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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망양로
시인 조연로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을 정비 한다는 소식에 자료 정리 차 탐방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12회 김민부문학제’를 기념하는 시화전이 김민부 전망대에서 열린다하니 초량 이바구 길을 먼저 탐방키로 했다. 탐방 코스를 4시간 정도로 계산하여 고관입구에서 구봉성당을 거쳐 구봉산 산복도로 망양로를 거쳐 시인 청마 유치환 선생을 기념하는 느린우체통을 지나 김민부전망대로 해서 초량연탄돼지고기집 소주 한잔을 계획 하여 출발했다. 고관마을은 1678년 이곳에 설치된 두모포왜관이 초량왜관으로 옮긴 후 왜관이 있던 자리에 형성된 것으로, 당시 이곳은 동래부 동평면(東平面) 두모포리(豆毛浦里)에 속하였다. 1914년 부산부 부산면에편입되어 수정리로 개칭되었다가, 1957년 동구가 신설되어 부산시 동구 초량동 고관마을이 되었다.
고관입구 옛 침례병원 도로에 도착하니 전차가 땡땡 하며 지나간다. 지금은 우회 도로 같이 보이지만 1960년대에는 비탈진 도로가 전차 다니는 큰 도로였다. 나의 고교 시절인 1962년에는 1구간 전차요금이 2원 50전이고 2구간이 3원이었다. 구덕운동장에서 서면까지가 1구간이고, 온천장 까지가 2구간으로 정해져 있었다. 53년 간 운행하던 부산 전차는 1968년 5월 20일 막을 내렸으나 동래선 일부는 1973년까지 운행되었다. 구덕운동장에서 온천장까지 운행하던 마지막 전차가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에 전시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는 전차가 서울과 부산, 평양 세 곳에 있었다. 부산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02년 광복동 거리에 가로등이 밝혀지면서이고, 전차가 등장한 것은 1915년 11월 1일 중구 중앙동의 부산우편국에서 동래 온천장까지 12.8km가 시작이었다.
조금 올라가니 1972년 보이스카우트 부산 연맹의 사무실이었던 골목이 보인다. 그때 보이스카우트 해양소년단 1대대 대장이었던 관계로 자주 들락거렸는데, 맛있는 점심 순두부 백반과 청국장이 99원이었다. 두 블록 정도 올라가니 연문 출판사의 건물이 보인다. 그 당시 월간 해기 편집장이었던 관계로 일과의 상당 시간을 연문 인쇄소에서 보냈다. 당시 인쇄소는 납으로 된 자동 활자 주조기가 쉼 없이 움직였고 이렇게 활자를 뽑아 골라낼 수 있게끔 만든 활자 보관대 ‘문선대’가 있고, 다음은 ‘조판’ 혹은 ‘식자’라고 불리는 과정으로, 문선 작업을 통해 뽑은 활자를 배치하고 심어 판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 ‘인쇄’ 하는 것이 활판 인쇄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주조공, 문선공, 그리고 식자공을 거쳐 완성된 조판을 받은 인쇄공이 인쇄기를 통해 인쇄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가편집이 끝나면 시청에 가서 인쇄 검열을 득해야 인쇄할 수 있었다. 사병과 장교가 앞뒤로 앉아 초등학교 일기장 검사 하듯이 검열도장을 찍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지나간 역사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구봉성당이다. 이때부터 가파르기 시작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계단도 비지땀을 훔치며 오르니, 산복도로 망양로다. 망양로는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과 부산진구 범천동을 연결하는 산복도로로, 부산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길이라고 하여 망양로라는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북항을 중심으로 부산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망양로는 6·25 전쟁 이후 형성된 피난민촌에서 시작된 산동네를 연결하는 도로로, 서구와 동구 그리고 진구를 잇는 산복도로다.
청마 빨간 우체통을 향해 걷는 도중 건물지붕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02년 태종실록인데, 부산(富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해안인데도 유난히 산이 많아 ‘산부자’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 같다. 세종실록에는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종실록부터 부산(釜山)으로 바뀌었다. 부산은 예로부터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서 좋은 소금을 만들었으므로, 해안가 모래사장마다 소금가마가 들끓고 있어서 가마솥 마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김동현님은 “부산 이야기”에서 밝히고 있다.
부산은 6.25동란으로 무질서하게 형성되어 70년대 후반부터는 성장억제 도시라는 멍에를 짊어지기도 했다. 그 이유로는 꼴지의 도로율과 공원확보율을 대표적으로 꼽았다. 부산은 물류가 지나가는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 이상 한국의 제 2도시도 아니고 제1의 항구도시도 아니다. 이제 공동어시장도 전남으로 이전할 것으로 알려져 걱정이 된다. 고등어 고갈비가 귀갈비로 둔갑하면 어쩌지? 노인의 도시, 소비의 도시로 전락될 가 걱정이다. 이런저런 상념을 하며 걷는데, 빨간 우체통과 “행복”이라는 시가 반긴다. 느린 이라고 적힌 우체통 주변이 너무 소박하다. 청마는 『문예월간』1931년 12월 호에 시「靜寂」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이때 청마의 나이는 24세였다. 청마는 15세가 되던 1922년에 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형인 극작가 동랑 유치진이 다니던 풍산 중학교에 입학해 수학하기도 하고, 역시 동랑이 주동이 돼 만든 『참새』라는 동인지에 시「단가」를 발표하기도 하면서 문학에 대해 이해를 넓히기도 했다. 청마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정적”과 “행복”을 보자
불타는 듯한 정력에 넘치는 칠월달 한낮에 / 가만히 흐르는 이 정적이여 / 마당까에 굴러 있는 한 적다란 존재- / 내려 쪼이는 단양 아래 점점이 쪼그린 적은 돌맹이여 / 끝내 말없는 내 넋의 말과 또 그의 하이함을 / 나는 너게서 보노니 / 해가 서쪽으로 기우러짐에 따러 / 그림자 알푸시 자라나서/ 아아 드디어 왼 누리를 둘러싸고 / 내 넋의 그림자만의 밤이 되리라 / 그러나 지금은 한낮, 그림자도 없이 / 불타는 단양 아래 쪼꾸려 / 하이한 하이한 꿈에 싸였나니 / 적은 돌맹이여, 오오 나의 넋이여 -「정적」전문
불타는 듯한 칠월 한낮 태양아래 쪼그려 하이한 꿈을 꾸는 "적은 돌맹이"이에 대해 시적 화자는 "오오 나의 넋이여"라고 말한다. 보잘 것 없는 돌맹이를 자신의 넋으로 치환하는 시적 화자의 세계 인식은 거대한 세계 앞에 속수무책인 시적 자아의 왜소함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幸福」전문(『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대중에게 널리 애송되는 청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1957년 판 시집『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에 실려 있는, 명상과 진술에 의존하고 있는 청마시의 특징이 잘 드러난 시이다. 현란한 시적 비유가 없지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경구성 진술에 힘입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는 사람들이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슬프고도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낸다"는 설정은 자칫 상투적인 멜러물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라는 이 '사랑'에 대한 진정성이 이 작품을 시로써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바로 삶 그 자체에 대한 진정성이 청마시의 장점이자 한계이다. (김용락/시인, 문학평론가: 유치환론) 나의 고교시절 교과서에 “깃발”이 실려 있었는데, 그 당시 국어 선생이었던 시인 박철석은 이 구절에서 침이 튕기는 줄도 모르고, 팔뚝만한 몽둥이를 치켜들곤 긴 목을 빼들고 읽었다. 오백 미터 쯤 걸으니 이바구 공작소가 보인다.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물어 겨우 김민부전망대에 닿았다. 초량 이바구길은 근 현대사가 동구에 남기고 간 씨앗이 피어난 것이다. 6.25와 피난시절을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에 의해 탄생한 마을로, 바다를 앞에 펼쳐놓고, 산을 등에 지고, 산복도로를 머리띠로 두른 이 마을은 발 닿는 골목마다 사연이 깊어,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올해 8회째를 맞는 김민부 문학상에는 배옥주 시인이 선정됐으며, 전망대에는 강달수, 이석란, 이숙희, 고안나, 신명자, 이영수의 시화가 전시 되어 있었다.
김민부 전망대는 168계단 중간을 지나 우측 골목 안으로 들어온 이곳은 부산항 전경을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전망대이자 휴식 공간으로 “기다리는 마음”의 시가 벽면에 써 았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절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대동아전쟁, 월남파병 등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연인끼리의 기다림, 부모와 자식간의 기다림, 남북 이산가족간의 기다림 등 이 땅의 안타까운 모든 기다림의 마음을 담고 있는 전망대라 하여<김민부 전망대>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부산항의 수많은 역사적인 사연들이 같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시대의 부산지역 매축의 역사를, 한국동란의 피난민촌, 부산역전 대화재, 관부연락선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 등 우리 부모세대의 애환과 역사가 녹아 있고, 북항재개발 등 역동하는 동구의 미래가 보이는 뜻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김민부는 1941년 3월14일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좌천동 37번지에서 아버지 김상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성남초등학교 2학년 때 3학년으로 월반 하여 부모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본인도 무척 우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 정대현은 그것이 그를 괴롭히는 족쇄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우월감은 고등학교 시절 자기 이름이 적힌 원고지를 사용할 정도로 다른 사람과 차별되기를 원했고, 이름도 중학교에서 병석炳錫에서 민부敏夫로 개명하였다. 시인 김철은 부산고등학교 1학년 일 때 쾌활하고 당돌한 모습의 선배가 문예부 회원 모집을 한다며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교실에 들어 왔는데, 후일에 그 선배가 김민부였음을 알았다고 기억한다. 1956년 고교 1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조
--불타오르는 정열에 / 앵도라진 입술로 / 남 몰래 숨겨온 / 말 못할 그리움 / 아 이제야 가슴 뻐개고 / 나를 보라 하더라 / 나를 보라 하더라 --
-석류 전문-
로 당당히 입선 하였고, 1958년 고교 3학년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 / 배 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 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나 / 남 몰래 제 어깨에다 / 새기고들 있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눈먼 사투리는/ 밤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푸른 달빛
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소리 /바람 불어, 아무렇게나 그려진 /그것의 의미는 /
저승인가 깊고 깊은 /바위 속의 울음인가 /더구나 내 죽은 후에 /세상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
-균열 전문 -
로 당당히 당선되어 기성 문단, 특히 부산문단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국문과 응시에서 실패한 사건은 경험해 보지 못한 상처로 남았을 것이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온 몸을 불태웠을 것이라고 정대현 시인은 추측한다.
어슬렁 어슬렁 비탈길을 내려오니 택사스 거리이다. 중학교 때 사라호 태풍으로 모금함을 들고 지나갔던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드럼통에 연탄불을 넣어 구워주던 돼지 불고기집은 찾을 수 없었다. 잘 꾸며진 초량 하천을 끼고 재래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싱싱한 횟감이 보였다.
이 글을 쓰며 부산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왜? 부산광역시 당국은 부산 예술인에 대한 대접이 이렇게 빈약 할 까? 청마 느린우체통이나 김민부전망대나 좀 더 예산을 확보해 부산 자랑거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터인데. 부산을 사랑하자고, 애향심을 갖자고, 위정자를 비롯해서 기성세대들이 강조하면서, 그 역할이 큰 예술인에는 소극적이고 찬밥으로 대한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울산예술문화회관이나 경주예술문화회관에 비교 할 것도 없이, 관광버스 한 대 댈 주차 공간이 없는 부산예술회관 건물과 대지 규모를 보면, 자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첫댓글
역사적인 이 글을 읽고 사리처럼 남는 건,
망양로는 6·25 전쟁 이후 형성된 피난민촌에서 시작된
산동네를 연결하는 도로,
초량 이바구길, 부산 전차,
보이스카우트 연맹회, 청마와 김민부,,,
부산예술회관의 규모와 질적개선에 한표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