35년 동안 중등학교 장학관을 역임한 교육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삶의 후반기에 들어 비평과 교육 보고서 등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시는 거의 쓰지 않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아널드 자신도 당대의 시인들과 자신을 견주어 이런 말을 하기도 했지요.
“제가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보다 시적 정서가 부족하고 브라우닝Robert Browning보다 지적 활력과 풍부함이 떨어질 수 있겠지만 그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둘 중 어느 누구보다 나을 것입니다.” (1869년 모친에게 보낸 편지)
아널드는 시인으로서도 당대를 대표할만한 명성을 얻긴 했지만, 더 주목할 만한 업적은 비평과 공교육 분야에서 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6세기 르네상스 시기 이후 부르주아 계층이 등장과 더불어 심화되다가 산업혁명과 두 차례의 선거법 개정을 거쳐 노동 계층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면서 ‘교양’culture은 사라지고 ‘속물근성’philistinism—이 단어는 서구인들이 갖는 편견을 그대로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팔레스타인 부족인 필리스티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인데, 중동인인 필리스티아 사람들, 나아가 비서구인들의 삶에 대한 서구인들의 왜곡된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아널드가 사용한 원래 의미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사용합니다.—이 세상에 만연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하면서, 문학비평과 공교육의 확대를 통해 사라진 ‘교양’을 회복하는 동시에 사회의 ‘속물근성’을 타파하는 데 관심을 두었습니다.
아널드가 말하는 ‘교양’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라는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교양’이란 “이제까지 세상에서 생각하고 말한 최상의 것”(the best that has been thought and said in the world)이라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립니다. 아널드는 특히 호머Homer 이래 쓰인 훌륭한 최고의 문학작품이 ‘교양’의 핵심적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단순히 문학작품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담긴 인물과 사회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삶에 대해 생각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최고의 문학작품’에 무지한 부르주아들과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잊히고 무시되는 것이 사회에 ‘속물근성’이 만연한 까닭이라고 진단한 것이지요. 문제의식이 명확하니 답도 분명합니다. ‘교양’ 없는 대중들에게 ‘교양’을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면 될 텐데, 이게 예전처럼 일부 여유 있는 집안의 가정교육만으로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두 가지였지요. 하나는 문학비평을 통해 수많은 문학작품들 가운데 훌륭한 문학작품을 제대로 비평하여 최상의 작품들을 선정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선정된 작품들을 공교육 제도를 통해 다수의 대중들에게 교육시킴으로써 ‘교양’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중등학교에서 영어 교육—그들에게는 국어 교육인—을 통해 훌륭한 문학작품과 그 속에 담긴 바람직한 삶의 방식, 즉 ‘교양’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속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것이 사회의 속물화를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지요. 아널드의 문학비평을 단순한 작품 비평이 아니라 ‘삶의 비평’ 혹은 ‘인생비평’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와 철학이 하던 역할을 문학비평이 수행하는 것, 아널드는 그런 생각을 품고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시학교수로서, 중등학교 장학관으로서 아널드가 비평과 현장 교육을 통해 선정한 ‘최고의 작품’들이 나중에 중등학교의 영어 교육과 대학의 영문학 교육 체계에서 가르치고 배우도록 선정되는 작품들이 되고, 그가 제시한 비평의 기준들이 이후 훌륭한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 역할을 하게 됩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상당부분의 교육내용이 매슈 아널드의 작업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작업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대학의 영문학 교육은 아직 아널드의 영향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이전만큼은 못하다 해도 우리나라의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한 문학과 비평 또한 아널드의 사고에 그 터를 두고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널드 비평의 한 가지 면만을 더 언급하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삶 혹은 인생 비평으로서 문학비평이 지녀야 할 가장 핵심적인 미덕으로 ‘공평무사함 혹은 사심없음’Dis-interestedness을 꼽습니다. 글자 그대로 비평을 하는 모든 영역에서 비평의 대상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객관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공명정대한 태도를 의미했으며, 아널드 자신은 물론 모든 비평가가 그런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모두는 자기 입장에 서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중앙은 없는 법이지요. 언제나 자기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이 나뉘는 법이고요. 아널드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교양’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널드 자신은 최상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른 조건과 상황과 맥락에서 보면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고, 아예 ‘교양’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겠지요. 노동계층에 대한 그의 적대적 태도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의 속물근성도 비판했지만 특히 19세기 초중반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법안 만들기 운동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참정권을 법제화하기 위해 했던 일련의 투쟁—을 통해 선거법을 개정시키면서 참정권의 주체로 등장한 노동계층이야말로 사회 내에 무질서를 가져오는 존재들이라 보고 ‘교양’의 반대편에 ‘무질서’Anarchy라는 이름으로 노동계층의 삶의 방식을 위치시킬 정도였지요. 그의 대표작이란 할 수 있는 비평서인 『교양과 무질서』Culture and Anarchy는 1867년 2차 선거법 개정을 통해 모든 개별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얻게 되는 과정을 지켜본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요.
‘교양’의 정의에 대해서도 실제로 아널드의 입장처럼 인간의 문화적 산물들 가운데 ‘최상의 것’만을 교양의 내용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런 차등과 구별 없이 인간들의 삶의 상황 속에서 나온 모든 것, 즉 ‘인간 삶의 모든 방식’the whole way of life을 ‘culture’의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때 ‘culture’는 아널드 식의 ‘교양’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문화’라는 의미로 번역됩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영국에서 이런 움직임이 생겨 오늘날 ‘문화연구’라는 나름의 영역과 모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문화연구’는 아널드 식의 협의의 문화 개념을 보다 폭넓게 적용시켜 문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서 차별 보다는 차이에 초점을 두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그 결과물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가치평가를 하고자 하며,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문학이건 문화적 산물이건 ‘최상의 것’은 불변하는 고정된 가치평가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상황과 맥락 속에서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상대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동안 가치평가 받지 못하던 ‘문화’, 특히 대중들과 노동계층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삶의 방식에 공정한 시선을 보내야 한다는 입장도 분명한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영문학에 관심을 가진 데는 아널드의 시와 비평이 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처음 접했을 때 ‘공평무사함’이라는 비평의 개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조금씩 더 알아가면서 저는 아널드의 ‘교양’ 개념이 지닌 한계와 ‘공평무사함’이라는 입장의 오류를 확인하고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 개인적 맥락을 확인하면서 그에게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결국 제가 학위 논문으로 삼은 주제는 아널드의 입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보다 넓은 의미의 ‘문화’ 개념을 주장하는 ‘문화연구’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아널드에 대한 제 애정은 여전합니다. 아니 어쩌면 더 깊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널드에 대해 조금 장황할 정도로 언급할 까닭도 그런 제 애증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 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Yes! in the sea of life enisled, 그렇다오! 삶의 바다에 섬이 되어,
With echoing straits between us thrown, 메아리치는 해협들을 사이에 두고,
Dotting the shoreless watery wild, 끝없는 물의 광야를 점점이 수놓으며,
We mortal millions live alone. 우리 수많은 필멸의 존재들은 홀로 살아간다오.
The islands feel the enclasping flow, 죄어드는 물결을 느낄 때,
And then their endless bounds they know. 섬들은 끝없는 경계선을 알게 된다오.
‘Yes’라고 시작하는 것은 이 시가 이전에 쓴 「이별-마가렛에게」“Isolation-to Marguerite”라는 시에 이어지는 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치 말하듯, 구어체colloquialism로 시작하는 서두가 자연스럽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비유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서로 소외되어 고독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대양 속에 고립된 ‘섬’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해협들’straits이나 ‘끝없는’shoreless이라는 단어가 그들 사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그렇게 따로 떨어져 ‘고독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은 ‘끝없는’ 바다물이 사방에서 자신을 옭죄어 올 때 비로소 알게 되지요. 자기를 구속하고 있는 이 ‘끝없는’ 바다의 경계선을요. 1연에서 반복되는 ‘끝없는’shoreless, endless이라는 단어는 섬, 인간이 처한 가없는 고독을 절절하게 전해줍니다. 참고로, 이 시에 앞선 「이별-마가렛에게」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Of happier men--for they, at least, 더 행복한 이들 — 그들은 적어도
Have dreamed two human hearts might blend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 될 수 있다는
In one, and were through faith released 그런 꿈을 꾸고, 믿음을 통해서
From isolation without end 영원히 계속되는 고독에서 해방되었으니.
Prolonged; nor knew, although not less 그대 못지않게 고독하면서도,
Alone than thou, their loneliness. 그들은 외로움을 모르니.
그렇게 이별을 모르고 하나 될 수 있다는 꿈을 꾸는 행복한 존재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인간의 필연적 고독에 대해 지금 화자는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독한 인간을 섬으로 은유하는 것은 17세기의 존 던John Donne도 자주 사용했으며, 아시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조병화 시인은 ‘섬’이라는 제목으로 연작시집을 내기도 했지요. 그만큼 고독하게 존재하는 인간과 대양 속에 고립된 섬의 이미지는 잘 연상되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But when the moon their hollows lights, 그러나 골짜기마다 달빛이 비치고,
And they are swept by balms of spring, 봄의 향기가 온 섬들을 휩쓸고
And in their glens, on starry nights, 별 빛나는 밤에 계곡에서,
The nightingales divinely sing; 나이팅게일이 아름답게 노래 부를 때면;
And lovely notes, from shore to shore, 그 아름다운 가락이, 해안에서 해안으로
Across the sounds and channels pour-- 크고 작은 해협을 가로질러 쏟아질 때면--
2연은 낭만적인 정조와 함께 공감각적 이미지가 가득합니다. 홀로 존재하는 고독한 섬들 마다 달빛이 내리비치고(시각), 바다를 건너 온 봄의 향기가 가득 풍겨오고(후각), 반짝이는 별빛 쏟아지는 계곡에서 아름다운 나이팅게일의 노래 부르고(청각), 그 노랫소리 이 섬 저 섬으로 울려퍼집니다(청각).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인간의 고독은 더욱 또렷하게 상기됩니다. 아널드의 시에서 이와 같은 낭만적 광경은 자주 등장합니다. 까닭이 없지 않습니다. 그가 동경하던 시인은 다름 아닌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였습니다.
아널드는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이웃에서 살면서 워즈워스를 직접 만나기도 했던 아널드는 커서 그런 위대한 시인이 되려는 꿈을 품기도 했습니다. 이 꿈은 그저 어린 시절의 꿈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이 시는 물론 그의 대표작으로 언급되기도 하는 「도버해안」“Dover Beach”를 포함한 많은 시들은 낭만적 묘사로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워즈워스가 서거한 이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추모시」“Memorial Verses”에서 “이제 유럽은 어디서 워즈워스가 주었던 치유의 힘을 얻을 것인가”But where will Europe's latter hour/Again find Wordsworth's healing power?라며 가득한 슬픔을 쏟아내기도 했지요.
공감각적 요소들이 가득한 2연의 이런 낭만적 아름다움 속에 극대화된 고독 속에서 타인을 향한 그리움과 갈망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Oh! then a longing like despair 오! 그러면 절망 같은 그리움이
Is to their farthest caverns sent; 섬의 가장 먼 동굴까지 번진다오.
For surely once, they feel, we were 예전에는 틀림없이, 섬들이 느끼듯, 우리가
Parts of a single continent! 한 대륙의 일부였으니!
Now round us spreads the watery plain-- 지금 우리 주위엔 물의 평원이 펼쳐져 있다오.
Oh might our marges meet again! 아, 우리의 가장자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절대의 고독 속에서 타인을 향한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이 번져오지만, 그 그리움은 이미 ‘절망’의 그림움이라는군요. ‘절망 같은 그리움’이라니요! 이미 그 그리움은 채워질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절망을 안고 있는 그리움이군요. 그러니 그 그리움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요. 게다가 섬들은, 아니 우리 인간들은—이 지점에서 이제 화자는 섬이라는 비유를 아예 인간이라고 동일시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모두 ‘하나의 대륙’single continent이었음을.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함께 있는 인간들을 비유하는 ‘하나의 대륙’이라는 이 비유는 고독한 인간과 섬의 비유가 그러하듯 적절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가 원래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 비유가 적절하면서도 과학적 진실과도 부합하는 기발한 비유를 ‘형이상학적 기상奇想’Metaphysical conceit이라고 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기발한 착상’을 의미하는데 특히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7세기 영국시인인 존 던을 비롯한 형이상학파 시인들Metaphysical Poets의 특징적인 기법이라해서 그런 이름을 붙여준 것이지요. ‘형이상학적 기상’을 대표적으로 사용한 존 단의 유명한 예로 이별하지만 마음은 함께 있는 두 연인을 ‘콤파스의 두 다리’에 비유한 것이나 서로 똑같이 사랑하는 여인을 두 개의 반구半球가 하나로 합쳐진 구球로 비유한 것이 유명하지요. 아널드가 본래 하나였던 인간들이 서로 떨어져 고독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을 커다란 대륙에서 갈라진 섬으로 비유한 것도 그 이미지와 비유하고자 하는 내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비유의 효과를 더해주지요.
‘끝없는 물의 평원’이 사이에 놓인 채 고독 속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다시 만나기를 그리워하는 고독한 인간의 열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가엾은 열망이라는 것은 이 연의 처음에 이미 언급된 ‘절망 같은 그리움’longing despair이란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누구일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이 불같은 그리움을 절망으로 만들어 버린 존재는? 답은 바로 이어지는 4연에 있습니다.
Who order'd, that their longing's fire 누가 명하였던가, 그들의 그리움의 불길이
Should be, as soon as kindled, cool'd? 불붙자마자 곧 식어버리도록?
Who renders vain their deep desire?-- 누가 그들의 깊은 열망을 헛되게 하는가?-
A God, a God their severance ruled! 운명이, 운명이 그들의 단절을 명하였다네.
And bade betwixt their shores to be 그들의 해안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The unplumbed, salt, estranging sea. 짜디짠, 소외의 바다가 놓이도록 명하였다네.
화자는 묻습니다. 누가 이 불 같은 그리움의 열망을 꺼버린 것일까요? 그 깊은 열망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는 누구일까요? 그는 스스로 답합니다. ‘A God’이라고요. 두 번이나 반복하는 이 존재의 거대한 필연성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면 그냥 ‘God’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앞에 A가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하느님은 아닌데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게 무엇일까요? 신은 아니지만 신과 같은 존재. 그렇습니다.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널드에게 그것은 ‘순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렇게 정해진 그들의 운명, 함께 있을 수 없도록 결정된 운명,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운명이라고 화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슴 아픈 일이군요. 여기에 이 시를 쓴 아널드의 비극이 있습니다.
이쯤에서 아널드가 스위스 여행 중 만났다는 여인, 이 시를 쓰게 한 ‘마가렛’이라 언급된 여인과의 일화를 생각합니다. 처음 이 스위스 시편이 나왔을 때 마가렛은 상상의 여인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932년 아널드가 친구인 클라프Arthur Hugh Clough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가렛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실제 여인으로 밝혀졌지요. 친구와 함께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던 프랑스 여인인 마가렛과 아널드는 1847년 혹은 48년 한 호텔에서 만났는데, 그녀는 명랑한 성격에 “아름다운 푸른 눈과 부드러운 갈색 머릿결”을 하고 있었답니다. 아널드를 만나기 전 이미 몇몇 남성들과 연애 경험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아널드는 그녀와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널드보다 사회적 신분이 낮은 가정교사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이 아널드에게는 결혼으로 이르는 길에 장애가 된 것 같습니다. 이미 자신이 헌신하고자 하는 길에 대한 의식이 명확했던 아널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공적 봉사 임무에 헌신할 공적인 사회적 삶과 한 시대의 ‘교양’을 바로잡을 대학교수이자 비평가로서 도덕적 진지함에 헌신해야 할 자신의 사회적 책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그녀 주변의 환경들에 대해 갈등했고, 결국 1850년 그녀와 결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널드는 이것이 운명, 소위 말하는 ‘운명의 장난’이라 여긴 듯합니다. 왜 그녀는 나와 같은 신분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널드는 그렇게 원망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시 속의 화자는, 다시 말해 시인 아널드는 그들 앞에, 아니 우리 앞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짜디 짠 소외의 바다”(The unplumbed, salt, estranging sea)를 던져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과 같은 명령을 하는 ‘운명’이라는 존재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시 속의 섬들의 단절과 고독이 필연임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현실의 자신과 마가렛의 이별도 운명이 그렇게 정해둔 것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듯합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저는 그런 시의 화자가, 그리고 시인 아널드가 가여웠습니다. 불쌍했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운명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결정은 누가 하는가. 시 속의 화자, 그리고 시인 아널드 자신이 하는 것 아닌가. 운명은 핑계일 뿐 아닌가. 헤어진 뒤에도 그토록 그녀를 잊지 못해 계속 시를 쓰며 그녀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나중에 다른 시들에도 그 미련의 흔적이 남을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자신의 소명과 사회적 신분의 제약이 그리 큰 문제가 되어야 했을까? 결국 시의 화자도 현실의 아널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에 대한 핑계를 운명 탓으로 돌리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절대 고독이 인간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라는 사실이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건 사랑과 관계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이 시에서도 그런 면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마가렛이라는 대상을, 시인인 아널드는 현실의 프랑스 여인을 두고 이야기 하고 있으니 절대 고독과는 또 다른 개인의 선택에 따른 이별의 원인을 ‘운명’으로 돌리는 둘에게 지금은 온전한 호의적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마냥 비난만 하지는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아널드의 한결같은 삶의 태도가 보여주는 확고함은 대단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라고는 하지만 35년 동안의 장학관 생활 동안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영국 중등교육의 중요한 자료들을 확보하고 교육 커리큘럼을 확립한 것은 물론, 비평가로서 문학작품에 대한 실제 비평과 이론 비평을 통해 영국사회에 만연한 ‘속물근성’을 근절하기 위한 ‘교양’ 교육에 헌신한 아널드의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놀드에 대한 사소한 한담을 마지막으로 전해드리며 이 시에 대한 해설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강의 시간에 시 외적인 부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시인이 몇 있는데, 지난 호에 봤던 윌리엄 블레이크,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Lord Byron 그리고 나중에 언젠가는 볼 토마스 스턴 엘리엇Thomas Stern Eliot입니다. 이들의 초상화와 생몰연도 등을 보면서 시인의 생애와 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니다. 아널드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아널드의 생몰연도. 1822년 출생, 1888년 세상을 떴습니다. 66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특이한 점이 보이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아널드는 생몰연도마저 정확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22년, 88년, 그리고 66년. 기억하시죠? 위에서 아널드가 비평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평무사’였다는 사실. 생몰연도마저 놀라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물론 농담입니다. 그러나 가끔 어떤 인물들은 사소한 일마저 그 사람의 삶과 닿아있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 흠칫 놀라기도 합니다. 아널드의 초상화를 잠깐 볼까요?
저기 저 놀라운 5:5 가르마, 보이시지요? 저 수염은 또 어떤가요? 얼굴 자체가 완전한 대칭과 균형을 이루고 있어요. 아널드의 초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저 코입니다. 놀랍도록 크고 곧은 코는 거의 미간에서 바로 직립하여 곧바로 우뚝 솟아있습니다. 동양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관상학적으로 코는, 그렇습니다. 자아ego를 상징하지요. 저런 코를 한 사람과 논쟁해서 그의 뜻을 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널드는 자신이 세운 결심을 꺾지 않았습니다. 35년 장학관 생활을 한 뒤에 스스로 ‘비루한’ 시간이라고 했습니다만 그 시간 내내 그는 자신의 책무와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런 사람이니 자신이 세운 결심을 흐트리는 일은 불가능할 정도일 것이라 봐줄 수도 있습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저는 감정적으로는 워즈워스를 닮고 싶은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시대가 더 요구하는 대로 또 자신이 소명으로 받아들인 대로 비평가이자 교육가로서 삶을 살아야 했던 시인 아널드, 자신의 소명을 위해 어쩌면 평생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여인마저 떠나보낸 인간 아널드의 두 모습이 겹쳐져 자꾸 그의 초상화를 찾아보게 됩니다. 이상 매슈 아널드의 「마가렛에게-이어서」“To Marguerite-Continued”였습니다. 시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To Marguerite-Continued
Matthew Arnold
Yes! in the sea of life enisled,
With echoing straits between us thrown,
Dotting the shoreless watery wild,
We mortal millions live alone.
The islands feel the enclasping flow,
And then their endless bounds they know.
But when the moon their hollows lights,
And they are swept by balms of spring,
And in their glens, on starry nights,
The nightingales divinely sing;
And lovely notes, from shore to shore,
Across the sounds and channels pour--
Oh! then a longing like despair
Is to their farthest caverns sent;
For surely once, they feel, we were
Parts of a single continent!
Now round us spreads the watery plain--
Oh might our marges meet again!
Who order'd, that their longing's fire
Should be, as soon as kindled, cool'd?
Who renders vain their deep desire?--
A God, a God their severance ruled!
And bade betwixt their shores to be
The unplumbed, salt, estranging sea.
마가렛에게 – 이어서
그렇다오! 삶의 바다에 섬이 되어,
메아리치는 해협들을 사이에 두고,
해안 없는 물의 광야를 점점이 수놓으며,
우리 수많은 필멸의 존재들은 홀로 살아간다오.
죄어드는 물결을 느낄 때,
섬들은 끝없는 경계선을 알게 된다오.
그러나 골짜기마다 달빛이 비치고,
봄의 향기가 온 섬들을 휩쓸고
별 빛나는 밤에 계곡에서,
나이팅게일이 아름답게 노래 부를 때면;
그 아름다운 가락이, 해안에서 해안으로
크고 작은 해협을 가로질러 쏟아질 때면--
오! 그러면 절망 같은 그리움이
섬의 가장 먼 동굴까지 번진다오.
예전에는 틀림없이, 섬들이 느끼듯, 우리가
한 대륙의 일부였으니!
지금 우리 주위엔 물의 평원이 펼쳐져 있다오.
아, 우리의 가장자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누가 명하였던가, 그들의 그리움의 불길이
불붙자마자 곧 식어버리도록?
누가 그들의 깊은 열망을 헛되게 하는가?-
운명이, 운명이 그들의 단절을 명하였다네.
그들의 해안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짜디짠, 소외의 바다가 놓이도록 명하였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