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끝난 뒤 서독에 주둔했던 미군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기념품으로 폴크스바겐을 사오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월급을 몇 달 아껴 쓰면 살 수 있을 정도로 값이 싼 데다가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모양새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패전한 독일놈들은 차도 이렇게 작은 것을 타고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폴크스바겐을 비웃는 농담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중고차시장에 가서 자기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차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일즈맨은 그에게 까만 딱정벌레 같이 생긴 차를 보여주었다. 차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엔진상태가 어떤지나 살펴보려고 보네트를 여니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랍쇼, 이 차는 엔진도 없이 갑니까?"
"뒤쪽 트렁크를 열어 보십시오."
그래서 그는 트렁크를 열었다. 그랬더니 거기에 납작하게 생긴 조그마한 엔진이 들어 있었다.
"저런! 엔진이 찌그러져 트렁크에 실어 놓았군."
수평대향식 엔진이 뒷바퀴 바로 뒤에 놓인 차를 처음 본 그는 그 차를 고장난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초기에 미국에 상륙했던 폴크스바겐은 모두가 까만색을 칠한 데다가 당시의 미국차들이 매년 대형으로 바뀌어 가던 것과 달리 작아 자동차라기보다 장난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미국인들은 그것을 조롱하듯 비틀(딱정벌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포드가 인수를 포기한 초라한 회사
값 싸고 고장 나지 않는 차가 목표
그 무렵 미국에서는 빅3와 AMC가 대량생산하는 차가 홍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아무나 탈 수 있는, 미국차보다 색다른 차를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캐딜락이나 링컨보다 롤즈로이스를 좋아했고 재규어, 트라이엄프, 포르쉐, MG같은 스포츠카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중산층에도 시보레나 포드보다 피아트, 르노, 힐만 같은 유럽차를 타고싶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크기는 작았지만 그런대로 외국차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 유럽차들은 모두가 미국차에 비하면 차체가 작았다. 최고급차의 대명사인 롤즈로이스는 캐딜락이나 링컨에 비하면 중형차에 속했고 스포츠카나 힐만은 소형차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체가 작았다. 그에 비하면 비틀은 그리 작은 것도 아니었다. 전후의 VW는 한때 포드가 인수할까 해서 헨리 포드2세가 시찰하러 갔던 일이 있다. 연합군사령부가 독일의 부흥을 위해 포드에 출자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격으로 부서진 공장과 제품을 시찰한 포드2세는 그 꼴이 하도 보잘 것 없어 보여 그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그때 그것을 인수했더라면 지금은 GM보다 더 큰 회사가 되었을 것을 그는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연합군사령부는 할 수 없이 그 회사의 경영을 하인츠 노르트호프에게 맡겼다. 그는 공과대학을 나와 BMW에서 기술자로 성장한 뒤 GM의 독일회사인 오펠에서 일하면서 1936년 중역이 되었던 사람이다. 1947년에 사장이 된 노르트호프의 VW는 전쟁 전에 설계, 개발되어 일부 생산한 적도 있는 비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차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국민차로 개발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1933년 집권하자 1차대전 후의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었던 독일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포르쉐에게 명령해 그 위를 달릴 차를 설계,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게르만 민족 모두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히틀러가 포르쉐에게 주문한 것은 두 가지였다. 일반 국민이 조금만 부지런하게 일하면 살 수 있을 정도로 값이 싸야 하고, 고장이 나지 않는 실용차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포르쉐는 즉시 미국을 방문해 헨리 포드를 만나 그로부터 모델T에 관한 사상을 배웠고, 그가 시작한 컨베이어 방식 조립공장도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차가 비틀이다. 그 차는 요즘말로 적정설계(옵티멈 디자인)가 된 최초의 차였다. 4기통 1.1l 25마력의 작은 공냉식 엔진으로 760kg이 조금 넘는 차를 최고시속 80km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스러운 속도로 달리게 했다.
그 차는 사람을 태우고 달리고 서며 커브를 도는 기능 이외의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딱정벌레와 같은 차체 모양새는 외관을 보기 좋게 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작은 동력으로 차를 달리게 할 수 있도록 공기저항을 최소로 줄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적정설계, 공력설계라는 용어가 태어나기 전에 포르쉐는 그것을 실용화한 혁신적인 차를 개발했던 것이다.
정비공장 갖추고 미국시장 공략
무력으로 실패한 유럽점령 성공
그 차가 얼마나 군살 없이 잘 설계되었는지는 그 차를 20년이나 큰 설계변경 없이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어느 한 부분을 설계변경해 중량을 늘리게 되면 엔진을 더 키워야 하고 그렇게 되면 차체 전체를 설계변경해야 할 정도로 전체가 서로 균형을 맞춰 설계되었던 것이다. 1947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비틀은 달리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에 만드는 족족 팔려 나갔다. 노르트호프는 회사의 먼 장래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 반드시 상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국차를 선호하는 몇몇 미국인들 중에도 적국이었던 독일에서 만든 차를 사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50년에 겨우 150대를 팔았고, 다음 해에는 200대가 팔렸다. 그래도 노르트호프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수입업체가 갖추지 않은 정비공장을 완비하고 사고를 일으켜 고장난 차의 서비스를 완벽하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호기심만으로 차를 샀던 사람들이 차를 몰아보고 나서 미국차는 물론 영국, 프랑스, 이태리에서 만든 차와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음이 조금 큰 것이 흠이었지만 성능은 그 어느 차보다 우수했고 고장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런 소문이 차츰 널리 퍼져 판매량은 꾸준히 늘어났다. 특히 전후의 미국풍조, 무엇이든지 크고 사치한 것을 좋아하던 풍조에 비판적이었던 젊은 지식인들이 많은 캘리포니아에서는 실용적이고 성능이 좋은 비틀을 타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다. 60년대에 들어서자 판매량은 연간 20만 대에 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판매량은 미국시장의 3%밖에 안 되는 미미한 숫자여서 빅3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비틀은 소형차를 좋아하는 이태리, 프랑스, 영국에도 대량으로 수출되기 시작해 70년대에 VW은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자동차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시장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해도 미국차가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히틀러의 딱정벌레는 그가 무력으로 점령하려다 실패한 유럽 전체로 시장을 넓혀간 것이다.
<자료출처 : 자동차생활 200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