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臥仙亭을 가다
鄭 雲 宗(문절공 후, 10대 손)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鶴山里) 골띠 마을, 문수산 동쪽에서 발원한 초계수(草溪水)가 그 옛날 太白五賢의 거룩한 숨결을 간직한 채 쉴 새 없이 흐르고 그 아래 골짜기엔 은폭(銀瀑)이라는 5m 남짓한 폭포가 또한 장관이다. 臥仙亭 옆 깎아지른 듯한 석벽(石壁) 사이엔 10여인이 앉을 수 있는 반석(盤石)이 보이고 그 위엔 누가 새겼는지 臥仙亭 竢德巖이 선명하다. 와선정에서 이 사덕암 폭포로 난 문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누군가 말 한대로 금새라도 은빛 폭포에서 일어나는 푸른 물빛이 가슴을 파고 들것만 같은 느낌이다. 臥仙亭이 자리한 것은 바로 이처럼 빼어난 風光때문인 듯싶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마루방으로 이루어진 와선정은 1636년(인조 4) 병자호란이 항복의 치욕으로 끝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두메산골 태백산 아래에 은거했던 太白五賢이 逍遙하던 곳이다. 太白五賢은 잠은(潛隱) 강흡(姜恰),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포옹(抱翁) 정양(鄭瀁) 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으로, 잠은은 법전의 버쟁이에 은거했으며 각금당은 모래골에, 포옹은 춘양 도심촌에, 손우당은 춘양 소도리에, 두곡은 봉성 뒤디물에 은거하였는데 그들이 은거 하던 곳의 거리는 서로 10리에서 30리 안 밖이었다. 시간이 흘러 정조 14년에 왕명으로 발간된 ‘존주록배신열전’은 이들 다섯 선비를 일컬어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받들며 경의를 표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나라의 두 번에 걸친 침입으로 조선과 청과의 전쟁을 말한다. 당초 1627년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관계를 맺고 일단락됐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명나라 북경을 침공하면서 양국을 군신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 수많은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인조임금은 후금과 일전의 의지를 굳히게 된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라 칭하고 국호는 청(淸)이라 고친 후 조선이 계속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와 대신을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청의 이 같은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조선의 태도에 분개한 청태종은 같은 해 12월 2일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쳐들어 왔다. 임경업 장군이 의주에서 그들과 맞서 싸웠으나 청의 군은 이를 피해 곧바로 서울을 점령하므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해 저항하였다. 그러나 12월 16일 청의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성 아래 20만 청의 군을 집결 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성문은 열리고 항복을 하게 된다. 청태종은 항복의 조건으로 청에 대해 ‘군신의 예를 지킬 것’ 등 9개항에 달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 호란으로 일국의 신하가 어찌 청을 섬길 수 있느냐 하는 대명 절의와 올곧은 선비의 정신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아래 봉화군 일대(춘양.법전.봉성.명호면 등)에서 각각 은거하며 학문과 덕을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우려 대대로 추앙받던 다섯 분 현인이 있었으니 이들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칭했다. 태백오현은 하나같이 이 호란 당시 굴욕적인 패전과 불의의 정국에 항거하며 선비의 곧은 은둔의 성향에 따라 유향(儒鄕)이라 하는 봉화지방에 낙향, 오직 국가의 존망과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한 세상 살다간 거룩한 분들이다.
태백오현 중 잠은(潛隱)(이오당) 강흡(姜恰: 1602~1671)선생은 1630년 사마진사에 합격 성균관 유생으로 1635년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배향 할 것을 소청하였으며 뜻하지 않은 병자호란으로 굴욕적인 항복을 슬퍼하며, 그간 닦은 학문과 청운의 꿈을 초야에 묻고 부모와 노인에 효도로 우국충정을 달랬다. 다른 오현과 함께 두터운 우의로 봉화 법전에서 은거하며 곧은 절개를 지켜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정민공(貞敏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각금당 정민공 심장제(覺今堂. 貞敏公 沈長世, 1594~1660),)선생은 명종의 장인 심강(沈鋼)의 증손이며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손자이다. 1594년에 태어나 1660년에 몰했다. 자는 덕조(德祖). 호는 각금당(覺今堂). 1624년 이괄의 난 때 포의로 임금을 호종하여 금부도사가 되었으며, 163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부사가 되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절의를 지켜 태백오현의 1인으로 불리워졌다. 증이조판서. 시호 정민(貞敏).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포옹 정양(鄭瀁: 1602~1668)선생은 내 10대조로 1600년에 태어나 1668년에 몰했다. 자는 안숙(晏叔),호는 포옹(抱翁)ㆍ김장생 문인이다. 161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로 피난했다. 1661년 장령을 거쳐 시강원 진선에 이르렀다. 증이조판서. 시호는 문절(文節). 학덕으로 태백오현(太白五賢)의 칭을 듣고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두곡 홍우정(洪宇定: 1593~1654)선생은 형조판서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이며 이조판서 홍우원(洪宇遠 )과 청백리 홍우량(洪宇亮 )의 형이다. 1595년에 태어나 1656년에 몰했다.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이다. 16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학이 뛰어나 대신의 천거로 왕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뒤 직장ㆍ공조좌랑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숭정처사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아 태백오현의 1人 으로 불리워졌다. 증이조판서. 시호 개절공(介節公) 문원서원에 배향되었다.
손우당 홍석(洪錫: 1604~1675)선생은 증조ㆍ고조 양대 영의정에 증조부가 대제학을 지낸 명문(名門) 출신이다. 1604년에 태어나 1680년에 몰했다. 자는 군서(君敍),호는 손우당(遜愚堂)이다. 김집과 김상헌에게 글을 배웠다. 김수항ㆍ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주부와 용담현령을 거쳐 세자익위사어에 이르렀다. 사림의 중망이 컸으며 절의를 지켜 태백오현의 일인으로 일컬어진다. 증이조판서,시호 정민(貞敏). 사덕사에 제향되었다. 문집과 예기유회,일성록ㆍ이기록ㆍ예총요설 등이 있다. 이분 다섯 분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키며 이 지금의 와선정이 있는 와선대를 모임 장소로 삼고, 일 년 중 좋은 날을 잡아 회합을 갖곤 했다. 하얀 도포에 갓을 정갈히 갖춘 선비들이 스스로 '은폭(銀瀑)'이라 이름 붙인 하얀 폭포를 바라보며 詩를 짓고 글을 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五賢의 모임은 이분들 대에서 멈추지 않고 370여 년 동안 후손들로 이어졌다. 자손들은 돈을 모아 와선대에 정자를 짓고 와선정별소계를 조직, 대대로 조상의 덕을 기렸다. 삼월삼짇날이나 단오에 모이던 계는 어느 때부턴가 매년 중복에 맞춰 이어 나갔다. 정자에 오손 도손 모여선 다섯 문중의 후손들은 五賢의 덕을 추앙하며 혈육보다 진한 정을 나눈 전통을 계승해 나온 것이다. 와선정 모임은 현재 이곳 법전리 잠은공 후손들이 정성껏 주도하고 있다. 특히 잠은공 12대손 강신황 선생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고가 돋보여 칭송이 자자하다. 금년에 모인 五賢 후손 중에는 봉화군 춘양면 법전리 일대에 거주하는 많은 잠은공 후손들을 비롯하여 洪承漢(봉화군청 기획감사실장)씨 등 두곡 후손 여덟 분과 각금당 후손중의 한분인 沈龍澤씨등 40여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文節公 후손도 70여 년 전 충북 堤川에서 여러분 다녀 간 기록이 있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양성댁 海直公을 비롯, 종친 몇분의 함자가 보인다. 그러나 매년 모임을 주관해 온 현지 잠은공 문중 얘기로는 근 반세기 동안 文節公 후손들이 보이지 않았고 손우당 후손도 여러 해 불참한다며 아쉬워했다. 奎源 족숙과 한께 뜻밖의 환대를 받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던가. 五賢 후손들은 이날 臥仙亭에서 간단한 修人事만 하고 춘양면 한 음식점에 모여 도시락에 불고기 정식으로 점심을 들며 덕담을 나누었다. 매우 의미 있는 하루였다. 끝으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직접 차를 몰고 우리를 안내해준 잠은공 12대 宗孫 鎔岩 姜信鎔공의 厚誼에 감사하며 臥仙亭에서 읊은 시 한수를 소개한다.
臥仙亭에서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삼전도의 한 달래며 태백 오현 교유하던 곳/ 신선이 누우신 듯 아! 그 이름 빛나는/ 태백오현 와선정 문수산 자락서 발원한/ 시원한 은폭 비류 중복 폭염을 식히는데/ 맛 또한 달고 향긋하니 조상의 음덕인가
높은 학덕 곧은 절개/ 만세불후 우국충정 나라사랑 값진 유훈 / 아! 그 이름 거룩한 태백오현 굳은 절개여!
臥仙亭 吟 有名鶴山在春陽 最勝臥仙亭觀光 太白五賢求何道 盡忠一念憂國情 文殊淸流洗文筆 長座仰天氣星像 英雄史策功赫赫 士林大義高明明 <辛卯 盛夏 文節公 鄭 瀁 10代孫 又松 鄭雲宗 謹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