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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타협을 구하려는 탐구의 원류
-정인환 편
송 귀 영 (한국 시조 협회 부이사장)
1. 서론
원래 시조란 존재 안에 새겨져 있는 형상을 시어로 호명하여 삶의 존재 의식에 언어와 연결하면서 시조가 형성됨을 감지한다. 시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비문의 시학과 사유로 건너가는 의도이다. 시인은 지식인 중에 가장 숭고한 존재로서 자아 성찰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감성을 여과시켜 삶에 대한 활착 현상을 관조해 낸다.
따라서 시인은 인간 본연의 순수함에 충실하고 중요한 시적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인간이나 자연모두가 변화무상하다. 오늘이 고달프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도 무방할 것이다. 시조에 있어서 감성의 층을 더한 상상의 전망을 제공하는 구체적인 자문자답까지를 포괄한다.
시조의 영토에는 소절(小節)과 구(句)를 거치지 않고서는 포착할 수 없는 시어와 독자의 감수성이 만나는 자리가 있다. 환상에 불과한 의식의 심연을 밝혀내는 시조 안에 인간의 신비도 들어 있다. 특히 시조의 복식을 쉽게 하여 언어의 화려한 의상이나 장식을 외관에 달지 않고 암묵적 함의를 통한 삶의 각성과 희한을 새겨 넣는다.
시조의 안정적인 형식과 가락을 직조할 때에 그 속의 잠재한 아름다운 무늬를 채색함으로써 작품의 품격과 아름다움은 배가된다. 정인환의 작품에는 균형과 안정을 추구하면서 자연에 순응의 타협으로 쓰다듬어 성찰적 자세로 자리 잡는 노력에 집중 체임을 자각하고 있다. 시조에서 형식이라는 구심력과 내용의 원심력을 평등하게 갖추어 외적인 필연성과 내적인 긍정성을 분명히 인식한다.
사소한 일상적인 경험이 시적인 내용으로 환치시키는 것은 관점의 전환에 뿌리를 둔다. 시조 작품에서 관계의 미학이 발현되는 것은 시어 속에 소통과 관계 형성을 향한 의지에 내포성이다. 악착같이 어느 사물에 매달리어 외부의 우연적 계기에 눈을 돌려 사물에 존재적 형태와 유동성의 성질을 독자들은 촉각이 선다. 보통 시에 내포한 모든 사물의 대상은 모두 접속하는 존재들에 실재이다.
주체의 뜻과 의지대로 삶이 진행될 수 없고 이러한 사실들은 주체적 결단과 의지로 간편한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적 생활양식으로 반성을 촉구한다. 시조가 지녀야 할 품위와 율격을 겸허히 수용하여 새로운 문학적 의미의 공간으로 결집하는 일이다. 시조 형식은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며, 형식적인 규제와 정형적인 규제로 시조를 시조답게 만나게 한다. 이것은 자유시와 변별성을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시조 형식은 시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적 접선 관계에서 존재하는 가장 핵심적인 자질은 존재자의 형태에 시선을 고정해 시인 특유의 시선으로 사납고 난해한 시적 공간에 끈질긴 의지를 작동시킨다면 느긋하고 여유로운 공간이 된다. 이러한 공간적 감각은 그것이 시(詩)적 주인공에 초청의 대상으로 부각한다. 이런 부분의 자립은 독립성에 소외되었던 영역을 시각화하여 동일성의 시학에서 벗어나 사물의 실재에 다가가도록 하는 데 있다.
2. 선정후정의 서정적 사유에 호흡
시조는 우리에게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비실제의 삶에서 어둠을 뚫고 조그마한 구멍을 통하여 햇빛을 만들어 내는 그런 이미지의 공간이다. 시조가 물질적으로 이동하는 것들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이동 속에서 탄생한다. 시조의 존재가 더 말할 수 있는 것을 더 말해도 되는 효율적인 수단이다.
하고 싶은 말을 절제하여 시어를 배치하고 배열해야 하는 시조에서 억제할 수 없는 감정들은 악순환이 반복되는 그 틈새에서 시조가 얽혀진다. 어떤 소재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는 완성된 사유로부터 성찰하여 상반된 사유로 건너가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시인이 해야 할 몫이다. 정인환 시인의 언어는 새로운 출발점이며 시어의 불완전성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안 성의 힘을 빌려서 의존하는 것 같다.
시조는 우리 민족얼 속에 흐르는 정한의 유구한 실재로서 예술적 자산으로 외골수 형식이며 오랜 가락에 울림이다. 시의는 감성이 아니라 오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의 지배다. 기본 음보를 밟고 있는 시조가 45자 이내의 글자 속에 담아서 사유의 축적으로 얽어내는 것이다. 정인환 시인은 시의의 칼을 숫돌에 갈고 그 끝을 벼리어서 많은 이야기 가락을 엮어 한 편의 시조를 탄생시키고 있다.
정인환 시인에게 있어 새로운 모험은 진실에 동반한 우리 삶 속 희로애락의 미적 감동을 온몸으로 유도해 낸다. 시제에 관련하여 무명의 존재들을 서사적 맥락으로 얽어 과거와 현재의 복합적 시공간 속으로 소환한다. 시적 사물과 사건 형상의 양상 그리고 생리적 특성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는 의식은 대상이 지닌 고유성과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문학적 충동을 발동시킨다.
현실은 현재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잘 응축 시켜 미래로 연결되는 통로에 여운의 자장을 깔아 놓는다. 거친 세상에도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고 낮은 세상에서도 높은 자리를 내어 설국에 발자국을 남기듯 순수한 시조의 미래를 건너 무한한 공간으로 진입한다. 생명의 지향과 이타심에 실천으로 쟁점이 사라진 화합하는 이미지즘(Imagism) 정신을 충전시킨다.
다층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시대의 현장에 잊혀가는 모습들을 존속 시켜 묵시적 공간을 확보하고 서정적 자아의 구원과 묘법을 찾아내는 정형화가 요구된다. 시 의식의 대상은 형상과 양상, 그리고 특성의 생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심미적 의식을 발굴하여 문학적 충동을 격발시킨다. 현실에서 삶의 은총은 존재와 존재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와 연결해 시적 구성 요소에 촉매제 역할로 감동의 물무늬를 그려낸다.
인간에 이성의 힘으로 시조 세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의 소중한 가치를 환생한다. 시인은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과 풍경, 그리고 오래전 사연들에 미물들의 생명력을 찾는다. 이러한 모든 주요 관점들을 의식하고 있는 정인환 시인의 여러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바람에 서걱대는 강가의 갈대밭에
추억의 조각 모아 저무는 노을 보며
남몰래 숨겨 두었던 그 사랑을 부른다.
-갈대밭- 전문
인용한 작품 “갈대밭”의 시각적 배경은 저무는 노을 녘이며, 공간적 배경은 강가의 갈대밭이다. 시인은 어느 날 저무는 노을 강가의 갈대밭을 거닐면서 사색한 것을 작품으로 엮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쓸쓸한 배경을 바라보면 이에 연관된 과거의 추억을 끌어들여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특히 쓸쓸한 풍광이라든가 기쁨을 즐거워했던 기억이라면 행복한 그때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잊기 어려운 것은 과거의 결핍에서 비롯한 정서적 아픔이거나 잊기 어려운 기억이라면 더욱더 선명하게 유발한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속에 숨겨진 추억의 조각들을 모아 회상하면서 내부에 솟아나는 추억의 서정을 나타내게 된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갈댓잎들이 바람에 부딪혀 서걱대는 소리는 과거에 불러보던 사랑의 노래로 환치된다. 종장에서 “남몰래 숨겨 두었던 그 사랑을 부른다.” 는 주관적 관념은 저무는 노을이 서걱대는 갈대밭의 자연 상태를 묘사함과 동시에 시적 대상물에서 파생하는 느낌을 의인화한 환유적 표현 기법을 취하고 있다.
계절이 바꿔놓아 정으로 타는 것은
가지에 남겨 놓은 사랑의 열매인데
한 세월 앙금을 풀고 지나가고 있어라
-가을 연가- 전문
가을걷이가 끝난 정취에 허무감이 묻어나는 군담이라 조심스러운 울림의 여운이 남는다. 가을이라는 이미지는 창조의 결실과 계절의 신비스러운 시공에 영원한 흐름과 생의 순환이다. 마지막 나뭇가지 끝에 남겨 놓은 한 알의 감은 까치를 위한 사랑의 열매다. 계절의 변화는 여러가지를 상징하지만,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의지와 활동성을 체험하는 것은 힘의 원천이 된다.
화자의 가을은 한세월의 앙금을 풀면서 지나간다고 긍정적인 데 비하여 프랑스 시인 폴베클렌(Paul-Verlaine)은 “가을 노래”에서 “ 종소리 울리면/ 숨 막혀와/ 창백해진 나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물을 짓는다./ 흩어지는 낙엽과 같이/.” 라며 슬픔을 노래하였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두고도 시인마다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여러 가지 환경으로 처한 입지에 따라 따른 사유의 다양성 때문이다.
가을 잎 쌓인 길을 호젓이 걷고 있다
오색 빛 능선 따라 산정을 바라보면
노을은 그리움으로 빈 하늘을 물들인다.
-가을 서정- 전문
작품 “가을 서정”에 취택한 시어에서 “가을 잎, 호젓이, 오색 빛, 산정, 노을, 물들인,” 등은 서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들이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 또는 수확의 계절로 그리고 정리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을은 서정의 계절인 동시에사색의 계절이다. 가을의 만상은 자신의 살집을 채색하여 변색한다. 나무는 잎을 떨구며 탐욕을 버리듯 우리에게 탐욕마저 스스로 비우고 버리라 한다.
나무에 잎이 피고 지며 계절의 만남과 헤어짐, 가을 들판의 얻음과 잃음이 상반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보완 관계가 상호 연속임을 감지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터득한다. 해당 시조의 초장에서 가을 잎이 쌓인 길에 화자는 깊은 사색을 하면서 호젓이 걷는다. 중장에서는 멀리 펼쳐진 오색 단풍이 물들인 능선과 산성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종장에 노을을 대치시켜 가을의 높고 빈 하늘에 그리움도 버리는 삶에 이치의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가을의 서정적 사색을 통하여 생존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족하다.
무수리 푸른 달밤 별빛도 차가운데
풀벌레 나지막이 가을밤 익어간다
어머니 계신 곳에도 국화꽃이 피겠지.
-가을밤에- 전문
인용한 작품 “가을밤에”는 앞에서 언급한 “가을 연가”나 “가을 서정”처럼 신인이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와 느낌, 그리고 감성을 시화한 작품으로써 가을에 담긴 사물에 형상과 자연의 변이를 체감하면서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해맑게 내리비치는 가을밤 달빛은 조도를 높인다. 달빛은 유난히 교교하고 빛나면서 차갑게 느껴진다. 특히 가을의 초저녁에는 온갖 풀벌레 소리의 합창으로 자연의 연주회장이 되고 있다. 달도 별도 두 눈을 감고 잠속에 빠지려고 슬슬 준비한다.
화자는 고요 속에서 저물어가는 가을밤 외지에서 사는 자신의 삭막한 현실에 삶의 고단함을 접고 잠시나마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을 생각한다. 이 푸짐하게 국화가 피는 계절에 부모님이 계시는 그곳(고향)에도 국화꽃이 필 것이라고 상상한다. 시인은 가슴속에 관통하는 시적 관계가 아픔이나 응어리를 치유함으로써 진솔한 의식의 전환과 “어머니가 계신 곳”을 차용하여 긍정적 의미를 향유하고 있다.
저만큼 높은 산을 오르고 오르기에
눈앞에 펼쳐있는 많은 것 못 보다가
더디게 내려오면서 모두 보고 있어라.
-등산길에서- 전문
등산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상을 오르고 싶어 한다. 정상에 도달하기 전까지 등산객의 목표는 정상이며, 막상 정상에 오르면 더 높이 오를 수가 없다. 그렇게 힘들어서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능선을 따라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안개가 쌓인 넓은 산 아래를 한번 둘러보고 하산을 한다. 고행의 등산도 고난의 인생도 그 목표는 정상에 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과 같다. 산을 우러르며 산길에 오르면 무수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굽어보는 풍류가 된다.
저만큼 높은 산에 오르다가 오를 때 못 보았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고 만다. 이 작품 중장을 읽다 보면 “내려갈 때 못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는 고은 시인의 “그 꽃” 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그런데 고은 시인은 올라갈 때도 못 보았고, 내려갈 때도 못 보았지만, 화자는 서서히 내려오면서 올라갈 때 못 보았던 많은 것을 내려올 때 모두 보았다. 산행의 등산길에서 타자가 보지 못한 것을 세밀히 보았다니 시인의 눈은 역시 치밀하고 예리하다. 등산길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와 잡 벌레들도 자신들의 몫으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3. 탈속의 산실과 해탈의 도량을 찾다
정인환시조가 소박한 현실 속에 있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고 되 읽히는 언어의 마술을 구사하여 독자들에게 귀감이 되어준다. 사물을 주시하여 그늘에 묻힌 것들의 한 줌 빛으로 비추는 꾸준한 정성이 깃든 맑은 속살들을 세밀하게 소명한다. 시조에서 정형 미학이 갖는 위상은 장대하고 깊다. 충만한 현대형의 양식이 통하여 삶에 순간적 충격을 미학적 열망으로 전이시킨다.
단순한 언어의 차원을 넘어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고 역할과 개성이 있는 영역을 개척하여 다양성의 언어유희로 차분하게 갈무리한다. 탈속을 향한 세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어를 찾기 위한 긴 시간의 투자가 시인의 마음속을 정확하게 씻어주는 행복한 세계로 유도한다. 삶과 사물의 태동을 주시하는 투명한 시선으로 서정의 장광설에 시화 방식을 유도해 내고 있다.
시조의 품격을 고수하고 무한대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고양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여 시조의 탁월성에 생명줄을 연결한다. 정인환의 시편에서무한한 이름 없는 존재들을 서사적 맥락으로 엮어 현실의 복합적 시공간에 다시 불러 모아 구조화된 신화로 재현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우리의 사회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어 그 힘으로 이 사회가 굴러간다.
인간은 서로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모자라는 것은 상호 채워주며 더불어 사는 사회적 일원에 최소 단위의 구성원으로 집단화한다. 개인을 말할 때는 인생이라 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볼 때 인간이라 칭한다. 시인들은 시적 내재율을 느끼면서 인간이 정체성을 뛰어넘어 시인이라는 자아의 실존적 현재에 존재성을 환치한다. 그래서 문학은 금전과 권력도 명에도 아닌 순수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에 소중한 가치일 뿐이다.
우리 말속에 어제는 없으나 “모레, 글피, 그 글피”라는 말은 있다. 시인은 있는 그대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랑하면서 감정이입의 심미 활동을 창조적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시인의 묵묵한 해탈의 운명을 감내하며 무한한 생명의 원천으로 우주에 이치와 삶의 방향성을 수용한 메시지로 설정하여 담아낸다. 다시 정인환의 다음 시편을 살피려 한다.
세속의 수량 도장 수덕사 찾아와서
무엇을 얻고자 함 가지지 않았지만
춘삼월 꽃피는데도 비구니는 정좌다.
-수덕사- 전문
수덕사는 충남 예산 덕숭산에 소재한 백제 말엽 승제 법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가수 송춘희가 60년대 말 발표한 “수덕사의 여승”이 한때 유행했던 적이 있다. 여러 수량 도장을 찾는 것은 세속의 얽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고자 하여 집착으로부터 냉정해지려는 비구니의 정좌를 본다. 수덕사라는 도량의 매개체를 통하여 고해인 세상에서 모든 욕망과 번뇌를 씻어내고 괴로움이 없는 사바의 세상으로 나가려는 희망이 엿보인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으며 자신을 다스리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시각화하였다. 이 시조의 절정인 종장 “춘삼월 꽃피는데도 비구니는 정좌다.”는 만물의 생동과 자비로운 미소에 연결해 꽃봉오리가 피고 있는데도 현실의 속세와 무관하게 엄숙한 의미의 파장을 무한히 확대한다. “비구니는 정좌다.”로 시조를 마무리한 것은 우리들이 한 차원 높고 은연한 음유의 시적 기법에 읽는 즐거움을 더한 심오한 경지와 경건함을 체험하게 한다.
선암사 가는 길에 매화가 같이하고
세속에 찌든 마음 바람에 털고 있다
해우소 앉았던 몸이 어느결에 가볍다.
-선암사- 전문
선암사는 부산 백암산과 전남 순천 등 두 곳에 사찰이 있다. 여기 인용한 선암사는 전남 순천 송광사 부근에 소재한 선암사를 이르는 것 같다. 이 선암사는 신라 542년 도선 국사가 창건하고 약 200여 년 후 의천이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서기 1700년경 재건한 명승 고찰이다. 속세와 저승의 경계에 대한 인식은 현실적 삶의 제약에서 벗어남은 본격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식했다는 의미다.
세속에 찌든 마음을 바람에 털어버린 이후의 상상은 현실적으로 삶의 장애에 대한 의식과 함께 초월을 갈구한다는 뜻이다. 시적 화자는 선암사로 가는 길가에 매화를 바라보며 세속에 찌든 온갖 잡념을 바람에 날려 버린다. 종장에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니 몸이 가볍다는 느낌은 자신의 범속함을 털어내고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려는 의미로 읽힌다. 또한 지고한 수행을 통하여 아름답고 성스러운 존재로 전환되어 가기를 염원한다.
백양사 둔덕 넘어 단풍잎 주우려니
늦가을 찬 바람이 덧없이 몰아치고
경내는 스님의 기침 빈 가슴도 시리다.
-백양사에서- 전문
전남 장성 백암산에 있는 백양사는 백제 승려 여한이 창건하고 그 후 중연이 중창한 고찰이다. 거대한 바위를 배경 삼아 좌우에 맑은 계곡물이 흘러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자연과 한 몸이 되고 싶은 화자는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무소유의 깨달음을 얻고자 산사를 찾는다. 떨어진 단풍잎을 주우려다 문득 주변을 살펴보니 낙엽이 되어버린 시간의 흐름은 육신을 노화시키는 생명의 순환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늦가을 백양사의 경내 뜰을 거니는 스님에 기침 소리가 한적한 적막을 깨우고 있다.
늦가을 찬 바람이 부는 백양사의 입구에는 떨어진 단풍잎 위로 한적함이 덧쌓인다. 백양사를 찾는 일은 더 밝은 세상을 구원하고 화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복락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백양사에서 혼자 곱씹고 되새기며 적나라하게 사색한다. 자신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심오하게 역동성으로 천착하여 감동을 부추긴다. 또한 정돈된 감성과 절제된 호소력으로 세상사의 관심사를 아울러 뿜으려 한다.
파도는 봉돌 안고 서럽게 울고 있다
백사장 지나는 길 발자국 남기면서
하늘의 구름을 보며 슬픈 마음 건넌다.
-소록도에서- 전문
소록도는 육지와 연결된 섬이면 서도 멀리 있는 느낌에 섬으로 한 센 인의 한만은 슬픈 사연이 아직도 남아있다. 소록도 하면 한 센 환자 시인 한하운의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얼마나 몽매하고 아주 왜곡된 세상을 사실이라 여기며 살아야 했던 천병에 시달린 한센인 환자들의 한숨이 곳곳에 서려 있다. 외로운 섬, 버림의 섬, 소록도는 오늘날 단절의 공간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과거의 슬픔을 씻어내려고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슬프고 아픔의 땅에 따뜻한 두 분의 손길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카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이다. 이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한 센 인을 보살펴 온 천사들이다. 애달픈 사연들을 함의한 화자는 “파도는 몽돌을 안고 서럽게 울고 있다.”고 술회하며 지나간 아픈 발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주지시킨다. 한센인의 슬픔 내력들을 파도와 몽돌도 알고 있을 것이라며 허망한 하늘을 바라보며 화자도 함께 아픔을 나눈다.
4. 온화한 미덕이 담긴 섬세한 시학
시인들이 시를 쓰는 행위는 어디인지 그 의문들의 어려운 해답을 화두로 삼는다. 이렇듯 시조가 깊은 사유와 고뇌의 결정체로 창작을 통하여 의식을 깨우고 무한한 포만감과 큰 위안을 받게 한다. 언어와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평범한 말속에서도 천착의 대상이 된다. 그 누구도 시(詩)로써 비평할 수 없고 자신에 대한 성찰로 깊은 땅속에 묻혀있는 감성의 광맥을 찾아 채굴하여 언어의 보석을 채집한다. 현란한 수식이나 지나친 기교를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더 강한 호소력이 가슴 깊게 다가온다.
인간은 생물과 달리 질문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타당한 공동체로 윤리적 법치가 필요하고 존재를 대변하는 소리의 전달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 기준이 일관성을 상실하였을 때 이것은 곧 나의 허물로 재생한다. 실존에서도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물의 형태에 결과를 잠정적 학술의 진리로 간주한다. 시인들은 여전히 비합리적인 일관성에 매몰되어 진리의 이단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창작활동을 취미 삼아 한다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이와 비슷하다.
시인의 감성은 신이 내린 영역이라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시어로써 시인의 마음을 뛰지 넘지 못한다. 시조의 형상 과정에서 비유와 상상력은 시조를 아주 맛깔스럽게 만들어 내는 요소 중의 핵심이다. 이러한 표현의 형태는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고 짧은 3장의 간결한 표현으로 시조의 맛은 수십 쪽의 수필이나 소설 한 편을 엮어내는 것과 같다. 문학의 힘은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는 작품에서 출발한다. 한 편의 시조와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해도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이다.
문인은 권위를 부여받고 그들이 창작한 작품이 사회적으로 큰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인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야 하며 반드시 훌륭하고 위대한 작품을 창작하지 못해도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문인의 행세를 할 수가 있다. 현명한 시어는 훌륭한 작품을 낳게 하고 섬세한 시어가 감성을 충족시킨다. 언어는 우리의 뿌리이며 자산이므로 이를 요리할 자격이 있다.
시작에 소재를 달리하는 다양한 관심과 탐구 정신은 다변화하는 시대의 의식과 조우 앞에 공감과 채찍으로 형이상학적 해법을 찾는다. 묘사가 적절하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옹이처럼 박고 있어 시조의 품격과 격조를 한층 고조시킨다. 흔한 주제의 시일수록 시(詩) 쓰기가 어려운 것은 새롭게 다가올 수 있는 건더기가 없기 때문이다. 주제에 대한 압박을 느낄수록 신선하고 새로운 표현이 나오기 어렵다. 시조의 안정적인 형식과 가락을 얽으면서 그 속에서 읽어낸 인간 세계의 참 면목을 그려 넣는다. 정인환의또 다음 작품을 감상해본다.
어제의 꽃샘추위 가지에 머물더니
봄 햇살 내리고서 덧없이 사라진다
봄비는 이른 아침에 내 적막을 깨운다.
-봄바람- 전문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봄은 희망과 꿈,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마음이 훈훈하다. 이러한 봄날에 산 넘고 강을 건너 바람까지 살금살금 불어와서 비까지 내리니 삼라만상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새싹을 틔우기에 적당한 환경이 조성된다. 꽃샘추위도 이제껏 가지에 머물다가 봄 햇살의 등쌀에 어쩔 수 없어 저만치 물러난다.
대지에 여백을 슬금슬금 채우면서 조물주가 그리는 대지의 풍경이 싱그럽다. 만물을 회유하는 봄바람은 자연 사계의 순환 질서에 합일하는 보상이다. 봄은 생명의 재활을 의미하고, 사물의 이미지는 우주의 삶을 뜻한다. 이러한 봄을 성장과 번식, 생산과 재생의 계절로 첫 자리에 두는 것은 등가물의 영원성과 상징성이기 때문이다. 사말(些末)들은 자연에 의탁하여 질서를 지킴으로써 인륜의 뿌리 의식을 전이시킨다.
안개 낀 선운사에 상사화 피어나서
잊혀진 그리움이 희나리 불붙는다
나무에 옹이 진 상처 뉘 있어서 지울까.
-상사화- 전문
상사화는 봄이 되면 비늘줄기 끝에 잎이 모여 자라는 여러 살이 풀로 꽃을 피우는 수선화과에 속한다. 선운사 일주문을 조금 지난 주변에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어 피는 쾌 볼만한 선운사의 상사화는 명성을 얻는다. “ 고운 얼굴 한 번 못 보고서 / 이리 보낼 수 없는데 / 내가 가야만 했던 / 그 험한 길 위에 왜 나를 떠나가요. / 란 가사의 “상사화”를 안예은이란 가수가 자작곡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최근 사랑의 콜센터에서 임영웅이 이 곡을 불러 시청자들로부터 절절한 감성과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찬사를 받았다.
안개 낀 날 화자는 선운사의 상사화 피는 꽃을 보고 과거 잊혀진 추억의 그리움이 마르지 않은 덜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불꽃을 피운다. 가슴에 옹이 진 상처를 넋두리 섞인 묵언으로 정말 태우기 쉽지 않은 꽃일지도 모른다. 가식을 지워 버리고 아무도 없는 장소에 홀로 피고 싶은 상사화이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이 꽃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꽃말을 주었다.
엊그제 빈 들녘이 시름에 잠기다가
어젯밤 내린 비로 청보리 푸르러라
산 제비 날아들고서 일렁이는 바람 소리…
-보리밭- 전문
매년 4월과 5월이 오면 시골을 고향에 둔 도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볍지 않은 유년의 향수에 붙들린다. 고향의 보리밭은 종달새와 더불어 향수의 안태가 된다. 하얀 구름이 뜬 하늘 아래 풀냄새를 맡으며 바람에 출렁이는 보리밭 물결의 밭고랑을 거닐며 보리피리를 꺾어 불던 그 추억은 서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최근 들어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농촌에서도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 재배를 하고 있다. 수년 전만 해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농촌 보리밭 풍경을 지금은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마음의 고향 보리밭은 많은 기억과 추억이 담겨있다.
반세기 전쯤 보릿고개란 말이 우리들의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리던 때가 바로 보리가 익기 전의 고비를 의미하였다. 여름철 무더운 날씨에 보리타작하시던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리 벨 때와 보리타작할 때 목덜미와 등에 들어간 보리 꺼럭의 가려움은 땀과 범벅이 된다. 삼베 잠방이에 몽땅 수건을 이마에 불끈 동여매고 김치 깍두기 한두 쪽을 안주 삼아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며 도리깨질하시던 모습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기억은 빈 들녘의 시름에 잠겼던 보릿고개가 엊그제 같은데 추억으로 남는다.
눈 쌓인 골목길은 고요도 고요하다
발걸음 있지 않고 자취도 있지 않아
세상의 평화스러움 여기에서 보노라.
-골목길- 전문
시골 농촌이나 도시 등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응당 골목길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좁은 골목길에는 많은 사연이 연출되고 또한 추억거리가 담겨있다. 대부분 골목길은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최근 골목길은 주차 문제로 이웃 간에 시빗거리의 제공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골목길에 눈이 쌓이면 그야말로 진풍경이 벌어진다. 보행자들의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거나 제집 앞 눈을 치우지 않아 앞뒷집과 옆집 간에 다툼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지금은 겨울 연료로 연탄 사용이 줄었지만, 과거 연탄이 겨울의 주 연료로 사용할 때에는 미끄럼 방지를 위하여 눈을 덜 치운 골목길에 연탄재를 뿌린 적도 있었다. 위에 인용한 “골목길”은 막다른 골목길이거나 밤이 이슥한 눈 쌓인 골목길일 터다. “고요 속에 고요”가 늦은 밤을 암시한다. 화자는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고 한적하게 눈이 쌓인 평화로움을 골목길에서 느낀다.
앞길만 바라보다 뒤돌아 돌아보니
봄바람 가볍게 발걸음 재촉한다,
운해에 가린 정상은 보이지를 않는다.
-설악산은- 전문
자연의 신비로움을 아무리 캐보아도 그 실체를 속속들이 알아채기가 힘들다. 캐면 캘수록 새로운 세계와 형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설악산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쪽 미시령과 남쪽의 철봉산에 걸쳐진 주 능선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외설악, 서쪽이 내설악으로 구분된다. 산세가 아름답고 빼어난 경관과 맑은 계곡 등, 많은 암자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자연 생태탐방으로 사시사철 관광객이 찾는 명산이다.
화자는 설악산을 오르면서 한동안 앞만 보고 올라간다. 한참을 오르다 숨이 가빠 몰아쉬며 잠시 서서 올라왔던 곳을 향해 내려다보니 아득한 산행이다. 때마침 봄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스치며 등산을 재촉한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산 위쪽을 바라보니 운해에 가리어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를 올라가야 정상에 도달할까. 정상을 정복한 쾌감을 미리 예감해 보면서….
5. 맺는말
시조에서 정형 미학은 절제와 균형, 감각을 유지해 시종일관 시(詩)의 김장감이 열림의 공간으로 무한하게 확산시키는 멋이 있다. 그래서 시조의 형식과 율격이 짜임새 있게 직조하는 데 꼭 필요한 절제의 언어를 응축하여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특성을 살려낼 수 있는 구조다. 시조를 구속하는 것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여 언어의 시학적 약속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시조는 언어를 도구로 삼는다.
시조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고 연륜과 사유의 축적으로 뽑아 올리는 것이다. 시인이 생각의 끌을 갈고 그 끌을 벼려서 육중한 바위를 뚫어내는 일은 보상을 바랄 것이 아니다. 오직 자아를 성찰하고 깊은 땅속에 묻혀있는 감성의 뿌리에서 길어 올리는 언어와 모진 역경을 견디며 성찰의 열매를 얻는다. 깊은 사유와 고뇌의 결정체인 시조는 의식을 깨우고 무한한 자유와 큰 위안을 안겨준다.
시어는 이러한 사회 소통을 벗어나서 비유의 영역을 지향해 나간다. 비유가 애매성을 이끌면서 이루는 형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한다. 표현의 아름다움이 서사의 절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이 누적된 사유와 혼돈의 세상을 올바른 눈길로 바라보는 심성의 연마에서 온다. 시조는 과도한 표현을 걷어내고 든든한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 시인에게 주어진 덕목인 동시에 숙명이다. 시조를 쓰는 시각에 따라 환경이 어느 쪽에 놓여있느냐에 밀도가 달라진다.
정인환의 작품을 통하여 그가 자연에 타협하려는 탐구의 원류와 선정후정의 서정적 사유의 호흡을 함께 해 보았다. 그리고 탈속의 산실과 해탈의 도량을 찾는 시인의 모습과 온화한 미덕이 담긴 섬세한 시학도 엿보았다. 지면 관계로 “가시 고개, 적벽강, 갯바위, 청산도, 시골 역, 아이 걸음 등 주옥같은 시편을 다루지 못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정인환 시인의 작품은 지성과 열정으로 포착하여 결연한 의지에 함축된 삶의 의지를 담아 시조로 풀어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여러 작품에 주제와 창작 배경을 살피면서 내재율과 외재율의 의미에 따른 연상을 나름으로 펼쳐 보았다. 향후 한 차원 더 높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조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시조 세계의 지평을 열어갈 유능한 큰 시인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