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사신도四神圖 앞에 서다>
자전거를 타고
칼바람 막아주는 어머니 등에 기대
논두렁 달려가던 울퉁불퉁 자전거길
콧노래 입김에 닿아 무지개는 피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무조건 달리라던
쟁쟁한 그 말씀이 바람으로 나를 키워
쉼터서 숨을 고른 뒤 페달 밟아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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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도四神圖 앞에 서다
- 국내성 오회분 5호묘
무덤 속 널길 지나 널방의 신 깨운다
북방을 휘달려온 고구려가 채찍 들고
그림을 뛰쳐나오며 한바탕 춤을 춘다
청룡靑龍
두 눈을 부릅뜨고 토하는 저 불기둥
먹구름 감아쥐고 별과 달을 희롱한다
청비늘 곧추세우자 동해가 엎드린다
백호白虎
붉은 혀 날 선 이빨 포효하는 그 소리에
하얗게 질린 천지 바람마저 숨죽인다
노송도 허리 굽히며 뒷걸음쳐 물러난다
주작朱雀
반원으로 말아 올린 세 갈래 꼬리 깃이
퍼덕이며 날아올라 회오리를 치는구나
무지개 입힌 깃 자락 하늘마저 붉게 탄다
현무玄武
거북을 휘감은 뱀 마주친 눈 불꽃 튀어
팽팽한 긴장 속에 숨 막히는 검은 정적
몸속에 날 세운 진검, 오금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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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 비 보이B-boy
앞마당 뒤흔드는
꽹과리 소리 맞춰
상모 돌려 지신 밟는
풍물놀이 한창이다
소반 위
얹은 쌀 가득
가족소망 담겨있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다리로 하늘 버팅겨
방앗공이 돌려대며
갈구하는 자유영혼
거리의
브레이크댄스
천 년 전의 화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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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푸집
꽃가마 타고 왔네, 어린 색시 수줍어도
풋살구 입속에 넣고 볼 붉히며 웃었는데
보내 온 전사통지서, 까무러친 앳된 엄마
속살을 파고드는 옷섶의 칼바람에
울며 보챈 어린 것을 다독이고 어르다가
고추꽃 매운 눈매로 매를 들며 삼킨 울음
회색빛 하늘 아래 무지개 염원하다
거푸집 부서져야 종소리 울린다며
불가마 뜨겁다않고 한줌 재꽃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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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바다
밑바닥 뒤집어서
혁명 한 번 하는 거야
하얗게 부수다가
탐라로 치솟으며
세상을
평정하는 거야
물밑까지 투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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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寧陵을 바라보다
- 효종왕릉에서
볼모의 쓰린 세월 살얼음 위 말을 달려
눈보라 속 벼린 칼날 달빛을 토막 내며
치욕을 씻어보고자 다짐했던 그날들
품었던 설욕의 한 짙푸른 청솔 되고
`
진군을 재촉하던 백호는 돌로 굳어
장명등 불 밝힐 날을 손을 꼽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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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눈빛
밤하늘 바라보면 아스라이 뜨는 얼굴
별빛을 헤쳐 가며 불러보는 이 밤에
당신도 날 보기 위해 뜬 눈으로 새웁니까
날마다 수척해가는 하현달 가리키며
왔던 길 돌아간다고 눈으로 말씀하신
어머니 까끌한 손을 가슴에다 묻습니다
서서히 달이 차는 만삭의 여인처럼
산고 끝에 꽃을 피워 보름달로 찾아오신
그 눈빛 애달픔에 젖어 가슴 한쪽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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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몰이
흔드는 무의舞衣자락 관중은 모여들고
마이크 거품 물면 포효하는 바람소리
날 새면 무위無爲의 하늘 빛을 쏟고 있겠지
선량은 알 길 없고 포장은 눈부시어
고르는 이삭무게 고달픈 선택 앞에
휘모는 광폭狂暴의 바람, 어지러운 선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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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청령포淸泠浦에 갇히다
가시, 보늬 모두 벗긴 풋밤의 소년이여
긴 한숨 물안개로 피워 올린 청령靑靈의 섬
밤마다 피맺힌 절규, 소쩍새도 함께 울어
늑대 우는 유폐 궁에 두고 온 소녀 생각
가슴에 대못 치는 풀 길 없는 이 미망을
돌탑에 눈물을 쌓다 한양 땅이 어른거려
권좌의 칼날 앞에 속절없는 어린 혼백
오늘사 찾는 길손 명치는 아려오고
읍하는 노송 가지엔 새도 차마 못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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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에서 소년왕을 그리다
- 단종왕비 정순왕후
살포시 딛는 걸음 화관花冠이 영롱했다
맞잡은 앳된 손길 그윽이 바라보며
세상의 주춧돌 되자던 그 언약이 선한데
산기슭 초막으로 흘러드는 외론 달빛
영월 향한 간절함이 피눈물로 변하던 날
긴 머리 싹둑 자르고 향불 올려 기원했다
적막을 띠로 두른 고난의 울안에서
삭은 가슴 검게 타서 백발 된 소녀의 한
자욱한 강을 건넌다, 왕의 손에 닿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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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栗] 향내, 생명을 품다
산굽이 돌아들자 초야의 그윽한 향
첫 폭포 문을 열어 천지사방 쏟아지는
아릿한 뭉게구름이
산너울로 퍼진다
하얗게 머리 풀어 유월을 맞는 신록
산새도 취했는가 날개 접고 숨죽이면
혼절한 저녁놀 아래
산마을도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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탯줄
양수를 터뜨리며 시작된 홀로서기
이 터전 박차고 나선 출발의 시간 앞에
갈구渴求의 발버둥으로 바람처럼 울었다
내 품 떠나 날아오른 창공의 한 마리 새
활짝 편 날개 아래 별 하나 품고 있다
쇠로도 자를 수 없는 핏물 적셔 엮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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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 향을 품다
바위틈 발을 뻗어 허공에 길을 낸다
물안개 피고 져도 외길로 뻗는 생각
때리는 폭포소리를 죽비인양 듣는다
비단보다 여린 꽃술 향주머니 내리 달고
맑은 종 살풋 울려 선정禪定에 앉고 보면
서역은 새벽을 열어 빛내림을 하고 있다
꾀꼬리 읊어주는 시 한 편 받아들고
구름을 따라간다, 내려놓는 마음자락
감탕밭 벗어나는 길 눈동자에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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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수줍은 비취비녀
숯으로 탄 아내 앞에
엎드려 가슴을 쳐도
억누르는 천근 무게
범종도
길을 못 여는
이 첩첩한 갈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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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간 감나무
마당가 움을 틔운 먹다버린 감씨 하나
아침저녁 정성으로 다가오는 환한 얼굴
아버님 외로움 털고 주름진 손 얹는다
어느덧 담장 너머 오가는 이 내다보고
하나 둘 감꽃 세며 이야기 꽃 피웠는데
감꼭지 떨어지던 날, 예고 없는 이별 뒤
아버님 잠든 땅에 그 나무 옮겨 심어
촘촘한 별빛 아래 축원으로 합장한 손
은핫물 넘치는 소리 볼을 타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