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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2015년도 ‘역사학자와 함께하는 하남시민 문화유적 답사’를 5월에서 처음으로 실시하게 된다. 연녹색 잎들이 반들반들한 윤기를 발하는 싱그러운 5월의 화사한 날씨가 첫 답사의 시작을 반겨준다.
지난해까지 하남 역사박물관이 주최하며 (사)하남 역사문화연구소가 주관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올해부터 박물관의 답사 내용과 진행방법의 이질화로 공조체제가 무너지면서 파국으로 치닫던 본 연구소의 답사가 기사회생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흰 눈송이를 흠뻑 뒤집어 쓴 듯 눈부신 이팝나무의 꽃이 아침에 햇살에 빛난다. 3,4월 두 달간의 공백을 메우며 진행하는 새로운 답사라서 그런지 설레는 마음 금할 길 없다. 학자수(學者樹) 또는 삼공(三公)의 자리로 알려진 느티나무의 고장 괴산군(槐山郡)하면 퍼뜩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선생이 떠오른다. 그렇게 연상되는 곳에 신라 때 창건 된 ‘각연사(覺淵寺)’라는 절집과 고려 전기의 ‘통일대사(通一大師) 탑비’를 친견하러 간다.
하남에서 차를 달리니 두 시간 여 만에 각연사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각연사로 올라가는 길이 좁아서 한창 확장공사 중이다. 개울에 다리를 놓는 곳에 다다라 물막이로 놓은 흙길의 경사로에서 버스의 앞부분이 땅에 박혀 옴짝달싹 못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절집에 거의 다 와서 답사객들은 내려서 걸어 올라가고, 공사장의 중장비로 일의 뒷수습을 하고 뒤늦게 합류하였다.
보개산 각연사 일주문
덩그마니 세워져 있는 ‘보개산 각연사(寶蓋山 覺淵寺)라는 편액의 일주문이 보인다. 문안으로 들어가기보다 텅 빈 옆으로 차량도 사람도 지나간다. ’각연사‘는 일곱 개의 보물이 묻혀 있다고 해서 ’칠보산(七寶山)‘이라 한다는 산에 있다고 들었는데, 웬 ’보개산‘인가 하는 의아함이 든다. 나중에 알아보니 보개산은 속리산 자락의 작은 산이라고 한다. 이곳도 무슨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장비소리가 소란스럽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기 위한 연등도 얼기설기 걸려있어 단정한 절집의 분위기 보다는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든다. 곱게 단청을 한 대웅전의 건물이 보인다. 빨랫줄처럼 사방으로 줄을 치고 메달아 놓은 형형색색의 연등이 절집의 멋을 살리지 못하고 엉성해 보인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된 ’괴산 각연사 대웅전(槐山 覺淵寺 大雄殿)‘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이다.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有一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영조 때 작성된 상량문에는 통일대사가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안내문은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때 중건하였고 1979년에 보수한 것으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알 수 있는 목조건축물이라고 한다.
보개산 등성이에서 본 각연사 전경
이상배 선생이 각연사의 연기(緣起) 설화를 들려준다. 각연사는 원래 칠성면 쌍곡리 근처에 지으려고 했는데, 재목을 다듬은 나무부스러기들을 까치가 물어다가 어디론가 날라서 유일대사가 기이하게 여겨 따라가 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현재 각연사 터의 연못에 대패 밥이 떨어져 있어서 연못을 들여다보니 연못에 돌부처님이 계시고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연못의 부처님을 뵙고 깨달아서 ‘연못 연(淵)’자에 ‘깨달을 각(覺)’자를 써서 ‘각연사’라 했다고 한다. 모든 연기설화가 그렇듯이 이곳의 설화도 신비스러움으로 드러내어 절집의 신성함을 보여주기 위한 대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불교 연기 설화에서 보면, 이 설화는 절을 건축하게 된 인연의 중요성을 표현한다고 보겠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이 설화의 중심 소재를 재목과 대패 밥(찌꺼기)의 상관성에 있기 때문이다. 도를 닦는 스님은 재목이라는 기둥의 가치에만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되고 그 찌꺼기인 말단도 매우 중요하다는 함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부스러기를 물고 가서 버려진 곳에서 광채가 나는 부처님을 발견하는 頓悟(돈오)의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설화의 내용과 유사한 의미가 『장자(莊子)』「천지」편에 나온다.
“백년 된 나무를 쪼개서 희준(제사에 쓰는 술잔)을 만들어 푸른색 노란색으로 색칠을 하고 그 부스러기(찌꺼기)는 도랑에 버려지는 데, 도랑에 버려진 부스러기를 희준과 비교하면 아름다움과 추함에 차이가 있지만 본성을 잃은 것에는 같다.(百年之木 破爲犧樽 靑黃而文之 其斷在溝中. 比犧樽於溝中之斷 則美惡有間矣, 其於失性一也)”
기둥을 잘 다듬는 것은 자연 상태의 커다란 고목을 인위적으로 깎아내서 집을 짓기 위한 재료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에서 나온 대패 밥인 부스러기는 쓸모없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순박함을 조작하고 파괴했다는 결과에서는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수도를 사명으로 하는 절간의 생활은 자잘한 사소함도 결코 소홀함이 없이 용맹 정진해야 비로자나불의 ‘광명편조(光明遍照 : 세상을 두루 밝게 비춤. 비로자자의 다른 뜻)’한 세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대웅전에서 우측 위쪽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인 ‘괴산 각연사 비로전(槐山 覺淵寺 毘盧殿)’이 자리한다. 정면 세 칸에 측면 세 칸을 한 팔작지붕이다. 초석이 신라 계통의 형식이라 하며 배흘림 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고 여러 번 중수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에는 보물 제 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 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이 모셔져 있어 ‘비로전’이라 불린다.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진신(眞身)인 법신불(法身佛)을 말한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한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교주로 때와 장소 및 사람에 따라 가변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중생이 진심으로 빌고 바라는 바에 따라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미혹에 얽매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절집에서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혹은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 하는데 좌우에 협시보살을 모신다. 그런데 이곳처럼 ‘비로자나불’만을 봉안하면 보통 ‘비로전’ 혹은 ‘화엄전(華嚴殿)’이라 한다.
비로자나불 좌상
법당 안으로 들어가 불상을 친견한다.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니 ‘비로자나불’이다. 단아한 모습에 붉은 입술 그리고 검은 색의 나발이 눈에 들어온다. 육계(육계)는 낮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연화대의 대좌 위에 단정하게 앉아 온화하게 엷은 웃음 띈 모습이다. 조금은 기형적인 커다란 귀가 푸근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뒤 광배의 모양도 불상의 윤곽선을 따라 잘록하게 표현되었다. 광배의 표면에도 화염 무늬뿐만 아니라 좌우 대칭으로 작은 좌불상을 허리와 어깨 부분과 나발 부분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나발 위쪽에 세 분의 좌불상을 화염 무늬 속에 새겨 넣었다. 불교에서 ‘셋’이라는 숫자는 상당히 많이 쓰인다. 얼른 생각나는 것으로, ‘삼보(三寶 : 불, 법, 승)’, ‘삼덕(三德 ; 법신, 반야, 해탈)’, ‘삼독(三毒 ; 탐, 진, 치)’, ‘삼매(三昧)’ ‘삼배(三拜)’등 이다. 여기서는 ‘삼존불(三尊佛 : 법신, 보신, 화신)’을 나타낸 것 같다. 불교에서 삼존불을 모시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여러 세상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통일대사 탑비
보물 제1295호로 지정된 각연사 통일대사탑비(覺淵寺 通一大師塔碑)를 찾아 오솔길을 따라 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일행들이 비석 주위에 모여서 이상배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다. 비석을 보는 순간 우뚝한 비석의 모습에 눈길을 빼앗긴다. 귀부(龜趺)의 머리 모양은 거북의 얼굴보다는 퉁방울눈을 부릅뜨고 여의주를 물고 있어서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거북의 등딱지의 윤곽이 뚜렷하고 거대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등 위에 비신이 얹어져 있고 이수(螭首)도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향해 용틀임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완전한 형태의 귀부, 비신, 이수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아름다움을 더한다. 다만 비문이 위쪽 일부만 남아 있고 마모되었다.
통일대사는 속성이 김 씨 이고 중국 유학을 다녀온 뒤 왕실에서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태조 때부터 광종 때까지 유명한 선승이어서 입적한 뒤에 광종이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한림학사를 지낸 김정언(金廷彦)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했다고 한다. 비문이 마모되지 않았다면 통일대사에 관한 내용이나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햇살에 비치는 늠름한 아름다움의 탑비를 뒤로 하고 통일대사 부도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탑비와 부도는 원래 한 군데 있어야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서로 떨어져 있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이정표가 있는데 샛길을 따라 가파른 산등성이를 올라가야 한다. 이정표에 1.2km라고 되어 있으니 넉넉잡아 30분이면 오를 수 있으리라. 시작부터 가파른 등성이를 오르니 힘이 든다. 등성이를 넘으니 평평한 능선을 지나고 또 올라가니 편편한 지대에 승탑이 보인다.
통일대사 부도
보물 제1370호 각연사 통일대사 부도(覺淵寺 通一大師 浮屠)는 자신의 모습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은일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친견을 하는 순간 땀 흘려 올라온 가치와 보람을 느낀다. 전형적인 8각 원당형을 하고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완형에 가깝게 구비하고 있다. 전체적인 균형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대석 아래에는 안상(眼象)과 복련(覆蓮)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중간에 귀꽃이 있는데 마모되었다. 중대석은 팔각의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며 상대석은 앙련(仰蓮)이 새겨져 있고 받침석의 형태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중대석과 같은 형태로 제작되었고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다. 상륜부의 귀꽃은 연꽃봉오리의 형태에 오밀조밀하게 조각되었다. 중간에 떨어져나간 것이 있어서 아쉽다. 보주(寶珠)도 앙련 꽃받침만 남아있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문비와 마주한 지면에 배례석도 갖추고 있다.
보물의 문화재를 친견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탑비와 ‘부도(승탑(僧塔)이라고도 함)’는 함께 세우는 데, 통일대사 탑비와 승탑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이 승탑이 통일대사의 부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상배 선생은 정확하게는 ‘전(傳)’ 통일대사 부도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전’자를 빼고 부른단다. 하여튼 대단한 분의 승탑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겨운 보개산 등성이에 이렇게 커다란 탑을 조성했으니 말이다.
흡족한 마음으로 하산을 한다. 건너편 산의 아늑한 자리에 각연사의 절집이 안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창 공사 중이지만 이곳 까지 들리지도 않는다. 녹음(綠陰) 속에 검은 기와의 색상이 묵언(黙言) 수행하는 비구니의 정좌(靜坐)한 모습 같다.
각연사 석조귀부
시간이 조금 지체되어 하산길이 바쁘다. 내려가는 길에 원래 각연사가 있던 자리에 있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각연사 석조귀부(覺淵寺 石造龜趺)를 친견하러 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넓게 닦여진 평지에 쌓은 단 위에 귀부의 머리도 없고 비신 및 이수(螭首)도 없이 귀부의 몸체만 남아 있다. 하지만 첫 대면하는 순간 크기와 사실적 기법이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거북이의 넓이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거의 같아 보이지만 정방형의 형태라 길이는 작다. 귀부와 받침석이 하나로 되어 있다. 커다란 등딱지 위에 굵은 선으로 무늬를 새겼다. 앞에서 보는 배딱지가 솟아올라 있고 짧고 뭉툭한 발에 굵은 발톱이 뒤로 꺾여 있는 형상이 앞으로 기어가는 모습이다. 느린 걸음의 거북이가 바다를 향해 전진하는 힘찬 역동성이 느껴진다. 큰 모습에 비해 깔끔한 질감의 중후한 무게감 이 듬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따로 끼우게 만들어진 귀두(龜頭)가 없어져서 안타깝다. 비좌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와 안상(眼象)이 표현되어 있다. 잔존한 것만으로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쉬운 마음에, 일제 침략기 당시에 왜놈들이 귀두를 가져갔을 것이라고 농담을 하자, 함께한 김용수 선생이 정색을 하며, 뭔 일만 있으면 일본 사람에게 혐의를 갖는 태도도 문제라고 힐난하며 농담을 하여 가가대소(呵呵大笑)하며 다음 답사할 곳으로 이동한다.
사찰 진입로 확장 공사로 인한 작은 사고 때문에 지체되고, 산등성이를 올라 승탑을 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점심때가 지났다. 괴산군청 근처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는다. 5천 원짜리 청국장을 시켰다.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시골 밥상 같다. 싸지만 든든한 점심에 괴산의 인심과 훈훈함이 있어 좋은 인상으로 다음 답사지로 이동한다.
벽초 홍명희 생가
이번에 찾을 답사지는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홍법식 고가(古家) 이다. 이 집은 구한말(舊韓末) 금산군수를 재직하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 병탄(倂呑)에 항거하여 최초로 자결한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선생의 생가이다. 선생은 자결하면서 유언으로 ‘절대로 친일하지 말라’를 남겼다고 한다. 이 집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물을 최근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중부지방 양반 사대부 가문의 전형적인 형태인 ‘ㅁ’자 구조를 하고 있다. 안채의 좌우 부엌의 구조가 같게 되어있어서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인지 의심스럽다. 텅 빈 큰 집이 휑뎅그렁하여 쓸쓸하다. 잠시 마루에 앉아 이상배 선생의 설명을 듣는다.
이 집은 당국의 입장에서는 우정 홍범식 선생의 고가로 명명하고, 그의 순국의 뜻을 기려서 의사(義士)로 추앙하여 받들고자 커다란 비석도 앞에 세웠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 1888〜1968)선생이 일반 사람에겐 더 친숙한 이름이다. 벽초의 사상에 관한 문제가 21세기 민주공화국의 대한민국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 못내 안타가울 따름이다.
벽초는 역사소설『임꺽정(林巨正)』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그의 이력은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좌우 합작의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독립투사이다.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만주와 남양군도까지 그 활동의 무대를 넓혀가며 올곧은 삶을 실천하느라 간고(艱苦)한 생활을 하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맹자가 말하는 진정한 대장부의 자세를 지닌 지사였다. 또한 신간회 활동에는 일찍 얻어 나이가 열다섯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큰 아들 대산(袋山) 홍기문(1903〜1992)과 부자가 함께 활동하였다. 국학자로서 그의 연구업적도 매우 크다. 두 부자(父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 집안이 파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념과 사상이 다르고 또한 홍기문은 김일성대학 교수를 역임했기에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의식적으로 벽초 홍명희의 이름을 배제하고 있다.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의 후손은 아직도 이 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모순된 질곡의 현실이 안타깝고 분기탱천(憤氣撐天)하게 한다. 이제라도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 생가’로 명명해서, 견위수명(見危授命)하고 위국헌신(爲國獻身)하는 그의 자세 및 민족애와 올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한다.
새로 복원된 건물이라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벽초의 생애를 더듬어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가졌다.
김기응 가옥 내부
다음 답사지는 중요 민속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된 괴산 김기응 가옥(槐山 金璣應 家屋)이다. 괴산군 칠성면에 있는 옛 집이라 ‘칠성 고택’으로도 불린다. 품격으로 보면 괴산의 경복궁이라 칭송받을 만큼 격조가 뛰어난 가옥의 형태라고 한다. 전통적인 사대부 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 안쪽의 넓은 마당이 나오고 안채로 들어가려면 작은 문을 지나야한다. 이렇듯 복잡하게 여래 개의 문을 지나야 안채로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내외의 구분이 엄격했던 전근대 전통사회의 사대부 집안의 면목을 살필 수 있다. 그럼에도 부부 사이의 내밀한 교응(交應)을 위한 비밀스런 문이 있다. 혹자(或者)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부부유별(夫婦有別)만을 말하여 마치 부부간에 차별을 말한다. 여기서 ‘別(별)’은 ‘차이’와 ‘다름’을 말하는 것이지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중용』에 보면 “君子之道 造端乎夫婦(군자지도 조단호부부 : 군자의 길은 부부관계에서 실마리가 비롯된다)”라 했으니 부부간의 의리를 모든 실마리의 근본으로 본다.
집안 곳곳을 돌아보며 사대부 가문의 살림살이를 엿본다. 옛날 건물에 현대식 생활이라 여러모로 생활의 불편함이 묻어난다. 현대식 유리문을 설치했지만 7언의 대련이 보이는데 칠이 벗겨져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沖澹精神(충담정신 : 텅 빈 담담한 정신)”과 “從容文采(종용문채 : 조용한 문장의 아름다움)”의 단정한 글씨는 보인다. 노장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글귀이지만, 홍진(紅塵)에 물든 세속의 생활을 하는 현대인에겐 먼 옛날 퀴퀴한 책 속의 한 구절이리라.
밖으로 나와 집 전체를 둘러보며 담장을 보니 자연석 돌과 기와를 이용한 꽃담이 예쁘다. 마당 귀퉁이에 마을 유래가 적혀 있다.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 친 것이 성과 같아서 ‘성미’ 또는 ‘성뫼’라고 하였는데, 일제 침략기 당시에 ‘성산(城山)’이라는 명칭으로 오늘에 이르렀단다. 비옥한 옥토가 앞들에 펼쳐져 있는 명당이라고 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을 뒤로 하고 달천이 앞을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吉地)가 된다.
다음 답사지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인 연풍 풍락헌(延豊 豊樂軒 : 연풍 동헌)으로 간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접경지역인 연풍면은 조선시대에도 오지에 속하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소백산맥의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인 험준한 곳이다. 지금은 이화령 터널이 뚫리고 4차선 국도가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여 시간적 지리상으로는 매우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이와 같이 험준한 곳이기에 이곳에 부임하는 원님들이 울고 왔다가 울고 가는 곳이라고 한다. 첩첩산중이라 울고 왔다가 살아보니 순박한 시골의 인심 때문에 울고 간다고 하는 고장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시인으로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詩畵相看(시화상간 :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봄)’으로 우의를 돈독하게 했던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의 「延豊雜詠(연풍잡영)」이라는 10수의 시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를 읽으며 당시의 연풍고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峽人爲火田(협인위화전) 산골 사람 화전 만드는데
人去火不息(인거화불식) 사람 가도 불은 꺼지지 않네.
風吹上絶峯(풍취상절봉) 깎아지른 봉우리 위 바람 부니
夜崩千歲木(야붕천세목) 한 밤에 천 년 묶은 나무 쓰러지누나.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산골짜기의 모습과 멀리서 들리는 산봉우리의 바람 소리에 꺾어져 쓰러지는 나무 등걸 소리에 벽촌(僻村)의 오지(奧地)임을 실감케 하는 시다. 그런 벽촌의 현이니 오죽했으랴?
연풍 관아 풍락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豊樂軒(풍락헌)”은 조선시대 연풍현의 현감이 집무하던 동헌(東軒)이다. 연풍초등학교 운동장 한 편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1991년에 보수 정비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연풍 동헌의 옛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화가로 알려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현감으로 집무했던 곳이라 그의 체취를 느껴보는 기회를 가져본다.
단원(檀園)은 일반적으로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단원을 보는 매우 좁은 소견이다. 그는 도화서 화원으로서 정조의 어진(御眞 : 임금의 초상화)을 그리는 데 참여했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의 원찰인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후불탱화를 그렸다. 그래서 그는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풍속 등 모든 장르에 능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개되는 그의 그림은 풍속화가 많아 풍속화가로 알려진 것이다. 단원의 다방면에 걸친 화풍을 다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교과서로도 널리 알려진 풍속화가로 불린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단원의 그림은 맨발의 단원이 포의를 입고 비파를 타는「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이 그림에는 유려한 필치의 행서로 “紙窓土壁 終身布衣 嘯詠其中(지창토벽 종신포의 소영기중 : 종이로 바른 창 흙벽에 종신토록 베옷 입고 그 속에서 휘파람 불며 사네)”라는 화제가 있음> 한쪽에는 술 단지가 있고 정강이가 드러나도록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파초 잎 위에 앉아 생황을 부는「월하취생도(月下吹生圖)」, 봄날 말을 타고 가다 버드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는 모습을 그린「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등 이다.
단원을 말할 때는 그의 스승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표암은 단원에 대하여 ‘나는 단원을 세 번 만났다. 어려서는 그림을 가르치는 제자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서는 관직의 동료로, 늙어서는 망년지우(忘年之友)로 만났다’고 하였다. 표암은 단원의 든든한 후원자로 스무 살 이전에 단원이 도화서의 화원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이곳 연풍현의 현감 노릇을 한 것도 표암의 후원에 힘입은 것이다. 단원은 이곳 현감을 지내면서 관리 노릇을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품상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또한 매화를 좋아하여 그림 값으로 받은 삼천을 가지고 이천으로 매화와 바꾸고 팔백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과 마시고 이백으로 쌀과 땔감을 샀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매화음(梅花飮)> 일화이다. 이 일화처럼 간송비술관에 소장된 그의 <백매(白梅)>라는 그림을 보면서 벗들과 더불어 간담상조(肝膽相照)하는 술자리를 갖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러니 그의 집안 꼴은 어땠을까? 그런 자유분방함도 정조의 승하와 스승의 서거로 생활이 급전직하하게 된다. 그래서 만년의 단원은 자식의 학비도 대지 못하고 끼니를 거르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단원은 그림 이외에도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생황도 잘 불고 비파도 잘 탔으며, 글씨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시도 잘 지었다. 그야말로 시서화의 삼절에 음악에도 통달한 사절이라 할 수 있다.
연풍 동헌은 이렇게 단원을 회상하는 것으로 답사를 마친다. 연풍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타임캡슐을 묻은 기념비가 보인다. 오지인데 개화의 바람이 일찍 불어 신식학교도 이른 시기에 개교를 했다. 학교 앞에는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화를 입었던 천주교 성지가 있다. 외래 종교의 유입으로 개화가 빨리 되어 신학문을 일찍 받아들였나 보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는 보물 제 97호로 지정된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槐山院豊里磨崖二佛並坐像)이다. 이 마애불은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눈에 익혔던 불상이다. 두 분의 부처님이 나란히 조각된 마애불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다정한 모습의 불상이이라는 어렴풋한 영상을 각인해 두었었다. 언제고 때가 되면 꼭 친견해야지 했던 불상이다. 한데 괴산군 답사를 왔다가 부푼 가슴 안고 찾아왔는데 보수를 위해 비계를 설치하고 가림막을 처 놓았다.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수리 장면
이 마애불은 높이 14m 폭 4m의 거대한 자연석 바위 벼랑에 감실 형태로 바위를 파내고 그 속에 두 분의 부처님 좌상을 조각해 놓아서 ‘이불병좌상’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전체적인 조각상의 수법은 거친 면이 있어 보였다. 지금은 뵈지 않으니 아쉬움만 남는다. 두 분의 부처님은 ‘법화경’의 전설에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이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건립한 설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단한 삶을 살던 고려시대 민중들의 간고한 삶이 후천세계에서 다정한 부부의 연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느껴진다.
이 불상은 고려 말의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가 조각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불상 때문에 장수가 많이 나겠다며 불상 뒤쪽의 혈을 자르고 코를 베어갔다’고 한다. 실제로 두 불상의 한 분은 코가 없다고 하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우리에게 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신 걸까? 아니면 만남의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더 신심을 쌓아야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일까? 아쉬운 발길 돌리면서 오늘의 답사를 마무리한다.
2015년 5월 28일 풍산고 교무실에서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