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道碑 碑文>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成均館祭酒諡文敬任聖周神道碑文敬公豐川任公諱聖周神道碑
문경공(文敬公)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辛卯 肅宗37 ~ 1788戊申 正祖12) 공(公)은 18세기 조선조의 훌륭한 유학자로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율곡 이이(栗谷 李珥),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불린다. 이 글을 지은이는 유년시절부터 공의 산소 앞을 오가며 그 명성을 듣고 존경하여 오면서 유학을 공부하여 왔는데 공의 9세손 이며 고향 선배인 임항빈(任恒彬)의 부탁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공은 본관(本貫)이 豐川(풍천), 자(字)는 중사(仲思), 호(號)는 녹문(鹿門)이다. 공은 시조 온(溫)의 21세손,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 자송(子松)의 15세손, 참지문하부사공(參知門下府事公) 구(球)의 13세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죽애(竹崖) 열(說)의 8세손이며, 이조판서겸양관제학(吏曹判書兼兩館提學) 의백(義伯)의 현손(玄孫)이다. 공은 1711년(辛卯) 음력 7월 17일 청풍부 노은동(현,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서 아버지 함흥판관 임적(任適)과 어머니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5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글자를 배우자 벽에 “임사동(任獅同;任聖周)은 배 안에 오백 자가 있다”를 써놓을 만큼 총명하여 신동(神童)으로 불리었다. 12살 때 공자(孔子)의 초상을 손수 그려 다락에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여러 형제들과 함께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참배한 뒤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가풍을 노복에 이르기 까지 온 집안이 함께 실천하도록 하였다. 16살 때 율곡(栗谷)의 글을 읽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묘리(妙理)를 깨달아 성현의 큰 뜻을 세웠다. 이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부에 전념하고 당시 율곡학의 적전(嫡傳)인 도암(陶菴) 이재(李縡)에게 편지를 올려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청주 옥화대(玉華臺)에 들어가 3년 상을 치르면서 형제 및 학자들과 경서를 강독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1730년 19살 때 경기도 용인의 한천정사(寒泉精舍)를 방문, 도암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734년까지 약 5년 동안 스승 도암과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한천어록(寒泉語錄)이다. 1733년(英祖9)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사마시(司馬試)에 형 명주(命周)와 함께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당시 고관(考官)인 조명리(趙明履)는 공이 쓴 대귀신문(對鬼神問)을 “큰 선비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그 이듬 해 홀로 화양산(華陽山)에 들어가 『중용(中庸)』 공부에 정진하였고, 1736년 겨울 송명(宋明欽), 김원행(金元行), 송능상(宋能相),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회덕(懷德)의 옥류각(玉溜閣)에 들어가 『대학(大學)』을 강독하였다. 그 이듬해 여주(驪州)로 이사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민우수(閔遇洙), 김양행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1750년(英祖26) 세자(世子)의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임명되어 처음 벼슬길에 나아간 이후,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공조정랑(工曹正郞),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1754년 임실현감(任實縣監)으로 나아가 공명인서(公明仁恕)와 정기격물(正己格物)의 두 원칙으로 백징(白徵)에 관한 민원(民願)을 해결하고, 군자당(君子堂)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풍속을 교화하였으며, 세미(稅米)를 폐지해 주는 등 농민들의 불편 해소와 권익을 보호하였다. 1758년 형제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공주군 명탄면 녹동(鹿洞 :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동)에 은거하여 학문에 종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에 후학들이 공을 녹문선생(鹿門先生)이라 불렀다. 1762년(英祖38) 정조가 동궁(東宮)에 오르자 세자익위사위솔(世子翊衛司衛率)에 복직되어 약 5년 동안 세자교육에 전념하였다. 1767년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에 이어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771년 봄 양근군수(楊根郡守)가 되었을 때도 한결같이 임실에 있을 때와 같았다. 당시 대소(大小)의 공역(公役), 세곡(稅穀) 운반 등 과중한 부과징수(賦課徵收)로 민폐가 심하였는데, 공은 고마청(雇馬廳)을 신설하고 경창(京倉)에 대동미(大同米)를 납부할 때 아전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 공이 떠난 뒤 용문강(龍門江)의 뱃사공이 “이 배는 임후(任侯, 임성주)의 배다”라고 칭송하였다. 1773년 전주판관(全州判官),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임명받고, 이후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74년 성천부사(成川府使)에 부임하여 향관(鄕官)의 부조리 방지를 위해 지역 장로(長老)들을 소집해 향관 임용에 관한 세부 규정을 만들어 공포하고, 공정한 인사를 시행코자 하던 중 사헌부 관리의 부당한 보고서로 인해 억울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은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았다. 1782년 공은 온 가족과 함께 누이동생 윤지당(允摯堂)이 사는 강원도 원주(原州) 산호(山湖)로 들어가 5년여 동안 자연을 감상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모정(慕情)의 세월을 보내고 1786년 공주 녹동으로 돌아와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여생을 보내다가 1788년(戊申) 음력 3월 6일 78세로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부인은 네 분으로 신창맹씨(新昌孟氏), 은진송씨(恩津宋氏), 남양홍씨(南陽洪氏), 창녕성씨(昌寧成氏)인데, 넷째 부인 창녕성씨만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조(照), 차남은 후(煦)다. 형 명주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고, 동생 정주(靖周)는 공의 문집을 간행했고, 누이동생 윤지당은 오빠 녹문선생에게서 배워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 성리학자가 되었다. 공은 헌종(憲宗) 때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의 건의로 문경(文敬)의 시호(諡號)를 받고,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건의로 ‘가선대부대사헌(嘉善大夫大司憲)에 추증(追贈)된 후, 다시 조두순의 건의로 자헌대부이조판서겸성균관좨주(資憲大夫吏曹判書兼成均館祭酒)에 추증(追贈)이 되었다. 공의 묘소는 1788년 5월 충북 청원군 문의면 덕지리에 모셨는데, 1802년(壬戌) 공주 녹동(녹골)으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1816년(丙子) 충남 연기군 동면 명학리 산42번지 황우산 아래(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산42번지)로 이장하였다. 여기에는 부인 신창맹씨와 창녕성씨가 함께 합장되어 있다. 공의 저술은 매우 많은데, 「한천어록(寒泉語錄)」, 「옥류강록(玉溜講錄)」, 「녹려잡지(鹿廬雜識)」 등이 수록된 『녹문집(鹿門集)」, 26권 13책이 있다. 공의 문인으로는 임정주, 임윤지당, 임노(任魯), 박경기(朴慶基), 이광정(李光鼎) 등이 있다. 공은 평생 오로지 성리학을 연구한 순정(醇正)한 유학자로서, 율곡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율곡학파 내에서 일어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 심체(心體)의 본원(本源)에 대한 가치논쟁(價値論爭)에서 이기동실(理氣同實)과 ‘심성일치(心性一致)’의 입장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심(心)과 성(性)을 구분하지 않는 일원적(一元的)인 심체를 말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심은 도덕을 실현할 수 있는 순수하고 역동적인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인간의 도덕능력을 성(性)만이 아닌 심(心)의 차원에서 확보함으로써,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이기지묘설(理氣之妙說)을 학문적으로 명쾌히 논증하였다. 이러한 공의 성리학은 그동안 주기론(主氣論), 유기론(唯氣論) 등으로 잘못 이해된 바 있으나, 손흥철(孫興徹) 등 여러 학자들이 공의 학문은 정통 주자학과 율곡학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독창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비록 늦었으나 이제서야 작은 비를 세워 공의 높은 학문과 덕을 추모하게 되니 어찌 사문(斯文)의 다행이 아니랴.
명(銘)에 이르기를, 수사(洙泗)에 연원(淵源)하고, 무이(武夷)를 돌아 율곡(栗谷), 도암(陶庵)을 이으니, 아! 그 학문 높고 깊어라. 옥화대(玉華臺), 화양산(華陽山), 옥류각(玉溜閣)에서 갈고 닦았도다. 이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 성범일치(聖凡一致), 이일분수(理一分殊), 기일분수(氣一分殊)의 성리묘도(性理妙道) 만세에 길이길이 빛나도다.
2017년 4월 2일(陰 丁酉 三月 六日)
黃義東(忠南大學校 大學院長) 지음
任甲淳(忠州書藝協會 會長) 씀(頭篆文)
保寧 巨門藝石(任恒烈) 施工
豐川任氏鹿門公派宗中 근수(謹竪)
(회장 泰彬, 이사 尙爀, 英爀, 恒彬(總括), 杞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