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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관광객의 시선으로 고향 풍경을 바라보다
클로드 모네, <절벽 위의 산책>, 캔버스에 유채, 66.5x82.3cm, 1882,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1860년경부터 파리는 칙칙한 중세 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산뜻한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오스망 남작이 추진한 도시개발 덕분이다. 노동자와 도시빈민이 거주하던 열악한 주거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불바르(Boulevard)’라고 불리는 대로를 만들고 광장을 조성했다. 요즘 우리의 경우로 치자면 뉴타운 개발이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1860년을 기점으로 파리는 도심과 근교를 잇는 대중교통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듬해 최초로 프랑스 관광지를 소개하는 책자가 발간되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했을 때, 시외로 나가서 여가를 즐기는 게 당시 파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파리에서 가까운 노르망디 지역은 파리지앵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였다. 게다가 1861년에는 높이 180미터에 달하는 철교가 건설되었는데,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와 근교를 잇는 철도의 발달이 이전과 다른 공간 감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파리라는 공간의 확장인 동시에 시공간 자체의 축소였다. 지리상으로 한 지점에서 또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은 시간을 전제하기 마련인데, 거리 이동의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바로 시공간의 축소인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네의 그림들과 이런 현상들은 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모네는 이런 근대화나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하는 자연의 의미를 꼼꼼하게 따져보는 순간 숱한 의문의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네는 자연을 그렸다기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시선은 파리에서 온 ‘관광객’의 것이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따라서 모네의 그림은 귀스타브 르 그레(Gustave Le Grey)나 앙리 르 섹(Henri LeSec)의 사진을 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추상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양미술사에서 회화와 사진은 공생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모네의 그림은 이런 사실을 적절하게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모네의 그림은 르 그레나 르 섹의 사진처럼 초기 관광산업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공화주의에 기반을 둔 프랑스 민족주의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적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영토의 개념, 다시 말해서 프랑스의 노르망디가 상징하는 영토의 끝이라는 의미를 재현해서 하나의 파리, 더 나아가서 하나의 프랑스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모네의 <절벽 위의 산책>이 보여주는 건 파리의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파리지앵의 시선이다. 나폴레옹 3세의 개발 정책을 통해 르아브르는 파리의 일부분으로 통합되었다. 센 강이 휘감아 흐르는 ‘하나의 파리’가 완성되었고, 이 통합의 공간이 바로 프랑스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절벽 위의 산책>이 보여주는 화사한 색감과 현란한 빛의 흐름은 이렇게 역동하는 파리의 발전과 거기에서 살아가는 파리지앵의 여유로움을 암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모네는 르아브르에서 성장했다. 그렇다면 모네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시선은 관광객이라기보다,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화가의 시선이 아닐까? 물론 이런 추측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런 의문을 좀 더 밀고 갈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네의 시선은 근대화라는 것이 어떤 미학적 효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근대화이다.
이걸 레이 초우(Rey Chow) 같은 미국의 학자는 ‘원시적 열정’이라고 불렀다. 항상 자신들이 부대끼며 살던 공간을 원시적인 것, 또는 기원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게 원시적 열정의 작용이다. 그러니까 예전 같으면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았을 풍경이나 사물이 갑자기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주목을 받았던 <워낭소리> 같은 다큐멘터리도 이런 경우에 속한다. 다큐멘터리의 취지나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다큐멘터리가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까닭은 도시화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농촌의 풍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풍경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도시와 공존하고 있지만,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영화가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에 영화에 등장한 시골마을을 찾아가서 할아버지와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이 발생했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도시의 관객들에게 영화를 통해 재현된 실제 공간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무관한, 자신들이 찾아가서 발견해야 하는 관광지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다.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1796-1875) 자화상
이와 비슷한 일들이 19세기 파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이 태어난 곳을 낯설게 만드는 새로운 미학적 시선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인상파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상파들만 이런 작업을 했던 건 아니다. 인상파에게 영향을 미친 화가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카미유 코로라는 화가의 작품에서 이런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전에 도쿄에 갔을 때, 나는 우연히 일본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 세계의 코로 작품을 거의 다 끌어 모은 특별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코로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덕분에 그곳에서 인상파와 코로의 상관성에 대해 깊은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카미유 코로, <보베 근처 마리셀의 교회>, 캔버스에 유채, 55x42cm, 1867, 루브르 박물관, 파리
코로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풍경은 흥미롭게도 숲에서 마을이나 도시로 들어오는 입구들이다. <마리셀의 교회>도 이런 풍경을 보여준다. 교회 건물의 모습을 전면에서 그리거나, 교회 건물의 배경으로서 숲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숲의 오솔길을 따라 저 멀리 교회가 보이는 광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중세 시대였다면 이 시선의 주인공은 순례자일 테지만, 코로의 그림은 분명히 근대의 시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그 시선의 주인공은 관광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카미유 코로, <파르네제 정원에서 바라본 콜로세움 전경, 오후>, 캔버스에 유채, 23.2x34.8cm, 1826,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다는 건 이탈리아의 풍경을 그린 코로의 다른 그림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르네제 정원에서 바라본 콜로세움 풍경, 오후>는 오늘날 로마를 찾은 관광객들에게도 익숙한 ‘포토 포인트’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물론 이런 코로도 모네에 비하면 여전히 고전적이다. 모네는 코로에 비해 훨씬 더 구체적인 시선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시선은 익숙한 것들과 결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근대의 미학이었다.
2.꿈을 안고 파리에 모인 세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캔버스에 유채, 98x128.5cm, 1870, 오르세 미술관, 파리
오늘날 우리가 인상파라고 부르는 일군의 화가들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인물들을 꼽아보라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보들레르가 있고, 마네가 있으며, 또한 마네의 친구 드가도 있다. 그리고 별반 알려져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인상파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프레데리크 바지유이다. 인상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바지유라는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대개 인상파라고 한다면, 모네나 피사로, 더 나아가서 르누아르나 시슬레 정도를 생각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마네나 드가는 인상파의 일원으로 간주되긴 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인상파와 엮이는 것을 그렇게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대로 보나 출신 계급으로 보나 이들은 인상파의 ‘젊은 악동들’과 자신들을 무의식적으로 구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두루뭉술하게 이들을 인상파라고 부르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살롱 화풍과 다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이외에 뚜렷한 공통분모를 찾기 어렵다. 여하튼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면서 한 배를 타고 있었던 셈이다.
파리에 모인 바지유, 모네, 르누아르
인상파의 탄생 과정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1862년 모네는 군대에 지원했다가 지병으로 인해 복무를 그만두고 고향인 르아브르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모네는 여름 내내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와 어울렸다. 용킨트는 네덜란드 출신 풍경화 화가인데, 주당에 색골이어서 젊은 모네의 관심을 끌었다. 용킨트는 모네를 다시 파리로 보내서 화가 수업을 계속 받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만약 용킨트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상파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모네는 다시 파리로 와서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던 샤를 글레이르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모네는 처음 파리로 상경해 수이세 아카데미에서 화가 수업을 받을 때 피사로를 만나 의기투합했는데, 물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네는 글레이르의 스튜디오에서 르누아르와 바지유를 만나서, 예전에 피사로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그림에 대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영국 BBC에서 만든 <인상파 화가들(The Impressionists)>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바지유와 모네, 그리고 르누아르가 카페에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에서 바지유는 가업을 이으라는 부모의 권유와 화가라는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진지한 청년으로 그려진다. 바지유는 몽펠리에에서 태어나서 부유하게 자랐다. 프로테스탄트였던 부모는 바지유에게 사업을 권했지만 그는 화가에 뜻을 두고 있었다. 마네의 경우처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바지유도 부모를 설득해서 화가 수업을 받기 위해 파리로 왔던 것이다. ▶프레데리크 바지유 자화상(Frédéric Bazille, 1841-1870)
파리에 모여든 이유나 과정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패기와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패기와 열정을 감안한다면, 이들 셋이야말로 인상파라는 거대한 나무를 자라나게 만든 씨앗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스망의 도시개발로 웅성거리던 파리에서 이들은, <풀밭 위의 점심>이 살롱 전시를 거부당한 후 미술사 최초로 ‘개인전’이라는 새로운 전시 형식을 만들어낸 마네를 옹호하고, 마네의 편에서 고리타분한 살롱의 미학을 질타한 젊은 화가들이었다.
초기 인상파의 진실을 보여주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풍경
바지유의 그림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는 바로 이렇게 혈기 방장했던 초기 인상파의 진실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그림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들이 설왕설래하지만, 정확하게 통합할 수 있는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명확한 것은, 이 그림에서 초기 인상파를 지배했던 새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평범한 아틀리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여기에서 보이는 아틀리에의 분위기야말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와 이 그림을 비교해보면 이 말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아틀리에>, 캔버스에 유채, 361x598cm, 1854/55, 오르세 미술관, 파리
쿠르베 역시 자신의 그림에 여러 지인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예를 들어서 오른쪽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책상 위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나이가 보들레르이다. 바지유의 그림도 자신의 지인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을 보면 바지유는 지금 이젤에 걸린 그림을 완성해서 지인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인들은 누구일까?
역시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당시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조각가 자샤리 아스트뤼크와 모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들도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르누아르나 시슬레일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에드몽 메트로인데, 바그너의 음악에 홀딱 반한 바지유의 친구였다. 바지유는 이젤 앞에 서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네에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마네에 대한 존경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프레데리크 바지유, <화장>, 캔버스에 유채, 132x127cm, 1870,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바지유의 아틀리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은 모네와 르누아르, 그리고 자신의 그림들이다. <화장>도 보이고, <투망을 든 어부>도 알아볼 수 있다. 이 아틀리에는 가난해서 작업실을 임대할 수 없었던 르누아르와 함께 쓰기 위해 바지유가 빌린 것이다. 바지유의 그림에서 르누아르와 유사한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바지유의 <투망을 든 어부>와 르누아르의 <고양이와 함께 있는 소년>이라는 그림을 비교해보라. 두 그림은 바지유의 아틀리에에서 르누아르가 함께 기거하면서 생활할 때 그린 작품이다. 당시 이들은 식비를 아끼기 위해 삶은 콩으로 배를 채우면서 그림을 그렸다.
프레데리크 바지유, <투망을 든 어부> ,캔버스에 유채, 134x83cm, 1868, 제3세계를 위한 라우재단, 취리히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고양이와 함께 있는 소년>, 캔버스에 유채, 124x67cm, 1868/69,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그렇게 거칠 것이 없이 자라나던 인상파의 꿈은 1870년 돌연 위기를 맞이한다. 보불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리고 <콩타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를 완성한 그해 바지유는 국민방위군에 자원했다가 전장에서 그만 전사하고 만다. 향년 29세, 결과적으로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는 바지유의 유서로 남은 셈이다. 이런 사실에서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이 인상파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르누아르와 모네의 일상에서 바지유가 지녔던 삶의 무게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글 이택광 (문화비평가)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첫댓글 인상파에 관한 글이지만 왠지 카미유 코로의 작품에 눈이 가네요. 작품 전체를 품은 듯한 따뜻한 빛의 느낌이 무언가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유명한 것만 바라보았던 건 아닌가 하고 반성해 봅니다. 릴리님, 예술작품과 음악방에 올려 주시는 글들 소중하게 보고 듣고 느끼고 있습니다. 고마운 말씀 전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