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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eo Ricci 한문명 이마두利瑪竇
1552년 10월 6일 ~ 1610년 5월 11일 (향년 58세)
천주라는 초월 번역으로 세계 기독교계에 대파란과 영향력을 끼친 사제. 마테오 리치의 영향력은 천주라는 어휘가 지금까지 유효한 점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소속 신부, 선교사. 1552년 10월 6일 교황령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이후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예수회에 입회하여 예수회 신학교에서 천문, 역법, 수학, 과학, 기계 제작 등을 배웠으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못다 이룬 동방선교의 꿈을 품고 중국으로 갔다.
1577년 로마에서 출발해 인도를 거쳐 명나라 광둥성 자오칭(肇慶, 조경)에 들어온 마테오 리치는 6년간 그곳에 머물며 중국어와 그 지역의 문화, 유교 및 불교의 경전을 공부했다. 이는 나중에 사대부들과 교류하는데 있어 큰 메리트였는데, 유교 경전에 박식한 외국인은 중국인들이 보기에 호감을 사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보이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사고가 유연했으며 중국인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1]
마테오 리치는 북경으로 이동하는 동안 중국의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중국의 거대함과 부유함을 놀라워 했다(특히 강남지방). 남경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곤 곰곰히 계산해보니 일주일동안 남경시민들이 소비한 화약이 자신들이 1년동안 전쟁에 쓰는 화약의 양과 맞먹는다거나 대운하의 아름다움과 물동량은 베네치아의 운하와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등장하는 키타이가 명나라였음을 알게 되었다.
1598년에 베이징에 들어갔다가 쫓겨났으나 1601년에 자금성에서 만력제를 접견하였다. 만력제는 마테오 리치가 헌상한 자명종 및 다양한 기계에 관심을 보였다. 마테오 리치는 해박한 유교 지식을 바탕으로 사대부들과도 교류하였으며, 이후 중국에 성당을 짓고 선교에 나섰다.
당시 예수회는 황제가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진 중국에서 효과적으로 선교하려면 먼저 황제를 개종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황제에게 접근했다. 만일 황제 및 사대부가 개종한다면 자연히 일반 백성들도 따라서 개종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2]
따라서 마테오 리치는 황제 및 황제를 보필하는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마테오 리치뿐만 아니라 예수회 자체가 신앙인 엘리트 집단을 만드는 걸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한 것도 있는데, 예수회가 포교한 주요 나라마다 예수회가 만든 여러 학교를 창설해서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침 마테오 리치는 구태소(瞿太素, 1549 ~ 1612)라는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와 안면을 텄다. 리치는 그에게 수학, 과학과 같은 서양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레 교류하였고, 구태소는 마테오 리치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되어 다른 사대부들에게도 그를 알렸다. 그렇게 마테오 리치는 예부시랑(차관) 섭향고(葉向高, 1559 ~ 1627)와도 친분을 쌓는 등 사대부들 사이에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사대부 출신 신자로 서광계(徐光啓)와 이지조(李之藻, 1571 ~ 1630)[3]가 있는데 이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서를 번역하고 홍포와 같은 서양 무기를 들여오기도 하였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 지인/신자들을 통해 중국에서는 역법이 매우 중요하단 사실을 깨닫고, 예수회 본부에 편지를 보내 천문과 역법 및 계산에 정통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아담 샬이다. 또한 중국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써 출세하고 입신양명해 부모와 가문의 이름을 빛내는 것을 삶의 한 가지 지상과제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서양에서 사용하던 기억술인 기억의 궁전을 기법이라는 책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4]
이후 황족인 건안왕(建安王) 주문룡(朱謀壠, 1559 ~ 1620)[5]과도 교류하면서 중국 선교를 위한 저술활동을 벌여 가톨릭의 교리를 요약, 정리한 책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서양 철학자들의 명언 및 사상을 정리한 <교우론(交友論)> 등의 책을 저술했다.
이후 1610년에 베이징에서 58세를 일기로 선종했으며 만력제는 선교사 및 사대부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인근에 묘지를 정해 묻어주도록 했다.
서양 학문을 한문으로 능히 번역하고 각종 학문에 능했다는 면에서, 지금같은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능력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자(利子)'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이는 마테오 리치가 한자로는 이마두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자, 맹자처럼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서양 학자다. 이를 통해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서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대로 교세가 쇠퇴해 마테오 리치의 꿈이 실현되지 못했다. 그나마 홍콩과 마카오에는 꾸준한 포교 덕분에 신자들이 좀 되는 편이며, 중국 본토에도 지하교회 세력들이 있다고 전해진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의 취향에 맞도록 유교 경전을 인용하면서 선교를 벌였고, 체계적인 내세관 교리가 있어 가톨릭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불교를 공박하여 가톨릭의 우위를 알리는 한편[6], 유교에 대해서는 종교보다 철학 사상에 가깝게 보아 관대한 태도를 취해 제사와 같은 유교적 행사도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양보하여 예수회가 중국에서 포교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조상제사 문제는 이후 70여년 넘게 이것이 미신적 요소를 분리할 수 없는 조상숭배인지, 용인가능한 수준의 조상에 대한 공경일 뿐인지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극심했으며, 결국 조상숭배, 미신적 요소를 분리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교황청의 결정에 의해 18세기 초부터는 200여년간 동아시아권에서 조상제사를 금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청나라 시기의 가톨릭 박해와 조선에서의 여러 가톨릭 박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현대에 들어 1939년 이후의 현대 교황청에서는 이제는 과거와 달리 조상제사에서 조상숭배적 가치관이 많이 옅어졌다고 판단하고, 단순한 가문의 전통의 선에서 '천주교에서 인가한 양식'으로 신주 같은 유교적 요소를 뺀 조상제사를 치르는 것은 조건부로 허용해주고 있다.
한편,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한자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는 중국어의 어떤 단어도 기독교의 신 개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마테오 리치는 오랜 고민 끝에 유교 경전에도 나오는 천주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 선택은 풍응경(馮應京)이 『천주실의(天主實義)』 서문에 썼듯이 리치가 ‘이중화중(以中化中)’의 태도, 중국을 빌려 중국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마테오 리치의 사후 40년 동안 중국인 가톨릭 신자 수는 1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글은 조선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기하원본』을 저술하여 조선에 전해졌고, 저서 『천주실의』 역시 조선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한 이수광이 저서 지봉유설에서 처음 소개한 이래로 널리 퍼져, 천주교가 자연스레 전해지는 가교가 되었다. 유학자들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교를 불교와 같은 허망한 종교라 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 때문에 이후 이익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서파와 종교로 신봉하게 되는 신서파로 나뉘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과 상제 개념을 천주와 함께 사용했는데, 이에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서는 말이 되냐고 반발했고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여서 천주 이외의 호칭을 금했다.
하지만 그건 100년이 지난 뒤고, 당대에는 이러한 선교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 실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하상 바오로가 쓴 『상재상서』에서 당대 조선인들이 상제/천을 천주와 동일시했으며 혼용해 사용하는 것으로 신앙을 설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만 보더라도 '천주'라는 호칭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 '천주교'라는 교회의 이름으로도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