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김영산 새 꽃피우기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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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김영산 새 꽃피우기 설명서

  1. 설명서 땜에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김영산 시인의 신작시 다섯 편이 든 우편물이 배송되었다. 한 사람의 세계가 켜켜이 쌓아올린 낱장들의 탑처럼 끝도 없었다. 두 손으로 받쳐 들 듯 비문의 글자들을 쓰다듬으니 『詩魔』(2009)와, 『하얀 별』(2013)의 시집, 『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2015)의 산문집이 ‘넌 누구냐?’라며 올빼미처럼 내려다본다. 그 속에는 설형문자처럼 해독하기 힘든 「봄 혼례」, 「가을 혼례」, 「설동자(雪瞳子)」, 「詩魔 붉은 별」, 「詩魔 검은 별」이라는 다섯 편의 시가 눈을 감았다 다시 무섭게 치뜨며 나를 옥죄여 온다. 시들은 다섯 발 달린 씨알처럼 낮에도 밤에도 따라다녔다. 내 의식의 밭 어디엔가 어서 심어야 할 텐데 그 동안 익숙했던 어떤 것들로 분류해서 구분 짓기가 힘겨웠다. 모르는 그가 지금도 어디선가 인사를 하고 있는데 나는 어떤 답장도 보낼 수가 없다. 검은 하늘의 밝은 날을 짚어가며 저 깊은 흙살을 돋았다. “잘 이해는 안 되어도 거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울울한 날이 몇 날이고 계속되고 문득 뿌리를 내려 꽃이 보고 싶어진다. 왜? 한 번 듣도 보도 못한 모양의 씨앗들이니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지금까지 품어왔던 씨앗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키워내야 함을 알았다. 어떻게? 그냥 시에게 수도 없이 말을 걸었다. 그래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내가 더듬은 시의 몸이 코끼리 허리일 수도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도 그것들이 부화하는 동안 그 방은 굉장히 밝았다. 이제 깨어난 시들은 나를 엄마로 알고 따라다닌다. 누군가 그의 시들을 분양받아 키워보고 싶다면 ‘2015년, 김영산 새 꽃피우기 설명서’를 더러 참고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꽃들이 너무 많은 이유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드넓은 밭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단, 이 설명서는 검증되지 않은 한 사람의 꽃피우기 성공담일 뿐이다.

  2. 시설(詩說)이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시가 ‘시설’로 불리기를 원한다.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시인 자신이 만든 새로운 형식이므로 그에게 물어보자.

 시설이란 무엇인가? 시소설인가. 시와 소설이 아닌 시소설인가. ‘와’라는 조사가 없는 시소설인가. ― 시에는 우주적 서정이 있고, 소설에는 우주적 서사가 있다 ― 시 가락과 소설 서사가 한 몸인 시소설인가. 나는 죽기 살기로 여기에 골몰해 있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나는 솔직히 그녀의 벌레 먹은 사과보다도, 달콤한 사과보다도 ‘와’라는 과일 하나를 삼키는 죽음의 구멍, 혹은 입을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 김영산, 『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 부분

 시설이란 아직 완결되었다기보다 그 자신이 ‘죽기 살기로’ 천착하고 있는 실험성의 형식이다. 그러기에 “시 가락과 소설 서사가 한 몸인 시소설인가”의 “인가”로 그 자신도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왜, 그는 시설이라는 형식 만들기에 그토록 자신을 던지는 걸까. 그건 그 자신도 제어하기 힘들 만큼 자기 안의 말이 되고 싶은 말, 나의 말이면서 나의 말이 아니기도 한 욕망하는 말의 용량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21세기는 우주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에 합당한 우주문학이 발원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우주시대의 주체는 우주적인 공간과 시간을 살아가며 그는 시를 쓰는 시인(깨어 있는 의식)이어야 하기에 “시가 우주가 돼버린 광기의 시인의 말, 언제나 미루고 미루던 말 시설이라는 말”을 담아내기 위해 기존의 시를 ‘삼키고 뱉어내는’ 장르의 구축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묻는다, 시설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아무 분별이 없던 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시설 아닌가. 원래 문학은 분별이 없고, 소설적 서사와 시적 서사가 하나 됨을 꿈꾼다. 모든 이야기는 시를 꿈꾼다. 거대한 하나의 문학나무에서 여러 줄기에서 실핏줄처럼 뻗어가는 게 있다. 여린 잎을 통해 무수한 말을 한다.

- 김영산, 『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 부분

 아이러니하게도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였지만 과학적 사고의 결과 인간은 ‘와’라는 연속적 층위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모든 의문점들을 신의 존재로 돌리던 인간은 깨진 파편으로 떠돌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신은 사라졌지만 일원론적 사고는 여전히 강력하다) 그의 시 또한 표면적으로는 현실세계가 처한 물질문명의 병적 징후를 드러내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당면한 죽음의 문제와 정면대응한다.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죽음이라는 구멍, 이 구멍의 공포에 질식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의 시는 바로 이 공포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처럼 검은 바퀴의 입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그가 우주문학론을 세워보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체적이면서 독자적인 개별성을 포기하고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할 때 거기 무수한 죽음을 거듭하면서도 이어지는 인간 정신(영혼)을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시설의 등장인물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로 이루어진다. ‘그’, ‘그녀’, ‘나’. ‘그들’, ‘우리’ 등등 고유명사의 층위를 통과해서 보편성으로 방향을 잡는 인물들은 그들이 살았던, 살고 있는, 살아갈 현실적 시간대가 지워진 채 보편적인 시간성을 확보하게 된다. 시설의 공간 또한 구체적인 지명이 드러나지 않은 채 개별자들이 살아가는 장소로서의 성격보다는 관념적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모든 인물들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바라보는 화자는 인물들에게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묘약으로의 시간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자칫 그의 인물들이 폐쇄회로에 갇힐 수 있는 이유이며 인물들에게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인 죽음을 반복시키면서 닫힌 원운동을 되풀이하게 된다.

 시마에 들린 시인(“모든 진정한 시인은 시마파이다”)은 언어로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의 탄생을 엿보고자 하는 걸까. 시의 서정과 소설의 서사 형식을 아울러 품으면서 둘 사이의 융합과정을 통해 우주의 공간성을 담아내려는 자신의 꿈을 그는 나누고 싶어 한다. 시설은 ‘드라마틱한 주술성이 있는 이야기며 고려가요의 후렴구가 시설의 후렴구가 되고 가사의 형식이 시설의 형식이 되었으며 근대 서사문학의 최고봉인 장편소설 대하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있고 사건, 배경, 구성에 있어 치밀하고자 한다.’ 그의 시설에의 꿈이 팽창하는 우주를 닮은 걸까?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4가지 힘인 전자기력, 중력, 강력, 약력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에 말년을 전부 쏟아 부은 것처럼 그 또한 하나의 장르로 모든 문학을 통합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꿈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놓아야 할 다리가 많다. 인물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공간 속엔 객관적인 현실세계가 하얗게 표백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소리쳐도 너무 멀어서 이곳까지 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을 여기 내 곁에 살아있는 인물로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천 번 만 번 척살을 당했다하더라도 나 자신으로 아프게 다가오지가 않는 이유는 뭘까.

 3. 검은 바다 속의 시간

 「설동자」를 제외한 「봄 혼례」, 「가을 혼례」, 「詩魔 붉은 별」, 「詩魔 검은 별」에는 후렴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 후렴구는 고려가요의 그것처럼 주제를 강조하고 전체적인 통일감을 부여하며 반복을 통한 리듬감을 유지한다. 후렴구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이야기를 끊어가는 마디 역할로 작용한다. 그의 시설이 가사의 형식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4음 4음보라는 율격의 친근성을 유지함으로써 시설 속 사건들이 어둡고 섬뜩하며 끔찍한 상황을 나타내더라도 시가 지향하는 통일성으로의 미학을 드러내게 된다. 그가 규칙적인 율격을 지속하는 한 시설은 우주를 운행하는 질서로서의 연속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인식주체인 시인은 세계를 불연속적인 단면으로 파악하지 않고 연속적인 세계관(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그의 말처럼 후렴구의 기계적 삽입이나 4음보의 규칙성은 자연의 질서, 더 확대하면 우주의 질서를 담고자 하는 우주문학으로의 뜨거운 기록임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무덤이여 봄날의 혼례여

  내 시설(詩說)을 들어라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그녀 어디 갔는가

  내 무덤 앞에 상복을 벗어던지고

  황사의 사내가 오는 날

  그와 혼례를 치르느라 면사포로 얼굴 가리는가

  도시의 빌딩은 묘비처럼 뿌옇고

  봄 혼례여 천지사방이 먼지의 꽃이 피어

  먼지의 잔치 사흘 밤낮

  치러져도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그녀, 목련같이 옷을 입고 무덤가에 진달래 같은 신을 신은 봄 혼례여 혼례여

  우리는 무덤에 대고 맹세한다

  우리는 무덤에 엎드려 맹세한다

  모든 맹세는 무덤인 것을.

-「봄 혼례」

 시의 화자는 문맥상 이미 죽었는데도 마치 살아 있듯이, (죽음이 받아들이지 않고 뱉어낸 듯) 모든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다. 죽은 자신의 그녀는 상복을 벗어던지고 다시 황사의 사내가 오는 날 그와 혼례를 치르고자 한다. “그녀는 시이고, 하얀 별이고, 사람 여자이고, 우주 여자”이기에 이 혼례는 황사 속에서도 치러지는, 치러져야 하는 시의 혼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하얀 별은 “내 무덤 앞에서 상복을 벗어던지고” 황사의 사내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무덤이란 죽은 자가 잠들어 있는 곳이 아니라 생명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그녀의 혼례로 알게 된다. 그런 ‘우리’는 마침내 무덤을 향해 맹세하게 된다. 죽은 자는 그녀에 의해 살아 있는 자가 된다. 각각의 시설은 다른 제목 아래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녀, 하얀 별에서 출발해서 다시 하얀 별로 되돌아오는 아우로보로스의 한 몸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수록 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언어의 용암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을 혼례는 그녀의 장례였다, 그녀는 상복 입고 날마다 제 장례를 치른다. 내 묫자리를 위로하던 그 사내의 손이 그녀 묫자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제 무덤을 그리며 산다! 가을 장례는 국화의 혼례 국화를 보러 사람들이 거리를 흘러 다닌다. 모두 노랗게 핀 얼굴을 하고 하얗게 핀 얼굴을 하고 한 곳으로만 몰려다닌다. 그녀를 위해 내가 쓴 시, 그녀에게 바친 화환이 모두 장례식장에 모여 있다.

-「가을 혼례」 부분

 가을에 떨어진 꽃처럼 그녀는 무덤 속에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장례는 곧 혼례으므로 죽은 그녀는 다시 태어날 무덤을 그리며 산다. 「가을 혼례」의 무대를 우주로 확대해보자. 우주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서운 속도로 별들은 서로 달아나면서 팽창하고 있다. (미국 과학 포털 픽스오그에 발표된 새로운 학설에 의하면 수 십 억 년 내에 우주는 수축하기 시작해서 대함몰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 많은 인간들의 질문으로 가득한 밤하늘, 다섯 편의 시설 또한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대할 때 그 의미의 지평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기존의 시에 익숙한 상징적 문법과는 상당히 다르다. 마치도 달콤하고 따스한 이부자리를 걷어내고 거기 누워 있는 해골바가지들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듯 반복되는 죽음의 춤은 독자에겐 가혹하기까지 하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가을혼례는 그녀의 장례라고. 그녀는 날마다 자신의 장례를 치른다고. 그러니 이 세상은 마야가 아니냐고. 아직도 절망할 것이 남았느냐고.

 무덤이 아름다울 수 있는 역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죽음을 하나의 순환원리로 품고 있는 우주주체적 시선으로 관찰자 시선을 확대해야만 한다. 그렇게 관점이 확산될 때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이 잉태되는 하나의 사건일 수 있다. 따라서 시설의 주인공들은 구체적인 사건을 살고 있는 과정의 인물들이기보다 보편자적인 성격을 띤다. 봄에 혼례를 치른 그녀는 가을에 장례를 치른다. 그러니까 봄에 핀 꽃은 봄에 지고 가을에 핀 꽃은 가을에 진다. 이 무슨 말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어느 선승의 덕담인가. 그녀는 흘러가는 강물 아래 흐르지 않는 물 전체로서 늘 거기 있다. 그녀는 붉은 꽃이기도 하고 초록 잎이기도 하며 황금빛으로 피어난 가을 잎이기도 하다. 그녀는 아예 상복을 입고 날마다 장례를 치르고 있다. 혼례와 장례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주적 생리를 시로 표현할 수 있는 까닭은 시가 은유와 역설로 짜여진 언어구조여서다. 반복적으로 시인은 우주생과 인간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인간이 나고 살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듯 우주도 나고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운동을 한다. 그러므로 우주신을 하느님, 부처님이라 불러도 좋다고 말한다. 무수한 죽음의 허물을 벗고 우주의 몸으로 거듭나기. 우주신 되기. (우주신으로 존재하기) 그러기에 시설 속 꽃들은 피어남과 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시간은 웜홀로 이어져 있다. 영겁의 우주시간으로 보면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은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 내의 존재인 개별자에게 영원이란 그냥 관념적으로만 감지될 뿐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어슷비슷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까닭은 중심핵으로의 죽음의 악력이 너무 커서 인물들이 독자적으로 숨 쉴 틈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만드는 풍성한 변주는 그가 의도하는 상징계 너머 실재의 얼굴을 보여주려는 의지에 의해 희생되어야 한다.

 4. 언어의 그물로 건질 수 없는 이야기들

 별이 수소나 헬륨으로 핵융합반응을 일으켜 일생 동안 빛과 열을 발산시키듯 인간 또한 물질에 해당하는 색(물질의 총합이 검은색)을 정신에너지인 빛(흰색)으로 융합 반응하는 한에서만 인간으로의 필요조건을 만족시킨다고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시설은 인간으로서 피할 길 없는 문제를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화성에조차 아직 발을 디디지 못했다. 우주는 너무 커서 인간을 먼지처럼 허무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다시 무의식의 바다에 떠 있는 언어의 반짝임에 눈을 돌린다. 거기 처음 본 배, 시설이 있다. 우주의 장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시설 속 시간의 흐름은 일정한 규칙을 갖고 있다. 우주에도 계절이 있듯 그의 시에는 진달래가 피는 봄이 있고 가을이 있고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린다. 봄과 상응하는 붉은 별의 이미지는 갈래머리 소녀의 등장으로 확인된다. 그녀는 하얀 강보에 싸여 우주의 바닷가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등대지기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고아라는 걸 알게 된다.

 갈래머리 소녀는 등대별이 있는 바닷가를 헤매였다, 그 아버지 같은 사내를 찾아서 소녀는 등대지기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아별은 등대별이 되지 못한다, 뉘 집 문밖에 제가 버려진 까닭을 알기 전까지는. 하얀 강보에 싸여 바닷가에 흘러온 아기는 파도 같은 소녀가 되었건만 그 집 대문 밖을 떠나지 못한다.

-「詩魔 붉은 별」 부분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그녀가 상복 입은 그녀가 되기까지, 제 무덤의 건반을 두드리던 묘지기 처녀가 무덤의 애무를 알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는다. 단 하루일 수도 있다, 그녀 이야기는 하루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녀가 그녀를 장례 지내며 일생을 보낸 것이다.

-「하얀 별」 부분

 하얀 별은 원래 붉은 별이었다, 그녀는 밤이면 성을 빠져나와 그 사내를 만나러 간다. 고아별 갈래머리 소녀가 되고 묘지기 처녀가 되고 웨딩드레스 입은 여자가 되고 상복 입은 여자가 되었건만 아직 하얀 별이 되지 못하였다. 그 붉은 별의 이야기는 하얀 별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유전되는지 모른다.

-「하얀 별」 부분

 솟아올랐다 무너지는 바다의 말을 들으면서 자라났고 고아별인 갈래머리 소녀는 누구나 그렇듯이 ‘축축한 육체의 물을 건너야’ 했다.‘그 육체를 담은 구두는 누구에게 빌려올 수도 없고 단지 자신의 발뿐이기에’‘고향의 장례를 치르면서 혹은 도시의 장례를 치르면서 소녀는 성장해간다.’‘아버지를 찾았지만 그곳에 이미 아버지는 떠나고 없다. 그녀조차도 떠도느라 한 사내에게 머물지 못한다.’ ‘되기’의 순환운동을 거듭하는 일은 멀리서 보면 한없이 아름다운 춤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자식이 아버지를 잡아먹는 잔혹한 이야기며 이것이 우주의 역사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이곳은 붉은 별이었다가 하얀 별이 되고 다시 검은 별이 되는 끝없는 되기의 장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한없이 가라앉은 죽음의 중력으로의 검은 별, 블랙홀은 끝없이 타오르는 빛의 상징인 하얀 별과 등이 맞닿아 있다. ‘검은 별’은 이미 그 단어 속에 역설을 포함하고 있으며 어둠을 통한 빛으로의 차원변화를 통해 우주적 영성과 그 영성 안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난다.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처럼 하얀 별은 갈래머리 소녀인 붉은 별이 되고 다시 하얀 별로 빛을 한없이 나누어 주다가 마침내 검은 별로 일생을 끝낸다. 그러나 별의 죽음은 진정한 끝이 아니다.

 그녀 병풍 뒤의 살해는 갈기갈기 찢기는 척살이었다. 살점 하나하나 찢긴 척살! 우주 암흑물질 척살! 검은 별의 척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에게 배운 데로 그를 살해했소, 우주 암흑의 아버지! 아버지 우주의 살해는 척살이었는가,

 아버지! 아버지는 거덜난 몸 찢겨진 입으로 별을 퉤퉤 뱉는다, 아버지! 아버지는 장례 치르는가. 그녀는 그녀를 장례 치르는가, 그녀 병풍 뒤의 무덤은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녀 무덤은 문드러진 적이 없었으나 문드러지고, 문드러져서 평묘처럼 방바닥처럼 되었다.

-「詩魔 검은 별」 부분

  그녀 병풍은 접혀지고

  그녀 관이 옮겨졌다.

  그 합장(合葬) 병풍 속에 접혀지고

  우주 장례는 우주 바깥으로

  검은 돌상여를 떠메고 가는 것,

  우리는 상여꾼으로 제가 저를 떠메고 간다.

-「詩魔 검은 별」 부분

 무덤은 문드러져서 방바닥처럼 평평해졌다. 이제 그녀는 죽음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졌다. 우주의 바깥, 우주의 장례는 무로 사라지는 것,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무로 사라질 것들로 제가 저 자신을 떠메고 가는 상여꾼임을 말하고 있다. 하얀 별의 죽음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끝난 것이 아니다. 하얀 별이 붉은 별이었고 검은 별이었다면 검은 별 너머 우주의 바깥조차 완전한 무일 수는 없다. 그곳으로 사라져간 죽음들이 있다면, 마침내 그곳으로 모두 사라져 갔다면, 여기 엄연히 존재하는 시의 하얀 별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얀 별은 다시 돌아온다. 눈이 내린 깊은 겨울 하얀 눈밭에 도무지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생길 것 같지 않은 날, 눈동자마저 하얀 눈의 아기가 태어난다. 악마인 검은 별에게 동공을 빼앗겼지만 그렇기 때문에 눈의 아기의 동굴은 세상에서 가장 깊을 수 있다. 그 하얀 아기는 악마인가, 악마이면서 천사인가. 언어상징의 시스템으로 채 작동하지 않는 부드러운 눈송이로 눈동자를 찌르면서 눈이 내린다.

 게임은 게임을 신으로 삼는다; 묘비에서 울음이 들리는 게 아니라 비 밖에서 울음을 져 나르는 흰 눈동자가 있다. 악마에게 동공을 빼앗겨 그 흰 동굴은 세상에서 가장 깊다. 찬바람 불면 흰 눈 내리고 눈보라 속에서 돌아오는 악마가 보인다. 깃털의 가장 부드러운 눈송이가 눈을 찌르는 무기이다, 눈은 무기의 창이다

- 「설동자(雪瞳子)」

​-『시와문화』 2015년 여름호

​                                                                           평론가: 이병금

[출처] 2015년 김영산 새 꽃피우기 설명서, 김영산 시 해설|작성자 leebg204

[사랑니]

.......!!!!!!!!

[스텔라]

조용한 밤에 와서 다시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