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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바위 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들, 포도 넝쿨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잡으라. 우리의 포도 넝쿨에는 부드러운 포도가 있음이라.
14절, 바위 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당신이 숨는 바위가 어떤 바위인가에 따라 좋은 의미일 수도 나쁜 뜻일 수도 있다. 오바댜 3장에서 에돔인들은 그들의 셀라-페트라 바위 요새가 난공불락이라 생각하고 교만에 차 있었다. 그들은 틀렸으며 예레미야 49:16의 유대인들도 틀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숨을 곳을 주신다면 그분은 당신을 올바른 반석에 숨겨주실 것이며 그곳은 안전한 곳이다. 신명기 32:31에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않음을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스스로 판단하는도다." 라 말씀하며, 주께서는 자기 영광을 지나가게 하실 때 모세를 바위 틈에 숨겨서 안전하게 지키셨다(출 33:18-23). 모세는 "오래된 반석"에 있었다. 우리가 부르는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에서는 메마른 땅에서 반석 아래 우리를 숨기시는 주를 노래한다.
모두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는 것이라. 이는 그들이 그들을 따랐던 그 영적 반석에서 나온 것을 마셨음이요. 그 반석은 그리스도셨음이라(고전 10:4).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 3:3).
이로써 우리는 솔 2:14이 믿는 자의 영원한 보장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14절). 이제 우리는 또다시 휴거와 우주의 구조에 대한 참조 구절을 만난다.
창 28:12에서 야곱이 본 것은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였다.
그가 꿈을 꾸었으니, 보라, 사다리가 땅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보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창 28:12)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길 "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 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요 1:51)고 하시더라."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과 주님 사이에는 셋째 하늘로 갈 수 있는 한 순간에 셋째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고전 15:52).
과학자들과 공상과학소설 작가들은 "웜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에너지와 물질을 우주의 한 지점에서 엄청난 거리의 다른 지점을 향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보낼 수 있는 수단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추론 중 하나이다. 웜홀 가설의 원형은 킹제임스성경에서 발견되는데 현대인들은 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으로 오지 않는다.
성경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 "솔로몬이 주의 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자, 그녀 안에 더 이상 정신이 없는지라."(왕상 10:5)
이로써 과학자들이 찾으려 노력하는 초거대 "웜홀"이 그리스도께서 셋째 하늘과 우주를 2시간 안에 오고 가시는 통로임을 알수 있다(요 20:17).
"가파른 산 은밀한 곳"은 어느 시대 누구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성령께서 기록하신 말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셋째 하늘로 올수 있는 통로에 대해 설명하려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에스컬레이터나 엘레베이터라는 말을 쓸 수는 없는데 B.C.1000-A.D.1900년까지 누구도 그런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웜홀"이란 말을 쓴다면 고대 사람들은 그것이 "벌레먹은 사과"란 뜻인가 할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어떤 어려운 것을 설명하실 때는 쉽고 단순한 말로 하신다.
자, 땅에서 셋째 하늘로 갈수 있는 직통 경로가 있다. 모세는 그것을 "사다리"(창 28:12)라 불렀고 솔로몬은 14절에서 "가파른 산"(stairs: 럭크만 박사는 이것을 문자적인 계단이라 받아들이고 있다)이라 불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스스로에게 적용하셨지만 영적인 진리가 그렇다 해서 물리적 사실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길, 혹은 사다리, 계단은 문자적이기도 하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어떤 과학자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여행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마찰 때문이라 했다. 그는 마찰이란 두 물체가 서로 부딛칠 때 항상 생기고 그 마찰력은 물질의 분자 단위까지 내려가 적용되기에 "무한 가속"이 불가능하다 말했다. 그는 "무한가속"이 가능한 유일한 조건은 완벽한 진공 상태인데 우리의 우주는 진공 상태가 아니며, 우주에는 먼지와 여러 물질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그것들이 비행체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비행 속도를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그 과학자는 이런 가정을 해 보라 했다. 주께서 돌아오실 때 그가 당신과 셋째 하늘 사이에 완벽한 진공 상태인 어떤 통로를 조성하신다면, 당신은 흡사 진공 청소기에 훅 빨려올라가는 것 같이, 빛보다 빠르게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 제시했다. 나는 실제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보다 수학 잘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좀 설명해주기 바란다.
14절,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신랑이 신부에게 그녀를 보게 해달라고 청한다. 3장을 보게 되면 신부 또한 신랑을 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이상적인 사랑이다.
신랑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자. 신랑은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을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으로 나아와 그 말씀들을 읽음으로써 주의 얼굴을 뵈올 수 있다.
그러나 유리를 통해 보는 것같이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는 우리 모두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똑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느니라(고후 3:18).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께서 그분의 말씀을 마음판에 믿음으로 새기시도록 공부하면 당신은 매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모되어 갈 수 있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기도"(계 5:8)를 "향으로 가득한 금호리병"이라 묘사하시는데 그 기도는 성전의 제단에서 사르는 향 같은 것이다. 이 질문을 던져 보겠다. "오늘 주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나요?"
허리케인 "카밀"이 멕시코만을 들이쳤을 때(1969) 흑인 두명이 그 일을 다음날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흑인 신자가 담임 목사에게 "저는 어제 밤 참 오랜만에 기도란 걸 했답니다"라고 말하자 목사가 "그래요, 어젯밤에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목소리의 기도들을 많이 들으셨을 것 같네요."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만 기도하려고 하지 말라.
그 다음으로, 14절의 의미는 (휴거 혹은 죽음을 통해서든) 성도를 그리운 고향집으로 부르시는 광경의 묘사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로다."(시 116:15)
주께서 레스터 롤로프 같은 성도는 집으로 일찍 데려가시고 베니 힌 같은 자는 여기 남겨놓는 것에 대해 나는 이런 결론을 얻었다. 그분께서 자기 자녀를 데려가시는 이유는 그를 일찍 보고 싶으셔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감정 또한 주님의 여러분에 대한 감정과 동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사랑의 관계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보다 열악한 여건에 있긴 하다.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지만 여러분은 눈이 가리워진 채 믿음만으로 이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부활 후 도마는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하나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주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또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대어 보고, 나의 손으로 주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않겠노라.”고 하더라."라 말했는데 우리는 도마만 너무 몰아붙이려 해서는 안된다. 도마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주를 직접 뵙기 전까지는 부활을 믿지 못했다(눅 24:11, 36-40).
도마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나의 손을 보고 너의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자 도마는 믿음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그분을 믿었다. 믿음의 성질에 있어서 바울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지만(롬 1:17; 갈 3:11; 히 10:38) 그런 그 자신도 도마와 같은 처지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목도했을 뿐 아니라(고전 15:8)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가기도 했다(고후 12:1-4).
당신이나 나는 바울이나 도마 같은 믿음이 아님을 명심하라. 주께서는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라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너희가 그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벧전 1:8-9)라 언급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보내 이삭의 신붓감 리브카를 데려올 때도 그러했다. 리브카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신랑감과 결혼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리브카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리브카를 불러서 그녀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내가 가겠나이다.” 하더라(창 24:58).
그녀는 어떤 이유로 이삭에 대해 들은지 24시간도 안 되어서 그와 결혼할 결심까지 하게 되었던가?
리브카는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끌고 온 낙타들을 보고 이삭이 재정적으로 탄탄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나 열 대나 되는 벤츠 행렬을 끌고 여행 다니지는 않기 때문이다.(그때 낙타는 벤츠 자동차 같은 것이다) 그녀가 엘리에셀을 집으로 인도했을 때 그는 그녀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들을 내 놓았다. 그녀는 이삭이 "베풀 줄 아는 사람"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에셀은 주인의 심부름을 마칠 때까지 먹지 않았다. 그녀는 엘리에셀의 주인이 육신적인 사람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리브카는 이삭이 선한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 엘리에셀이 식탁에 앉아 줄곧 주인에 대해 칭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엘리에셀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이삭은 또한 영적인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리브카는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때 이삭이라는 남자가 부유하고 관대하며 이타적이고 탐욕스럽지 않은 데다, 좋은 성품을 가진 데 더해서 영적인 청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아버지와 형제들이 엘리에셀과 함께 가겠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엘리에셀에게서 미루어 보여지는 그 주인 이삭과, 자기 고향 청년들을 비교해 본 후 인생 전부를 걸고 이삭에게로 가는 모험을 택한 것이다.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도 그러하다. 우리 중 누구도 그분을 본적이 없으나 나는 본 적 없는 그분에 대해 62년간 자랑해 왔다. 그러나 나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니,(히 11:1)
나는 누가 그 증거를 알려주었는지 알고 있다. 나는 주인의 종인 성령을 만났고 그 종이 내게 준 선물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내게 변화된 인생만 선물한 것이 아니라 밴드에서 드럼치는 디스크자키이며 간음하는 주정뱅이였던 그 사람을 정결하게 만들어서 복음 전도자의 자리로 부르셨다. 당신은 변화에 대해 말하고 싶을지 모르는데 형제여, 그것이 온전한 선물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미친 거나 다름없다. 내가 스스로 죽을만큼 노력했다 해도 내가 경험한 엄청난 변화를 스스로 가져오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주인의 종은 내게 주인의 책을 선물했는데 그 책에는 시종일관 그의 주인에 대한 찬사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주인이 아주 부자란 것을 알았고, 그분이 관대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주인이 선한 분인 것을 알았다. 성령께서 그의 주인에 대해 기록하신 말씀을 보고 나는 주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그분의 종이 되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그분은 나의 옛 주인 마귀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 고 물으실 때 나는 "저 가겠습니다. 즉시 떠나겠습니다. 이 쓰레기 난장판을 떠나서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라 대답했다.
이런 나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에서 최고로 기대하는 순간은 그분을 친히 보는 때이다. 그 외의 다른 일들은 내게 시시한 일이다. 물론 그곳 하늘에 가면 모든 것이 다 놀라울 테지만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만큼 기대되지는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주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오래 기다리게 두시고 우리가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다. 그러나 종종 마귀가 개입해서 우리 안의 육신을 발동시킨다. 우리 육신은 성경을 의심하게 만들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나는 주님께서 속히 오셔서 사탄의 입을 닥치게 해 주시고, 또 나를 믿음에서 떨어뜨리려 애쓰는 이 육신을 새것으로 갈아입혀 주시기를 소원한다. 나는 그것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 내가 네게 말했었지. 그분이 맞았어. 나는 1949년 이래로 항상 그분에 대해 말해 왔었는데,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너는 내게 성경이 단지 동화책이라 말했지만 네가 틀렸어."
14절,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주께서 구원받은 죄인을 자랑하시는 장면이다. 사람 편에서 주를 자랑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것이 "경배"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자랑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뭐라 해야 할지 묘사하기 힘들다. 그러나 주께서는 구원받은 자녀들을 자랑하신다고 써 있다. 주께서 욥을 너무 자랑하셨기에 사탄은 하나님께 도전했다(욥 1:8-11). 주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약 2:23)라 부르셨고, 모세를 자랑하시기를 "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했다"(히 3:2)고 하신다.
내가 감히 말하건데 주께서는 우리들을 자랑하신다. 당신이 정직하게 행동하고 주를 잘 섬기면 저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주께서는 당신을 자랑하시고 사탄은 그런 당신을 욥의 경우같이 각별히 유의해서 지켜본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랑을 꺾어놓고 싶어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내 친구들과 학생들을 그렇게 많이 자랑하지 않는다. 사실 더 칭찬하고 싶지만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사람에게 뭔가 불운이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입을 닫고 만다.
나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사역하는 "웰든 존스" 형제에 대해 많이 자랑했었다. 그는 내가 브랜트 침례교회에서 사역할 때 PBI로 왔는데 이 친구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일 뿐 아니라 능숙한 전도자였다. 그는 R 발음을 정확하게 내지 못하는 언어 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어를 학습하기 시작하자 R 발음 핸디캡은 그에게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어에서 R 발음은 영어와 발성이 틀리다. 이 친구는 멕시코인보다 스페인어를 더 그럴싸하게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선교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직업을 얻은 후에 몇 개의 교회를 세우고 목사들을 훈련시켰다. 산 속에서 십대를 위한 성경 캠프를 시작했고 멕시코에 선교를 훈련하러 가는 젊은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일도 한다. 그는 그곳에 모임들을 주선하고 나를 초청해서 직접 전담 통역자로서 나를 섬긴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통역사 중의 하나다. 우리 사역이 배출한 최상의 열매 중의 하나가 그 형제이다.
한번은 그가 십대 청소년들을 태우고 버스를 몰고 산길을 가는데 갑자기 트럭 한대가 차선을 침범해 들어왔다. 트럭과의 충돌은 겨우 피했지만 버스가 심히 망가졌고 그럼에도 웰든 형제의 재빠른 대처로 버스에 탄 승객 중 남녀 청소년 둘만 목숨을 잃었다. 트럭과 정면 충돌했다면 버스에 탄 전부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이 내가 아이다호 보이시 시에서 사역하는 "릭 데미켈레" 형제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할 때 일어났다. 그는 PBI 졸업생인데 그가 Boise로 갔을 때 주께서 그의 사역을 축복하셔서 그의 교회는 아이다호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와 그의 사역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하자 그는 백혈병이 발병했다.
그런저런 일들 때문에, 나는 내 학생들에 대해서 되도록 자랑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사역을 모르거나 고맙다 생각하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는 그들이 별탈 없이 오래 사역하기를 바란다.
주께서 우리를 자랑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주께서는 우리가 주의 일을 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는 데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주께서 당신을 자랑하고 싶어할 만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가?
2) 사탄에 대해 자만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희화화시키거나 우습게 여길 상대가 아니다. 은사주의자들처럼 사탄을 놀려먹겠다고 미친 짓들을 하고 다니지 말라.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사탄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알려준다. 사탄은 경솔하게 대처할 상대가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니라(벧전 5:8).
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들, 포도 넝쿨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잡으라. 우리의 포도 넝쿨에는 부드러운 포도가 있음이라.
"잡으라"(take)는 단어는 포획하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게임이나 격투기에서 지금도 쓰는 말이다. 한편이 다른 편을 "take on"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물론 그들이 상대편을 붙들어서 어디로 데려간다는 말은 아니다. 경쟁이나 싸움에서 상대를 패배시키겠다는 말이다.
15절의 포도원은 신부의 것이며(솔 1:6, 8:12) 그러나 "우리의 포도원"이라 말하고 있는데 물론 2장에서의 화자는 솔로몬과 신부, 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포도원은 그녀의 것이지만 솔로몬이 그녀에게 준 것이라 볼 수 있다(4-5절에 근거해서).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각각의 크리스찬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포도원이 있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그 포도원에서 열매가 나기를 기대하시며(요 15:2-8) 그 열매들은 갈라디아 5장에 명시되어 있다. 갈라디아 5:22-23에서 "성령의 열매(단수)"라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실제로는 아홉가지 열매들이다. 즉 성령의 열매는 포도알과 포도송이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포도가 잘 열매맺게 하기 위해 그녀는 "포도 넝쿨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잡으라"는 경고를 받는다. 왜 "작은 여우들"일까? 작은 여우들은 포도원의 개구멍이나 담장 틈새로 기어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머가 있다. "당신은 코끼리는 피할 수 있지만 파리는 피할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큰 문제를 다룰 때보다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더 골머리를 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손톱의 작은 상처가 파상풍을 일으킬 수 있다. 작은 모기가 옮기는 병균이 황열병이나 말라리아를 퍼뜨릴 수 있다. 벼룩과 쥐들은 흑사병을 퍼뜨려 중세 시대에 많은 사람을 죽였다.
설교자들이 곧잘 인용하는 예화로서, 캘리포니아의 500년 묵은 레드우드가 하루아침에 쓰러진 이유에 관한 설명이 있다. 그 나무는 500번의 여름과 겨울을 거친 노장이며 산불과 눈사태, 벼락, 지진, 산사태를 견뎌 왔었다. 공원 관리인들이 나무가 쓰러진 이유를 조사하자 나무 안에서 벌레들이 파먹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외부에서 닥치는 게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그리스도인들은 겉을 가다듬고 깨끗하게 살려 하는데 안을 돌보지 않는다. 그들은 술마시고, 담배피고, 춤추러 가기, 영화관 가는 일, 나쁜 친구를 사귀는 일을 포기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도 멈춰 버린다. 그들은 혼을 구령하는 열정을 잊어버리고 주와 교제하는 법도 잊는다. 그것이 당신의 포도송이들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이다.
성경에서 여우가 사람을 상징할 경우에 두가지 부류에 적용된다.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 자신의 영을 따르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지자들에게 화가 있도다!
오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사막에 있는 여우들 같으니라(겔 13:3-4).
누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게 없으면서 짐짓 받은 체 하면 그들은 여우 같은 자들이라 불린다. 모든 은사주의자들이 여기에 포함되며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떠벌린 마이클 루터 킹 주니어도 그렇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문에서 자기가 더 우월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대학 교수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기와 똑같은 들나귀들을 복제해서 퍼뜨린다(이렇게 언급함에 있어 나는 들판에 있는 네발 짐승들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부정직한 회의론자인 헤롯왕을(눅 13:31-32) 여우로 비유하셨다. 연방정부에 포진한 모든 무신론, 불가지론, 진화론, 인본주의자들은 여우과에 속한다. 솔론에서 빅터 프랑클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자들, 찰스 다윈의 뒤를 잇는 모든 과학자들도 그러하다.
이 두 정의가 정확하다면, 읽기, 쓰기, 산술, 그 외 모든 교육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적용하는 데서 벗어나 있다면 그 교육은 학생들이 현재 살고 있거나 앞으로 살게 될 영적인 삶을 망치는 것들이다.
그것이 세상 교육이건 "기독교 학교"의 교육이건 간에, 사탄은 고등 교육 체계를 통해 사람들이 가장 황량하고 열매없는 삶을 살도록 만든다.
2:16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요, 나는 그의 것이니 그가 백합꽃들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도다.
2:17 날이 밝고 그림자가 사라지면 돌아오소서,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은 벧엘 산 위의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16절 앞에 단락구분 표시를 했는데 이는 화자가 또 바뀌기 때문이다. 신부가 신랑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16절,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요, 나는 그의 것이니
이것은 성도의 그리스도의 관계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값주고 사셨고(고전 6:20) 동시에 그리스도는 당신께 속해 있다.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곧 영광의 소망이라."(골 1:27)고 언급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바울은 "아내가 자기 몸을 주관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관하며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주관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관하느니라."(고전 7:4) 고 말했다.
결혼 관계에서 아내가 남편을 소유하고 남편은 아내를 소유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신부를 소유하시고 신부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관계이다.
그가 백합꽃들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도다.
내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의 뜻을 확실히 입증할 관주가 없기에 나는 잘 모르겠다.
(역자 주: 럭크만 박사는 16절의 feed를 "(양떼를) 먹이다"가 아닌 자동사인 "먹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적용하는 것도 가능한 용법이며 그렇다면 이 구절은 "그가 백합꽃들 가운데서 무언가 먹는도다"가 될 것이다)
솔 4:5에서 사슴들에 대해 "백합꽃들 가운데서 꼴을 먹는"이라 말씀하고 있기에 백합꽃은 사슴들이 풀을 뜯는 초장에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4:5은 신부에 대한 묘사이며 신랑이 아니다. 그러나 2:16과 6:3에서는 반복해서 신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솔 5:13에서 신랑의 입술은 백합꽃 같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그 묘사와 16절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솔 6:2에서 신랑은 그의 동산으로 가서 백합꽃을 수확한다. 그것이 본 16절의 의미와 더 연관이 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 이미 2:1에서 주님 자신이 "골짜기들의 백합화"라 말씀하셨기에 백합꽃 가운데서 먹거나 거둔다는 말을 정확히 알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 자신은 영이시기에 배고픔으로 인해 먹을 필요가 없다(요 4:24). 시 50:12에서 주님은 비꼬는 말로 "내가 설령 굶주릴지라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이는 세상과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라 하시는데 50:13에서는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라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신다. 당연히 그러실 필요가 없다.
주께서 성육신하신 상태에서도 주께서는 누군가에게 음식을 달라거나 배고픔을 채워달라고 요청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4장에서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수칼 성읍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요 4:8,31) 주께서는 물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이 있느니라.”...“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요 4:32,34)
막 6:38에서 주님은 5천명을 먹이실 때 제자들에게 “빵이 몇 덩어리나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군중이 먹을 빵은 커녕 주님 자신이 드실 것도 없었다. 이때 행하신 기적에 대해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 역시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고 하셨다. 다시 한번 주께서는 육신으로 와서 계신 동안에도 음식에 의존하는 대신 아버지와의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을 지탱하셨음을 보여주셨다.
주께서 시장하셨다고 언급한 구절이 딱 하나 있는데 그때도 주께서는 음식을 달라 청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창조하신 무화과나무에서 찾으려 하셨다. 거기에 열매가 없자 주께서는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막 11:12-14).
그 사건을 통해 주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막 11:20-24).
부활하신 후에 주께서는 두번 음식을 달라 하셨는데 한번은 눅 24:41에서 방에 모여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였고 구운 생선 한 토막과 벌집을 드셨다(눅 24:42-43). 그것은 주께서 진정 배가 고파 드신 게 아니라 주님의 육체적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하신 일이다.
주께서 음식을 달라 하신 마지막 요청은 요 21:5에 나온다. 이때도 주께서는 배고픔 때문에 달라 하신 게 아니다. 부활하신 주의 몸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몸이 아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를 믿게 하기 위해 요청하신 것이고 그때 주께서는 엄청난 고기를 낚는 두번째 이적을 행하셨다. 제자들이 그 생선과 빵을 배불리 먹은 것은 분명하지만 주께서 친히 드셨다는 말은 없다.
앞으로 주께서는 신부를 위해 하늘에서 성대한 결혼피로연을 여실 것이고 그것이 어린양의 혼인잔치(계 19:7)인데 심지어 거기서도 주께서는 음식을 드시는 대신 주를 신실하게 섬겼던 성도들을 섬기고 계실 것이다(눅 12:37).
그 주인이 띠를 두르고 식사를 위해 그들을 앉힌 후, 곁에 와서 그들에게 시중들리라(눅 12:37).
말하자면 주께서 드시는 음식은 따로 정해져 있는데, 그것은 "그의 성도들과의 영적 교제"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이것이 내가 솔 2:16의 "feeding" 대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다.
여러분은 솔 1:7에서의 방식과 같이 16절의 feed를 "양떼를 먹인다"라고 적용할 수도 있다. 거기서는 신랑이 신부인 양떼를 먹이시는 것으로 나온다. 신부는 4:5에서 쌍둥이 노루가 먹듯이 백합꽃 가운데서 먹는다.
2:1에서 백합화는 그리스도 자신에 적용되었고 2절에서는 교회에 적용되었다. 그렇다면 16절은 서로가 서로를 먹여준다는 말일 가능성도 있다.
17절은 16절보다 해석하기 용이하다.
"날이 밝고" 이것은 재림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벧후 1:19)라 언급한다.
"그림자가 사라지면" 이것은 현 시대가 밤인 것을 뜻한다. 시편 기자는 "밤새도록 울음이 지속될지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라 노래한다. 기쁨이 오는 아침은 대환란 끝, 재림의 날이다.
"당신은 벧엘 산 위의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8-9절의 "휴거" 교리를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17절은 신부가 신랑에게 휴거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다. 환란과 지상재림이 있기 전에 신랑이 오셔서 자신을 취해가기를 바라는 신부의 기도이며, 성경의 마지막 기도 내용이기도 하다. 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요청하는 기도다.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벧엘 산"은 주님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다. 솔로몬 시대의 지도에는 그 위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Bether"의 의미는 "구획", "격리"가 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재림을 묘사할 때 항상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기에(솔 2:8) 솔 4:8로 가 보자.
나의 신부야, 레바논으로부터 나와 함께 가자. 레바논으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의 정상(산이다)에서, 스닐과 헤르몬의 정상(또 산이다)에서, 사자들의 굴들에서, 표범들의 산들에서 바라보아라(솔 4:8).
성경에서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 근거해 살펴볼 때 이런 산들은 하늘에 있는 산들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과,(히 12:22)
주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도성과 그의 거룩한 산에서 크게 찬양받으시리로다.
북편에 있는 위대한 왕의 도성 시온 산은 그 자리잡은 곳이 아름다우며 온 땅의 기쁨이니(시 48:1-2)
이 구절들은 땅의 예루살렘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북편에 있는"은 땅의 예루살렘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땅의 북쪽이 아닌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윗이 도읍을 정한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서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북편에 있는" 장소는 루시퍼가 올라가려고 애썼던 곳이며 그곳에서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사 14:14) 되려 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느냐!
이는 네가 네 마음속에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가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사 14:12-13).
그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 별들보다 높이 있다. 구절의 나머지를 살펴보라. "회중의 산"이 어디인가? 셋째 하늘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면 나침반을 가져오라. 바늘이 가리키는 북쪽이 그 방향이다. 당신이 외부 우주로 나가 북쪽을 향해 계속 올라가면 "깊음"과 "유리 바다"를 만날 것이며 마침내 새 예루살렘과 하늘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산을 만날 것이다. 그 산의 정상은 이미 알겠지만 피라미드 형상처럼 생겼다.
3:1 내가 밤에 내 침상에서 내 혼이 사랑하는 그를 찾았도다. 내가 그를 찾았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2 내가 이제 일어나서 성읍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내 혼이 사랑하는 그를 넓은 길에서 찾으리니, 내가 그를 찾았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3 성읍을 순찰하는 파수꾼들을 만나, 내가 그들에게 묻기를 “당신들은 내 혼이 사랑하는 그를 보았는가?” 하였는데,
3:4 내가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내 혼이 사랑하는 그를 만났으니, 내가 그를 붙들고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그를 데려올 때까지 놓지 아니하였도다.
3:5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의 암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2:8-14에서 휴거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3장은 신부가 말하는 파트로 시작된다. 만일 이 책이 어떤 예언적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면 3장에서 필시 우리는 "대환란"을 만나게 될 것이다.
1절에서 "밤에"는 대환란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3장이 대환란의 그림인 것은 분명하며 6절에 나오는 "광야에서 오는 이"는 다윗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장면은 재림이다(시 68:7). 그분은 "연기 기둥"(6절)과 함께 오시는데 군대가 그를 호위한다(7-8절).
따라서 2장과 3장은 전천년주의에 따른 시간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솔로몬의 노래가 주전 1,000년 경에 기록되었음에도 이런 놀라운 계시를 담고 있다. 2장은 휴거였고 3장은 1-5절까지 대환란을 묘사한다. 3장 6-10은 재림 단락이다. 11절에서는 유대인 남은 자들이 재림 무렵에 회심하고 있다(슼 12:10-14). 아직 충분치 않다면 11절 말미에서는 재림 전에 있을 어린양의 혼인식을 묘사하고 있다(계 19장 참조).
이런 현상이 성경에서는 여러번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증거는 역대기하에서 시편까지 구약 성경들이 배열된 순서이다. 역대기하에서 유대인들은 본토에서 추방되는데 이는 A.D.70년에 그렇게 된 것에 대칭된다. 유대인들이 귀환하는 것은 그들이 1918-1948년에 그렇게 된 것과 같다.
에스더서에서 이방인 신부가 쫓겨난 후 유대인 신부가 왕비로 등극한다. 에스더서는 왕궁의 혼인 잔치로 시작되며(계 19:7-9) 이 책의 주제는 사탄이 유대인들을 쓸어버리려 노력하는 그 일(계 12장)과 연관되어 있다.
욥기에서 욥은 42장 동안 땅에서 박해받는데 유대인들은 대환란 때 땅에서 42개월 간 고난받을 것이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욥의 포로된 것을 돌이킴으로 끝나며 그것은 대환란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는 것과 같다.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묘사하고 있다(시 2,21,24,45,47,48,50 등).
반면 유대인들이 보는 히브리어 성경은 말라키 대신 역대기하로 끝나는데(마 23:35)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경 끝에서 발견하는 말은 "그 민족이 본토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당신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의 여타 저작물들을 보면 전천년주의 사상을 찾을 수 없을 것인데 이는 그들이 뛰어난 학자들이었고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신실하게 성경을 번역했음에도 신학적으로는 그 학자들이 무천년 혹은 후천년주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 본문은 그 번역자들과 교열자들의 신학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이는 현대 역본들이 킹제임스 성경과 불일치하는 것과 같다.
킹제임스 성경의 책들이 전천년적 순서로 배열된 것과 같이 솔로몬의 노래 2장도 "향상된 계시"에 의하면 전천년 순서이다. 어떤 자필 원본을 통해서도 이런 진리가 알려지지 않았으며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서만 조명된다.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학자들은 이것을 "이단"이라고 부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400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이 그리스도의 몸에게 지난 3000년 동안의 어떤 "자필 원본", "원문", "원어"보다 많은 진리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국적, 혹은 세계적 부흥을 위해 구약 히브리어 성경과 신약 헬라어 성경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것들이 A.D.1세기 말엽에 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른 어떤 역본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사역으로 불러 쓰임받게 했고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은 죄인들을 구원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두려워할 필요 없는 한가지는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제시하는 "럭크만의 향상된 계시"다.
1절, 내가 밤에 내 침상에서 내 혼이 사랑하는 그를 찾았도다.
실제적 부부간의 사랑에 있어서 여인의 소원은 자신의 연인, 혹은 남편이 여인을 보고 싶어 찾는 것이다. 교회를 여인의 자리에 대입해 보면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녀가 1:7-8에서 그랬던 것 같이 신랑을 찾고 있다. 그러나 1절 하반절에서는 한가지 문제가 드러난다.
내가 그를 찾았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실제 결혼한 부부에 적용하자면, 한밤중에 잠에서 깬 아내가 남편이 사라진 것을 알고 집을 돌아다니며 찾지만 발견하지 못한 것과 같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교리적으로 어떻게 교회에 적용해야 하는지 난감할 것이다. 당신이 거듭난 성도라면 찾고자 하는 대로 바로 주를 찾을 수 있다. 주님은 자기 성도를 저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24시간 내내 주님과 연락할 수 있다. 기도 가운데서 그렇게 할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히 4:16).
내가 기도로 주를 만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비서를 통해 번거로운 약속을 잡을 필요가 없다. 나는 성 베드로나 마리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축복받은 요셉" 혹은 "축복받은 침례인 요한"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곧장 왕좌로 가서 왕을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찾으려" 할 필요가 없다. 구원받을 때 그는 주를 찾은 것이며 구원받은 사람 안에 주께서는 성령으로 거하고 계신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곧 영광의 소망"(골 1:27)이며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가 그들 안에,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은 그들을 하나로 온전하게 하셔서"(요 17:23)
내가 그리스도를 찾았던 때는 1949년 3월 14일이었고 그날 이후 한번도 그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롬 8:35-39).
다만, 본문은 현 시대 크리스챤들에게 생활면에서 적용 가능하다. 사도행전 2장 이후 지금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볼 수 없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이 시대에는 더 복되다(요 20:29). 어떤 그리스도인도 보고 믿지 못하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찾는다"는 것은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에 있는 집에 거할 때 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자신에 차 있으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
우리가 자신에 차 있으니 정녕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오히려 더 원하노라(고후 5:6-8).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만 물리적으로는 그분과 동떨어져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는 여기 땅 위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그의 혼은 썩어가는 몸 안에서 잠자는 것도 아니고 무덤에 머물지도 않는다(여호와의 증인들). 우리를 위해 하늘의 몸이 준비되어 있다.
2절, 내가 이제 일어나서 성읍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내 혼이 사랑하는 그를 넓은 길에서 찾으리니, 내가 그를 찾았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물론, 그녀가 신랑을 찾지 못한 이유는 찾는 곳이 틀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길거리에서 발견한다면, 당신이 거기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당신을 찾으려고 누군가를 길거리로 파송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대로와 산간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눅 14:23).
나는 휴 파일 목사가 나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전날 밤의 일들을 기억한다. 나는 비 내리는 펜사콜라 도심을 여기저기 헤집고 달리며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나는 어느 감리교회에 들어갔고 그곳 강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주여, 저는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저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뒤에 있는 방에서는 성가대가 연습 중이었고 예배실에는 아무도 나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날까지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채였는데 그때 어느 말라빠진 볼품없는 침례교 설교자 하나가 내가 일하던 라디오 방송국을 방문했다. 나는 구원받기 전 수많은 인파들 속에,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맞이한 어느 새해첫날 저녁을 기억한다. 아무도 나에게 증거하지 않고 전도지를 주지도 않았다.
형제들, 미국의 길거리와 골목길들에는 문자 그대로 수백만의 잃어버린 혼들이 구원을 찾으며 방황하고 있다. 당신이 가서 그 방법을 알려줄 때까지 그들은 찾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PBI의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거리 설교에 내보내는 것이다. 모든 지역 사회들마다 복음증거자들이 지속적으로 사역하면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거리설교에 대해 형제들이 제기하는 가장 흔한 불만은 그것이 효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즌 제한을 두지 않고(이제 매년 4-9월 사이만 설교함) 설교한 장소들마다 최소 수십명씩은 구령했었다. 형제들이 "거리설교가 효과 없다"고 하는 말은 그것에 참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늘지 않고 있다는 말일 뿐이다.
2절, 그를 넓은 길에서 찾으리니, 내가 그를 찾았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광대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소하여 그것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넓은 길은 다수가 선택하고 가는 길이며 잘못된 길이다. 넓은 길은 너무 광대해서 부처, 모하메드, 알라, 교황들, 여호와의 증인들, 몰몬교도, 자유주의 개신교인, 무신론자, 인본주의자, 불가지론자, 사탄숭배자 등이 돌아다니는 길이다.
그 길을 가다 보면 그 잘난 자들 중에는 자기 추종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길은 너무 좁아서 그것은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곳은 너무 협소해서 그분을 만나려면 지정된 한 장소, 갈보리로 가야 한다. 그길은 너무 좁기에 믿음으로 그분을 통해 걷지 않으면 당신은 "도둑과 강도"(요 10:1)로 간주되어 내쳐질 것이다.
본문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해석이 더 어려워진다.(나는 성경의 모든 것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나는 학자가 아니라 성경 학도이다)
2-3절을 해석하는 두 방식이 있는데 첫째는 신부를 환란기의 이스라엘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2절 때문인데 거기서 "찾으나 찾지 못한다"는 문맥은 호 5:6과 통한다.
그들이 주를 찾아서 그들의 양떼와 그들의 소떼와 함께 가겠으나 그들이 그를 만나지 못하리니, 주께서 그들로부터 물러나셨음이니라(호 5:6).
이것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상태와 같다. 그들은 메시야를 거절하고 빌라도에게 말했다 "모든 백성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더라(마 27:25).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셨는데 그들은 또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민족적으로 거부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면서 말을 마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고 하더라."(행 28:28)
A.D.70년 이래로 유대인들은 계속 민족적으로 주를 찾고 있으나 찾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분은 하늘로 귀환하셨고 1948년까지는 유대인들과 민족으로서 상대하지 않으셨다. 그때도 이스라엘의 본토 귀환과 물리적 회복만 일어났을 뿐이다.
당신은 트레블링카, 아우슈비츠, 벨젠-벨젠, 그 외의 수용소들에서 랍비들이 시편을 읽으면서 거기 나온 약속들을 주장했던 것을 아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기도는 거부되었다. 미국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6백만 명이 죽도록 주께서 허용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무신론자들이다.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고 주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대로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카이사를 왕으로 삼으셨고(히틀러도 로마 카톨릭이 인정한 지배자였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핏값을 지불하게 하셨다. 주께서는 그 유대인들의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거절하셨다(요 19:15; 마 27:25).
3절에서 "파수꾼들"이 등장한다. 에스겔서의 대환란 묘사에도 "파수꾼들"이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집에게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내 입에 있는 말을 듣고 내게서 나오는 경고를 그들에게 주라"(겔 3:17). 해당 문맥은 대환란이다(겔 3:1-3, 계 10:9-10 참조).
두마에 대한 엄중한 말씀이라. 그가 세일 산에서 나를 부르시기를 “파수꾼아,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아,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시니
파수꾼이 말하기를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이다.” 하였도다. 너희가 물으려거든 물을지니 돌아오라, 오라)사 21:11-12).
여기서도 문맥은 대환란에 대한 것이다(사 21:9 계 18:2 참조)
3절에서는 그녀가 파수꾼들에게 묻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4절에서 신부는 신랑 찾기를 포기한다. 그러나 5:7에서 두번째로 파수꾼들과 마주칠 때는 다른 일이 일어난다.
성읍을 돌아다니는 파수꾼들이 나를 발견하더니 나를 쳐서 상처를 입혔으며 성벽을 지키는 자들은 내게서 나의 너울을 빼앗아 갔도다(솔 5:7).
파수꾼들의 여인에 대한 태도에 있어 변화가 생겼다. 3장에서는 그냥 내버려두다가 5장에서는 그녀를 때린다. 이것을 "세대주의적 관점"으로 보자면 여인은 환란기 유대인의 처지와 같다. 전3년 반 동안은 상대적으로 평화롭기에 그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으려 애쓴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대환란 중간에 적그리스도가 유대인들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희생제를 금지시키며 핍박하기 시작한다. 후3년 반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찾고자 한다면 생명의 위협이 있다.
이 해석은 약간 설득력 있지만 이렇게 보려면 여인을 이스라엘로 해석해야만 한다. 물론 그 해석은 자체적으로 결함이 있다.
첫째 문제는 파수꾼들은 에스겔처럼 대환란 때의 증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파수꾼들은 신부가 신랑을 찾는데 알려주지 않는가 말이다. 당신은 계 11장의 두 증인들이나 계 7장의 유대인 전도자 144,000명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는지 알려줄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가? 또 3장과 5:7의 파수꾼이 같다면 왜 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는가?
이제 알 것이다. 교리에 맞춰서 대충 끼워맞춘다 해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본문에는 성령께서 분명히 알려주지 않으신 많은 것들이 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로 보기 어려운 또다른 이유는 그녀가 1:5, 2:7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예루살렘의 딸들"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5절).
좋다. 이 여인이 정말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라면 이 단락에 적용할 수 있는 해석은 거의 영적인 것밖에 남지 않는다. 이 구절들을 교리적으로 맞추고자 하면 거의 빗나가고 말 것이다. 이제 여인이 교회라고 믿고 살펴보면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절, 내가 밤에 내 침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에 휴식을 취하는 때가 아니기 때문에 첫 단락부터 혼란스럽다. 그러나 영적 적용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에서 쉬신 것같이 그도 자기 일에서 쉬었느니라."(히 4:10) 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자(살전 5:6)." 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이 어둠의 시대에 우리는 깨어서 주변을 경계하고, 활동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고 하셨느니라(엡 5:14).
이 구절의 전달 메시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이 자지 말고 일어나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말이다.
3:1-2의 영적인 투영은 이렇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친교와 소통을 회복하기 위해 일어나 이리저리 주를 찾는데 "넓은 길"에서는 찾지 못한다. "넓은 길"에서 죄인들을 찾아 구령할 수는 있지만 그곳 자체에 주님과의 교제는 없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려면 먼저 TV와 라디오를 끄고 혼자 떨어져서 성경을 펴고 "귀한 약속들"을 찾아 그것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 신중한 작업은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는 러시아워 차 안에서나 쇼핑몰, 야구장에서는 하기 어렵다.
3절의 "파수꾼들"은 깨어있는 크리스챤들일 수 있다. 본문은 그들이 여인에게 신랑이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알려줬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니 파수꾼들을 지나치자마자 여인은 신랑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인 적용의 일부이며 주석가들은 이렇게 가르친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설교 재료이며 교리적으로 논박할 필요도 없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다시 찾아서 목숨을 다해 그를 섬긴다. 그는 다시 부주의하게 되어서 주를 잃어버리고 헤매지 않을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게 되며 교리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는 잃어버릴 수 있으며 그럴 경우 무릎을 꿇고 마음을 열어 죄들을 고백하며 자기 성찰을 한 후 올바로 살면 된다.
4절, 내가 그를 붙들고...놓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은 야곱이 주의 천사를 붙들고 놓지 않았던 장면과 유사하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고 싶다면 야곱처럼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것을 "끈질김"이라 부르시는데 이에 대해서는 눅 11:5-10의 "끈질긴 친구", 눅 18:1-8에서 "불의한 재판관"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의 초점은 주님은 잠자리에 든 친구나 불의한 재판관 같은 분이 아니고 당신을 사랑하시기에 당신이 찾으려고만 하면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 찾았으면 그분을 다시 보내지 말라.
4절로 돌아와서,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그를 데려올 때까지" 를 살펴보자.
"어머니의 방"은 명백히 새 예루살렘의 예표이다. 성모 마리아의 품이 아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우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 4:26).
성경에 의하면 남자는 "씨를 주고", 여인은 "임신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낳으시고 새 예루살렘은 여인처럼 잉태한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한다. 성경에는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 투성이이다. 남자 성도가 어떻게 여자인 신부가 되어 그리스도와 혼인하는가? 게다가 남자건 여자건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아들들과 어떻게 결혼하시는가?
새 예루살렘은 4절에 의하면 우리의 어머니가 되는데 그러나 그 도성은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이기도 하다(히 12:22-24). 또한 그 도성은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신부 자체로도 묘사된다(계 21:2). 당신은 정직하게 이 모든 말을 이해한다고 하겠는가? 나도 다 알지 못한다.
당신이 셋째 하늘에 가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성경에 있다. "더 분명한 번역", "최신 현대 역본",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경이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지나치게 질긴 음식이라 해서 뱉어 버리지 말라.
다시 4절로 돌아와서, 1:4에서 왕이 여인을 그의 침실로 데려왔던 데 반해 여기서는 그녀가 그를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온다.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잘 모르겠다".
5절은 2:7의 반복으로서 휴거를 소원하는 기도이다. 그녀는 자신을 "예루살렘의 딸들"과 구분하기에 이 여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제 2-3장의 개요를 다시 정리해 보면, 2장에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휴거되었었고 3장에서 대환란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사실 3장의 여인은 교회여서는 안되지만, 살펴보면 이스라엘 역시 아니다.
계시록 7:9-17에서 대환란 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환란 성도들인 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대환란 때 구원받는 셀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있다. 나는 그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열심히 찾을 것이라 믿는다. 복음서에 보면 마 8:5의 백부장, 막 7:25-26의 수로페니키아 여인, 유월절에 주를 찾아온 그리스인들(요 12:20-21) 같은 "주를 찾는 이방인들"이 있다.
대환란 끝무렵에 환란후휴거가 있게 될텐데 그 휴거는 두 무리의 성도들이 참여한다. 유대인 환란 성도들과 이방인 환란 성도들인데 그렇다면 5절의 의미가 이방인 환란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들에게 주를 깨우지 말고 오실 때까지 잠잠히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인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여, 천천히 때가 되면 알아서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솔로몬의 노래 3:5과 같이 드리는 기도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환란기 때 이방인들의 구원에 있어서 환란후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하는 사건은 딱 하나이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한다. "그리하여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 가운데 선포되어야만 하리라(막 13:10)"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이 아닌 왕국 복음(마 24:14)이다. 그렇다면 이방인 환란성도들이 유대인들에게 환란 때의 왕국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기 전까지 주를 흔들어 깨우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인가? 만일 이 설명도 틀린 것이라면 나는 더 말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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