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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흘러가지만 산(山)은 고향을 지킨다 (2)
— [중원과 백파] ☆ 예천·문경·상주 문화유적 탐방 이야기 —
[탐방 제2일] ☆ 문경 당포-함창-은척-작약산
▶ 2022년 05월 01일 (일요일)
* [청정한 문경의 아침] ― 바다는 어떤 물이든 사양하지 않는다
▶ 중원 이기태와 함께 문경의 여사(旅舍, 문경온천호텔)에서 아침을 맞았다. 오전 8시, 행장(行裝)을 정리하여 밖으로 나와 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온 누리에는 맑은 햇살이 축복처럼 내리고 있었다. 아, 문경, 청정한 고향의 아침, 신신하고 맑은 기운이 충만한 아침이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이 장엄한 풍채로 창공에 솟아있다. 깊은 호흡으로 산천의 정기를 마음 속에 호흡한다. —
읍내에 있는 ‘새재식당’에서 ‘올갱이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식당 현관에 들어서니 ‘海不讓水’(해불양수)라고 쓴 서예 액자가 걸려 있다. 일필휘지의 글씨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 ‘바다는 어떤 물이든 사양하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 무한한 포용(包容)의 바다가 떠오른다, 바다는 자신의 품안에 흘러드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이 된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오늘은 일단, 문경의 당포에 있는 이기태의 선대의 묘소를 참배하기로 했다. 나의 제의를 이기태가 받아들였다. 지난 2017년 6월 4일 청랑회의 고향 방문길에, 이동욱, 서종태 등 멤버 몇 사람이 당포 묘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너무나 아름답게 가꾸어진 묘역을 보며 감동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묘역은, 2004년 당시, 김포경찰서장이었던 이기태가 주도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10대조 이하 조상의 묘소를 한 자리에 모아 ‘합동납골묘’로 조성하였는데, 산뜻하게 잘 정화된 묘역과 아름다운 조경, 그리고 조상을 숭모하는 후손의 정성이 느껴지는 곳이다.
오늘의 일정은 당포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서, 작년 운길산 산행 때 이야기했던 이기태의 고향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기태의 뼈를 키워준 고향, 상주 함창—이안을 경유하여, 은척 의 무릉리를 탐방하고, 지금도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는 작약산(芍藥山)을 함께 오르기로 했다.
문경 당포리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진량공 문중 묘소
▶ 오전 8시 50분, 문경의 당포리 이기태 선대(先代)의 묘소(墓所)를 찾았다. 묘역은 우뚝한 시루봉 산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록의 발치에, 정결하게 다듬어진 너른 잔디밭을 조성하고 그 윗자리에 ‘봉분묘소’를 만들고 묘원의 주변에는 꽃나무를 심었다. 오늘 따라 묘원(墓苑)의 곳곳에 원색의 선연한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묘역 한 가운데에는 약 지름 10m 크기의 정결하고 아담한 봉분(封墳)이 있고, 그 가장자리에 빙 둘러 석조(石造) 납골당(納骨堂)을 조성하여, 거기에 선대 제위(諸位)의 유골을 모셨다. 그리고 그 묘 앞에 깔끔한 묘비(墓碑)를 세웠다. 묘비의 전면에는 ‘全州李氏孝寧大君竫孝公八世通德郞眞亮/恭人金海金氏後孫合同崇祖之墓’(전주이씨 효령대군 정효공 팔세 통덕랑 진량/ 공인 김해김씨 후손 합동 숭조지묘)를 새겼다. 그리고 묘비 후면에는 묘갈문(墓碣文)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을 이러하다.
* [묘비의 원문]▶ ‘通德郞 眞亮 할아버님은 大朝鮮國太宗恭靖大王의 別子이신 孝寧大君靖孝公 八世孫이다. 孝寧大君은 諱가 補이시고 周나라 泰伯虞仲같이 德이 높으신 名公子이셨으며 諡號는 竫孝이시다. 大君의 셋째 아드님은 諱가 함이신 寶城君이시며 寶城君의 일곱째 아드님 東陽正은 諱가 徐이시고 江城都正을 낳으시니 諱가 堅孫이시다. 江城都正께서는 우리 通德郞眞亮 할아버님의 高祖이시며 曾祖父는 愛日堂이시고 諱가 孝彦이시며 司憲府監察 安陰縣監 承政院左承旨를 지내셨다. 祖父이신 退憂堂께서는 諱가 景慓이시고 濟用監正을 지내셨으며 宣祖大王을 모실 때에는 司諫院 獻納으로 諫爭하는 姿勢가 곧고 바르며 剛直하기로 有名하셨다. 先考께서는 號가 旅奄이시고 諱가 憘이시며 龍驤衛副護軍을 지내신 通政大夫이시다. 眞哲·眞亨·眞亮·眞奭 四兄弟 아드님을 두셨으며 셋째분이 通德郞 眞亮 할아버님이시다. 通德郞 眞亮 할아버님께서는 光海君 四年 壬子(1612年) 京畿道 砥平 光陽祖父 退憂堂 先墓下에서 誕生하시었다. 仁祖 20년 壬午(1642年) 宣川府使이던 從姪 煃가 黨人들의 謀陷으로 極刑을 받고 宗家는 伯父를 비롯하여 三代가 滅門之禍를 當하자 仁祖大王을 모시던 맏형 通政大夫 眞哲께서 모든 벼슬을 스스로 버리고 새재 남쪽에서 세상을 등지고 홀로 隱居하시니 兄弟間의 友愛가 남다르신 通德郞 眞亮 할아버지께서도 벼슬을 버리고 형님이 계신 聞慶으로 落鄕하시니 이때부터 우리 後孫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三百六十餘年의 歷史와 함께 우리 後孫들은 崇祖敦宗의 精神을 이어오며 열심히 살아왔다. 二十세기에 이르러 社會制度의 急激한 變化 속에서 後孫들은 各處로 헤어져 여러 곳에 모셔있는 墓所를 바르게 管理하기 극히 困難하여 數百年 이어온 崇祖敦宗 精神을 이어가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렀다. / 이에 우리 後孫들은 뜻을 모아 聞慶 主屹山 자락 艮坐局勢 좋은 이 자리에 通德郞後孫合同崇祖之墓를 마련하여 子子孫孫 崇祖敦宗 精神을 이어가고자 한다. / 二千四年四月一日 甲申 通德郞 眞亮 十代孫 金浦警察署長 總警 李起泰 謹書’.
[주(註)] * [태백(太伯)·우중(虞仲)] ☞ 주(周)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의 11대 손인 고공단보(古公亶父)는 기산(岐山)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겐 태백(太伯)·우중(虞仲)ㆍ계력(季歷)의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중 계력(季歷)이 훗날의 서백(西伯)인 창(昌)을 낳았다. 그런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창(昌)에게 왕위를 주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태백(太伯)ㆍ우중(虞仲) 두 형제는 떠났고, 결국 계력의 아들 창(昌)이 이어받아 문왕(文王)이 되었고 그 아들 무왕(武王)이 주나라를 창업했다.
* 묘비문을 정리하여 보면 ▶ ‘통덕랑(通德郞) 진량(眞亮)은 대조선국 태종대왕의 별자이신 효령대군 8세손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주나라 * 태백(太伯)·우중(虞仲)같이 덕이 높았으니 시호는 정효(竫孝)이다. 대군의 3자가 보성군(寶城君)이며 보성군의 7자가 동양정(東洋正)이고, 강성도정(江城都正)을 낳았다. 강성도정은 통덕랑 진량의 고조이며 진량의 증조부는 애일당(愛日堂)인데 사헌부감찰, 안음현감,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조부 퇴우당(退憂堂)은 제용감정을 지냈으며 선조대왕을 모실 때에는 사간원 헌납으로 간쟁하는 자세가 곧고 바르며 강직하기로 유명하였다.
선고(先考)는 용양위부호군을 지낸 통정대부인데, 진철(眞哲)·진형(眞亨)·진량(眞亮)·진석(眞奭) 4형제를 두었다. 제3자인 진량(眞亮)은 광해군 4년 임자년(1612) 경기도 지평 광양조부 퇴우당 선묘 아래에서 태어났다. 인조 20년 임오년(1642) 선천부사이던 종질 규(煃)가 당인들의 모함으로 극형을 받고 종가는 백부를 비롯하여 삼대가 멸문지화를 당하자, 인조대왕을 모시던 맏형 통정대부 진철(眞哲)이 모든 벼슬을 스스로 버리고 ’새재‘ 남쪽에 내려와 세상을 등지고 홀로 은거하였는데, 형제간의 우애가 남다른 통덕랑 진량(眞亮)도 벼슬을 버리고 형을 따라 문경(聞慶)으로 낙향하였다. 이때부터 진량(眞亮)의 후손(後孫)들이 문경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360여 년 동안 후손들은 숭조돈종의 정신을 이어왔다. 20세기에 이르러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후손들은 각처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묘소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산재한 묘소를 한 자리에 모시어 바르게 관리하고, 수백 년 이어온 숭조돈종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후손들은 뜻을 모아 문경 주흘산 자락 간좌(艮坐)의 좋은 이 자리에 ’통덕랑후손합동숭조지묘‘를 마련하였다. 2004년 4월 1일 갑신년 통덕랑 진량 10대손 김포경찰서장 총경 이기태(李起泰) 삼가 짓다’고 명기하고 있다
▶ 당시 김포경찰서장이었던 이기태 총경이 주도하여 조상의 봉분(남골당) 묘역을 조성하고 비문까지 지은 것이다. 납골당에는 ‘통덕랑 진량공과 공인 김해 김씨 부인’을 위시하여 이기태의 선고(先考) 대까지 여러 분이 모셔져 있다. 이기태는, 비문에 적은 것처럼 ‘조상을 숭모하고 후손종친들 간의 돈독과 화목’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그는 평소 숭조돈종(崇祖敦宗)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좋은 자리에 조상을 모시고서 정갈하게 묘원을 조성하고, 수시로 찾아와 정성을 다하여 정화(淨化)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태는 가문(家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스스로 그 조상을 존숭함으로써 후대의 자손들이 서로 화목하고, 후손들이 번성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 묘원에는 옛날의 재사(齋舍)에 해당하는 아담한 별장(別莊)이 한 채 있다. 집의 가운데 부분은 제법 너른 거실을 갖추고 있고 좌측에는 주방, 우측에는 방 하나를 들이고 있다. 전기와 수도 공급이 되어 있어 종친들이 제향을 준비하거나 회의를 할 수 있고 음식을 나눌 수도 있다.
▶ 이곳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8대손 진량공과 그 후손의 묘원은 참으로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중원 이기태의 정성이 묘원 전역에 스며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기태의 집안이 화평하고 자식들이 거리낌 없이 건승(健勝)하는 것을 보면 그의 ‘숭조돈종’하는 후덕(厚德)이 은연 중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이기태는 재덕(才德)을 겸비한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온 것을 대표적인 실례로 든다. 이기태는 슬하에 강원과 강일,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자기 분야에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맏아들 강원(康源)은 외국 유학 중에 만난 재원(才媛)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국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맏며느리 김나정 교수는 대학에서 유망한 교수로 꼽힌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현직 대학 교수인 그 며느리가, 집안에서는 겸손하고 다정다감하며 더없이 예의바르다고 했다.
상주 함창
함창성당 ☆ 상지여자상업고등학교 탐방
▶ 당포의 이기태 선조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서, 우리는 함창(咸昌)으로 향했다. 함창성당을 탐방하기 위해서였다. ‘함창성당’에는 ‘상지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는데 이 성당과 학교는 이기태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상지여고의 전신은 ‘함창고등공민학교’인데, 14살의 까까머리 이기태가 1960년대 그 공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함창성당에는 독일인 왕묵도 신부님이 있었는데 성당에 공민학교를 세워 가난한 학생들을 모아 사랑으로 가르쳤다. 고등공민학교는 정식 중학교가 아니므로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고입검정고시를 보아야 한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①
은척-함창공민학교에서 중학교 과정 이수
○ 이기태는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武陵里)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하리 만큼 깊은 산골마을이다. 그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시절, 집안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한학을 하신 아버지는 옛날의 법도를 중요시 여기는 시골선비였다. 위로 형이 둘이 있다. 이기태 어린 시절의 집안 형편은 얼마 되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겨우 연명(延命)을 하는 실정이었다. 정말 배가 고팠다. 그는 형들과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무릉초등학교(은척초등학교 무릉분교, 지금은 학생수 감소로 폐교되었다)를 다녔다. 전후, 미국의 구호물자인 강냉이 가루를 받아먹으며 학교를 다녔다.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형편이 어려워 감히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중학교는 집에서 수십 리 떨어진 상주나 함창에 있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학(漢學)을 공부하라고 하셨다.
○ 어린 이기태는 어머니를 졸라 학비가 들지 않은 고등공민학교(은척)에 들어갔다. 집에서 산길로 6km를 걸어서 다녔다. 그런데 1년 뒤 그는 과감하게 대처(?) 함창으로 나아갔다. 당시 함창성당에서 운영하는 ‘함창고등공민학교’로 옮긴 것이다. 이기태는 매일 집에서 약 12km 떨어진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지금은 함창과 은척의 무릉리는 잘 포장된 32번 국도가 지나가지만, 당시 함창은 은척면 무릉리 집에서 이안면 양범을 거쳐 산을 돌고 물을 건너서 가는 길이다. — 당시 성당에는 인자한 독일인 신부가 계셨는데 가난하고 헐벗은 아이들을 정성으로 가르치고 보살펴 주셨다. 당시 독일인 왕묵도(도지날도) 신부는 어린 이기태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세상에 눈을 뜨게 했다. 그로 하여 가난하지만 순수한 소년 이기태는 야무진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다. 도지날도 신부님은 이기태 인생의 은인(恩人)이다. 그는 졸업할 때 신부님의 감화를 받아서 ‘예레니모’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 [함창성당―생애의 은인 왕묵도 신부님] *
‘함창공민학교’의 추억을 되새기며
▶ 오전 11시, 우리는 함창성당에 도착했다. 언덕 위의 자리한 성당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오늘따라 성당 주위에는 백색과 진홍의 철쭉을 비롯한 아름다운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다. 높은 곳에 자리한 성당의 종탑 위에는 십자가가 창공에 빛나고 있었다. 성당 앞 잔디밭 가장자리에 성모상이 있고 그 옆에 동상이 있다. 사각의 석조좌대 위에 신부님의 흉상이 모셔져 있다. 바로 가난하고 어린 이기태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준 왕묵도 도지날도 신부님이다! 동상 옆에는 이기태처럼, 당시 공민학교를 다녔던 어떤 제자가 쓴 추모시비가 있다. …
… 신부님! 당신이 그리워 여기에 모십니다. 누구든 함께 살아오신 당신. 가난하고 병든 사람 찾으시고 어두운 곳 밝히시며 어려움 함께 하셨습니다. ‘야야, 착하게 살아야죠’ 평소에 이 한 마디 말씀은 진정 당신 삶의 정신이었습니다. 이 땅에 평화가, 이곳에 사랑이 당신 이름으로 영원하리니 영광 받으소서, / 글·글씨 우희원 … 이기태도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살아생전에는 자주 찾지 못했다. 옆에서 바라보는 필자에게도 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 이기태가 다니던 당시의 공민학교는, 지금 함창 상지여자중학교와 상지여자상업고등학교가 되어 있다. 읍 소재지 학교로는 그 시설과 규모가 크고, 교육적인 수준이 높은 학교로 변신해 있었다.
오늘따라 날씨는 화창했다. 5월의 맑은 햇살을 받으며 아름다운 교정과 너른 운동장을 둘러보았다. 이기태는 옛날 공민학교 시절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 왕묵도 신부님을 생각하며 잠시 묵상기도를 했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②
문경종합고등학교 광산과를 다니다
○ 이곳 함창공민학교를 졸업한 이기태는 고입검정고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지만, 여전히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위의 형들도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아버지 몰래 당시 취직이 잘 된다는 점촌의 문경종합고등학교 광산과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당시 문경에는 석탄 광산이 많았고 그 석탄사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정책적으로 당시 인문계 문경고등학교에 광산과·건축과·토목과를 개설하여 종합고등학교로 개편하였다. 광산과는 졸업만 하면 취직이 잘 된다고 하여 가난한 농촌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다. 공민학교-검정고시 출신의 이기태는 문고 광산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는 다행히 ‘장학금’을 받게 되어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하든지 대학을 가리라고 결심하고 나서 ‘죽어라고’ 공부했다. 초저녁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까지 한 적도 있었다. —
* 이기태가 걸어서 다녔던 20여 km 등하교길*
[상주시 함창공민학교→ 이안면 양범→ 은척면 무릉리-장암리]
▶ 공민학교가 있던 함창성당을 탐방하고 나왔다. 이제 이기태의 고향인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로 가는 여정이다. 함창에서 무릉리까지 가는 이 길은 어린 시절 이기태가 걸어서 공민학교를 다니던 바로 그 길이다. 당시에는 신작로 산길이었다. 우리[제네시스]는 ‘함창중앙로’를 따라 가다가 ‘함창보건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경북선 철로의 지하차도를 지나, 점촌[문경시청]에서 농암으로 가는 ‘32번 국도’에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교촌리 함창 ‘명주테마파크’ 앞을 지났다. 함창은 전국에서 이름난 명주(明紬)의 고장이다. 상주는 예로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린다. 삼백은 상주에서 나오는 세 가지 백색(白色)의 물산, 즉 ‘백미(白米)’, 하얀 누에고치가 만든 ‘명주(明紬)’ 그리고 ‘곶감’을 가리킨다. 서리를 맞은 곶감이 건조하면서 표면이 하얀 분을 발라놓은 것처럼 백색을 띄기 때문이다. 함창은 바로 이안천 평야의 쌀과 명주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 삼백의 물산은 모두 임금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상주군 이안(면) 양범리-안룡저수지
▶ 우리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가로질러가는 교각[지산교]을 지나 양범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이안면사무소가 있는 양범리로 들어갔다. 동네의 길 좌측에는 산뜻한 색상으로 단장한 이안초등학교가 있고, 길 주위 동네의 모습도 조용하고 깨끗했다. 이기태는 이곳에서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일러주었다. 양범에서 지산천을 따라 올라가면 깊은 산곡에 ‘안룡저수지’가 있다. 좁은 길을 따라 안룡의 저수지까지 올라갔다. 안룡저수지는 서쪽 은척의 작약산 줄기인 성산(508m) 아래에 있다. 이 작약산 줄기가 동북으로 뻗어가 어룡산(616.9m)이 마성의 진남교반에서 영강을 만나 그 맥을 다한다.
이안의 양범리와 안룡리는 이 산줄기의 남쪽에 자리 잡은 고장이다. 성산의 남쪽으로 듬대산이 있는데 이 산줄기를 경계로 동쪽에 이안면 양범리-안룡리가 있고, 그 서쪽은 은척면이다. 은척의 지평천 상류에 구미리 작약산이 있으며, 거기에 인접하여 은척면 무릉리, 장암리, 두곡리가 있다. 모두 작약산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룡에서 성산 남쪽의 고개를 넘어가면 구미리로 통한다. 이기태는 어린 시절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 우리는 다시 32번 양범교차로로 나왔다. 국도를 따라 무릉리로 가는 길, 도로의 좌측에 지평지를 지나고 아천리(교차로)를 지나니 은척면 무릉리 입구에 이르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가까이는 들판이고, 저 멀리 장대한 작약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마을이 보인다. 무릉교를 건너 지평천을 따라 올라가면 은척초등하교 무릉분교가 있다. 바로 은척면 무릉리이다.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
이기태의 고향은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武陵里) 부근의 산골이다. 그 이름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하게 하듯이 옛날에는 깊은 산골마을이다. 마을의 뒤쪽에는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동쪽으로 뻗어온 산줄기가 솟아 올린 작약산(芍藥山, 774m)이 있다. 작약산 산줄기의 북쪽에는, 청화산에서 발원한 영강의 상류 쌍룡계곡이 있고, 산줄기의 남쪽에는 속리산 형제봉에서 발원한 이안천이 멀리서 흐른다. 무릉리는 이안천의 지천인 지평천이 발원하는 곳이다.
▶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온 32번 국도는 이기태가 이곳 무릉리에서 함창의 공민학교를 다닌 편도 12km의 통학로였다. 지금은 직선의 왕복 2차로 도로지만 옛날에는 산굽이를 돌고 저수지 옆을 지나 물(지평천, 지산천)을 건너서 가야 하는 시골길이었다.
* [동아쏘시오홀딩스 인재개발원] *
▶ 지평천을 따라 난 도로를 타고 올라가니 무릉초등학교 앞에 현대식 건물이 시선을 압도한다. 동네의 초입에 건설된 단정하고 규모가 큰 건물이다. 보통 ‘동아제약 연수원’으로 통하는데, 정식 명칭은 ‘동아쏘시오그룹 인재개발원’이다.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 마을 초입에 있다. 상주시가 적극 유치한 이 동아 인재개발원은 2년간의 공사 끝에 지난 2016년 8월 31일 완공했다. 인재개발원이 들어선 이곳 무릉리는 동아제약을 창업하여 ‘박카스 신화’를 이룩한 고 강중희(姜重熙) 회장이 태어난 고향이다.
○ ‘동아쏘시오그룹의 모태인 동아제약(東亞製藥)은 1960년대 ’박카스 신화(神話)‘를 창조하며 국내 최대의 제약회사이다. 2016년 기준, 자양강장제 박카스는 1963년부터 지구를 58바퀴나 돌 수 있는 192억병을 판매했으며, 국내 최초로 의약부분 단일 제품으로 판매액 2천억 원을 돌파하고 해외에서 517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국내 최고의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현재 동아쏘시오그룹은 동아쏘시오홀딩스, 동아에스티, 동아제약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아 인재개발원은 14,531㎡의 부지에 연수동, 숙소동, 운동장 및 부대시설을 갖춘 최신의 인재양성소로, 그 동안 경북의 출향 인사들의 지속적인 투자 유도와 창업주의 강중희 회장의 아들인 강신호 회장의 고향에 대한 투자 의지가 투합된 결과물이다.
특히, 그룹측에서 당시 인재개발원 바로 앞에 있는 무릉분교 전교생 7명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주민들에게 어학캠프 등의 연수원 프로그램도 제공했으며, 지역인재 30명 고용과 연간 연수생 2만 명에 대한 식자재 제공, 지역특산물 판매 등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 오늘은 건물 주위가 조용했다. 이기태가 수위실에 들어가 알아보니 그 동안 코로나로 인해 연수프로그램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았다고 했다. 연수원 앞 개천 건너에 무릉초등학교가 있다. 이기태가 나온 학교이다. 청정한 하늘 아래 색색으로 단장한 아담한 시골학교, 이 예쁜 학교가 지금은 아이들이 거의 없어 폐교가 된 상태라고 했다. 몇 안 되는 이 마을 아이들은 스쿨버스를 이용하여 은척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이기태가 나온 그 고향의 학교는 이제 건물만 그대로 남아 있고 아이들이 없다. 텅 빈 운동장에 적막감이 흐른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