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두’와 ‘엄두'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한국어 중에는 한자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이 많다. 그중에는 한자어가 완전히 한글처럼 변한 것도 있고, 발음이 변해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도 있다. 예컨대 ‘장난꾸러기’라고 할 때의 ‘장난’은 ‘작란(作亂)’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지럽게 만들어 정신없게 하는 일’을 ‘작란(作亂)’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래하여 어린아이들의 놀이같이 ‘해칠 생각이 없이 즐겁게 노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했다. 장난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아이들이 재미로 놀이함2.짓궂게 다른 사람을 놀리는 못된 일을 함 3.하찮게 일을 실없이 하거나 심심풀이 삼아 함”(<다음사전>)이라고 되어 있고, ‘작란(作亂)’은 ‘장난의 비표준어’라고 나타나 있다.
이렇게 우리말에는 한자어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그중에서 ‘염두’와 ‘엄두’가 어원이 같고 의미가 다른 특이한 경우다. 예를 들어 “염두에 두다”와 “엄두가 나지 않는다”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없이 “엄두가 나지 않아.”라고 말해왔는데, 그 의미가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염두(念頭)에서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같은 말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는 긍정적인 면으로 사용하고, 또 하나는 부정어와 어울려서 쓰고 있음이 특이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우리말처럼 된 ‘엄두’가 부정어와 호응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우리말을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었다. ‘노인’보다는 ‘늙은이’가 낮춤말 같이 느끼고, ‘감사합니다’보다는 ‘고맙습니다’가 낮춤말 같다. ‘여자’들에게 ‘계집’이라고 하면 화를 낼 정도니 순우리말보다는 한자어를 선호한 것이 사실이다.
‘염두(念頭)’는 “1.마음의 속 2.생각의 맨 처음”이라는 말이다. 예문으로는 “장마철 산행은 길이 미끄럽고 힘이 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철저한 준비와 함께 떠나야 한다.” 혹은 “나는 글을 써도 사실성을 늘 염두에 둔다.”와 같이 쓴다. ‘마음속’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그날 우물가에서 본 슬픈 광경 하나가 염두를 떠나지 않는다.”(김소운, <일본의 두 얼굴>)를 들 수 있다.
‘엄두’는 흔히 부정적인 말과 어울려 쓰며, “감히 무슨 일을 하려는 마음”의 뜻이다. 예문으로는 “김천댁은 그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쭈뼛쭈뼛 기웃거리고 망설이기만 하였다.”, “선생님의 무서운 얼굴을 보니, 돌이는 감히 잘못했다는 말을 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습니다.”, “2020년 7월 도시공원 일몰제가 시행될 예정이지만, 사유지 매입에 따른 지방비 부담 때문에 공원 개발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려대, <우리말샘>)와 같다. 이상의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엄두’는 항상 부정어와 함께 다니고 있다.
우리는 염두(念頭)에서 엄두로 변하는 현상을 변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단모음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단모음화가 된 경우 의미가 같거나 비슷해야 하는데, ‘엄두’와 ‘염두’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로 변했다. ‘낡다’나 ‘늙다’는 모음의 변화를 주어 약간의 의미 변화를 준 것인데, 이에 비해 엄두와 염두는 사용법이 지나치게 변했다. 모음변이와 단모음화의 차이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그러니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순우리말과 한자어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한자어로 된 것은 그대로 어원을 간직하며 의미의 변화가 없는데, 우리말화된 엄두는 부정적인 말과 결합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본다.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한자로 된 것을 높게 보는 시각은 이제 바꿀 때가 되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것이 두뇌에 각인되어 왔기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어는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점진적으로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찾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늙은이 어디 가세요?”하고 물으면 화낼 것 같다. 오호, 애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