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마음

[주연]

별 일이 없었다면 이 글은 2022년 상반기 안에 마감되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중 유일하게 대학 강의실을 들락거리던 내가 소재로 삼기에 퍽 자연스러운 다음의 내용으로. 아래 여섯 문단은 약 1년 전 내가 ‘여자 여섯의 여자 여섯’ 주제를 놓고 틈틈이 생각하다 메모해둔 내용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나는 강의실에 일찍이 들어가서 최대한 고독한 곳에 자리잡는다. 70여명이 듣는 전공 수업이다. 그 많은 자리 후보들을 제치고 앉은 의자 위에서 생각했다. 남은 여자 다섯이 어떤 자리에 앉을지에 대해.

우선 나는 교수님의 오른쪽 흰자에 앉은 바 있다. 눈을 맞춰가며 강의를 듣기가 부담스러워 정면은 싫다. 그래도 교수님이 날 인지하기는 바라므로 앞쪽, 이왕이면 두 번째 줄에 앉는다. 교수님이 오른쪽으로 오가는 일이 반대편으로 그러는 일보다 잦으므로 교수님 기준 오른편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도 더했다.

교수님의 동공에 그러니까 똑바로 선 정면에 앉는 사람은 아무래도 지우다. 두세 번째 줄쯤에 잘보이게. 뭐든 정공법 정면돌파하기에 깡도 용기도 충분한 그녀에게 제격인 자리다.

가장 앞줄에 앉았지만 서로 다른 의도를 품은 두 사람은 혜언과 세원이다. 먼저 혜언은 이 교실 다른 학생들에겐 관심이 딱히 없어서 앞으로 왔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녀의 화두가 오직 교수일 것이다. 교수님의 지성과 화법 같은 것이 궁금해서 바짝 주의를 기울일 작정이다. 반면 세원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확실히 믿으면서 전략적으로 맨앞줄에 앉았다. 아마 중간고사 즈음 일필휘지의 답안으로 교수님을 놀라게 할 것이고 그렇게 교수에 의해 자신의 이름이, 맨얼굴이, 인상적인 무엇이 발각되는 바람에 꾸준히 의식받다가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자리를 옮길 것이다.

지윤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들 중 가장 뒤에 앉는다. 그녀는 똑바로 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 빔프로젝터가 쏘는 화면보단 말하는 교수님을 주시한다. 그러다 몇 차례 ‘강지윤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식의 긴급 질문을 불쑥불쑥 받게 될 것이다.

소희는 때로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 가끔은 맨앞자리에 앉는다. 이유는 강의가 시작하는 시각에 딱맞춰 와서다. 아마 공강 중에 멀리 간 산책에서 돌아오는 데 시간을 다 썼거나 하는 까닭에 빠듯했을 것이다. 남는 자리에 앉는 소희. 어디든 아무렴 어때, 하며 착석하는. 전략이나 계산보다 자기 앞에 놓인 경우를 받아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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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의향을 고려치 못한 채 추측만 난무하는 문단들이다. 온전히 내 가정과 판단에서 비롯한 내용이라 실제와 크게 다를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반박 앞에 그것이 맞다고 대답할 것이다.

1년 전의 나는 여자 다섯 개개인에 관해 몇 자깨나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좀 이야기가 다른데, 이들과 2021년부터 약 2년간 한 달에 한 번 꽤 규칙적으로 지속했던 모임이 최근 6개월 동안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사정이나 이유 때문이라 어쩔 수 없었다며 인정하는 마음이 더 크지만 하나하나에 가졌던 애정이나 마음씀이 희미해져서 아쉽다. 그덕에 확신의 테두리 같은 것도 더불어 뭉개졌다. 내가 정확하게 움켜 쥐고 있던 그들에 대한 정보를 이제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흘렀고, 최소한의 것들부터 전향적인 무엇들까지 변했을 것이란 짐작을 갖고 있다. 어쩜 이들을 알아올수록 모르게 되었던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자각도.

그런 것 같다. 실은 나는 이들을 알아온 중에 지금 가장 모르고 있다. 근황부터 요즘의 생각이나 마음 깊이 새겨가는 취향과 골머리. 무엇을 읽고 울었는지 무얼 보고 웃었는지 어느 인상적이라 할 만한 순간에 떠오른 첫 번째 사람 등등. 1년 전의 글을 이으려면 그때만큼의 확신과 관찰을 보태어 쓸거리가 필요한데 없다. 먹고 죽으래도 없는 그런 상태. 그래서 결국 ‘여자 여섯의 여자 여섯’을 보다 잘게 쪼개어 쓰기로 한다. 모르는 중 그나마 알겠는 나에게 비중을 크게 둔 이야기를 향해 방향을 틀기로. 여자 여섯을 1과 5로 쪼갤 수밖에 없던 시간의 공백 때문이라는 변명을 업고, 미안하지만 내가 감히 다섯을 ‘총체’로 뭉뚱그려 그들이 내게 미친 영향이라거나 나를 낫게 만든 순간이라거나 이런 것을 토로하는 비겁함으로 남은 분량은 마저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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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다섯을 진하게 거친 후에야 비로소 내게 보인, 그제야 존재를 드러낸 무엇들이 떠오른다. 그 무엇들 가운데엔 여름이 있다. 이들을 만나기 전에, 말하자면 나는 여름보다 여름비나 여름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름에 뭐가 더해진 그제서야 언저리의 여름을 보는 사람. 그리고 그것들을 더 감도 있고 맛나게 만드는 여름의 기여도는 크게 치지 않았다. 여름은 나에게 인상적이지 않은 계절, 지루한 시절일 뿐이었다.

다섯은 이미 여름을 만끽하는데 어떤 도가 트여있었다. 아님 여름을 보내는 각자의 방식을 갖고 있거나. 하다못해 여름이 낭만적인 계절이라는 데에 큰 반박 없이 동의하는 이가 있기도 했다. 여름이 토마토의 계절이라 좋고 여름의 풀과 잔디가 기깔나는 모양새라 찍어올릴 수밖에 없는 충동이 맘에 들어 좋고. 또 어째서 좋고 저째서 좋다는 사람들 틈에 부동의표를 들고 나는 있었다.

그들을 오랜 시간 잊어버려가더라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여름과 관련된 기분과 인상일 것이다. 그들을 겨울에 처음 만났지만 관계가 무르익은 건 여름을 맞이하고 나서라. 그 첫 여름과 두 번째 여름을 거치면서 우리가 겪었던 감정들 같은 것 때문에. 그 무렵의 서툶과 방정맞음과 긴장과 질투와 기죽음과 기고만장함 같은 것 때문에. 뭐가 막 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뭐라도 된 기분 같은 게 우리의 여름을 통과하는데 아주 중요했음을 안다. 내 여름엔 여자 여섯이란 고정 필터가 있는 듯하다.

여름을 싫어하는 마음까지도, 여름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도, 좋아해보겠다 작정하는 것도 모두 다 여름을 지나는 중에 겪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길어지기만 할 지구의 여름 대비 상대적으로 짧은 이번의 여름을 지나며 남모르게 여름을 좋아하는 연습을 했다. 가끔 그들이 찬양하던 이 계절의 작열함을 온몸으로 통과하면서. 아스팔트 위에 구불거리며 상승하는지 하강하는지 묘연한 아지랑이를 봤을 때 그건 여름의 실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위 방향을 재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율하듯 퍼지는 더위.

우리들이 지났던 2년의 여름 뒤에 조용히 맞이하는 2023년의 여름엔 홀로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덥혀진 바깥의 공기에 쉽게 몸이 데워질 땐 어떤 장소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여름에 쏘다니던 이대역과 신촌, 을왕리, 가로수길, 종로3가, 회기동. 지금 거기에서는 더위가, 어쩌면 지구상 여름의 역사 중 가장 기다란 모양으로 구불구불거리면서 사람들의 목덜미를 구렛나루를 등줄기를 오금을 훑고 있을 것이다. 1~2년 전에도 우릴 상대로 그랬으니까.

나는 여전히 여름의 더위에 목이 막히고 마음이 마르고 그래서 여름을 마냥 좋아하기엔 어려운 사람이다. 너무 많이 재고 따지는, 그런 흔쾌함이 없는 사람. 그렇지만 어떤 좋아하는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번 계절의 연습으로 여름에 완연한 호감은 갖지 못했으나 여름이 내게 존재감이 있다는 건 확실히 인정하게 되었다. 현재로서 나는 발열하는 중이라고 하면 좋겠다.

여름의 마음은 여자 여섯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여자 다섯의 호감을 닮고 또 담고 싶어서. 그들에게 받은 애정에서, 또 내가 그들을 향해 쓴 다정에서 어떤 마음이 크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고, 여자 다섯이 내게 나눠준 길고 길어질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