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 때쯤 비 내리는 날이면 떠오르는 한 여인이 있다.
짙은 마스카라에 뜨겁고 붉은 입술, 주홍빛 우아한 관능적인 자태로 화려하게 내 눈길을 뽑던 그녀였다.
비 내리는 날이면 그 빗줄기 속에서 마알간 슬픔이 고여 수정 같은 눈물방울을 손등으로 떨구던 그녀. 고혹적이었다. 건장한 사내라면 그 누군들 그 아름다운 자태에 흔들리지 않으리오. 지금 나는 지난 해 용인의 어느 절집에서 화려하게 내 눈길을 뽑던 화엄세계의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카메라를 메고, 우비를 챙겨 길을 내달린다. 매혹적인 길을 나서는 시간, 잿빛 낮게 드리운 하늘에서 비를 뿌린다. 지난해도 이 길에 비를 뿌리더니, 오늘도 그렇다. 세상은 온통 비에 젖는다.
축축한 날이로다.
빗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달리는 차창에 빗물이 스며든다. 그 빗물은 허술히 살아온 내 생의 마디마디에도 스며든다.
내 어설픈 글로 저 형형하게 스며드는 삶의 빛깔과 무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내가 살아온 만큼 저 비는 내렸고, 삶의 방황과 갈등만큼 저 비는 내렸으며, 내 삶의 우수와 슬픔만큼 저 비는 내렸고, 그 외로움과 고독만큼 저 비는 내렸으며, 내 삶의 분노와 좌절만큼 저 비는 내렸고, 그 고통과 고뇌만큼 저 비는 내렸으며, 내 삶의 희열과 기뿜만큼 저 비는 내렸고, 내 삶의 회오와 아픔과 그 눈물만큼이나 저 비는 내렸으리라.
축축히 내리는 빗물에 산도 젖고, 나뭇도 젖고, 그 잎도 젖고, 푸른 들판도 흥건히 젖는다. 그 빗물은 내 가슴 밑바닥까지 축축히 적신다. 지금쯤 관능적인 우아한 자태로 화려하게 내 눈길을 뽑던 그 여인도 내리는 빗물에 온 몸을 적시고 그 뿌리까지 흥건히 젖고 있으리라.
나는 꽃을 좋아한다.
나는 꽃을 좋아하고 그 향을 좋아한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꽃을 생각하고, 그 꽃을 찾아 길을 나서서, 그 꽃을 만나는 시간만큼은 내 내면의 흠결과 티가 모두 꽃으로 피어 아름다운 꽃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며, 허술하게 살아온 내 삶마저 그 꽃과 향이 되어 나를 향기롭게 감싸주기 때문이다. 하여, 꽃을 만나는 이승의 모든 시간들은 내 삶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정화시켜 주었으며, 쉬 사라지지 않는 매혹적인 여운 같은 것을 내게 심어 주었고, 꽃을 만나는 그 청초하고 결고운 시간엔 그 어디에도 이 세상의 어지러운 시간과 추악하고 삿된 시간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꽃을 좋아하는 이유일 터이다.
하여, 두 해 전, 한여름 폭염을 뚫고 희귀종인 고산의 솔나리꽃과 솔체꽃을 만나러 남덕유산(1,507m)과 장수덕유산(1,492m)을 찾아 나섰다. 하중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그 첩첩의 고봉들을 오르내리던 그날 한낮의 열기에 내몰린 철계단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그 무참한 불구덩이 속에서 땀으로 땀으로 목욕을 했더니 조청이 된 듯, 온 몸에 붉은 땀띠가 종기처럼 돌아서 며칠 동안 열병을 앓았다.
그때 산정에서 난생 처음 만났던 솔나리꽃과 솔채꽃. 이 두 꽃의 조우는 내게 있어 너무나 각별했다. 고산의 그 척박한 바위 틈세에 생과 명의 뿌리를 내리고 그윽한 향기로 온 몸을 감싼 채 우아하고 단아하게 살아가는 그 고혹적인 자태는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지상의 그 어느 꽃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과 눈부심이었다. 나는 그 꽃에 반했다. 밤하늘 별빛과 그윽한 달빛과 맑은 바람과 새벽이슬을 머금어 사는 그들은 샹그릴라(Shangri-La)의 세상에서 피는 꽃과 같이 고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첫 눈에 반한 그날, 시간을 잊고 그들과 함께 유정(有情)을 나누었던 나는, 어둠 내리는 깊은 산중을 뚜벅뚜벅 홀로 돌아섰다.
이윽고 비 뿌리는 절집의 경내에 선다.
빗줄기가 사선으로 떨어진다. 만대에 걸쳐서 불법의 진리가 피어날 대웅전의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빗줄기에 나직이 깔린다. 법당 안은 마음의 문을 두드려 몽매와 우둔을 깨우려는 어느 스님의 삼시염불(三時念佛)이 빗줄기에 흥건히 젖어 빗물의 골을 타고 흐른다.
지상의 모든 시간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순례하는 행려의 발길이 아니던가. 그 삶의 흔적들은 외진 절집이 건, 깊은 산속이든, 그 어디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펼쳐지고 있었다.
비 뿌리는 날은 사진 촬영하기가 참 조심스럽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카메라를 내리고 저수지가 내려 보이는 툇마루에 앉는다. 나무결이 퇴색된 튓마루에 빗방울이 흩뿌려 얼룩진 물기를 머금고 있다. 모처럼 빛바랜 툇마루에 앉는다. 추녀 끝에서 빗물이 쉼 없이 떨어진다. 뚝뚝 떨어지는 그 빗물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생의 지향점을 향한 발길처럼 내게 삶의 의미를 던지며 빗물의 골을 따라 어디론가 굼실굼실 흘러간다. 흐르는 빗물을 망연히 바라보니, 그 낙숫물은 아득한 꿈처럼 먼 기억의 세상 저편으로 나를 싣고 흘러간다. 이 나이가 되도록 흔들리며 허술히 살아온 내 삶의 흔적들을 싣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어쩌면 저 빗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아득히 흘러가버린 추억과 회오를 불러일으키는 반추의 힘이 있는지도 모르리라.
빗물에 넋이 나가 있을 그때 였다.
보살 한 분이 다가와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넨다. 뜻밖이었다. “감사합니다” 라는, 내 한 토막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보살은 아담한 뒷태만 남기며 저만치 총총히 사라진다. 종이컵에서 전하는 따뜻한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싼다. 따뜻한 한 모금의 차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든다. 목구멍이 따뜻하게 녹아든다. 낯선 불객에게 건넨 차 한 잔의 따뜻함이 이토록 고마운 지고‥‥. 그 고마운 맘에 보살쪽을 돌아보니 허공에 빗줄기만 사선을 긋는다.
비바람에 꽃대가 휘며 몸부림을 친다.
꽃의 개화는 우주의 중심이 되고 만개한 꽃은 해탈(解脫)의 의미를 가진다. 그 꽃이 시방을 맺은 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생의 종착지가 되고, 그것은 열반(涅槃)에 이르는 행위일 수 있다. 오늘처럼 비바람에 꽃대가 부러질 듯 휘어지는 아픔과 고통도 어쩌면 저 꽃이 튼실한 시방을 맺고 열반에 들고자 하는 생의 필연적이고 본질적 과정일 게다. 그것은 생의 종착지로 향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격어야 할 숙명의 고통과 고뇌의 몸부림 일터. 그러므로 이 삶도 저 꽃의 실존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하여, 저 꽃인들 어찌 산다는 일이 목 마르지 않겠으며, 산다는 일에 지치고, 때론 그 일에 쓸쓸함이 내려 외롭고 고독하지 않겠으며, 저무는 그 삶이 적막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사바세계의 모든 생명은 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업(業)을 지고 속박의 굴레에 묶인 채 고통과 고뇌를 안고 윤회(輪廻)의 바퀴에 실려 굴러간다.
고저넉한 절집의 빗물소리와 풍경소리와 노승의 염불소리가 저마다 목 마른 사바세계를 어루만지며 빗물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 시각 대웅전의 격자문이 슬며시 열린다. 봉안된 주불(主佛)과 협시보살이 지그시 눈을 감고 빗속의 화엄세계의 여인을 맞아들인다.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방황 속에서 세상 끝까지 구도의 길을 걸어 깨달음의 자리에 앉은 삼존불(三尊佛)이 아니던가. 그들이 우아한 화엄세계 여인의 지극한 공양을 받는 것이리라.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대웅전의 문이 슬며시 닫힌다. 이 불객도 자리를 일어선다. 쉼 없이 세상을 적시는 빗물은 내 발등과 옷깃을 적시며 세상 저편 어디론가 흘러간다.
저만치 뒤돌아보니, 고혹적인 화엄세계의 여인이 이 허름한 불객에서 두 손 고이 합장한다.
꽃을 만나는 시간을 위하여- ._ 석등 정용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