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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적인 바리톤 고성현, ‘내 목소리는 옥토가 아니었다’ 자갈밭을 옥토로 바꾼 인생 역정|작성자 리음아트앤컴퍼니
세계적인 바리톤 고성현,
‘내 목소리는 옥토가 아니었다’
자갈밭을 옥토로 바꾼 인생 역정
역경도 고생도 삶의 공부
김포공항을 출발해 30시간 이상 여행을 마치고 이태리 뻬루지아에 도착하자마자 빈혈기가 심한 아이 엄마는 구토와 함께 길바닥에 쓰러졌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타국, 유모차에 있는 아들 남희는 고맙게도 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로마공항에서 2시간 반 가량 흔들거리는 친구의 승용차를 얻어 타고 내리자마자 벌어진 일이다. 친구는 다시 로마로 출발한 직후였다.
짐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어찌할 줄 몰라 당황했지만 우선 이삿짐용 이민 가방 두 개와 아이 보행기를 움켜쥐고 아내를 부추기며 낯선 숙소의 문을 무조건 두드렸다. 문소리는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천둥처럼 울렸다.
대학교 4학년 때 결혼해 ‘벨칸토가 도대체 뭐라고’ 그 무지개를 찾아 떠나온 이태리 유학길이다. 세 가족이 함께하던 과천의 전세아파트를 달러로 바꿔 밑자본으로 만들었다. 대한항공을 이용해 알래스카를 거쳐 단번에 로마로 직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항공료까지 아끼려고 방글라데시 항공을 선택했다. 홍콩에서 4시간, 방글라데시에서 다시 7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로마로 향할 수 있었던 천로역정만큼 길고 긴 유학길.
김포공항에서 이삿짐을 쌀 때 사용하는 3단짜리 천가방을 들고 탑승하려다 제지당하자 ‘가난한 유학생이니 봐달라’며 얼마나 통사정을 했는지 모른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우유병과 기저귀를 담아 밀고 탑승했다. 짐 5개를 등에 메고 양어깨에도 하나씩, 그리고 손에는 보행기를 들었다.
잠시 현재의 고성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뻬루지아까지 왔건만, 거기서 힘든 여정이 끝난 게 아니었다. 85년 1월의 일이다. 빈혈에 정신이 혼미한 아이 엄마와 엉엉거리며 울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아이를 데리고 예약도 없이 무턱대고 모텔에 들어갔던 게다. 이태리말을 모르니 ‘아이에게 먹일 우유 좀 달라’는 의사를 전하는 데도 한참 걸렸다. 손과 얼굴 표정으로 바디랭귀지를 펼쳐야 했다.
“그래도 그 당시 이태리인들은 참 친절했어요. 말의 뜻을 알아들은 주인장이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주더군요.”
음악은커녕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친 상태였기에 ‘내가 여기를 왜 왔나’ 후회할 만도 하다. 그러나 그때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오늘부터 시작인데 저희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튿날부터 그는 뛰었다. 복덕방을 전전한 끝에 다행히 방 한칸 짜리 거처를 찾아 옮길 수 있었고 곧바로 언어학교에 등록하면서 바리톤 고성현의 해외 역정은 시작되었다. 당초 가져온 유학비는 아파트 전세비용 1만5천불. 선불 집세와 생활비, 중고차 구입 등으로 약 7개월 지나자 돈은 리라 동전 몇 푼만 남긴 채 이슬처럼 증발해버렸다.
결국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인교회 집사님을 찾아 일거리를 소개해달라 부탁했다. 우선은 견뎌야 하지 않는가. 부탁받은 집사는 바리톤 고성현의 가능성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차라리 내가 돈을 대 줄테니 공부만 하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몇 번을 달랬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어요. ‘역경과 고생도 삶의 공부’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분을 설득했죠. 무조건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하자 결국 여행가이드 일을 맡겼습니다. 가이드를 하면서 무려 10여만 킬로를 달렸습니다. 나폴리, 피렌체, 베수비오, 로마 등 이태리 전역을 누비면서 돈을 벌었죠.”
이 글의 제목은 ‘올댓 고성현’이다. 제목이 좀 건방진 면이 있다. 그깟 몇 시간 인터뷰했다고 바리톤 고성현의 전부를 알 수 있다는 말인데 제목을 적으면서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누구를 전부 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올댓 고성현’이라고 제목을 단 것은 그나마 지금까지 무대에서만, 또는 공연기획을 진행하면서 대기실에서만 빼꼼히 지켜봤던 고성현보다, 차 두잔 마시는 이다경(二茶頃) 동안 훨씬 넓은 그의 후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면면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는 일. 성악가가 되기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을 듣노라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많은 사건들로 점철돼 있는 까닭이다.
송나라 소동파는 친구 ‘장호’에게 문장 하나를 선물했다. 박관이약취(博觀而約取)라고 했다. 사람을 논할 때 여러 측면에서 두루 보되 요점을 취하라는 것이다. 바리톤 고성현의 긴 스토리도 소동파의 말처럼 몇 개의 이야기로 요약해보기로 했다.
바리톤 고성현, 장르를 뛰어 넘다
‘바리톤 고성현 교수가 변했다.’ 언제부턴가 고성현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릴 때 성악인들은 ‘고 선생님의 음악이 장르를 초월하고 있다’고 뒷담화 한다. 변했다면 과연 무엇이 변했을까? 우선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훨씬 유연해졌다는 평이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훨씬 유연해지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고성현 교수는 후자가 아닐까?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별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그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하루 아침에 떠오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 박노해
박노해 시인의 시처럼 바리톤 고성현이 변했다면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디에서 변했을까 다양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듣자하니 그의 인생스토리는 에누리없이 ‘곱다시’ 한 편의 인생드라마다. 특이한 점은 그가 고난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한다는 사실이다. 인터뷰 곳곳에서 그 점을 발견했다. 부친이 목사님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 갈등으로 무언가를 결정할 때, 절체절명의 순간, 늘 성경말씀을 ‘결정 카드’로 꺼냈다.
고성현의 가장 큰 변화는 ‘노래쟁이’에 대한 개념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몰라도 최근 몇 년 동안의 족적을 더듬어보면 ‘과연 대중친화적으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노래든지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법정스님께서 그랬잖아요. 스님이 스님답고 목사가 목사다워야 하듯이 노래쟁이는 노래쟁이다워야죠. 노래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이뻐 보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다 노래가 되거든요.”
“그 경지까진 모르겠지만... 2015년 ‘인생이란’ 음반을 발표했을 때, 옛날 고성현 선생님이라면 이런 곡은 부르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죠.”
“맞아요. 절대 안 했겠죠? 그런데 사실은 부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겨를이 없었죠. 아직은 한창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 나이였잖아요. 라트라비아타, 아이다, 안드레아 셰니에, 토스카, 팔리아치 엄청나게 많은데 다른 장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뿐이죠. 성악가라면 흔히들 아리아나 가곡만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악가는 ‘소리의 달인’이 되어야 해요. 조용필, 나훈아, 김광석, 송창식 등 이런 노래가 나왔을 때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반면 ‘당신도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에 나오는 Nemico della Patria(조국의 적)도 한번 해봐’ 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달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변화의 신호탄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현장에서 시작되었다. 2015년 경 국립오페라단의 ‘오텔로’ 공연을 앞두고 연습하던 중 신영주 음악코치님이 낯선 악보를 들고 나타났다. ‘시간에 기대어’라는 악보였다. 그동안 누구도 고성현에게 이런 류의 노래를 권하지 않았기에 뜨아 했지만 가사를 읽던 중 ‘이건 내 이야기잖아!’ 쓴웃음이 입가에 흘러내렸다.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
“가사를 반복하니 ‘차암~ 좋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 삶이 오텔로에 나오는 악인 ‘이아고’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하고 삶을 뒤돌아보았죠. 오텔로를 파멸로 이끈 이아고와 같은 존재 말이죠. 그동안 너무 무작정 달려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거죠. 아마 예전처럼 오페라의 어려운 노래들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이런 노래는 다른 사람에게 부르라고 해요’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7년 전은 14년 전과는 달랐습니다. 여유가 있었어요.”
‘시간에 기대어’를 발표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광혁 작곡가의 ‘대지의 노래’도 노래했다. 우광혁 교수가 ‘오직’ 고성현 교수를 염두하고 작곡했다는 이 노래는 지난 82년 대학가곡제에서 불렀던 ‘산아’만큼 감동적인 작품이다. 이후 고성현 교수의 음악장르의 폭은 봇물 터지듯 활짝 열렸다. ‘인생이란’의 가사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는 듯이...
인생이란 이런 건가 봐요
영원이란 것은 없는 것
사랑하고 또 멀어지고 나면
미워하다가 또 그리움
사랑을 미워할 순 없잖아
......
스타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모든 예술가는 저마다 대중이 평가하는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스타마케팅’이다. 그런데 공연장이든 기획사든 스타마케팅에 대한 개념을 모르거나 어떻게 해야 스타마케팅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교육이 없는 것 같다. 스타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실력 있는, 그리고 대중이 좋아하는 스타를 주최 측이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실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대중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 누군가가 없었다면 아마도 박물관에나 처박혀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훌륭한 음악가들의 ‘스타성’을 인정하고 공연을 할 때마다 스타마케팅을 최대치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라 스칼라좌에서 1년에 네 작품을 하든, 다섯 작품을 하든 파바로티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오히려 스칼라측에서는 제발 한 작품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죠. 메트로폴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타가 존재하기에는 척박한 토양입니다. 누군가 인기가 많아 무대에 자주 서면 ‘왜 저 연주자만 자주 무대에 세우냐?’고 따지죠. 신인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을 키워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그러나 유럽은 누구도 ‘왜 파바로티만 세우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는 스타니까요. 오페라에서도 이런 ‘스타’가 나서도록 길을 터줘야 합니다. 그래야 오페라가 재미있거든요. 베르디, 푸치니, 조르다노의 작품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고도의 테크닉’이 있어요. 이 부분을 해결하는 스타가 있다면 그가 몇 번을 공연해도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그게 스타마케팅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스타를 알아보는 관중의 안목도 중요하다. 3시간 이상과 20만원 티켓비, 그리고 자기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오페라이건만,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분들까지 초대해 ‘다음엔 이런 거 보지 말자. 너희들이나 봐’ 하는 얘기를 듣는다면, 이건 아니다 싶다. 오페라를 알고 ‘아까 그 사람 누구냐? 와~ 리골레토 ‘질다’의 죽음을 저렇게 해석하느냐? 정말 아름답지 않아?’할 정도로 식견을 갖춰야 한다. 그럴 때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성악가를 내쫓아버리는 파워도 생긴다.
“기대에 못 미치면 관중들이 야유하고 휘파람을 불거나 ‘극장장 나와’라거나 ‘지금 노래한 놈(?) 나가’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오페라 교육입니다. 왜 오페라하우스에서 노래만 하면 모두 ‘브라보’ ‘브라바’를 외치며 박수를 치나요? 소리가 안 되면 ‘최고의 음악을 달라’고 소리쳐야 하고, 반대로 테크닉의 최절정을 구사하는 성악가에게는 ‘다음에도 또 나오라’고 함성을 질러야 합니다. 그럴 때 스타마케팅이 이뤄지는 거예요.”
고성현을 가장 사랑했던 고 프랑코 제피렐리(왼쪽)와 함께
시야 넓은 사람들이 세상을 끌어갔으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그 구성원보다 더 큰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계적인 오페라 리더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울 점은 그들의 ‘음악적 양심’이랄 수 있다. 그들은 최고의 선 ‘ART’를 위해 끝없이 칼을 갈면서도 온유한 마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국내 민간오페라가 한때 크게 발정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시립오페라단의 고 김신환 단장님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성장해나갈 때가 있었지만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당시 민간오페라단 단장의 어떤 마인드를 가졌을까?
“제가 소개하는 이야기가 적절하다면 인터뷰에 그대로 내셔도 됩니다. 50여년 전쯤 일입니다. 위대한 오페라 연출자인 ‘프랑코 제피렐리’란 이름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일 중 하나를 소개할게요. 그가 이태리 밀라노 라 스칼라좌에서 트라비아타를 연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작비는 지금으로 따지면 80억, 여기에 20억 연출료를 별도로 지급했습니다. 엄청난 돈이죠. 그런데 프랑코 제피렐리는 80억은 물론이고 개인에게 주어진 연출료 20억도 오페라 제작에 전부 쏟아부어 100억의 공연을 만들었습니다. 80억만 해도 어마어마한 공연인데 100억을 들였으니 상상을 초월했겠죠. 그런데 그 이후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 공연을 본 코벤트가든은 120억에, 메트로폴리탄은 150억, 일본은 200억에 사들였습니다. 이게 ‘문화마케팅’입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이런 마케팅을 할 분이 나타나고, 그리고 그런 마케팅을 할 때가 된 것 아닌가요?”
문화마케팅을 좀더 얘기해보자. 누군가 최상위 개런티를 받고 그 금액 전액을 소년소녀가장에게 기부한다고 치자. 또는 ‘이번 사례비 전액을 백신 구입에 사용하십시오’ 그랬다면 누가 그를 인정하지 않겠는가?. 프랑코 제피렐리처럼 예술의 오병이어 기적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래전 이야기다. 고성현은 언젠가 유명 지휘자와 전국 6개 도시를 순회하는 음악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만 지휘자 본인이 받은 개런티는 고성현의 수십배 아니 더 이상을 받았고, 고성현은 6개 도시와 앙콜을 포함 7번의 연주에 몇백만원의 개런트를 받았을 뿐이다. 게다가 고성현을 더욱 연단케 한 것은 ‘당신은 그 지휘자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세상살이는 결국 맘먹기에 달렸다. 배우고자 하는 자는 굴욕 속에서도, 길에서도 배울 수 있다. 고성현은 그를 연단케 한 그 제작사와 지휘자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반드시 세계무대에 서겠다는 말을 남겼다. 최고의 예술가에게는 그란데(Grade), 교황에게는 뽄떼(Ponte)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그런 환호를 받는다면 진정 존경받는 위인이랄 수 있다. 고성현은 이후 유럽에서 오페라 무대에 설 때마다 16,000유로(3,000여만원)을 받으며 그란데! 그란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며 웃음 짓는다.
역경을 대하는 바리톤 고성현의 자세
고성현 교수와 얘기하는 동안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쓴 책 중에 ‘공부하는 독종만이 살아 남는다’(중앙books), 또는 야마구치 마유의 ‘7번 읽기 공부법’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천성적으로 소리통이 크고 굵으며 성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기에 별 노력 없이 최고 반열에 오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고교시절까지만 해도 그의 원래 목표는 의대였다. 자의적이 아니라 집안에서 그렇게 몰아갔다. 성현이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압력에 고교도 ‘이과’를 지망했다. 이과는 성악과 거리가 한참 멀다. 그러다 운명을 확 바꾼 사건을 맞닥뜨렸다. 고3 학년 2학기에 싸움이 벌어졌다. 대학생 두 명과 다툰 싸움인데 흠씬 두들겨 패고 서울로 떠나버린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을 동시에 어떻게 상대하느냐고?
흐음.... 고성현은 초등학교 때부터 100미터, 400미터 계주, 넓이뛰기 등 육상선수였고 7살 때부터 중고등 학생 때까지 전주신광교회 일층 합기도장을 놀이터처럼 다녔다. 합기도 비공인 4단 정도로 기본 체력이 탄탄했다. 부모님은 목회 때문에 늘 바빴기 때문에 5형제는 서로를 챙기며 더욱더 강하게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 특수반 보충수업 때문에 점심 저녁용 도시락 두 개를 준비했는데 여름철이면 저녁도시락은 늘 쉬어터져 수돗물로 씻어서 먹었다. 그 바람에 장이 탈이 나면서 원하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 바람에 성악가의 길을 걷지 않았나 웃음 짓는다.
“친구들에게 뒷처리는 알아서 하라 부탁하고 9월 1일 밤 11시 55분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죠. 그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고3이었어요. 열흘간 서울에 있으면서 운명이 확 바뀐 거예요. 9월 10일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무실을 박차고 들어갔습니다. ‘선생님 저 음대 갈게요!’ 선생님들이 ‘저 녀석 미친 놈’이라고 하면서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곧바로 문과로 바꿔 어머니께 두 달밖에 남지 않았지만 반드시 서울대 가겠다고 약속하고 교회 여신도회관 구석방에서 하루 2시간씩 자면서 공부만 했다. 이미 이과에서 수학 물리 생물 등은 ‘들은 풍월’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었고 걸림돌이었던 영어는 포기했다. 대신 다른 과목은 무조건 다 암기해나갔다. 최소 한 과목당 ‘일곱 번씩’ 읽었다. 공부를 해보니 할 만했다. 중학교 때 전교 15등 안에서 맴돌던 실력이 발동되었다. 어머니의 새벽 기도는 지금도 귀에 생생했다. 고성현 교수는 10년 전 하늘나라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해서 ‘전북의 별’이었던 고성현은 마침내 전주 해성고에서 또 한 명의 서울대생이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 10일간의 서울 도피
그런데 서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의대에서 성악으로 방향을 굳혔을까? 전주에서 도피했을 때 당장은 당시 한양대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형을 찾았다. 알다시피 형 바리톤 고성진 역시 그 목소리가 대포였다.
“형은 다짜고짜 ‘너 노래하지 마?’ 하면서 성악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어느 학교에서 저에게 4년 장학생에 생활비까지 줄 테니 자기 학교에 입학하라고 제안했던 일도 있었거든요. 나름 실력을 인정받았던 거죠. 그런데 형은 반대했어요. 단!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서울대라도 가면 모를까...’ 다른 대학은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는 거였죠. 사실 형은 제가 노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본인도 노래를 해보니까 성악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안 것이지요.”
그랬던 형이다. 그러나 동생이 상경해 서울대 시험을 치르자 자신의 방을 내주고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당시 형이 거주하고 있던 곳은 청기와주유소 부근 작은 지하방 한켠, 일인용 야전침대가 전부였다. 예비고사를 마치고 본고사 치르기까지 한 달 동안 그 좁은 침대에서 서로 방향을 바꿔 같이 자야 했다. 고성현의 얼굴에, 형의 발이 놓였고 그의 발은 형의 얼굴 근처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런 고성현이 나중에는 이태리 스칼라좌 수석으로 들어가고, 로베르토 알라냐와 호세 쿠라와 같은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어깨를 겨루게 될 줄이야... 고성현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서울음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목소리 세공(細工)을 위한 피나는 노력
워낙 소리가 좋아 다른 이들보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고성현은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질문하자 두 눈을 크게 뜨고 ‘뭘 모르시네’(?) 하는 반응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저만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나와 보라고 할 만큼 매일매일 소리를 냈죠. 이태리에서 제 푯대는 분명했습니다. ‘엔리코 카루소’ ‘에또레 바스띠아니니’ ‘피에로 카푸칠리’ ‘마리아 칼라스’란 말이에요. 그런데 제 노래를 녹음해서 들어보면 나는 촌놈에 불과하고 발음에 된장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당시 가이드로 사흘 일해 500불 받으면 아내에서 400불 주고 남은 100불은 레슨비에 썼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엔초 스코르소냐, 마리아 알로스 등 세 명의 프라빗 선생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다들 ‘그란데 굿’이라고 칭찬했지요.”
85년 1월부터 87년 7월까지 약 2년 6개월이 지나자 밀라노 라 스칼라좌에서 성악 오페라 아카데미 문하생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돈 벌까요 노래할까요? 여기 스칼라좌에 합격하면 노래하겠습니다.” 신은 그를 허락했다. 결국 라카르토 무티를 비롯,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167명 중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다.
그렇게 밀라노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이 침대와 이불 등 로마 살림살이를 몽땅 차에 싣고 삐그덕거리며 밀라노로 향했다. 비가 오면 다리 밑에서 기다려야 했고 아이가 힘들면 쉬어가야 했다. 그래도 밀라노로 온 보람은 컸다. 2년 반만에 디플롬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카데미 8개월째 레슨을 받던 중 레슨을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교수는 ‘당신의 소리는 이제 충분하다. 단 한국, 베트남, 중국 등 아시아권에 가면 크게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쪽에서 활동하라는 뜻이었다.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리죠? 네 맞습니다. 분명한 꾸지람이었어요. 네 소리를 한 마디로 공장 같은 소리다. 이곳은 공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세공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곳이니까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때 깨달았죠. Nemico della Patria 등 드라마틱 바리톤 곡만 배우려고 했을 뿐 베토벤의 Ich Liebe Dich와 같은 세공 작품은 공부하지 못했던 것이에요.”
교수는 고성현에게 수차례 지적했지만 고성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게 교수의 변(辯)이었다. 사실 그 8개월 사이에 고성현은 슈튜트가르트국제콩쿨, 나비부인콩쿨, 푸치니콩쿨 등 세계적인 콩쿠르를 도미노처럼 제패해나갔다. 그런 그에게 레슨 거부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아름다운 노래도 배우겠다’고 약속한 고성현. 모차르트의 작품을 배우면서 진짜 공부가 시작되었다.
객석 끝까지 관통하는 목소리를 키우다
고성현의 목소리는 대포 소리만큼 크다. 9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고성현의 노래를 처음 접했다. 천정이 뚫리는 줄 알았다. 멀리서 본 착시일까? 비교적 작은 체구로 보이는 고성현의 목소리는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런데 그토록 천둥같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었다. 고성현은 스칼라좌 아카데미와 함께 89년에는 오지모 아카데미에서도 공부했다. 어느 날 이태리에서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함께 공연을 펼치는데 청중들이 웅성거렸다. ‘왜 고성현의 소리만 들리지 않는 거지?’ 객석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몰랐지만, 피치에 문제가 있었던 걸 처음 깨달았다.
“그때부터 ‘들리는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공간에서 소리 낼 때, 악기통은 성대가 아니라 공간 전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설령 그런 공간에 없더라도 매일매일 그 공간을 상상하고 노래를 부르라는 겁니다. 스칼라좌 극장이 이 공간의 100배라고 한다면 그 100배를 상상하고 매일매일 연습하라는 말이죠. 이런 현상을 이태리말로 ‘인꾸보’라고 합니다. 즉 무념의 세계, 현실을 초월한 꿈, 몽유의 상태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 거죠. 단순히 성악이 아니라 이건 도(道)입니다. 공간을 악기통으로 상상하면서 한가지 염두해야 할 사항이 있죠. 무대에 있는 고성현과 객석 끝에 있는 고성현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역시 매일 상상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소리가 달라졌다. 세미한 음성으로도 저 멀리 객석 끝까지 전달하는, 오늘날의 발성이 완성되었다. 고성현은 감사한 마음에 실베스트리 선생님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아니 한달에 한 번씩이라도 계속 체크하고 싶다고 하자 실베스트리는 정색했다.
“나는 더 이상 너의 마에스트로가 아니다. 네 마에스트로는 저 무대야. 이제부터는 무대서 배워야 해. 무대가 바로 선생이야! 그러셨습니다.”
89년 7월이었다.
자갈밭에서 옥토로 바뀌다
처음 밀라노로 갔을 때는 가이드로 벌어놓은 돈으로 생활했지만, 고생은 계속되었다. 집세는 4개월이나 밀렸다. 밀라노 생활 첫해 겨울, 집은 추워 스티로폼을 깔아야만 했고 창문에서는 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밀라노에서는 가이드 일을 하지 않아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갔다. 구차하기만 한 자신의 처지가 참담할 때는 무릎을 꿇었다. 너무도 힘들어 전주 아버님께 SOS를 청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우린 네게 줄 거라곤 ‘기도’밖에 없다 하셨다. ‘주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은 호통을 쳤습니다. 노래해, 이 놈아. 노래해! 너 노래하려고 왔잖아.”
그러면 다시 일어나 노래를 연습했다. 오로지 노래만 했다. 고성현은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에는 어쩌면 한국 최고의 성악가로서의 교만에 가까운 자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타고 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성경’은 그런 고성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아니다. 너는 아직 자갈밭이다.’ 그런 울림이었다.
“성경을 읽으면 가시밭, 자갈밭, 옥토밭이 있어요. 고성현이라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그래도 이 정도면 옥토에 씨뿌린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죠. 고등학교 1학년 최우수상으로 피아노 타고 호평을 받고 군 입대 특례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이태리에서 발견한 고성현은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옥토였습니다. 이태리에서 ‘코리안’은 옥토가 아닙니다. 그냥 짝퉁이지요. 남들 보기에 겉멋만 든 옥토가 아니라 진짜 옥토가 되기 위해 완전히 갈아엎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매달렸고 마침내 성공한 것이지요.”
조금씩 벨칸토를 알아가며 까다롭기로 유명한 전설의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는 유독 고성현을 사랑했다. 목소리가 다비드의 근육처럼 탄탄하다고 높이 평가한 그는 ‘고성현의 노래에 진정 감동했다’며 ‘내 무대에서 코리안은 고성현 하나로 족하다, 다시는 동양인을 기용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다. 실제 그는 두 번 다시 동양인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게 제피렐리가 인정한 최고의 가수가 이스라엘 텔아비브 국립극장의 ‘나부코’ 공연에 서자 ‘한국에서 온 모세’라 호평했다. 유대인들의 아성(牙城)인 이스라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에 호세 쿠라와 펼친 공연에서는 ‘호세 꾸라의 밤을 훔친 바리톤, KO(고)’라 했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만한 ‘사건’이기에 고성현은 난생 처음 모 신문사에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언론사의 태도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인가요?’
“이스라엘 텔아비브 국립극장에서 7회 공연을 했는데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응으로 무료 야외 공연 1회를 더 추가했습니다. 무려 15만 명의 관객이 몰렸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를 때 모두 촛불을 켜는 등 장관이었습니다.”
사실 2002년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팔리아치’에서 세계적인 테너 호세 꾸라와 함께 했을 때 고성현의 아리아 ‘여러분’이 끝난 후 무려 5분 동안이나 박수가 이어져 꾸라가 입장하지 못했을 만큼 고성현의 목소리는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랬던 그가 텔아비브에서 알라냐와 함께 공연한 사실은 동양인으로서는 특필감이었지만 그 언론은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그 뒤로는 언론을 찾지 않았죠. 물론 그때 반성했죠.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데 자랑할 게 무엇이냐, 남들이 알아주면 고마운 정도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고성현의 목소리가 옥토가 된 후 잊을 수 없는 콩쿠르가 하나 있다. 2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나비부인콩쿠르에서 1등을 한 사건이다. 솔직히 나비부인 콩쿠르는 일본인들을 위한 콩쿠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인이 주최하고 대부분 상금을 일본 성악가들이 차지했었다. 상금이 1만 불에 달할 만큼 규모가 큰 콩쿠르인데 고성현이 그 수많은 젊은 유럽의 성악가들을 등위 밖으로 밀어냈다. 그는 상금 1만 불을 거머쥐고 3시간을 달려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활짝 열고 희미한 거실의 불빛 아래 지폐 100장을 뿌렸다.
“여보 4개월 밀린 집세 얼른 갚아. 그리고 그 돈 중 빳빳하고 깨끗한 돈 10장을 챙겨서 하나님께 꼭 드려요.”
한폭의 영화 같은 감동적인 장면이 아닌가. 이때가 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고성현은 나라밖에서 열린 이태리 성악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셈이다. 감격하는 아내의 눈시울을 뒤로 하고 곧바로 피렌체로 향했다. 이튿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일본 나가사끼로 날아가 기념식수(植樹)를 한 후 위너콘서트에 올랐다. 기적같은 나날이었다.
성악은 자기관리에서부터 시작해야
고성현은 자신이 이태리에서 옥토로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했던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그 내용을 담아낼 만한 인재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한다. 지방이건 서울이건 상관없이 그런 제자를 만나고 싶다. 테너 김호중과 같은 제자를 찾고 있다. 그러면 좋은 성악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그 첫째는 자기관리라고 한다. 아무리 재능이 넘쳐도 자기관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음악의 인터내셔널 언어를 체득하려면 ‘짜여진 사각형’ 안에 꽉 들어가야 합니다. 모차르트 바그너 푸치니 베르디 도니제티 등 위대한 음악가들에게 접근하려면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합니다. 그게 기초죠. 방안에는 먼지가 있으면 안 되고, 음악을 경건하게 대하기 위해 매일 샤워해야 하고 머리를 감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매일 연습하고 스님처럼 수신하지 않으면 그 위대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단 1%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음악가들 중에는 이같은 규격을 지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지나치면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로 악화되는 일도 있다. ‘4분의 4박자’, ‘4분의 3박자’라는 틀에 들어가지 않으면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곤 한다.
큰 의미에서 자기관리란 ‘나설 때 나서고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태도라고 한다. 알라냐와 일 트로바토레를 공연할 때 고성현의 노래를 지켜보던 바리톤 조르조 잔카나로가 다가와서 던진 충고 한마디...
“미스터 고! 일 트로바토레 공연 끝나고 팔리아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토스카, 오텔로 등도 알라냐와 계속해야 할텐데 내가 보기에는 이번만 하고 끝날 것 같은데...”
“왜?”
“정말 몰라서 묻나? 내가 봐도 네가 너무 잘해! 그게 이유야. 절대 알라냐보다 앞서려고 하지 마.”
조르조 잔카나로는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등과 자주 공연을 펼친 관록의 바리톤이다. 레나토 부르손과 피에로 카푸칠리 등 잔카나로 만큼 뛰어난 성악가들도 많지만 이들 대가들은 어쨌든 잔카나로만을 선호한다. 레나토 부르손이나 피에로 카푸칠리는 파바로티 등과 무대에 서면 ‘나도 당신들 못지 않다’는 식으로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봅시다. 루치아노를 보기 위해 왔는데 루치아노보다 잘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주제 파악을 못하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누가 저런 놈을 데려왔냐고 난리 칠 것입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였으면
바리톤 고성현은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꿈꾼다. 진정 통일된 대한민국을 꿈꾼다.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이 고성현에게 ‘오늘도, 내일도 노래해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 이런 요청이 많은 나라를 꿈꾼다. ‘테스형’ 하신 분이 있는 것처럼 고성현은 난 ‘로몬형’을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나라, 지식보다 지혜가 넘치는 나라를 꿈꾼다.
“‘프랑스 파리’ 하면 에펠탑, ‘뉴욕’ 하면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대한민국에는 무엇이 있나요? 어려서부터 늘 부른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에요. 온 국민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통일’, 그게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개선문처럼 우리의 통일문을 더 웅장하고 크게 만들고, 파리 에펠탑보다 더 높은 우리의 통일탑, 남북이 함께 그 탑을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 최고이자 꼭 가보고 싶은 나라, 한국 제일의 관광상품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통일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 탑에 이르는 길은 20차선으로 만들고 현대식으로 축구장, 야구장, 그리고 이태리의 오페라극장 같은 오페라하우스, 호텔 등 제2의 라스베가스처럼 조성한다면 가까운 나라에서부터 전 세계인들이 우리를 찾을 거예요. 탑 옆에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서면 죽을 때까지 노래할 겁니다. ‘아름다운 코리아’ 하면서요. 자동차와 반도체 그리고 문화... 이는 건립하는 즉시 명품이 될 겁니다.”
통일의 염원을 담아 수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탑을 짓는다면 대대손손 먹을거리를 주는 셈이다. 에펠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 얼마나 많은 비난이 쏟아졌던가. 지금은 네 개의 엘리베이터 운행만으로 연 2천5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각종 영화와 공연과 쇼가 펼쳐지는 등 에펠탑 하나로 1조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다. 문화가 있는 곳에 돈이 쏟아지는 단적이고 극명한 예다. 로마는 어떤가. 2200년 전에 만든 문화로 대대손손 먹고 살고 있다. 우리도 반만년 역사를 갖고 있으니 이제는 세계적인 기념물 하나쯤 만들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인구는 자꾸 줄어들고 있는데 아직도 살 집만 짓고 있다. 이건 커다란 모순이다. 이제는 거꾸로 가야 한다. 있는 아파트도 허물어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야 후손들에 면이 서지 않겠는가. 대체 우리 아들 딸 손자 손녀들한테 무슨 욕을 먹고 원망을 들으려고 하는지 겁이 난다.
“유럽에서 20~30대를 보냈기 때문에, 지금도 유럽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애국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긴 시간동안 선진국이나 유럽의 생태를 보면 우리나라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믿으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성악가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게 이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성현은 ‘문화는 곧 국가라고 말한다. 나아가 ‘문화 있는 곳에 돈이 모인다’는 논리 아래 우리 문화가 전 세계를 이끌어 가리라는 상상도 해본다.
최근 언론에 나왔던, 옥스퍼드 철학과 교수가 한 학생에게 만점을 준 사례를 들었다. 성경구절 중 ‘예수께서 가라사대 물이 포도주가 되라 명령하자, 물은 포도주가 되었더라’ 하는 내용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였다. 무심코 창문만 바라보면 한 학생이 시험시간이 끝날 때쯤 한 줄의 답을 적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교수는 그 학생에게 만점을 주었다. 우리 사회라면 가능했을까? 건방진 녀석이라며 F학점을 주었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 이런 리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정직하고 착한 것은 기본이고, 문학을 알고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 더 넓은 시각과 안목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긴긴 인터뷰가 끝났다. 지난해 11월 4일 한신대 창립 80주년 기념음악회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고성현은 이날 정요셉 작곡 ‘내 은혜가 네게’를 노래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에 은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일매일 더욱 익어가고 있다.
40여년 이상 그가 지키고, 가꿔오고 있는 ‘성악.’ 고성현은 말한다. 성악만으로 ‘소풍 마치는 그날, 가서 참 아름다웠다’ 말할 수 있도록 이 시간 이후로도 여전히 피아노 앞에서 노래할 것이라 한다. 노래가 곧 나 고성현이기에... 이제 그를 만나고 싶거들랑 오는 5월 20일 예술의전당 ‘음악맛집 고家네’에 오면 된다. 코로나로 험진 세상을 큰 가슴으로 위로하는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글 김종섭
[출처] 세계적인 바리톤 고성현, ‘내 목소리는 옥토가 아니었다’ 자갈밭을 옥토로 바꾼 인생 역정|작성자 리음아트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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