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준 친구에게 십여년 전에 보냈던 편지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통학차를 탈 시간에 이리역(익산역)에 왔다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가 35년이 지났으니, 어찌 그 시절의 우리생활의 한토막이라도 느껴보려 했던 것이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을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네. 우리가 간절하게 가고 싶었던 시절도 아니었고, 누가 애절하게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약간의 상실감과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지. 전주와 군산 간에는 통근차라도 운행하고 있어 통학차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도 있었을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다녔던 시대의 정읍선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네. 지금 내가 타고자 하는 열차가 송정리까지 가는 무궁화 열차라네. 시간이 통학차 시간일 따름이지 그 때 이리역 광장을 가득 메웠던 학생들의 모습은 다 사라졌고, 그 때 허름한 차림의 3등열차의 승객들은 이제 세련된 선진시민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네.
변방의 시골에서 통학을 했던 내가 전혀 살거움을 못 느끼고 지내던 시절에 자네를 통학차 안에서 만나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고, 서로 허물 없는 사이가 되고 나서 부터는 아침등교부터 저녁 하교시 까지 거의 같이 다니는 사이가 되었고, 그렇게 우리들이 공감하고 서로 같이 호흡했던 즐거움의 공간이 만들어졌고, 삭막했던 통학차의 생활이 조금은 낭만적으로 느껴졌으리라 생각하네.
언제부턴가 이렇게 객지생활을 하면서, 자네를 고향에서 한번 만나리라 생각할 때마다, 자네하고 통학차를 타고 부용역에 내려서, 자네 동네 농원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봉의산 까지 올라가보고, 또 다시 김제역에 내려서 우리 집까지 가 다시 김제 성산에 올라가보고 그 옛날을 회고해 보고 싶었네.
그리고, 자네는 기억을 할지 모르겠네만 어느 토요일 저녁 쯤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통학차가 평소같이 붐비지 않았던 분위기였지. 건너편 좌석에 신사복정장을 하였던 우리보다는 열 살 가량은 더 보이는 듯한 직장인인 듯한 두 사람의 대화 중에 이런 말귀가 언뜻 귀에 들어왔네. “It was long, long ago." 느낌으로 그들도 통학을 같이 하였던 친구였고, 아련히 옛 시절을 회고 하는 듯 보였네. 여러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이제는 객지에서 탄탄하게 삶을 꾸려가는 듯한 이력이 엿보였지.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였고, 멋있어 보였네. 그 때 그 분위기를 머리 속에 담고 있으면서 언젠가 자네를 만나면 나도 그들을 흉내 한번 내 보고 싶었네.
“It was long long, long ago." 라고 말이지.
그러나 이제 너무 시간이 흘렀나! 그래도 더 많이 늙어지기 전에 자네와 한번은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보면서, 중년이 되어서 어두워져 가는 고향의 들녘을 지나가는 이 시간에 그 옛날을 반추해보고자 하네.
자네가 알다시피 나는 중학교를 김제에서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이리로 하게 되어 자네를 만나게 되었지 않았겠는가?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어쩌다 스쳐지나 갔던 쑥색 하복의 국민학교 동창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 아침 일찍이 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던 동네 형들의 면학 분위기 풍기는 모습을 볼 때, 이리라는 도시공화국에 대한 선망과 경외심이 없을 수 없었지.
사회적으로 부의 축적도 어마어마할 것이고, 문화적으로나, 학구적인 분위기도 훨씬 앞섰을 것이라 생각했지.
실제로, 우리모교 남성고등학교를 진학해서부터 느꼈던 도시공화국과 그 도시공화국에서 제일 치던 고등학교의 위세는 가히 압도적이었네. 쉬지 않고 경적을 울리며 역동적으로 차량들이 오가던 이리역, 어느 고을, 어느 동네에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여 오던지 통학차에서 내리면, 이리역 광장을 메우고, 도로를 가득 채웠던 인파들, 영정통의 화려했던 상가들
우리 모교의 이미지는 또 어찌하였든지?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늘어서 있던 장대한 히말라야시다, 입학식을 치렀던 대강당 유성당, 격조 높고 위엄 있어 보이던 빨간 벽돌의 본관 건물,
연부역강해 보였던 선배들, 나보다 모든면에서 뛰어나 보였고 세련되고, 부티나 보였던 시내에서 다니던 동급생들
실제로 공부도 시원찮아 중간 아래였을 것이고, 매년 두 차례씩 있었던 단축마라톤의 최고 기록이 400등이 넘었던 기록이었고, 문예반이나 미술반 같은 특별활동반은 당초 소질이 없었으니 옆에 기웃거리지도 못할 형편이었고,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합창반 모집에 응했다가 오디션에 낙방했었고.....
내가 그 학교의 학생이라는 것을 빼고는 소속감과 애착을 가질만한 요소는 거의 없었지. 교실에서나 운동장에서나 소풍가서도 심지어는 통학차에서도 내가 주체가 된 경우는 없었네.
내가 기꺼이 뛰어 들리라고 마음 먹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향유하리라 생각했었던 큰도시 문화생활에는 옆에도 가지 못했고, 촌뜨기에게 도시공화국의 벽은 높았다네.
내가 통학하기 전에 선망하였던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모습도 실상은 변방의 시골뜨기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네.
학교에 다녀오는데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을 소모하고 집에 오면 지쳐 쓰러져 잠 보충하기에 바빳고, 통학차량은 가장 낡은 시설이었고, 약간은 불결하기도 한 데다가 , 비좁고, 시끄러워, 낭만이나 면학분위기하고는 거리가 멀었네. 당시 학생 주먹패들이 할거하는 곳이 통학열차 아니었는가?
통학구간마다 대전선, 전라선, 정읍선, 군산선으로 구분되었던 노선 중에 우리 정읍선이 통학생들은 가장 많았지만, 통학을 하기에는 여건이 제일 열악했다고 봐야 될 것이네.
전주, 군산은 기동차가 수시로 다녔고, 대전선은 여수에서 출발했던 전라선과 목포에서 출발했던 호남선이 합쳐지니 운행수가 당연히 많았을 것이고, 정읍선 통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열차는 통학차외에 한편이 더 있었지.
자네 기억하는가? 오후 네시 좀 넘어서 출발하던 목포행 완행열차 말일세.
자네와 친하게 지내기 전이었겠지. 1학년 때 토요일 이면 늘 기다리던 일상이라서 기억하고 있네.
토요일은 오전수업이라 집에서도 도시락을 준비해 주니 않으니, 배 골아 가며 역 근방에서 기다리거나 임시화물열차를 운 좋게 타고 간다 거나, 어떤 날은 김제까지 걸어가기도 했지.
다른 통학선의 친구들은 다들 먼저 가고 우리 정읍선 통학생들만 허기지도록 기다리다 보면, 드디어 안내 방송이 나오네. 세련되지 않은 굵은 역무원의 목소리로 “37열차 황등발차. 37열차 황등발차. 서울발 목포행 완행열차가 임전역인 황등역, 황등역을 발차하였습니다.”
거의 한번도 정시에 도착한 적이 없었던 완행열차, 그래도 저녁에 운행했던 통학차 보다는 나았을 것이네.
저넉 여섯시 경에 출발했던 정읍선 통학열차는 일년에 몇차례 빼곤 정시에 출발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이 삼십분 늦는 것은 보통이고, 한 시간이나 기다려 연발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는 그 당시 정기노선에서 퇴역을 하였던 증기기관차가 끌고 갈 때도 있었지.
그 때는 불편하고, 또 불친절하며 그리고 불평없이 기다리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기도 했었네.
그 때 삼등열차 중에서 가장 성능이 뒤 떨어졌던 통학열차의 진풍경이 있었네. 자네는 부용에서 먼저 내려 그런 모습을 몰랐겠지만, 와룡역에서 김제로 가던 철로에 아주 완만한 오르막길이 있었지. 우리는 그 고개를 삼시동 고개라고 불렀는데. 거기를 지날 때면 기관차가 힘에 지쳐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네. 어떤 때는 멈추기도 했었고, 사람의 걸음걸이 보다 늦어지니, 학생들이 하나씩 차에서 내리서 근방의 고구마밭 무우밭에 들어가 쑥밭을 만들어 놓고 다시 차를 타고, 그 걸 통학생들의 일탈이라고 밖에 그 것을 낭만이나 운치라고 말할 수 있겠나? 지금 같이 고속화된 철로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지.
지금은 어쩌면 동남아의 필립핀이나 인도같이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 속의 이야기로나 그려질 것이네.
그 전 까지만 하여도 철도 여행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네. 기차는 나를 낯선 지방으로 데려다 주었고, 객실 안에서는 서로 다른 지방에서 왔다가 다른 지방으로 가는 여행객과의 이야기 꽃이 피었고, 차창에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에 마음 설레이곤 하던 완행열차의 낭만이 있었지 않았는가. 일반 완행열차보다도 훨씬 거칠고 삭막했던 통학열차의 분위기에 마음이 많이 척박해져 있었을 것이네.
그러다가 2학년 2학기 말쯤 자네를 알게 되었던가? 자네는 전부터 눈에 띄였었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였고, 중학교에 다니던 동생하고 항상 같이 다니던 모습이 독특했지.
3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더욱 가까워졌을 것이네.
고교시절 3년 다니면서 결코 이리 사람이 되지 못했고, 그 후로도 이리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촌뜨기 였던 내가 3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 되어 친하게 되었고, 2학기 예비고사 전후부터 자네들, 부용에서 다니던 친구들, 동규, 두섭이. 인성이 등과 만나서 즐거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띄어지네.
자네와 나는 성격이나, 생김새나 대조적이었는데, 감성이 아주 고조 된 분위기엔 서로 뜻이 잘 맞았지.
부용에 가면 봉의산을 자주 올라갔지. 소나무사이로 헤쳐 나갔던 오솔길, 숨 차 하면서 올랐던 봉의산의 정상, 봉의산 정상은 사방이 훤하게 틔여 보였고 고즈넉하기 그지 없었지., 봉의산을 내려 오는 길에는 농장과 과수원과 밭과 언덕사이로 저수지가 있고 논이 있고 마을이 있고,
우리는 그 논두럭 길을 휘파람을 불며 내려 왔다네. 우리에겐 아무것도 보장된 것 없는 미래가 놓여 있고, 더욱 모험을 감내해야만 되는 젊은 시절이 도래하고 있었지만, 지금보다는 나아 질 것 이라는 서로의 격려와 우리가 소망하던 바는 일부라도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을 나누며 때로는 애조 섞인 노래와 때로는 활기찬 노래를 부르며 그 언덕 길을 내려 왔다네.
그 후 자네가 서울로 대학가서 그 봄에 보냈던 편지 한 구절이 생각나네,
‘봉의산 남쪽 언덕에 피어있을 할미꽃이 보고 싶다’는
그렇지! 봉의산은 그 시절 우리들의 우정, 소망, 사랑의 신화들을 간직하고 있지.
이제 무궁화열차는 부용역을 지나, 흔적도 없어져 버린 와룡역을 지나 김제에 도착하고 있네. 옛날 30분 이상 걸리던 길을 15분 만에 도착하였네. 모든 것이 빠르고, 정확하다네.
옛날에는 김제역이 종착역이 되었고, 집에는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지만, 이제는 김제에서 일을 보고 밤에 또 길을 나서야 하네.
자네 또한 부용에 다시 온다면 나와 같이 외로운 객이 되지 않겠나.
더 늙어 지기 전에 한번 만나세!
옛날에 즐거이 지내던 일이 기억이 아니 나거든
고운님 가신 텅 빈 고향에 님 기리는 망향가라도 부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