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부산으로 출장갈 기회가 있어 내려가다가 밀양을 잠깐 들린다.
이창동 감독과 송광호, 전도연 출연의 영화 밀양으로도 잘 알려진 지방의 소도시,,
밀양은 의외로 사명대사의 생가와 얼음골, 표충사가 있는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서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부산으로 향하는 도중 들러본 밀양의 하늘에 밭고랑구름이 가득하다.
밀양 시가지 모습
영남루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와 밀양강 수로를 접한 교통의 요충지로 예부터 진주 남강의 촉석루와 평양 대동강변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유명하며, 무봉사석조여래좌상, 천진궁, 아랑각, 박시춘 옛집, 밀양아리랑노래비가 있다.
밀양강변에서 바라본 영남루의 모습
팔작지붕 형태의 목조건물이 아름답다.
원래 이 건물은 신라시대 건물이었으나 폐사되었다가 고려 공민왕때 신축하였고, 조선 세조때 규모를 크게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병화로 불타게 되고 인조때 이인재 밀양부사가 개창하여 현재까지 내려온다.
본루는 조선 후기의 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큼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천진궁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옛집
한국 가요계의 거목인 작곡가 박시춘(본명,박순동)은 밀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여러 악기를 연주하다가 <몬테카를로의 갓난이>로 작곡가로 데뷔, 이후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서울> 등 대중의 사랑을 받은 가요 약 3,000곡을 작곡하여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의 서민생활을 애환을 달래는데 크게 기여한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전우여 잘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수많은 국민 애창곡을 작곡하여 한국 가요계의 뿌리이자 기둥으로 평가받는다.
영남루에서 바라본 밀양강
밀양관아의 모습
월연터널의 모습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시 사용되던 철길 터널로 1940년 경부선 복선화가 이설되면서 지금은 자동차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높이 3m, 길이 약 130m로 백송터널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산책하기 좋고 영화 똥개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월연정
월연정은 원래 월영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 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 선생이 1520년에 새운 정사이다. 월연정은 대청인 쌍경당과 월연대 등 주건물을 세우고 건물 옆으로 쌍청교, 영월간, 수조대, 탁족암 등의 유적이 추가되는데, 안타깝게도 입구를 자물쇠로 막아 일부만 엿볼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때를 만나면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귀향하여 자연을 벗삼아 지내곤 했다.
이때 귀향한 사대부들이 공들여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정자를 짓는 것이었다. 월연정은 1525년 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선생이 1519년 일어난 기묘사화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세운 정자이다.
월연정은 전라도 담양의 소쇄원과 비교되는 정자로 월연대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이 집합하여 세워져 조선시대 일반 정자 건축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월연정 뒤편에서 바라본 밀양강
점심을 해결할 식당
대설옥은 24시간 가마솥에 직접 고아낸 사골육수를 자랑하고 매스컴에도 올랐던 식당인데,,, 내 입맛이 까다로워서일까??
내 입에는 그리 썩 당기는 맛은 아니었다. 갈비는 많이 들어 있었다.
위양못 완재정
위양못은 신라시대 농사를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로 양민, 평민을 위한다는 의미로 위양이라 이름되었다.
못 가운데 섬위에 안동 권씨가 세운 완재정이 있고, 주변으로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들이 많이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데 특히 봄철이면 이팝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하얀 자태를 뽑내어 걷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전통가옥 체험마을의 어느 마당가에서 보이는 수탉이 위세를 뽐낸다.
이곳에서는 전통가옥 체험을 할 수 있고, 숙박 및 식사가 해결된다.
표충비각
표충비는 임란 당시 승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전쟁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왜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3천 명을 귀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사명대사(유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2년 남붕선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높이 4m의 비석은 일반 비석과 달리 검은색 대리석으로 건립되었고, 받침돌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고, 앞 뒤면에 표충사의 내력과 사명대사, 서산대사(휴정), 기허대사(영규)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국가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준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한데 이는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여 신성시되고 있다.
갑오동란 때 서말의 땀을 흘렸고, 한일합방시에 4말6되, 기미년 삼일운동때 5말7되, 8.15해방때 3말8되, 6.25사변때 3말8되, 5.16혁명때 5말7되, 박정희 대통령 서거때 10시간동안 한출, 기타 미얀마 아웅신테러, 북한 어뢰정, 등등 땀흘린 흔적이 전해진다.
밀양 무안리 향나무
높이 1.5미터의 수령 약 300년 된 향나무는 녹색 우산을 연상케 옆으로 퍼져 있다. 173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가 사명대사의 표충비를 이곳에 세우면서 기념으로 식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옆쪽에 건립된 사찰 내부에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영정과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두루 두루 향을 피워 올렸다.
만운재
밀성대군 박언침을 경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운 재사
밀성대군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남이며, 밀성 박씨의 싱조로 받들어지는 인물. 재사는 홍문관 시독을 역임한 교리 박해철에 의해 1927년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건물로 세워졌는데 잠겨있어서 내부를 볼 수 는 없었다.
담벼락 기단부에 기와를 얻어 층을 나눈 특히한 모습이다.
사명대사 유적지 내의 사명대사 동상
사명대사 생가
조선 중기 역사속에서 가장 위대한 고승 사명대사.
이분에 대해 기록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다.
사명당 유정은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나 "번뇌를 하지않고 쓴 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로 깨닫고 부모가 모두 죽자 김천 직지사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이 후 묘향산 보현사에 있던 서산대사 휴정을 찾아 그의 제자가 된다.
사명대사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승병을 모아 전쟁에 참전하여 의승도대장이 된다. 이 후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쟁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동안 머물면서 약 3천명의 조선인 포로를 귀환시킨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다가 해인사에서 제자들을 설법하던 도중 그 자세로 입적하였다. 나라에서는 대사가 죽은 이후에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시간이 훌쩍 흘러 오후도 막바지로 접어든다.
서둘러야만 만어사까지 다녀올 수 있을듯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만어사 암괴류
만어사 절 앞으로 펼쳐진 거대한 돌너덜 지대
삼국유사에 의하면 수로왕 때 가락국의 옥지라는 연못에 독룡이 살고 있었는데 이 산에 살고있던 나찰녀와 사귀면서 뇌우와 우박을 일으켜 4년동안 오곡의 결실을 방해하였다. 수로왕이 주술로써 이를 금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인도의 부처님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부처님은 여섯 비구와 1만의 천인을 보내 독룡과 나찰녀를 항복시키고 가르침을 내려 모든 재앙을 물리치게 된다. 수로왕은 부처님의 은덕을 기리어 만어사라는 절을 이곳에 지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목숨을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 무척산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가 새로 살곳을 마련해 달라 부탁한다. 스님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이 있는 곳이라 알려준다. 왕자가 길을 나서자 수많은 물고기떼가 그 뒤를 따르는데 왕자의 발길이 멈춘 곳이 바로 만어사이다. 후에 왕자는 큰 미륵돌로 변하였고, 따르던 물고기들은 크고작은 돌덩어리들이 되었다한다. 이 돌들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고 하여 경석으로도 불린다.
만어사 삼층석탑
고려시대 만어사가 건립될 당시 세워진 석탑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만어사는 1181년에 창건되었고, 삼층석탑 뒤편의 넓은 터가 만어사 자리인데 현재는 법당자리가 옮겨져 있다. 기단부는 고려시대 석탑에서 흔히 보이는 단층 기단으로 기단이나 몸돌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으나 상륜부가 없었는데 후에 별개의 석재를 다듬어 상륜부를 대신하였다 한다.
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부족하지만 전체적으로 균형미와 안정적인 비례감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미륵전 내부의 미륵석
높이 약 5미터의 미륵석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모습인데 이 바위에 기원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만어사 절마당 한 곳에 놓여있는 소원석
불전함에 불전을 올리고 기원을 하고 돌을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소원 내용에 따라 돌이 들리면 성취되고, 돌이 안들리면 소원도 물거품이 된다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부처님만이 아실 일이다.
나도 들어봤지만 꽤나 묵직하다.
삼층석탑 뒤로 해가 저물고 있다.
세상에 무엇이 저물면서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사람도 세상을 살다가 버릴 때는 저렇게 아름답게 저물 수 있을까??
지붕으로부터 어둠이 내려앉는 만어사를 등뒤로 하고 서둘러 하산한다.
스님의 저녁 불경소리에 묻혀 어디선가 텅~ 텅~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만어석에 돌을 던져보는 모양이다.
소원은 이루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