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제목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글을 쓰는데 제목이 미리 정해진 때와 마음대로 골라서 쓰는 자유제(自由題)의 경우에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미리 제목을 받아서 쓰는 경우가 더 수월한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치도 않는 말이라고 핀잔을 맞을 일인지도 모른다.
제한된 소재와 제목보다는 주변의 많은 소재들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서 쓰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아마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는 물건을 곧잘 사는데 호화스러운 백화점에서는 그대로 빈손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살 물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을 때 도리어 사기가 어려운 경우라고나 할까?
이번에 내가 청탁을 받은 것도 제목은 따로 정하지 않고 원고지 10장 정도의 수필이다. 글의 길이는 별 것이 아니라 하더라고 날짜가 별로 여유가 없다. 마감날짜까지의 며칠 동안 공교롭게도 나는 어떤 불가피한 일과 중복이 되어 있다.
불가피한 일이란 서울에서 며칠 동안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일이다. 나는 마음 놓고 글을 쓸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그동안 소재나 생각해 두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시간표를 받은 학생처럼 틈틈이 그 일이 머리에 떠올라서 마음의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제목을 미리 받았더라면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될 일이 아닐까?
우선 머리에 떠오른 것이 이웃집 아주머니다. 아침마다 일찍 이웃집 길거리를 쓸어 주는 착한 아주머니 얘기나 간단하게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다음에는 뜨락의 빨간 감을 생각해 본다. 회초리 같은 묘목에서부터 지금의 장대 크기에 이르기까지 그 자라온 내력과 그리고 첫 열매를 맺던 때의 즐거움 보람을 글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지난 여름방한 동안의 진해탐방기를 적어 볼 생각도 든다. 아니면 지난번 서울에서 올 때 버스 속에서 만난 운전사도 글 소재가 충분히 될 것 같다. 차라리 때때로 우리 마당으로 비행기를 떨어뜨리는 천진(天眞)스러운 동네 개구쟁이 이야기를 써보고도 싶다. 『청량리계외(淸凉里界隈)』라는 제목으로 평범한 이웃 어린이들 이야기를 써서 무슨 상을 탄 글을 읽은 일이 있다. 일제 때 일이지만, 해방 뒤에는 그 작가는 친일파로 몰렸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글 솜씨는 대단한 작가였던 것 같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별스런 소재가 아니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렇게 풍부한 소재를 가지고도 소재 부재인 양 손도 못 대고 있으니 말이다.
소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어떤 전람회에 가보면 철공장의 헌 쇠 부스러기를 주워다가 붙인 작품이나 목공소의 폐품, 떨어진 포대조각, 새끼토막도 일쑤 예술의 전시장에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에다 제목이나 그럴듯하게 붙여놓으면 그 쇠붙이나 넝마조각들이 의젓한 작품 행세를 하게 된다.
요즈음 나는 제목에 대해서 이상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 예술작품에서 제목이 이렇게 묘한 구실을 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수석이나 꽃꽂이 전시회에서도 많이 경험하는 일이다.
제목만 아니면 별것도 아닌 한 개의 돌덩이나 몇 개의 야생초들이 그럴듯한 제목 때문에 부각되어서 의젓하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살아나니 말이다.
초라한 집에서 문패만 그럴듯하면 훨씬 돋보이는 경우라고나 할까.
어제는 내가 없는 동안에 전화가 걸려 왔더란다. 통화자의 성명은 안 밝히더라지만 전후사연으로 미루어 보아 원고마감이 지났음을 경고하는 학보사 기자군의 전화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제목도 결정 못한 채여서 적지 않게 당황을 했다.
수험준비를 까먹은 학생이 시험 시작의 종소리를 듣고 가슴을 두근거리는 때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보다도 나는 지금 더 큰 어떤 제목을 못 찾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종은 멀지 않아 울릴 터인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 작품의 제목을 준비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별스러울 것도 없는 졸작 인생에도 제목만 잘 붙이면 돋보이고 빛이 나는 그 ‘인생의 제목’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