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순 탈환 작전이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군의 적극적 개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은 광주에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사 장비를 지원하였고, 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정보 분야에서 국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국회는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사건 뒤 한 달 보름 만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군-경 공권력의 사회적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당시 민간인 피해 진술 1. 서면지역 세동마을 박00(75) "비가 많이 오는 저녁 10명 내외의 산사람 행색을 한 사람들이 마을에 와 강 반장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렀어요. ‘예전에 밥을 해줘 고마워 은혜를 갚겠다’고 하며 밥을 해준 사람들의 집을 알려달라고 한 거지. 강 반장은 몇 사람의 집을 알려주었고" "밥을 해준 것으로 밝혀진 마을 주민들은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가족까지 전부 인근 앵기산으로 끌려가 몰살당해… 2. 서면지서 학구출장소 ㄱ○○ "치안확보를 위해 불가피했던 일이었다", "군경이 혐의가 있는 민간인을 기소하지 않고 즉결처분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즉결처분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3. 승주읍 유흥리에서 경찰에게 수색당한 정○○씨 "제가 열여섯 살이었는데 (…)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있었는데 순경 한 명이 집에 들어왔어요. 어머니가 저만 남겨두고는 못 나가겠다고 마당에서 버텼어요. 그러니까 그 순경이 어머니를 총으로 쐈어요. (…) 100일도 안된 막내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죽고 나서 젖을 못 먹어 그해 음력 11월에 죽었어요…" |
여순사건 진압 후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주민통제체제를 만들었다. 1949년에는 유숙계(留宿屆)제도를 실시했고, 좌익들을 선도하고 회개시킨다는 명목으로 보도연맹(保導聯盟)을 조직했다.
|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 출처 : <LIFE>, 촬영일 : 1948.11.1,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
토벌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2천여 명의 희생자)이 학살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 사건을 반공국가형성의 계기로 삼았다. 이후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남한은 철저한 반공국가가 되었다.
3. 마산투쟁 : 1960년 3월 15일
1960년 3월 15일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간부들이 마산시 투표소에서 40%의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함.
이후 민주당은 당일 10시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준비함.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여 집회를 하고 행진해 감에 따라 수천 명이 합류.
경찰은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다. 이때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는데,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시켜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 파출소장의 집 등을 부수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으며. 4월 11일 아침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으로 이어짐. 한편 광주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이 돼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국회조사단은 이날의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의 해산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정작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마산 시위가 공산당이 사주해서 벌어진 일인 양 주장하였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우리 동무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
|
1940년 4월 19일,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학생은 떨리는 손으로 이 글을 썼다. 거리로 나섰다.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미아리에서 데모대가 탄 버스에서 얼굴을 내밀고 구호를 외치다, 무차별 사격을 받고 희생됐다.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 자리에서 마산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을 따져 묻자,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 라는 등의 발언을 함.
4. 4.19 혁명 : 1960년 8월 15일
1960년 1월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됨. 그러나 부통령 당선(민주당 장면후보, 자유당 이기붕)을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 선거가 자행됨.
이승만 정권은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 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감독 하도록 하는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함.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 전개. - 2.28 대구 학생 의거이자 4.19 혁명의 도화선
3월 15일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마산투쟁).
1960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27일 동안 행방불명이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학생 사건 보도.
이후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 1~3을 탈취했으며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다.
4월 18일의 서울의 고대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 전개했지만 고대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 대학생 피습 사건 발생.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집결.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 발생(사망 21명, 부상 172명) 과잉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사퇴.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 4월 25일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 참여,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사퇴함.
5. 부마항쟁 : 1979년 10월 16일 ~ 10월 20일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가 불법 부정선거로 진행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선거에 승리하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는 과정에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총재 제명, YH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 당사 점거 농성에 대한 탄압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탄압 공세가 이어짐.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철폐, 민주화 투쟁이 부산대학교 중심으로 한 부산에서 마산까지 확산.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부로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적으로 진압.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20일 마산,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켜 59명의 시민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의 탄압 자행하며 항쟁이 마무리 됨.
6. 광주항쟁 : 1980년 5월 18일 ~ 5월 27일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10.26 사건이 발생한 이후 전두환 등 하나회 중심으로 한 신 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군부를 장악하고 이후 4월 14일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되면서 언론 및 정보기관을 장악함.
1980년 5월부터 전두환 중심의 신 군부의 정치관여가 드러나면서 이에 반대하는 전국적 민주화 투쟁이 전개됨.
이에 전두환 중심의 신 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 금지. 휴교, 언론 보도 검열 등의 조치를 취함.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5월 18일 광주시내에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시위 참여자 뿐 만 이 아니라 미 참여자까지 무참하게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함.
이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전 도민 차원에서 전개되었고, 이에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한 집단 발포를 하고 광주 외곽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봉쇄한 이후 5월 27일 당시 시위대가 농성 중 이던 전남 도청을 무력으로 점령함.
광주항쟁 이후 미국의 신군부 쿠데타 지원이 확인되면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강원대 성조기 소각 사건 등 반미 투쟁이 전개됨.
7. 6월 항쟁 : 1987년 6월 10일~ 6월 29일
1987년 1월 박종철 학생이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1월 14일 조사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함. 당시 정부는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려졌다.“라고 발표하면서 폭행 및 전기와 물고문 등에 의한 학살을 은폐함.
박종철 군 사망 이후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식]이 진행되고 이어 3월 3일에는 [박종철군 49재 및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개최되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전개됨.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요구인 민주화 요구를 외면하고 1987년 4월 13일 간선제 중심의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호헌과 함께 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 호헌 발표를 함.
4.13 호헌 발표 직후인 4월 14일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가 호헌 조치에 반대하는 시국 성명이 발표됨.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 조치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했고 이에 반대하는 김영삼, 김대중 등이 탈당하여 통일 민주당을 창당하는데 이 과정인 1987년 4월 20일~ 24일 전두환 정권은 통일 민주당 20여개 지구당 사무실에 폭력배를 난입시켜 창당을 폭력적으로 방해함.
1987년 5월 17일 노동자 황보영국씨가 부산상고 앞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신 뒤 일주일 후에 사망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음을 폭로함.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 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민주화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됨.
6월 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던 이한열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류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6월 10일 잠실 체육관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 정당대회가 개최되고 이 자리에서 노태우가 민정당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
같은 날인 6월 10일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전개되면서 6월 항쟁이 시작됨. 6월 10일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을 중심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민주화 시위가 지속되었고 이에 6월 29일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안 중심의 수습 안을 발표하면서 투쟁이 일단락 됨.
노태우의 6.29 수습안 내용 1. 여, 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19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한다. 2.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3.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4.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한다. 5.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6. 사회 각 부분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7.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8.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와 경찰에 의해 타살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이한열의 시위 도중 최류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전개되었고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마무리가 되면서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됨.
8. 미선, 효순 양 사건(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 2002년 6월 13일
2002년 6월 13일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소재 국가지원지방도 제56호선에서 갓길을 걷다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대대 전투력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이던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숨짐.
이후 6월 19일 미2사단 측의 한미 합동조사 결과가 발표.
'이번 사고는 결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 즉 과실사고
사고 당일만 해도 속보 형식으로 짤막하게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이 국내 언론에 보도됨.
그러나 당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한창 진행 중 이어서, 전 국민적 관심을 가지지 못함.
2002년 6월 하순부터 사고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의정부 일대에서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사고 사진을 의정부역이나 시내 광장에서 볼 수 있었고 의정부와 양주의 중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사고를 낸 장병들이 소속된 부대인 미군 제2사단 본부가 위치한 의정부시 가능동 '캠프 레드클라우드'에서 산발적으로 집회를 전개함.
집회의 주된 요구는 SOFA 규정상 대한민국 내 미합중국 병사들의 훈련 중 사고는 미국 측이 그 재판권을 가지는 일종의 치외법권의 형태를 보이는데 그 재판권을 한국 측이 가지겠다는 내용임.
이후 11월 동두천 미군 기지인 캠프 케이시 내 군사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무죄 평결.
그리고 5일 후 한국으로부터 일본을 경유하여 가해자 2명의 미군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안전하게 출국. 당시 가해자 미군이 무죄 선고를 받고 나오면서 "한국은 우리가 살기 좋은 나라 인거 같다. 주한미군으로써의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말함.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2002년 11월이었다. 6, 7월의 월드컵 4강 열기가 이제 막 식을 무렵 미군 2명이 운전하는 장갑차에 여중생이 깔려 죽었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알려지면서 11월 26일 드디어 국민들이 추모촛불집회를 시작.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전신격인 이모티콘 ▶◀을 자기 아이디 앞에 붙이는 등 사건은 확대 됨.
11월 27일에는 미 대사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12월에는 직접 전화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
하지만 미국 측의 사과는 '미안함'이라기보다는 우리 잘못은 아닌데 아무튼 애들이 죽었다니 유감 입장이었고 이에 불성실한 미국 측의 사과에 분노하면서 반미감정이 더욱 더 확산됨.
9. 촛불시위 - 2008년 5월
2008년 4월 미국산 쇠고기(광우병이 걸려도 수입 중단 할 수 없음) 전면 개방을 주된 내용으로 한미 FTA 협상을 완료, 대입 논술 고사 폐지하고 국영수 과목 중심으로 한 대학자율화 방침 및 초중고 자율 확대 명분으로 0교시 보충수업 허용, 우열반 편성 허용 등 교육 정책 추진에 반대하며 2008년 4월 고등학생 100여명이 서울 광화문과 청계과장에서 학교 자율화 초지 반대 촛불 문화제를 개최하면서 08년 촛불 시위가 시작됨.
2008년 5월 2일 인터넷 카페 ‘이명박 심판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의 주최 하에 오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청계 광장 일대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조치에 반발해 촛불 집회가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됨.
5월 2일과 3일에 집회를 열었던 단체들은 5월 6일에 또다시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청계 광장에 3천 명, 국회 앞에 8천 명이 모여 야간 촛불 집회를 가졌다. 5월 7일, 9일에도 집회가 개최됨. 5월 17일 청계광장에서 1만 명 이상이 모인 집회가 있었으며, 김장훈, 윤도현, 이승환 등의 가수와 김부선 등의 연예인도 참석.
5월 24일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하던 시위대는 도로를 점거하고 청와대 쪽으로 가두 행진
5월 25일 새벽 4시 40분, 경찰은 집시법 위반을 사유로 살수차를 동원하여 시위자들을 강제 해산. 다음날인 25일에도 청계광장에서의 촛불집회가 가두시위로 확대.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2백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연행되었고, 일부 석방되기도 함.
5월 31일에는 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집회를 진행하고 가두 행진 전개
시민들은 6월 5일 목요일부터 6월 8일 일요일까지 서울 시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72시간 동안 연속으로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시위 참가자 중 일부는 텐트를 치고 철야 시위에 나서기도 함. 경찰 추산 5만6천여 명, 주최 측 추산 20만여 명이 참가.
6월 10일에는 6·10 민주항쟁 21주년을 맞아 시위 이래 사상 최대인 경찰 추산 8만 명, 주최 측 추산 70만 명(전국 합산 100만여 명)이 참가하는 촛불 대행진을 개최
2008년 6월 30일부터 7월 6일까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 이후 시위는 기존의 대규모 동원보다는 게릴라성 시위로 변화
종교단체들의 대규모 행동 이후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의 대규모 집회에서 각 지역에서의 분산 집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촛불 시위대들은 KBS, YTN 등의 사장 교체가 이명박 정부의 언론 통제라고 비판하고, 이들 방송사에서 수시로 촛불 집회를 가졌다. 또한 PD수첩 보도로 인해 징계를 받은 MBC 앞에서도 여러 차례 촛불 집회가 열렸다.
2008년 9월 9일 오전 2시경,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 우정국 공원에서 대화를 하고 있던 안티 이명박 회원 3명에게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30대 남성이 "한우가 미국산 쇠고기보다 더 위험하다"며 회원들의 머리와 목, 이마에 회칼을 휘둘러 1명이 생명이 위독한 상태이며, 1명은 중상, 1명은 경상을 입은 사건 발생.
촛불시위 관련되어 수배된 광우병대책회의, 민주노총 관련자 여섯 명은 수배된 당시부터 조계사에서 계속 농성 투쟁. 2009년 5월초,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고,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여 112명이 연행
촛불 집회 전국 상황
0 수도권
인천광역시에서는 매일 광주, 군포, 구리·남양주, 김포, 동두천, 부천, 성남, 수원, 시흥, 안산, 안성, 안양, 양주, 양평, 연천, 오산, 용인, 의정부, 이천, 파주·고양, 평택, 하남, 화성시 등에서는 주 중 특정 요일에 수십 ~ 수백 명이 참여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0 충청권
대전광역시, 홍성군에서는 매일, 공주, 논산, 서산, 아산, 천안, 청주시, 당진, 연기, 영동, 예산, 음성군에서는 특정일에 촛불 집회가 있었으며, 청주시는 주 중 특정 요일에 촛불 집회가 열렸다.
0 강원도
강릉, 원주, 태백, 춘천시에서 5월 중 수차례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0 호남권
광주광역시, 익산시, 전주시에서는 매일, 광양, 남원, 목포, 여수, 군산, 화순군에서는 5월 중 특정일에, 순창군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촛불 집회를 열었다.
0 영남권
5월 31일 부산에서의 집회, 6월 7일 창원에서의 집회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양산시는 매일, 경산, 경주, 구미, 거제, 거창, 김해, 마산, 밀양, 사천, 양산, 진주, 포항시, 울진, 의령, 함안, 합천군에서는 5월 중 특정일, 창원시는 5월 이후 정기적으로 촛불집회를 진행하였다.
0 제주특별자치도
5월 6일 안티 이명박 제주모임의 주최로 제주시청 마당에서 150여명이 촛불 문화제.
5월 20일에도 촛불집회가 개최, 5월 24일에는 가두행진. 6월 14일에는 청와대 앞으로 이명박 현 대통령이 2008년 8월 15일에 해고된다는 해고 통지서를 보냄.
0 국외
6월 1일, 프랑스, 독일,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출신 이주민, 유학생들은 대한민국 내의 시위와 마찬가지로 쇠고기 협상을 비판하는 시위전개.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6월 1일 텍사스 대학 교정에서 촛불집회.
미국 뉴욕: 6월 7일 촛불문화제를 진행.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6월 11일과 12일 미시간 대학 Diag에서 촛불집회.
미국 워싱턴 D.C.: 수차례에 걸쳐 백악관 앞에서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독일 베를린: 6월 1일과 7일 기념교회(Gedachniskirche) 앞에서 촛불집회 진행.
독일 프랑크푸르트: 6월 7일 파울스교회(Paulskirche) 앞에서 촛불집회 진행.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6월 7일 촛불문화제 진행.
영국 런던 : 6월 7일 다우닝가(Downing Street) Richmond Terrace 앞에서 촛불집회.
본 시위로 1,045명이 연행되었다. (2008년 7월 31일 기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