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격동시대를 살다가 전쟁중에 순교한 이광재 디모테오산부
8, 15, 41. 세 숫자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사상 두 번째 사제 회원으로 기록되는 이광재(티모테오, 1909~50) 신부의 삶을 압축해 드러낸다. '8품 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열심했던 신학교 생활,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라 산 착한 목자로서 15년, 41살을 일기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한 순교자로서 삶이었다.
깊은 산골 소년, 신학생 되다
이 신부는 1909년생이다. 경술국치에 1년여 앞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북한 행정구역상 북강원도 판교군 지상리) 냉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만현(가브리엘)씨, 어머니 김 수산나씨 사이 2남 1녀 중 차남이다. 이천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 동네 교우촌에서 태어난 소년 이광재는 특히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학교에 가기 전 그의 모습을 가장 잘 기억하는 이는 그의 형 이광익(필립보)과 당시 신학생이던 노기남 대주교다. 노 대주교는 방학 때면 고향에 돌아가 소년 이광재와 훗날 '예수 성심의 사도'로 불리게 되는 이재현(요셉, 1909~50?) 신부를 만나 신앙을 이끌었다. 이들이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노 대주교 영향이다.
용산 예수성심소신학교에 입학한 신학생 이광재는 소신학교 시절부터 열심을 보여 모범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하도 열심이어서 '8품 신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문품과 강경품(독서직), 구마품, 시종품(시종직),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등 7품(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독서직과 시종직, 부제품과 사제품만 남음)을 넘어서는 인격과 신앙적 열심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재미있는 별명이다.
그렇지만,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는 이튿날부터 밭을 매느라 손과 발, 옷에 온통 풀물이 들 정도로 억척같이 일을 한 착한 아들이다. 부제품을 받을 당시엔 어렸을 적 낫에 다친 왼쪽 검지 탓에 사제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미사전례 집전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교수신부들 판정을 받고 부제품을 받는다.
마침내 신학과정을 마친 이 부제는 1936년 3월 28일 종현(현 명동)성당에서 당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원형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착한 목자'로서 그리스도께 충실한 삶을 시작한다.
새 신부, 착한 목자로 발을 내딛다
새 신부의 첫 부임지는 강원도 횡성 풍수원본당이다. 1936년 4월, 풍수원본당에 부임한 이 신부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사제답게 애덕과 봉사,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을 몸으로 실천하는 젊은 사제로 산다.
1937년 9월 말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한 것은 사제로서 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지방에서 사목하며 살아야 했기에 그는 '단독회원'으로 활동했다. 회원이 된 이후 줄곧 수도복과 띠를 착용하고 홀로 규칙을 지키며 '작은 자'로서 산 이 신부는 고해성사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사제인 오기선 신부에게 「성화」지를 비롯해 여러 자료를 가져가 보곤 했다. 또 각종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재속 프란치스코회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많은 영적 도움을 줬다.
3년간 풍수원본당에서 보좌로 산 이 신부의 애덕 실천은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걸어간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래선지 지금까지도 이 신부의 사목 행적이 본당에서 전해져올 정도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학비를 대준 것은 물론 추위에 떠는 거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주는 건 예사였고, 얇은 셔츠만 입고 있는 걸 본 교우들이 정성껏 지어 선물한 명주 바지 저고리를 거지에게 입혀 보내기도 했다. 본당에서 운영하던 초등학교 교실 난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성당 근처에서 장작을 패기도 했고, 남모르게 학교 화장실 청소도 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낮은 자로 겸손하게 살았다. 신자들 사이에선 이 신부를 찾으려면 성당이나 학교 화장실, 병자들의 집으로 가면 된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같은 애덕 실천의 밑바탕에는 "예수님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모른다"고 말하던 평소 이 신부의 신앙적 성찰이 깔려 있다.
전에도 기도생활, 특히 묵주 기도에 열심이었지만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이후로는 시간전례(성무일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에 힘을 쏟았고 신자들에게도 강력히 권했다. 반세기가 지나도 그를 기억하는 신자들의 회고는 미사 후 감사기도를 드릴 때의 경건했던 모습이다. 특히 날마다 오후 4시에 성체조배를 정례화시켜 신자들의 냉담을 줄였다.
착한 목자, 전쟁 와중에 끝내 순교하다
이 신부는 1939년 4월 춘천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춘천지목구 양양본당 주임으로 발령받는다. 부임하자마자 이 신부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 현 부지에 새 성전을 신축했으며, 본당뿐 아니라 특히 공소 신자들 사목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걸어서' 인제와 양구, 화천 등지 공소까지 순방하며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권면했다.
그렇지만 1944년에는 일제에 성당 건물조차 빼앗기고 성당 곁 주택 조그만 방에서 미사 전례를 거행해야 했다. 8ㆍ15해방도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3ㆍ8선 이북에 있던 양양본당은 해방되자마자 소련군 감시를 받아야 했다. 처음엔 성당 내 비밀 다락방에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소련군이 들이닥치자 허물어진 일본인들 빈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 신부는 자신을 기다리는 신자들을 찾아 공소 순방을 멈추지 않았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3ㆍ8선에서 가장 가까운 본당이던 양양본당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 신부는 본당 사목 및 공소 순방과 함께 강릉이나 주문진 쪽으로 월남하는 함흥교구 및 덕원대신학교 사제와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을 도왔다.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기도하면서 본당 신자 김봉만(보니파시오)을 안내인으로 15차례에 걸쳐 월남을 성사시켰다.
이렇게 본당 사목과 공소 순방, 피란하는 이들을 돕던 이 신부는 1949년 4월에 체포된 백응만(1919~50, 당시 춘천지목구 평강본당 주임) 신부가 1950년 1월 고문과 굶주림으로 평양교화소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이 신부는 평강본당 신자들까지 돌보던 중 6ㆍ25전쟁 발발 전날 체포돼 원산교화소 특사감방에 수감된다.
이곳에서 김봉식(1913~50, 연길교구) 신부를 만난 이 신부는 김 신부와 서로 라틴어로 고해성사를 주거나 기도를 바치며 감옥생활을 견뎠다. 한 끼니에 겨우 100g, 반 공기 남짓한 조악한 밥과 소금물 국이 전부였던 식사에도 기도생활로 수감을 버티던 이 신부는 그해 10월 9일 원산교화소 뒤 방공호에서 김 신부와 함께 순교한다.
원산에 진주한 한국군에 발견된 이 신부 유해는 성 골롬반외방전교회원인 미 해병대 군종사제 머피 신부 주례로 장례미사를 봉헌한 뒤 원산본당 사제관 뒷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춘천교구는 2008년 이 신부가 순교한 10월 9일을 '교구 성직자 추모의 날'로 정해 이 신부 등 사제 14명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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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화신문 연속기획 기사중에서....
신부님께서는 풍수원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시다. 양양성당 주임신부님으로 발령을 받으신다. 당시 양양성당은 원산교구 관할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항상 최선을 다하여 양때들을 돌봤다. 그러던중 38선으로 남북 길이 막히자. 신부님은 수많은 성직자와 교인들을 남쪽으로 탈출시키신다. 쉽지 않은 산길을 어두움을 이용하여 안내자가 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사람들은 신부님께 권하였다. 같이 남으로 내려가시자고... 그러나 신부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한마리의 양을 위하여 남아야 한다면 원산부근으로 돌아가셔서 지속적인 사목활동을 하시다 결국 총상을 입고 원산교도소에서 수복한 유엔참전용사 군종장교에 의해 선종되신 모습으로 발견되신다. 지금은 춘천 주교좌 성당 뒤 성직자 묘역에 영면하고 계신다.
당시 탈출 루트를 당시대로 춘천교구에서는 여러고증을 참고하여 복원하여 신부님의 본명을 따 디모테오 길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매년 그 길을 순례자들과 걷는 행사를 몇년 째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양양본당을 출발한 후 다리 건너 솔밭 길로 길은 남쪽으로 뻗어 이어 진다. 가는 길에 예수고난회 수도원이 있고 중간에는 양양글라라의 집이 있다. 어느날 나는 프란치스칸 형제, 자매님들을 모시고 양양성당 입구 왼편에 있는 신부님 기념관을 찾아 신부님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형제님을 만나 고증을 듣고 주임신부님과 수녀님을 뵙고 인사를 나눈 후 디모테오 길을 걸었다.
디모테오 숲 길, 참 평화스럽다. 백두대간 기슭 嶺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嶺東지방 동해 해안선따라 38 휴게소 까지 이어진다.
기도와 성가를 부르며 걷다 보면 평화가 전신에 달라 붙는 것 같다.
활엽수 숲과 소나무 숲으로 구성된 길은 참 평화로웠다. 수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을 구출했던 길이라 그랬는지 걸음마다 환희심과 함께 신부님에 대한 애상에 젖어들어었다. 걷는 중간 예수관회 수도원도 잠시 들러 여정을 내려 놓고 묵상하는 시간도 갖어 보았다.
쉬엄쉬엄 두시간 만에 도착한 양양글라라 성당, 언덕을 오르자 오메가광장이 반긴다. 그리고 저멀리 설악의 자태가 삼삼하게 다가 왔다. 디모테오 길을 이곳이 끝이 아니다. 산줄기를 타고 38휴게소 7번국도까지 달린다. 푸른 동해와 설악과 그밖에 백두대간을 힁으로 보며 걷는 길이 무척 아름답고 저절로 성소가 맺힌다.
문을 두드려 수녀님을 뵙고 서울에서부터 지니고 온 꾸러미를 내려 드렸다. 그리고 실내에 들어 경당으로 가 묵상과 더불어 기도를 드리고 청원해야 할 개인 기도까지 드린 후 물러나 휴게소로 갔다. 내주신 차 한모금 향이 좋고 여독을 풀어 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동행하셨던 신부님께서 주례사제가 되셔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수녀님들도 모두 나오셔서 성가석에 착석하신 후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가를 불러 주셨다. 얼마나 곱고 아름다웠던지, 지금도 그 당시만 생각하면 울림 온다. 하느님의 영광, 찬양의 노랫말과 음율~~~
모든 일정을 끝내고 경당문을 조용히 신중하게 닫은 후
지독하게도 열혈하셨던 글라라 성녀앞에 서서 기도를 드리고 절을 올렸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다 드리고 손을 들어 배웅해 주시는 수녀님에게 목례를 끝으로 한계령으로 향하였다. 디모테오신부님과 관련된 자료가 더 있다. 정리되는대로 올리려 한다. 어느 시대나 등불은 있기 마련이다. 험난했던 난세에 분명 디모테오신부님은 천주교의 등불같은 존재셨다. 우린 신부님을 기억하며 프란치스칸으로서 자질 배양에 힘을 써야 한다. 샬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