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iusQfmrBYTc
척준경은 정8급 무관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무관 출신이기도 했는데, 그 후 큰 권력을 얻으면서 무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에 쳐들어왔을 때 전면 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휘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웠다. 이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불과했다.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전사시키고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치면서 고려군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을 막아냈다.
그런데 이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 여진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엄청난 무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의 전공으로 하급 남반 신세에서 벗어나 천우위(千牛衛) 소속 녹사(錄事)가 된다. 천우위는 궁중 숙위와 국가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던 부대로 핵심 전투부대인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나 치안부대인 금오위보다 규모와 중요성이 떨어지나 엄연히 6위의 일원으로 척준경은 여전히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벼슬아치가 되었다고 볼 순 있었다.
석성전투(1107년)
윤관이 이끄는 17만 명의 별무반은 진격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 도달했는데 이곳에 있던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농성을 벌였다. 이 때 윤관은 여진족 족장들을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킨다.
이 일화를 가지고 윤관과 고려는 정말 비겁하다고 욕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쟁에서 비겁하거나 치졸한 방법을 쓰는 것은 결코 문제되지 않는다.
한 예로 1518년 여진족 속고내의 토벌 사례에서 여진족 추장인 속고내를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에서 조광조가 도적의 꾀로 엄습한다면 의리에 어긋납니다, 선비로써 체면이 있는데 기습은 예의에 어긋난다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어떤 방식이 더 옳은가를 고르기 쉬울 것이다.
또 항우가 미리 준비한 병사들을 숨겨놓고 유방을 잔치에 초대하여 죽이려 했던 홍문의 연이나 아랍의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들을 잔치에 불러서 대접하고 있다가 미리 숨겨둔 병사들을 풀어서 모두 죽였던 사건들이 있듯이 고대 동양에서 잔치를 가장하여 적을 불러들여 죽이는 일은 일상화된 풍습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홍문의 연을 두고 항우의 참모인 범증은 항우더러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우가 유방과 그 부하들을 왜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느냐며 그의 결단력이 없음을 비난하였다.
이 때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 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홀로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서너 명을 죽이는 기염을 토했다.
이걸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켰다.
동북 9성 완공 (11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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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목 병목전, 영주성 전투, 회령 전투, 웅주성 전투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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