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햇살을 당기다>
빨래판
브라와 청바지가 뒤엉켜 돌아간다
젖은 숫자 눌러놓고 하프를 켜는 여자
금간 손 엇박을 치며 빨래판을 긁는다
절은 때 씻는 하루 비벼대는 요철 속을
부르튼 물집들이 시나브로 터지는 밤
오그린 발칫잠에도 꿈속 길을 달린다
갸르릉 밭은 소리 리듬을 타다보면
헐거운 솔기 사이 얼핏 뵈는 푸른 하늘
옥탑방 바지랑대 세워
맑은 햇살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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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농축된 사랑과 눈물 알집에 묻었단다
누군가 문을 열고 압축파일 풀겠지
침묵과 함성의 광장
개켜 넣은 오늘을
켜켜이 묻은 시간 가루분 톡톡 털고
까톡까톡 부른다, 알람이 울고 있다
천년 잠 들여다보는
먼먼 훗날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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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밥
퀭한 눈
이밥 한술
떠먹이고 싶다더니
눈에 밟힌
마른버짐
바스락 부서질 듯
저 멀리
예성강 찾아
밀물 타는
꼬꼬밥*
* 꼬꼬밥(쌀밥의 북한 말)을 북의 아이에게 먹이려 탈북민들이 쌀이 든 페트병을 서해에서 북녘으로 띄워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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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하는 날
덤으로 주고받던 넉넉한 골목 웃음
공룡마트 올라간 날 굽은 등 숭숭 뚫려
출구도 비상구도 없는 구멍가게 사장님
금이 간 골목길에 황사바람 일고 간다
시린 뼈 훑어내려 관절을 툭툭 치며
‘폐기물’ 스티커 붙여
길바닥에 나뒹군다
맨살의 시멘트 벽 더듬는 촉수 본다
말없이 달라붙은 담쟁이의 저 안간힘
수많은 잎사귀를 끄는
숨소리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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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다
사방으로 튀어가는 꽃병조각 날 세운다
엉겁결 뛰는 발에 핏물은 배어나고
꽃의 집 숨을 멈추자 덮쳐오는 이 고요
흩어진 파편마다 눈 뜨는 불빛 좀 봐
허물 벗는 나비인가 꽃은 바로 활짝 피네
비로소 터지는 숨길, 날숨들숨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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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땀을 쥐다
- 단원의 씨름도
갓머리 벙거지에 상투에다 땋은 머리
폈던 다리 오그리며 응원소리 드높다
아자자!
들배지기에 받아치기 역습이다
싸움이 격렬해도 뒤돌아 엿을 치며
하루치 점을 보는 안다리를 걸고 있다
부채로 슬쩍 가린 속내 벌겋게 타는데
터질 듯한 시간너머 생의 반전 일어나는가
쏠리는 응원석으로 철퍼덕 내다꽂는 힘
꽹과리 절로 솟으며
당산나무도 덩더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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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귀꽃
너를 보면 젖이 돈다
찌르르 길을 낸다
서둘러 방울지는 옷섶을 풀어내면
솜털로
쫑긋 서는 귀
새끼노루 꽃잎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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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
부르르 몸을 떠는 노숙의 젖은 죽지
온천천 물가에서 밀린 기도 하고 있다
한사코 매달리는 천식 뿌리치지 못하고
가솔도 아랫목도 묻어둔 가슴 한켠
숭숭 뚫린 구멍마다 파고드는 숨비소리
시치미 딱 떼고 가는 애완견의 옷이 곱다
갈 길 놓친 왜가리의 구불텅한 목덜미
지루한 목숨 하나 버짐처럼 붙어있다
외발로 버티는 하루 빌딩숲이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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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그 누가 읽을 건가 외계인의 저 메시지
먹나비 날개자락에 붓으로 쓴 암호무늬
방부제 분칠한 꿈이 천년 잠에 들었다
나비원* 건너가서 봉서 한 통 받아들고
그대 행간 해독하려 가로세로 뜯어보다
차라리 나비 되리라, 장자 내편을 펼친다
* 울산대공원에 있는 나비식물원, 러시아 사진작가 Kjell Sandved는 나비 날개의 문자 등 여러 문양이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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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광복동 대로변서 허리 접는 저 아재
뼈도 밸도 다 버리고 허파에 바람 실어
어정쩡 장승은 싫어 온 몸으로 유혹한다
팔푼이라 조롱하던 눈총을 뒤로 하고
꾀죄죄 절은 청춘 은하에 풍덩 던져
별똥별 건지려는가 웅덩이도 마다않네
꼬부랑 노래 맞춰 피에로는 춤을 춘다
풀무질 날로 해도 허느적 우는 달밤
아지매 생각하는가 허재비 우리 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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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플란트
오백 년
영욕 딛고
버텨 온 저 팽나무
금가고 부러진 뼈
시멘트 기둥 박아
해묵은
아집을 털고
새떼 불러 젖 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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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한 벌
하얼빈 총소리가 어미에게 당도했네
약지를 자른 결의 하늘을 여는구나
목숨을 구걸치마라 수의 한 벌 보낸다
북천의 외로운 길 이 한 벌로 삭히랴만
배내옷 꺼내놓고 한땀한땀 달을 깁는다
바늘이 헛짚는구나, 창살 밝아 오는데
이역의 바람으로 천년을 떠돌아도
뤼순의 풀더미 속 흙으로 돌아가도
북두의 일곱 별이다, 어미의 높은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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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품 죽음이 싫다
노인이 먼 길 떠났다, 요양병원 침대에서
삼년간 튜브로 이은 목숨줄 아예 놓고
유품 속 빛바랜 봉서
덩그러니 남았다
정신줄 놓았다고 온 몸에 줄 달지마라
가는 길 훤히 보며 문지방 넘을란다
영정 속 깡마른 얼굴
조문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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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령구酒令具
천년을 가로질러 주사위가 굴러온다
파도타기 내림술에 춤추는 은빛 물결
둥근달 자맥질한다,
취기 자못 난만하다
던지는 물음표에 느낌표가 굴러간다
거푸 마신 석 잔이야 복불복이 아니더냐
러브샷, 팔을 건다는 건
외로움의 방편이지
도원이 가까웠나 가화가 지천이다
불나방 날아들듯 술잔에 빠진 혀들
엇박의 발자국소리
그림자가 꼬인다
* 주령구酒令具 : 경주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14면체의 주사위로, 주령구를 던져 나오는 면의 글자대로 따라하는 음주풍류를 위한 신라인의 놀이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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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좌우가 바뀐 채로
거울 속서 누가 본다
똑바로 보려거든 그대를 뒤집어라
한 번쯤 뒤집고 보면 가는 길이 보이리
영문글자 자리 바꿔
달려오는 앰뷸런스
앞차의 백미러엔 생명길 뚫고 있다
꽉 막힌 내 안을 본다
거울 하나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