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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 질의 스크랩 이 순신 장군은 죽어서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 (Q&A) / 박신 목사
상록수 추천 0 조회 28 15.09.15 20: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질문]

죄와 상관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전도할 때마다 “이순신 장군은 죽어서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라고 도리어 되 물어 옵니다. 그러면 복음의 진리를 다시 설명해 주어도 우선 그 질문부터 딱 부러지게 답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럴 때에 참으로 난감합니다.


[답변] 박신목사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반발

결론적으로 불신자의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그럼 당장 “그것도 제대로 대답 못하면서 어떻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하느냐”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라고 대답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또 “그런 식의 대답이 어디 있느냐 괜히 자신이 없으니까 무엇이든 하나님에게 미뤄 부치고 발뺌하려는 것 아니냐”고 따져 오면 “지옥에 가 있을 확률이 훨씬 높은데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이다”가 그 대답입니다. 이 마지막 대답이 가장 기독교적인 대답이자 정답입니다.

불신자들이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기독교의 구원관이 인간의 선행과 공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을 간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로선 기독교의 이 진리에 관해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두 가지 반발을 갖게 마련입니다.

첫째는 착한 일을 많이 해야 천국 가지 왜 아무 잘한 것도 없는 자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을 가는가입니다. 둘째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하니까 예수가 이 땅에 오기 전이나 온 후라도 예수를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수 많은 선한 자들은 몽땅 지옥 갔다는 말인가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의심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예로 들어 그들이 죽은 후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 완전히 들어 온 신자는 이 두 가지 의문은 자동적으로 풀리고 구태여 따로 구분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열심히 다녔어도 거듭난 체험 없어 십자가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 부분이 제대로 정리 안 되어있는 신자도 많습니다. 신자마저 그러니 불신자로선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불신자들이 제기하는 두 질문에 관해 각각 따로 답을 구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과연 착한 자라야 천국을 가는가라는 첫번째 질문을 따져 보면 그 답 속에 예수 그리스도 전에 살았던 사람의 구원여부에 관한 두번째 질문의 답도 실질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즉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 간다는 상식이 부인된다면 예수 전이나 후에 걸쳐 그분의 오심과 상관 없이 인간의 상식과는 다른 구원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뜻이 됩니다. 또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 되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 여부를 살펴보면 자동적으로 답변이 되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기 원하시면 “구약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 받았나요?”에 관한 답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커트라인의 문제점

우리는 너무 쉽게 인간의 선행을 기준으로 삼아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만큼 모순된 생각도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죄입니다. 그럼 누가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평생에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친구들 사이에 장난처럼 한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 먹고 살기 위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어 할 수 없이 한 경우는 어떻습니까? 정말 만우절 날 빼고 평생에 단 한번도 거짓말 안 한 사람이 있을까요?

인간은 윤리적으로 고급한 존재니까 최대한 잘 봐주어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당연히 천국 가야 합니다. 그럼 평생에 단 한 번만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또한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구원 받아야 합니다. 그럼 2번 한 사람은?, 3번 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따져 나가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어디선가는 합격과 불합격의 선을 그어야 합니다. 커트라인(cut line)을 정해야 합니다. .

그런데 문제는 커트라인에 바로 한 점 못 미쳐 떨어진 사람입니다. 10번 이내 거짓말 한 사람이 천국 가고 10,000번 이상 거짓말 한 사람이 지옥 갔을 때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어 별로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말 10번 한 사람은 괜찮고 11번 한 사람은 안 된다면 누가 그것을 타당하다고 수용하겠습니까? 또 만약 10,000번이 커트라인이라고 하면 10,000번 거짓말 한 사람과 10,001번 한 사람의 차이란 1/10,000로 0.01%밖에 안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선행으로 심판하는 하나님이야 말로 가장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선 심각한 죄로 취급도 않는 거짓말만 두고 보아도 이런 문제가 생기는데 죄에는 거짓말뿐 아니라 그 종류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허다한 죄를 전부 가중치(加重値)를 적용해 죄의 경중(輕重)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다른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짓말은 죽어도 안 하면서 성적(性的)인 문제만은 도저히 자유스럽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대체 의인과 죄인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그렇다고 인간은 선하게 살기로 노력만 하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공평한 기준을 가지고 심판을 할 수 있기에 문제가 안 된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공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더 문제입니다.

커트라인에 합격하려는 사람은 사실은 실력이 느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합격한 후의 보상만이 목표입니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자기 실력을 늘리려는 사람은 커트라인 같은 데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항상 1-2등을 다투는 학생과 겨우 평균치 넘어가는 학생 사이에 시험 문제 하나 틀린 것의 의미는 천양지차입니다. 전교 일 이등을 다투는 자는 하나만 틀려도, 등수가 한 칸만 내려가도 괴로워 못 삽니다.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그러나 중간에서 조금 나은 정도의 실력은 그래도 자기 보다 못한 자가 잘 하는 자보다 많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대학교 들어가기만 하면 되지 몇 등으로 들어갈 것인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자가 천국가야 옳다고 믿는 마음은 어떡하든 평균 이상을 해서 지옥에만 안 떨어지면 된다는 그 보상만 생각한 것입니다. 또 자기는 평균 이상은 되고 그럴 수 있다고 감히 자신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정말 선하고 거룩하게 사는 자는 아무리 적은 죄를 지어도 괴로워하고 고치려 애를 씁니다. 자기가 거룩해지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갖지 시험에 합격해 천국 가는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항상 자기는 완전과는 거리가 먼 죄인이라고 겸손해 하며 자기야 말로 천국 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부 일등 하는 자에게 자기 실력에 대해 만족하는가 물어보면 그 답은 매번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불만뿐입니다.

지옥에 가서 세 번 놀란 이야기

평생을 정말 남들 보기에 선하게 산 여자가 있었습니다. 자선기관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직업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항상 구제와 선행에 열심이었습니다. 이 선한 여인이 나이 들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한 목사가 심방을 오겠다고 요청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그녀지만 죽음 이후가 염려되기는 마찬가지였던지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목사가 그 여인에게 예수를 믿으면 아무리 큰 죄라도 다 용서함을 받고 천국 간다는 기독교 복음의 간단한 원리를 설명하고 예수를 영접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목사에게 그럼 천국에 가면 간음하고, 강도질 하고, 살인한 그런 몰염치한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 그녀는 만약 천국이 그런 곳이라면 자기는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크리스찬 조크 가운데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면 세 번을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는 분명히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살인 강도들이 와있는 것에 놀라고 둘째는 분명히 와 있어야 할 이순신 장군이 없음에 놀라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와 있는 것에 놀란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에 가도 마찬가지로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는 분명히 지옥에 있어서는 안될 이순신 장군이 와 있어서 놀라고 둘째는 교회 나가면서도 위선적으로 살던 그 못된 이웃집 김 집사가 없음에 놀라고 셋째는 자기가 그 곳에 와있는 것에 놀란다는 것입니다.

이 조크의 초점은 강도가 천국에 간 반면에 이순신 장군이 지옥에 갔다는 것에 있지 않고 천국과 지옥에 간 사람이 각각 자기 자신에 대해 놀란다는데 있습니다. 천국에 간 자는 어떻게 자기 같은 죄인이 이 곳에 와 있는가 하고 놀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에 간 자는 도대체 내같이 착한 사람이 어떻게 지옥에 떨어졌는지 이해가 안되어 놀란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며 교만한 자는 지옥에 가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겸손한 자는 천국에 간다는 뜻입니다.

평생을 선하게 살았던 그 여인이 강도 살인범이 있는 천국이라면 가지 않겠다는 생각은 이 둘 중 어느 쪽이겠습니까?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 자신을 볼 때 혹은 남들이 자기를 볼 때 의로울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느 누구도 의로울 수 없습니다. 대신에 아무리 사람들이 보기에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스스로 자신의 죄인 됨을 잘 알고 겸비한 자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의롭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겸손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겸손하다고 칭찬할 때는 어디까지나 사람들 관계에서 항상 양보하며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는 자라는 뜻 뿐입니다. 정말 그 사람의 깊숙한 마음 속에서부터 상대를 진정한 겸양과 존경과 양보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했는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흔히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말합니다. 분쟁이 생겨도 점잖게 물러서는 모습이 상대를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 아주 경멸해서 상대조차 하기 싫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내면적으로는 극도의 교만입니다. 그러나 겉 모습만으로는 그것도 겸손입니다. 내시나 간신배가 왕이나 권력자 앞에서 굽실거리는 것도 겉만 봐서는 겸손 120%입니다.

참 겸손은 자신의 위치를 평소에 하나님과 세상 앞에 죄인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해 놓은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예의 조크에서 천국을 갔던 지옥을 갔던 스스로 놀라는 까닭은 자기만은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해온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또 그 반대로 언제나 자신의 도덕적 상태가 의롭지 못해 괴로워해왔던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자기가 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님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불공평한 기독교의 하나님

선행으로 일생을 보낸 그 여인은 자기가 의롭다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또 실제로 그랬을 것입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얼마나 의로운 자가 많습니까? 교회 다니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겸손과 교만의 문제를 떠나 여전히 그들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강도가 가는 천국이라면 가지 않겠다는 뜻은 천국은 자기 같은 사람만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오직 착한 사람만 구원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인이나 다른 종교인들은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 기독교를 믿는 자만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해 주는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마치 하나님이 구원의 문호를 기독교인게만 열어 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는 굳게 닫아 놓은 양 오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기독교의 구원의 문호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여럿인가 하나인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일반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최대한 많은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만약 그 논리가 맞다면 미신도, 사탄을 숭배하는 자도, 누가 봐도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 종교도 인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라면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온전한 절대 진리를 누구나 명백하게 알 수 있는 한가지 길로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람으로 수만 가지 길에서 헤매게 하지 말고 분명히 알 수 있는 확실한 길을 보여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구원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았기에 예수를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관계 없이 누구라도 착한 사람이 천국 가야 맞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범위가 제한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착한 사람만 구원 된다면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착한 사람이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 악한 사람은 지옥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기에 당연해 보이는 논리지만 악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부터 구원의 범위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물론 인생 말기에 종합평가를 받아 자기가 이 땅에서 한 대로 심판 받는 것이지 특정부류의 사람을 처음부터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나면서부터 구조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앉은뱅이, 장님, 선천성 뇌성 마비처럼 평생을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을 섬겨준 사람은 당연히 천국 가고 그들은 평생 선을 행하지 못해 천국을 갈 수 없습니까? 정말 가난하고 약소한 국가에 태어난 최하층 천민의 경우 평생을 끼니 잊는 일에만 급급해서 선행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 나라에 구호식량을 보낸 자는 운 좋게 부자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천국 가야 합니까?

앞에 예를 든 그 여인의 경우도 생각해 볼 여지가 많습니다. 그녀는 정말 누가 봐도 훌륭한 인격을 가졌고 평생 선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섬김을 받았던 자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마 그녀는 감옥을 방문하여 자기로선 도저히 천국에 함께 갈 수 없다던 살인자나 강도에게도 봉사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본인이 실토한 대로 자기 같이 선한 자만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기본 인식은 항상 가졌을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본인이 그 선한 일을 할 때에도 의식을 했던 안 했던 자기의 봉사를 받고 있는 죄수들은 천국 가선 안 된다고 마음 속으로 이미 선을 그어 놓고 봉사 했다는 뜻이 됩니다.

무슨 뜻이 됩니까? “나는 너희에게 충분히 사랑을 베풀 만큼 인격적으로 선하고 훌륭한 자이고 너희들은 악하고 나빠서 나 같은 사람의 섬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너희와 수준이 다르고 너희는 모든 면에서 나와 비교될 수 없다. 그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져야 할 틈이 있다”라고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사람 취급하고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움을 받아야만 할 불쌍한 사람으로는 봤지만 자기와 동등한 인격과 품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꼭 그 사람을 짐승 취급하겠다는 인식은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상대를 사람 취급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선행도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베푸는 선행을 두고 성경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사64:6)”라고 하는 것입니다.

똥은 어디까지나 똥일 뿐이다.

커트라인을 따지는 사람일수록 시험 쳐서 합격할 자신이 있는 자입니다. 자기는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자신하고 남은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깔봅니다. 그 여인처럼 선행한 자만 천국가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범위를 하나님은 제한한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도리어 스스로 착하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제한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제한하였고 나아가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강도와 함께 가는 그런 천국이라면 나는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천국이나 지옥을 만들어 자기가 왕 노릇 하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자기 구원(自己救援)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된다는 절대 타자구원(絶對 他者救援)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 중에는 간혹 당신은 죄인이요 예수를 믿으시오 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죄인인가 예수 믿는 자네들이 나쁜 짓을 더 많이 하고 더 죄인이더라. 나는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네. 자네나 잘 믿게”라고 반박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가 선하게 사는 것은 둘째 치고 하늘을 들먹이는 그 자체는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늘을 우러러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사실은 은연중에도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누가 더 죄가 많고 악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일대일로 섰을 때 과연 나는 당당하다고 할 자 있겠는가 입니다. 정작 하나님 당신 앞에 일대일로 마주 섰을 때에도 강도나 살인자랑 같이 가는 천국이라면 못 가겠소라고 큰 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평생을 거짓말 한 적도, 남을 미워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소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할 때에 과연 그 똥만 더럽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자신은 백설같이 깨끗해서 괜히 상대하다가 내게 그 똥이 튀어 더러워지는 것이 겁나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하다 보면 내 속에도 더러운 성질이 드러나 같은 똥이 될까 봐 불안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똥이나 상대의 똥이나 더럽기는 마찬가지인데 내 똥은 숨겨져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내 순결성을 유지하겠다는 거룩한 뜻이 아니라 단지 내 교양과 지식과 가문과 명예와 이름과 지위를 동원해 끝까지 나도 똥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겠다고 위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혹시라도 자기는 백설이라고 생각했다면 자기 신분과 자존심과 매너를 순결성으로 착각한 것 뿐입니다. 똑 같은 똥을 교양이라는 화장품으로 살짝 치장해 덮어 놓은 것입니다. 혹시라도 저 놈이 나에게 똥칠을 하며 막가면 나도 이 화장을 벗어야 하는데 한 꺼풀만 벗기면 당장 자기에게서 더 구린 똥이 나올 것을 너무나 잘 아니까 기껏 “더러워서 피한다”라는 핑계를 댄 것입니다.

똥은 어디까지나 똥입니다. 설사 똥이나 마른 똥이나 염소 똥이나 다 구리고 더러울 뿐입니다. 아름답고 좋고 선한 똥이 따로 없습니다. 간혹 아기의 똥이 귀여울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아기의 부모에게 뿐입니다. 변비환자가 오랜만에 누는 똥이야 얼마나 좋을까 만은 그역시 환자 혼자만 좋은 것입니다.

자기의 진정한 내면이, 깊숙한 자아의 실체가 절대로 다른 사람의 똥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만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다고 큰 소리 칠 자격이 있습니다. 교양, 지성, 도덕성, 자존심, 지위, 가문, 명예 등 인간 세상에서 치장할 수 있는 모든 꺼풀을 완전히 벗기고도 나는 더럽지 않다라고 자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강도들과 함께라면 천국 가지 않겠소라는 말은 자기 똥은 끝까지 냄새도 안 나고 색깔도 아름답고 맛이 좋다고 우기는 꼴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도 저 놈 똥보다 내 똥이 낫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보는 영화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갖다가 살아난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숨이 넘어가기 바로 그 순간에 자기의 전 일생이 활동사진처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참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흔히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이 되었던 하나님이 되었던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죽기 직전에 자기 전 일생이 영화 장면처럼 지나간다는 것은 바로 이 사후의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일지 모릅니다.

만약에 자기 일생을 빠트리지 않고 찍은 영화를 하나님과 함께 본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쥐구멍을 찾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장 그 영사기를 부러뜨리고 싶지 않은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겠습니까?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렸을 때의 친구들을 몽땅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들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 친구들만 없다면 자기의 모든 죄악과 못난 점들을 완전히 감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일생을 찍은 영화 원본을 누군가 갖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것도 천하의 권력자라도 도저히 찾을 수도 없앨 수도 없는 하늘의 비밀한 곳에 감추어졌다면 말입니다. 애꿎은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소련 아니 인류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유명 탤런트 O 양이 자기 애인이랑 사랑을 나눈 장면을 찍었던 비디오가 일반에 유출되어 완전 매장되다시피 했습니다. 우리 일생을 찍은 비디오가 문제가 된 O양의 비디오보다 더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애인과 관계를 가진 비디오는 따지고 보면 부끄러울 것 하나 없습니다. 그것을 호기심과 음란한 마음으로 보면서도 O양을 욕하는 사람들이 더 더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가 엉큼한 마음으로 침 흘리며 O양의 비디오를 보는 모습까지 찍힌 영화를 같이 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럼 하나님은 과연 O 양과 우리 중에 누구를 먼저 탓하겠습니까?

스탈린의 경우 자기 일생을 찍은 영화에 비하면 죽여 없앴던 어렸을 적의 친구는 한 두 장의 스냅사진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하나도 허물이 될 수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억지로 자신을 미화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영화 필림 원본은 회수하지 못하고 스틸 사진 몇 장 없앤 것뿐인데... 하나님과 자신의 영화를 고개 바로 쳐들고 함께 볼 수 있는 자는 인류역사상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를 들었던 평생을 선하게 산 그 여인도 아마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숨기 바쁠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강도가 가는 천국이라면 안 가겠다고 감히 큰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실제로 하나님과 단 둘이 자기 일생에 관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한 번 가정해봅시다. 국민학교 1-2학년 때까지는 그럭저럭 보아 넘기다가 그 다음부터는 그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고개를 푹 처 박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츰 완전히 죽을 기색이 다되어 자기도 모르게 무릎이 꿇어지고 얼마 못 가 “저는 죽을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제발 저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지 않을 사람 있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일뿐 아니라 인간 사이의 의와 선으로만은 불충분하다는 뜻을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선 가식적인 선을 행해도 남이 모르고, 죄 짓고도 아닌 체 남을 속이거나 벌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람의 참다운 의는 세상의 판단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완전하신 절대자 하나님이 판단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가 최종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선하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다거나 살았다고 자신하는 교만한 마음은 문제입니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자라도 절대로 한 점의 티 없이 그렇게 깨끗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착할 자신이 있다는 뜻밖에 안 됩니다. 말로는 “하늘을 우러러”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남들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자기 인격을 비교, 판단, 증거 해줄 제 삼자로 하늘을 세웠다는 것으로 따라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작 하나님과 자기 일생의 비디오를 끝까지 함께 볼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주로 언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다”라고 우깁니까? 주위 사람들이 혹은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지 못할 때이다. 인간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내 결백을 알아 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떤 특별한 사건 하나에 대해 결백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큰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말을 하는 배경을 뒤집어 보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나님이나, 내 속을 까뒤집어 볼 수 없는 제 삼자가 내 죄와 허물을 증명해 보일 수 없음을 잘 아니까 나는 깨끗하다고 큰 소리 친 것입 니다. 최소한 그 말을 듣는 상대에 비해선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는 몰라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너는 내게 어떤 잘못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나보다 잘못 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자신 있게 자신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걸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 일대일로 대면해 본 자라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두려워서도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말로는 하늘 운운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고개 빳빳이 처 들고 그 분더러 내 허물을 들쳐보려면 얼마든지 들쳐보시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런 자가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인정하는 자이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착한 일을 많이 한 자에게 상 주시는 이기에 나는 상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큰 소리 치는 말입니다. 물론 착한 일을 많이 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상급을 주십니다. 그러나 자기는 상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 남들은 벌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늘을 우러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과 비교해 나는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큰 소리 친 교만일 뿐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성경에 똑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누가복음18:9-13)”

세리와 바리새인 중 누가 더 착하고 죄를 덜 짓는가를 따지자면 분명히 바리새인 쪽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굉장히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에 열심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5:20)

예수님은 둘 중 누가 착했는가, 누구의 태도가 겸손했는가를 밝히려 이 비유를 들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도 틀림 없이 율법의 규정에 맞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바리새인은 스스로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했고 세리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의의 기준을 남에게 두었고 세리는 하나님에게 둔 차이입니다. 바리새인은 남과 비교해 의롭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남들과도 “따로” 서서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보니까 도저히 고개를 들지도 못했습니다. 또 남들에 비해서도 의롭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했으니까 멀리 서서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정작 더 큰 차이는 하나님 앞에 바리새인은 자기가 한 일들을 꺼내 놓았고 세리는 자기의 전 인생을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 한 두 가지를 가지고 그 사람 전체의 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잘못한 것 한 두 가지 회개했다고 의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전 일생을 찍은 비디오를 들고 나가지 한 두 가지 잘한 것 들고 가지 않습니다. 스탈린처럼 잘못 나온 스냅사진 다 없애고 잘 나온 사진만 들고 갈 수 없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자가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자는 역으로 말하면 스탈린처럼 나쁜 짖 몇 가지 지우면 선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착한 일 한 두 가지 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의 평점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쁜 일 한 두 가지 때문에 점수가 깎일 것이라고 믿는 것과 다를 것 하나 없습니다. 선행과 악행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절대 증명할 수 없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잔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도저히 굶어 죽을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한 자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적을 많이 쌓아야만 천국 갈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 인생을 찍은 영화를 보여 달라고 하니까 젊었을 때 화장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찍은 잘 나온 사진 몇 장만 보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힌두의 승려가 사람은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천국을 가고 혹시 죄를 짓더라도 그 죄를 씻을 만큼 선한 일을 하면 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그럼 인간이 평생에 얼마나 죄를 짓느냐라고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입니까?” “아니 그보다 많겠지요.” “그럼 열 번 정도 됩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요” 대답했습니다. “그럼 많이 양보해서 5 번이라고 쳐도 일생에 얼마나 죄를 짓게 됩니까? 어림잡아 365일 5번씩 60년만 계산해도 9만 번이 넘는데 그럼 착한 일은 얼마나 합니까? 선한 일로 공적을 아무리 쌓아도 자기가 지은 죄를 다 씻을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니까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 지은 만큼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자라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큰 소리쳐도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 갈 때에 잘하고 못한 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전 인생을 걸고 나갑니다. 세리는 자기 자신 전체를 두고 죄인이라고 하면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눈을 들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세금 거두면서 배달사고(?) 몇 번 친 것 때문에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조금씩 부정을 저지르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그 짓을 그만 두어야지 했는데 남들 보다 잘 살게 된 뒤에도 돈만 보면 눈이 뒤집히고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가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는 자신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언제 누구에게 얼마를 부정한 죄 된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의 선한 행위를 자랑하거나 겸손해 하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자기’라는 한 인간 전체를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겐 한 인간이 죄인 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줄 아는가 모르는가 만이 의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 전체를 두고 부끄럼 없이 설 자가 없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남들과 비교해 나는 그래도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의롭고 겸손하다고 칭송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것이 참 겸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어 봅시다. 이 순신 장군이 천국을 갔는가 하는 의문은 두 가지 전제가 해결이 되어야 답이 나옵니다. 1)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는가, 2)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을 두고 부끄러워 숨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제대로 고백했는가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다고 칭송을 받은 것과는 상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오늘 날 우리로선 모릅니다. 당대 사람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그를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의 일생을 찍은 비디오가 있었다면 그분도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우러러 부끄럼 없다고 고개를 치켜 들을 수 있었을까요? 틀림 없이 쥐구멍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군이 죽기 전이라도 자기가 그런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 구원을 사모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본질이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의 교리를 줄줄 외우고 기독교적인 용어로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듯이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믿기만 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예쁘게 여겨 예수 믿는 신자에게만 구원을 허락했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본질은 간단히 말해 자기 일생 전체를 찍은 비디오를 하나님과 심지어 자가 혼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도저히 볼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동 한 두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고개도 처들지 못하고 자기 전부를 그 분의 처분에 내어 맡겼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하나님의 이 구원의 원리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알고 잘 믿는다는 사람마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자기 선행한 것 몇 개 들고 나와 큰 소리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아무도 그럴 수 있는 자 없다는 것을 당신의 죽음으로 보여준 것뿐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심지어 기생 라합, 이방 여인 룻 모두 예수라는 실존 인물과 그 십자가 교리를 전혀 알지 못했어도 바로 자기야 말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했기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 가서 스스로 놀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천국에 가서 놀랐다면 천국에 간 것이고 지옥에 가서 놀랐다면 지옥에 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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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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