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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사랑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푸르미
인천역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京仁線] 은 1896년(고종 33) 3월 29일 미국인 J.R.모스가 한국 정부로부터 부설권을 얻어, 1897년 3월 29일 인천 우각현(牛角峴)에서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중단하였다.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인철도회사(京仁鐵道會社)가 부설권을 인수하여 1899년 4월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 그 해 9월 18일 제물포(濟物浦:인천)∼노량진(鷺梁津) 사이의 33.2 km를 개통하였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되자, 같은 해 7월 8일 노량진∼서울(당시의 서울역은 서대문으로 현재의 이화여고 자리) 사이가 개통되어 서울∼인천이 완전 연결되었다.
경영권은 철도를 부설한 경인철도주식회사에 속하였다가 1903년 11월 1일 경부철도회사에서 매수하여 합병하였고, 1906년 통감부 철도국에 매수되었다가, 10년 총독부 철도국에 이관되었다. 경인선의 복선화는 8 ·15광복 후인 196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1974년 수도권 전철화계획으로 전철화되었다.
‘풍운’의 역사를 간직한 월미도 / 박정훈기자글 펌
월미도(月尾島)는 예나 지금이나 인천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곳 중 하나다. 월미도는 인천의 역사,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월미도는 조선 말 병인양요(1866년)를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이 문호개방의 압력을 넣었던 진원지였다. 개항(1883년) 이후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에 굴복해 ‘제물’로 바쳤던 곳이다.
하지만 월미도에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일본자본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일 합병에서 해방 전까지 전국 최고의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월미도는 다시 ‘전쟁의 상징 터’로 시련을 겪어야 했다. 6.25 이후 50여년 미군기지와 우리의 해군기지로 사용하는 바람에 시민들에게 좀처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금지’였다.
월미도가 수난의 세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열강들이 서울을 공략하기 위해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그 길라잡이 노릇을 한 곳이 월미도였다.
따라서 월미도는 서울 침략의 거점으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함대 사령관 로제(Pierre Roze)의 이름을 따서 해도에 ‘로제 섬’이라고 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개항 후 월미도는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의 세력 다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887년 일본은 우리 정부와 월미도지소자입계약서(月尾島地所借入契約書)를 쓰고 월미도를 찬탈의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 외국인의 토지소유는 개항장 10리 밖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10리 이내에서도 토지소유와 개간에는 법적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외국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인은 한국인 이름을 빌려 개항장 주변의 간석지와 황무지를 개발한 뒤 소유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대상지가 월미도였다.
그 뒤 일본은 1891년 1월 매년 80원(圓)의 지세를 조건으로 우리 정부와 월미도묘지 조차계약을 체결하고 월미도에 석탄창고와 군수시설을 설치했다. 월미도를 군수기자화하려는 ‘계략’이었다.
일본에 ‘밀린다’ 싶었던 러시아도 1896년 8월 조차계획서를 내고 월미도 남서쪽 1만3천400여평을 빌려 석탄창고를 세웠다. 미국 석유회사 ‘스탠더드’도 1897년 12월 월미도에 석유저장소를 건립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일본은 1904년 8월 월미도에서 다른 열강들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월미도에 있던 민가 50여 채와 묘지를 강제로 철거하고 해군기지를 조성했다. 이와 함께 소월미도를 군용품저장소로 만들어 지금의 문화의 거리를 잇는 나무다리를 놓고 철도까지 연장했다
월미도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결정적인 계기는 1914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정했던 각국 지계의 해체였다. 일본인들에게 인천 전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셈이었다.
더욱이 그 해 9월 월미도는 인천에 편입돼 일본인들의 땅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 4월 월미도 동쪽 해면을 돌뚝으로 막아 1천689평을 매립하도록 인천선거주식회사에 인가했다.
그 이듬 해에는 인천 내항에 도크를 건설하면서 한강에서 밀려드는 토사를 막고, 나룻배로 오가던 불편을 덜겸 지금의 대한제분에서부터 월미도 돌출부(지금의 대한제당 인근)까지 1㎞에 달하는 2차선 둑길(堤道)의 축조를 허가했다.
월미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일본은 월미도 산 중턱에 순환도로를 내고 도로 변에는 벚나무를 심어 섬 전체를 가꿨다. 1918년에는 풍치지구로 지정했다.
월미도의 벚꽃놀이는 전국에서도 이름 나 있었다.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를 개통한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20년 4월 월미도 벚꽃놀이를 위한 경인선 화열차(花列車)를 별도로 임시 운행할 정도였다.
철도국은 유명세를 탄 월미도를 임해 유원지로 개발했다. 소형 해수풀장과 오늘날 해수탕 격인 ‘조탕’(潮湯)을 만들었다. 관리권을 넘겨받은 ‘월미도 유한회사’는 월미도 인근 7천평을 매립해 유락시설을 만들었다.
1935년 무렵에는 3층 목조건물인 빈(濱)호텔을 건립했다. 해변가에 50m 대형 풀을 증설하고 밀물 때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설계한 일본식 요정 ‘용궁각’(龍宮閣)도 세워 1937년 6월 영업에 들어갔다.
봄에는 순환도로에 만발한 벚꽃을 즐기는 인파, 여름에는 해변가 수영장에 헤엄치는 인파로 월미도 전체가 북적거렸다. 인천우체국이 1924년 월미도에 자동전화를 설치해 ‘돈벌이’에 나설 정도였다.
인천의 승용자동차영업의 효시였던 별부자동차부(別府自動車部) 등이 밀려드는 인파를 나르기 위해 1924년 4월 월미도 왕복버스를 운행하기도 했다. 월미도 왕복버스는 4월부터 10월까지 오전 8시∼오후 10시 30분마다 운행했다.
‘관광단지’ 월미도는 일본 패망까지 20여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해방 이후 월미도유원지는 시들해졌다.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월미도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 옛 명성을 다시 찾고자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진 못했다. 그러다 한국전쟁 당시 ‘9.15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폭격으로 월미도는 초토화하고 말았다.
신포문화의 거리
인천의 명동인 신포동은 바늘,화장품, 구두, 양장등 우리나라 개화물건이 가장 먼저 들어와 선보인 신문물의 전시장이었다. 신포시장은 쫄면, 만두, 공갈빵, 칼국수 등 인천특유의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개발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월미산공원
월미공원은 50년 간 군부대였던 곳이어서 생태계가 매우 잘 보존돼 있다. 너구리 등 포유류는 물론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 수리부엉이 등 야생조류가 무려 264개체에 이른다. 공원을 따라 걷는 길도 아름답기 그지 없어 4계절 내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월미공원 산책길은 제1산책길(숲과 바다가 함께 하는 길), 제2·3산책길(지름길), 제4산책길(조깅
길) 등 코스별로 즐길 수 있다. 얼마전 이 곳엔 인천항과 서해바다를 더욱 멀리 볼 수 있는 전망대와 우리 나라 정원 양식 중 조선시대의 대표적 정원모습을 재현한 '한국 전통정원'을 궁궐·별서·민가 정원 등 3개 테마로 조성하였다. 이와 함께 해외로 이주한 한국인의 발좌취를 기록하기 위한 '한국 이민사박물관'도 건립될 예정이다.
월미 문화의 거리
1989년 7월 조성된 월미 문화의 거리는 휴일엔 각지에서 수십만 인파가 찾는 볼거리, 탈거리, 먹거리를 한 군데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문화의 거리엔 분수대, 야외무대, 워터스크린, 친수공간 등으로 꾸며졌다. 열린 공간 야외무대에선 매주 갖가지 공연이 펼쳐지면 워터스크린은 바닷가에서 만나는 신비한 영상이다.
월미도유람선
국내 최초로 만들어졌고 1천500t이란 최대 규모의 코스모스 유람선은 움직이는 천국이다. 유람선은 1·2층이 공연장, 3층 커피숍, 4층은 전망대로 꾸며졌다. 1시간20분씩 인천 앞바다를 관람하며 선상에서 즐기는 '쇼'는 잊지못할 추억을 남겨준다.
월미도를 출항하여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경인에너지와 화력발전소,영종대교, 작약도를 지나는 월미도 유람선은 해상 20키로미터를 약 1시간 20분동안 운항하며 하루에 4-5차례운항한다.
인천항
인천항은 부산,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한 이래 120년 동안 우리 나라 주요 무역항으로 발전해 왔다. 인천항은 현재 갑문을 중심으로 크게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되며 외항은 북항, 연안항, 남항 그리고 새롭게 인천신항이 개발 예정이며 인천항 내항만 104만 평으로 문학월드컵경기장의 약 500배 크기다.
인천항은 갑문식 dock도크형태로 되어있는데 1968년 착공, 1974년 완공한 세계적으로 6번 째로 규모가 큰 인공도크이다. 도크란 배를 주변이 막힌 곳에 넣고서 물을 빼고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말하며 갑문은 배가 도크에 들어온 후 바닷물이 유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문이다. 서해안 특히 인천의 경우 조수간만의 차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이러한 시설을 고안해 냈다.
인천항은 공영부두 1부두와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7개부두(TOC부두)로 이뤄진다. 인천항 내항은 48개 선박을 동시에 댈 수 있고 1만t~5만t에 이르는 선박이 하루 33척 정도 들어오므로 시간만 잘 맞추면 배가 드나드는 것을 볼 수 있다.
6부두는 펄프, 자동차, 원목, 철재 등의 다양한 화물을 처리한다.
7부두는 양곡전용부두로 세계 최고의 양곡처리장이다. 전국 70%의 곡물을 이 곳에서 처리한다. 곡물은 핀을 박아서 육지와 연결한 잔교 에 내려져 곡물을 수송하는 벨트컨베이어를 거친 뒤 곡물저장시설인 싸이로에 닿는다. 양곡은 주로 미국, 캐나다, 중국 등에서 들여온다. 양곡은 가축사료로 판매된다.
8부두는 고철과 규사 등을 취급한다. 우리 나라 원목수입량의 70%를 수입하고 있기도 하다. 수입원목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 들여오며각각 건축용과 가구용으로 가공된다.
1부두는 공영부두로 인천항에서 가장 오래됐고 가장 많은 배(11척)를 접안할 수 있는 곳이다. 1부두의 3선석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백범 김구 선생이 노무자로 일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지금은 북한의 남포항을 주 1회 운항하는 배가 출항하고 있다. 배는 민간단체가 지원하는 대북지원물자를 실어보내고 북한이 생산한 직물과 냄비 등을 싣고 온다. 또 인천과 위해(청도) 간을 주 3회 운항하는 뉴골든브릿지호도 이 곳에서 입출항을 한다.
650명의 승객과 250TEU의 컨테이너 적재가 가능하다. 현재 인천~중국 간 10개 카페리노선 가운데 4개 노선이 내항을 통해 운항된다. 나머지 6개 노선은 제1국제여객부두에서 운항된다. 지난해 인천항을 통한 국제여객은 90만 명이며 연안여객은 120만 명 정도였다. 제2국제여객터미널은 88년 서울올림픽 때 구 소련 선수들의 입출국수속을 위해 임시터미널로 건립했다가 1990년 한 중 항로 개설과 함께 2002년부터 지금처럼 운영하고 있다.
2, 3부두는 철재, 원목, 잡화, 산물 부두이며 4부두는 컨테이너 전용부두다. 4부두에선 6개의 갠트리크레인이 시간당 25~32개 정도의 컨테이너를 하역할 수 있다. 그 맞은 편의 KD(Knock Down)센터는 부품을 반제품 상태로 수출하는 곳이다. 그럴 경우 관세 면에서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 GM대우가 운영 중인 곳이며 2009년까지 5만 명의 고용창출효과와 8조4천억 원의 경제적효과를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IFEZ 홍보관(갯벌타워)
갯벌타워21층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미래상을 전시하고 설명하는 홍보관이 위치하고 있다. 인천 경제 자유구역은 청라, 송도, 영종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각각 비즈니스, 물류, 레저를 중심으로 개발하고 있어 이곳에 가면 인천 뿐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홍보관 옥상에는 송도지역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송도유원지
1963년 조성된 서해안 최대의 종합 유원지인 송도유원지는 다양한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염색체험등의 체험학습도 가능하다. 겨울철에는 눈썰매, 여름에는 해수욕장으로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해수욕장은 바닷물을 끌어들여 쾌적한 환경속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해수탕
짠물목욕은 인천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중 하나이다. 198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해수탕은 약
20여개 업소가 성업중이다. 지하 200미터 암반층에서 바닷물과 거의 비슷한 성분을 가진 무공해 지
하수(일명 해수)를 뽑아올려 별도의 정수과정 없이 바로 끓여 목욕물로 사용하고 있다. 해수탕은
염분농도가 높아 몸안의 노폐물을 끌어내는 삼투압 작용이 잘 되는 것이 특징이다.
인천 시립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국내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서 개장하였다. 2006년 7월 1일 내부시설과 전시물을 대폭 확충하여 새롭게 문을 열었으며, 약 37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1역사실'은 '선사시대~고려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 곳은 문학산 일대와 계양산 주변이 선사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문화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도록 꾸며졌다. 계양구 동양동에서 발굴 조사된 삼국시대 초기 토광묘를 비롯, 인천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인주 이씨 가문의 '이자연 묘지명' 등의 유물을 만난다. 경서동 출토 녹청자를 비롯해 강화 선두리에서 출토한 도기와 창후리 고분군에서 출토한 도자류를 통해 고려시대 도자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다.
'2역사실'은 '조선시대~일제강점기' 유물을 만나는 장소다. 남동구 도림동 파평 윤씨 소남종택의 고문서는 주자성리학에 충실한 사대부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1883년 개항을 기점으로 밀려드는 서구문물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인천의 시련을 체감할 수 있다. 1918년 완공된 인천항 도크와 일제강점기 아래 최대 호황을 누리던 시기 인천의 거리 모습도 눈길을 끈다.
'공예실'에선 원저단경호, 광구병 등 삼국시대 토기에서부터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에 이르는 도자기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불상과 보살상, 중국 명대에 제작한 청동관음보살 상도 만난다. 명대 관음보살상은 특히 제작시기와 발원내용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남아있는 작품이다. 아울러 조선시대 후기 사대부가에서 사용한 목제품도 눈에 띈다.
조선시대 주요 그림과 서예는 '서화실'에 전시하고 있다. 도교와 불교 관련 인물을 그린 도석인물화를 비롯, 조선시대 사대부와 화원화가가 그린 문인화와 산수화, 조선 후기 유행한 민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강세황, 김홍도, 이하응, 정수영과 같은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과 대각국사 의천의 탑비, 북관대첩비의 탁본도 흔히 볼 수 없는 작품이다.
기증실에선 1946년 개관 이후 지금까지 기증한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야외전시실, 우현마당, 체험교실도 운영 중이다.
상륙작전기념관
한국 전쟁 중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성공으로 이끈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전쟁기념관이다. 이기념관은 휴게실, 공연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실내외 전시장에는 남북한 군사장비와 생활모습을 비교한 사진을 비롯해 전쟁 당시 사용했던 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한 멀티비젼을 상영하기도하여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능허대
능허대는 백제가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27년(서기372)부터 웅진으로 남천한 개로왕21년(서기 475)까지 중국으로 내왕하는 사신들이 출발하던 나루터로서 능허대 밑의 한나루에서 배를 띄웠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어서 육로가 막혀버렸기 때문에 한나루에서 배를 띄워 덕적도를 거쳐 산둥반도와 등주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이 남북조로 갈려서 대립하고 있었고 백제는 주로 남조와 통교하고 고구려는 북조와 통교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능허대 중국행은 고려를 거쳐 조선조 광해군때까지 이어진다.
근래 능허대는 주변이 매립되어 주택지로 조성되고 앞으로는 해안도로가 있어 옛모습을 찾아볼 수없게 되었으므로 1988년 주변에 연못등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과거에는 송도쪽에서 청향산 자락이서북쪽 바다. 즉 현재 채석장이 있는 산 쪽으로 뻗어 반도형 구릉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구릉 끝의 조그만 봉우리가 능허대다. 그리고 이 구릉 동쪽 송도역 쪽으로 하나의 조그만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포구가 대진이다. 이포구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는 소둑이라는 능허대에서 뻗은 둑이 있어 방파제 구실을 한다.
사신들이 바람때를 기다리던 곳이 능허대라고 하면 배에 오른곳이 바로 능허대 밑의 대진이다. 그러므로 어느책에는 사신이 떠난곳을 능허대라고 하고 또 어느 책에서는 대진이라고 한것이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