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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류지(廣隆寺)
고류지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3, 교토의 역사에서 나오는 첫 답사지이다. 고류지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신라에서 보내준 것으로 전하는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이다.
고류지는 603년에 건립된 절로 나라의 호류지(法隆寺),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 등과 함께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7대 사찰의 하나로, 원래 이름은 호코지(蜂岡寺)였다. 창건과 관련하여 <일본서기>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진하승(秦河勝, 하다노 카와카쓰)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쇼토쿠태자가 '나는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이 불상을 모실 자가 없는가'라고 묻자 진하승이 자진하였으며, 고류지의 전신인 호코지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 불상은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으로 추정되며, 진하승은 도래인 하타씨의 후손이었다. 이러한 고류지의 창건에 대한 설명이 고류지 태자전 입구에 ‘고류지 중건비’에 세워져있다. 하지만 둘째 줄 “진하승이 창건했다”의 바로 윗부분에 일곱 글자가 도려내고 메워놓은 흔적이 남아있는바, 이는 진하승이 중국 진시황제의 자손이라고 되어있었던 것으로, 진하승이 신라 도래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은 그들의 속내를 보인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고류지의 옛모습은 장대한 사찰을 이루고, 아름다운 정원도 있었으나, 현재의 모습은 메이지유신때 폐불훼석(불교 배척과 그 유물에 대한 파괴활동)의 피해를 크게 입어 사찰 땅이 여럿 수용되어, 구청 청사, 경찰서, 영화 세트, 주택가가 들어서있다. 또한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는 재앙을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대로 내려오는 불상, 고문서, 회화만은 온전히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소장 문화재로 일본 국보가 12점, 중요문화재 48점이나 된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1982년 절 뒤편에 지어진 신영보전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교토에서 고류지만큼 아스카, 나라, 헤이안, 가마쿠라시대의 불상조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우리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상와 너무도 비슷하여 일본미술사에서도 도래 불상의 상징으로, 한국미술사에서는 사실상 삼국시대 불상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일본 국보 제1호의 영예를 안고 있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고류지에 있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해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1945년 가을,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일본에 왔을 때 이 불상을 보고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는 찬사를 하였다.
이 목조상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자신의 나라에서 제작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여러 증거들을 통하여 살펴본 결과 양식상 명확히 우리나라 삼국시대 형식이고, 일본 아스카시대 불상으로는 아주 예외적이어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 양식이라는 주장에는 이론이 없다.
교토 신간선
교토신역세서 바라본 전망대
교토신역-led 광고
광융사(고류지)-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신라에서 보내준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곳이다.
신영보전-일본 국보12점. 중요문화재 48점이 전시됨
쇼토쿠태자가 건립, 고류지의 전신인 호코지를 창건한 신라 도래인 진하승(秦河勝-하다노 카와카쓰)을 중국 진시왕의 자손이라고 쓰여인던 글을 정정한 흔적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모리미 도미히코가 가장 교토다운 길이라 소개한 곳으로 긴카쿠지에서 난젠지로 이어지는 약 2km의 오솔길. 20세기 철학자 일본 교토대 니시다 키타로가 즐겨 걷던 길에서 유래..
3) 철학자의 길(哲学の道, 데츠가쿠노미치)
교토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을 꾸준히 발표해 '교토의 소설가'이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태양의 탑」, 「요이야마 만화경」의 모리미 도미히코는 가장 교토다운 곳을 묻자 '철학자의 길(哲学の道)'이라고 답하였다. 이름도 고상한 이 길은 긴카쿠지(銀閣寺)에서 난젠지(南禅寺)로 작은 운하를 따라 이어진 2km가 조금 안 되는 이 오솔길로 20세기 초반 일본에 서양철학을 들여온 교토대 철학교수 니시다 키타로가 즐겨 걷던 길이라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드문드문 작은 가게와 카페들이 기다리고 있는 이 벚꽃나무 길은 교토다운 차분함을 대표하는 장소다.
이 길은 일본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비와코 호수의 물이 흐르는 작은 인공운하를 따로 양쪽으로 뻗은 벚나무가 근사하게 자리 잡고 있다. 봄에는 벚꽃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가을에는 핏빛 단풍이 높고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멋들어진 가을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꼭 봄가을이 아니라도 철학의 길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대여섯 시가 지날 때면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붉은빛 노을이 로맨틱하다고 한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겨울에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우러나 사계절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한다.
긴카쿠지- 1994년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됨
긴카쿠지(銀閣寺)
본래 명칭은 히가이야마지쇼지(東山慈照寺)이며 줄여서 지쇼지(慈照寺]이다. ‘긴카쿠지’라는 이름은 비공식적 명칭이며, 에도시대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무로마치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은퇴 후 살 저택으로서 1482년 2월 21일부터 지었다. 그는 공사를 시작한 다음해인 1483년부터 긴카쿠지에 옮겨와 살았다. 본래 이곳에는 대규모 건물들도 다수 있었으나 현재에는 관음전과 도큐도(東求堂)만 남아 있으며 이 두 건물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의 양식은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로 '간가(閑雅)'의 추구에 있다. 외로움을 느낄 정도의 조용함 속에 기품이 있는 것을 '간가'라고 하는데, 긴가쿠지의 건물과 정원에는 '간가'를 추구하는 히가시야마 문화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긴가쿠지은 2층으로 된 간소한 건물로, 1층은 '쇼인즈쿠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쇼인(書院)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선종 사원에서 승려가 독서하는 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실내 채광을 위해 벽에 창문을 만들고, 책상 대신에 선반을 만들었다. 그것이 무로마치 시대가 되자 일반인들의 집에도 도입되어 쇼인즈쿠리 양식의 주택이 발달하였다. 쇼인즈쿠리 양식이란, 독서를 위한 창문과 선반, 다른 한편으로는 도코노마(床の間)라는 공간과 지가이타나(違棚)를 설치하고 바닥에는 다타미(疊)를 깐 방을 의미한다. 훗날 일본 주택 건축의 주류가 된 양식이다.
긴카쿠지의 중심적인 건축물은 관음전이며 ‘긴카쿠’, 즉 ‘은각’이라고도 한다. 정식명칭은 '은각관음전'이다. 관음전은 각기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층으로 지어졌으며 지붕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 조각상이 있다. 1층 신쿠덴(心空殿)은 일본의 전통적인 주택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 조온카쿠(潮音閣)는 중국 사원 양식으로 지어져 불당을 설치하고 관음상을 모셔놓았다.
정원의 북쪽으로는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1486년에 세운 도큐도가 있다. 그 안에는 도진사이(同仁斎)라 하여 차를 마시며 독서를 할 수 있는 방이 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1485년 선종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그는 이 곳에 불상을 모셔 놓고 자신의 개인 사원으로 이용하였다. 도큐도 앞에는 긴쿄지(錦鏡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는 관음전 앞까지 이어진다.
정원은 흰 모래를 이용한 조경이 꾸며져 있는데 이는 긴카쿠지의 명물로서 인기가 높다. 이 모래 정원을 긴샤단(銀沙灘)이라 하며 정원 한쪽에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모래더미는 달빛이 반사되도록 만든 구조물이라 하여 고게츠다이(向月台) 라 한다.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본래 자신의 할아버지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세운 킨카쿠지(金閣寺)를 본보기로 삼아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 했다. 킨카쿠지가 금으로 씌워진 예에 따라 긴카쿠지의 외관을 은으로 씌울 계획을 세웠고 이 때문에 긴가쿠지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러나 건물 전체를 씌울 만큼의 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오닌의 난이 일어나 교토가 파괴되고 물자 조달이 어려워지자 이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결국 긴카쿠지는 옻칠만으로 마감되어 검은 색을 띤 건축물로 남겨졌다.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1490년 1월 27일에 사망하자 건립 중이었던 긴카쿠지는 미완성 상태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뜻에 따라 선종(禪宗) 측에 기증되었고 이로써 쇼코쿠지(相國寺)의 말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불교식 이름을 따와 ‘지쇼지’라 개칭되었다. 이후 긴카쿠지는 간파쿠(關白)였던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별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쇼코쿠지의 말사로서 줄곧 번창하였다.
1952년 3월 29일에 긴카쿠지의 정원이 일본의 특별사적 및 특별명승지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 12월 17일에는 긴카쿠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긴가쿠지 관음전- 은각 관음전이라고도 함. 고게츠다이(-정성스럽게 쌓아올린 모래더미가 달빛에 반사되도록 쌓은 것.향월대), 모래정원(긴샤단)이 유명하다.
은각사(긴카쿠지)- 무로마치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살 저택으로 1482-83년 지어졌다. 현재는 관음전, 도큐도(동구당)만 남았고 국보로 지정됨. 긴교지(錦鏡池) 전경
4) 기요미즈데라(清水寺)
‘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의 기요미즈데라는 교토가 도읍이 되기 이전인 778년 세워진 사원이다. 교토 시내의 동쪽에 있는 오토와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요미즈데라라는 명칭은 이곳에 있는 오토와 폭포에서 유래되었다. 창건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에도시대 초기인 1633년 도쿠가와 이에미스의 명령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1994년에는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기요미즈데라, 동양화처럼 펼쳐지는 극락세계
13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기요미즈데라는 원래 기타카논지(北觀音寺)라고 했다가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오는 물이 맑아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물 맑은 사원)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의 총본산으로 말사(末寺)나 단가(檀家)도 갖지 않은 기요미즈데라는 일종일산일사(一宗一山一寺)의 대본산이다. 본당이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경내 유물 15건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기요미즈데라의 입구에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앞의 것이 니오몬(仁王門), 뒤의 것이 니시몬(西門)이다. 니오몬 기둥에 귀를 기우리면 멀리 떨어진 기둥 근처에서 하는 이야기도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둥을 쓰다듬으면 귀가 좋아지고 좋은 소리만 듣는다는 전설이 있다. 니시몬은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단청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요미즈데라에서 가장 유명한 본당(本堂)은 본존십일면천수관음상을 모시고 있는데 지금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언덕 앞으로 10미터 돌출되어 있는 본당을 15미터의 느티나무 기둥 139개가 받치도록 설계했고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기요미즈데라에 온 사람들이 가장 크게 경탄하는 부분이다. 언덕 위로 돌출된 본당 마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1995년 교토의 대지진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본당 마루에는 무대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예전에 십일면천수관음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바닥의 나무판은 20~30년마다 한 번씩 교체한다고 한다. 한편 ‘기요미즈의 무대에서 뛰어내리는 각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관음보살께 필사의 각오로 기도하라. 그러면 관음보살이 보살핀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할 때는 죽기를 각오하고 매진하라는 의미이다. 본당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을 겹겹이 켜서 만들었는데 십일면관음보살을 상징한다.
기요미즈데라 본당 앞에는 지슈진자(地主神社)라는 사랑점을 보는 돌(love stone) 두 개가 18미터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데 미국 원자물리학자의 연구에 의해 아주 오래된 유물임이 밝혀졌다. 눈을 감고 한쪽 돌에서 출발해 다른 쪽 돌에 무사히 닿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곳에는 수많은 부적이 붙어 있다.
본당 아래로는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온 물이 세 갈래로 흐르는데 각 갈래의 물을 기다란 국자로 받아 마시면 연애 · 학문 · 건강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합격기원’ 등의 소원을 비는 국자를 사용하려면 사용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세 갈래 중에서 두 갈래의 물을 선택해야 하는데 세 갈래의 물을 모두 마시면 욕심이 많아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 갈래 중 어느 물을 택하느냐를 놓고 고민한다.
기요미즈데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은 선물가게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고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서울의 명동거리 뺨칠 만큼 걷기가 어렵다.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연간 400만 명 이상으로 연간 교토를 들르는 관광객 4800만 명 중 거의 10퍼센트에 이른다.
경내를 빙 둘러보다 보면 서쪽에 교토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녁 무렵에는 니시야마(西山)로 지는 새빨간 석양에 매혹된다. 일찍이 구제를 바라고 찾아온 사람들은 이 저녁 경치 앞에 보타락 세계를 현실로 경험하고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기요미즈데라의 관음에게 현세 육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내세의 극락왕생을 부탁하는 것이다.
- 이종호, <세계 불가사의 여행>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 1994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됨. 언덕 앞으로 10미터 돌출되어 있는 본당을 15미터의 느티나무 기둥 139개가 받치로록 설계됨.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 1995년 교토 대지진때도 영향을 받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