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2023년 5월, 박선환(테스)
프롤로그
책을 위한 변명
1. 박완서의 마흔
*글쓰기를 시작하다
*계기가 있었고, 시작했고, 끝까지 했다
*자신에 대한 존중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이야기도 결국 자신의 이야기가 되니까.
글쓰기의 계기가 생겼고, 그래서 썼고,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임에도 작가로 바로 등단하게 되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글쓰기에서만이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었기에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작가 양혜원은 "그에게 이 일은 이기적인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인가를 위해 자기 전신을 던진다는 것은 이기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를 던진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스물, 서른, 마흔, 쉰, 예순, 일흔... 어느 때든지 나 자신을 던지고 싶은 철저히 이기적인 나만의 일을 찾아 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래서 완전하게 만족스러운 인생이 될까?
그럼에도 끝까지 해도 안되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아직도 작가 지망생이 있다면, 아직도 하고 싶은 꿈을 위해 달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직도 그 꿈을 찾지도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마흔이 훨씬 넘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이름도 없이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도 있다.
모두에게 꿈꿀 수 있는 계기가 생기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꿈이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 박완서 나이 마흔이 주는 희망 메시지처럼 말이다.
2. 평등, 그리고 연애
*개인이 된다는 것
*중년 주부를 살아있는 여자로
*자가 마음의 기준
20대에 읽었던 박완서의 소설이 등장한다. 표지부터 어두웠고 소설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들이 시원하지 않았다.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환경 혹은 시대에 자유롭지 못해서 읽는 내내 답답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서야 미래의 내 이야기를 - 살아낸 적 없는, 경험치 전혀 없는 - 어린 내가 미리 읽었다는 사실을 알겠다.
인간에게서 품을 수 있는 나만의 안정감과 소속감이 필요해서 결혼을 선택했다. 이르지 않은 나이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인간적인 것만 원했던 사람의 품은 그가 아니라 그의 주변의 널려있던 부속적인 것에 놀라고 당황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훅 지나간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여자에게 가정은 곧 밥줄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집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혼을 깊이 생각하며 살 때, 절실히 참패당했던 이유를 이 책이 말하고 있다. 아이를 업고 걸으며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 만을 보며 울었던 내 마음에 새긴 결론이었다.
미움과 서운함이 컸던 그 시간들.
그랬다.
"아내와 어머니가 되는 길만 가르치는 전통 서사에 저항하며 평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서사를 익혔지만, 온전히 여자 개인으로서 연애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심리상담에 갔었다. 그래서 강의를 찾아다녔다.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뛰어다녔던 그 시간 속의 나를 떠올린다.
그녀에게 말한다.
너는 살고 싶었다. 아니 살아내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네가 세상에 무엇이 되지 않았어도 넌 누구보다 살기 위해 힘썼고 그런 네가 자랑스럽다. 넌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넌 그 시절을 살아있었음으로 가득 채웠다. 고맙다. 살아내주어서...
세상에 평등이 있을까? 참 많이 질문했던 물음이다. 그 답을 찾았기 때문에 나는 평등에서 자유로워졌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누리는 혜택이 무엇인지는 정말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계획을 세울 때 보이기 시작한다." 정말 백배 공감하는 문장이다.
평범한 일상이 주었던 모든 것이 감사할 때 비로소 나는 생기를 얻는다. 어린아이 같은 남의 편이 듬직한 내 편이 되고, 피곤하게 하고 실망시켰던 자녀가 장사의 화살통 안에 있는 화살이 되어준다.
내 고난의 순간들이 또 다른 이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가 될 때 감사하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주는 것만큼 기쁜 것이 없다.
오늘도 행복한 일상은 시작됐고 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생애전환기에 맞닥뜨렸던 나와의 진솔한 만남에 감사하다.
또한 세상에 완전한 평등은 없다. 하나님의 공평하심만 있을 뿐이다. 나는 공평이란 단어를 사랑한다. 공평을 말씀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3. 섹스와 임신
*딸과 아들
*선택적 아들 낳기
*무엇을 위한 섹스인가
*엄마 될 권리
우리가 정작 중요하게 쟁취할 권리는 낙태의 권리가 아니라 엄마가 될 권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여자들의 엄마 될 권리를 응원한다. p86
4. 트라우마
*트라우마를 들어줄 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말
*쉬운 답을 거부한다
전쟁 세대가 아닌 내게 박완서의 전쟁 경험 이야기들이 다른 어른들의 전쟁 이야기와 다르게와닿는 이유는 이러한 트라우마적 속성 때문이다. 박완서 자신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통해 분단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인 고발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통일 주장도 직업이 될 만큼 분단 문제가 정치화 되기만 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전쟁이 개인들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자신의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고, 1981년 <엄마의 말뚝>을 제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소감문에서 밝혔다. p91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살아남은 자들이 망자와 제대로 결별하고 일상을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의식이기도 하다. p97
5. 고통
*신마저 침묵하는 고통
*스스로 이유를 찾고 납득되어야
*다시 산 자의 자리로
*그의 빈자리
제목마다 다 내 것이 되는 부분이다. 결국 고통은 내게도 있고, 다른 누구에게도 있다.
아줌마들이 모여 천국을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천국이 그렇게 좋은 곳인가? 나는 가족과 함께 있는 지금이 천국보다 더 좋은 천국인데 라고 혼자 말할 즈음에 내게도 예고 없는 죽음, 참혹이 왔고 나도 별 볼 일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신음을 토해냈었다.
인생 중에 얻은 트라우마 중 하나는 너무 행복한 것이 두렵다는 거다. 고통은 고통스럽지만 너무 행복한 것이 고통이 될 것만 같은 불안증이 내 안에 찌꺼기같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사람마다 슬픔을 삼키는 방법은 다른가 보다. 박완서는 말을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글쟁이다. 한편으로 이 고통을 누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 누구도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이 많은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된다.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일기라는 단어를 찾았다.
이 깊은 고통 이야기에 일기라는 단어가 생명체처럼 내 마음에 채워져 있음을 느낀다.
쓰다 말다 반복하는 내 일기는 허접하고 늘 미완성이다. 쓰기를 까먹고 누운 자리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기가 수없이 많다.
'신마저 침묵하는 시간'으로 말해버리는 슬픔과 고통과 아픔과 상처의 시간은 그만큼 홀로의 때에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내포한다.
누구도 자신의 고통에 참여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눈물 나는 이야기. 그래서 기도했다. 내 깊은 슬픔의 흉터까지도 치유해 달라고.
어쩌면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나 보다. 소리도 낼 수 없고, 글로도 표현 안 되는 고통을 넘어 살아있음이 일기이며 살아있음이 기도가 되는 일기.
에필로그
글쓰기는 계속된다.
연구는 형식을 갖춘 호기심이다. 목적을 가지고 요리조리 들여다보고 콕콕 찔러본다. 이 세상의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우주적 비밀이 알고 싶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알고자 애를 쓴다. p166
연구라는 단어를 이렇게 맛깔나게 표현 하다니, 연구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문장이다.
연구자가 되고 싶은 밤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고 빠져보고 싶다. 일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 너머 깊은 관심으로 말이다.
알고자하는 호기심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서로의 고통을 알 때 우리는 더 깊이 만나는 것 같다. p168
어떤 대상에게 지적 호기심이 발동되어 그 우주적 비밀을 파헤쳐 보고 싶다. 그리하여 그와 대면하고 싶다. 얼굴과 얼굴로, 마음과 마음으로.
그대 거기 있는가?
그대에게 나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