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대기실
주르륵 창을 타고 빗방울이 울고 있다
당신은 훌훌 벗고 깃털처럼 떠나는데
멀거니 바라보는 창 후두둑 꽃이 진다
엇박의 뻐꾸기는 넘어갈 듯 끊어질 듯
제풀에 주저앉나 설운 눈빛 감추고
텅 빈 손 흔들고 있네
산그늘이 내리네
꿈이다 돌아가자 목청을 돋우는데
바람의 호명인가 어느 별의 손짓인가
‘유골을 인도하십시오’
자막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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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바람편지
적막 한 채 짊어지고 바라보는 산등성이
명치로 우는 뻐꾹 유월을 맴도는데
엉겅퀴 곧은 뼈 세워 녹슨 철모 뚫습니다
아린 상처 훑고 가는 가칠봉 바람 앞에
피로 쓴 한 줄 문장 철책선 들며나며
검붉은 옹이로 박혀 차마 읽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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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립다
배다리 건너가다 물아래 문득, 본다
캄캄한 물속에서 나를 보며 웃는 얼굴
어딘가 낯이 익은 듯 주춤하다 손 내미는
꽃들이 돌아서도 향기 아직 남아있다
꽁꽁 언 발을 감싸 가슴에 품어주던
발바닥 간질한 감촉, 엄마의 유두였다
물주름 말아가다 젖내음 밀려온다
철지난 폭우에도 때 이른 폭설에도
별빛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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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웨이 티켓(One Way Ticket)*
레일 위 달려가다 내 귀를 두들기는
원 웨이 티켓! 어깨 들썩 흥얼거린다
바퀴에 구르는 노래 동굴 밖을 나선다
왼쪽을 깎아내다 바퀴는 헛돌아도
오른쪽을 덧붙이다 혹 하나쯤 솟아나도
티켓을 끊으러가자, 눈빛 깊이 나누며
경배하듯 맞잡은 손 통일호에 오르는 날
갈피마다 새긴 설움 물살에 띄운다면
등 돌린 그늘쯤이야 간주곡으로 듣겠지
* 이럽셥Eruption이 부른 팝송 〈One Way Ticket〉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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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피드
뉘 심장 몰래 겨눠 불꽃 일던 눈화살
내 몸을 횡단하다 화인으로 박혀있는
가끔씩 열어보고 싶다
저릿하던 꽃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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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때로는 폭풍으로 불볕을 흩뿌리며
시간의 입자들이 펼쳐놓은 모래 물결
베두인 옷자락 따라 맨발인 채 걷는다
누억년 바람 안고 쓸려가는 고독 본다
모래보라 덮쳐오는 잃어버린 길 위에서
히잡을 둘러쓴 하루 내 안의 길 찾는다
새 지평 열고 있는 속살의 제단이다
죽음조차 거부하는 태양신이 머문 여기
당신이 호명하려나 주술 같은 이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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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
사각 방에 들어서는 눈과 눈이 마주친다
싸늘한 유리벽에 맞대보는 손금 타고
불티로 덮은 얼룩을 씻어내고 닦아낸다
찔레향 들이켜다 가시를 삼켰구나
움푹 팬 동공에는 첨벙하고 물결 일어
망초꽃 온 들을 덮어 쿨룩쿨룩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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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치원 블루스
생각을 파먹느라 합죽해진 웃음 너머
시시콜콜 챙겨넣은 가방을 둘러메고
바람 든 무릎을 접어 승합차에 오른다
차창을 내다보랴 주름 손을 내흔들랴
골을 판 오목가슴 여미지도 못한 채
손거울 가득한 입술, 립스틱을 칠한다
말문에 금이 갔나 헛말을 엎지르다
미궁에 빠져버린 기억을 건졌나 봐
뽀골한 억새꽃 이고 당신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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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강
흐르다 멈춘 강이 별을 향해 누워있다
빗방울 무리 지어 골짜기로 몰려갈 때
돌덩이 손에 손잡고 산으로 가고 있다
역린이 아니었다, 사발통문도 없었다
별들을 사랑한 죄 서로를 다독인 죄
두문동 칠십이현*이 새까맣게 누웠다
* 조선 건국을 반대한 고려 유신 72명이 두문동에 은거, 마을에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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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향하여(Turn Toward Busan)*
1
낡은 편지 꺼내들고 침침한 눈 닦는다
이번 작전 끝나면 통일이고 평화라던
전선의 마지막 편지 읽어도 다 못 읽은
햇살은 물에 젖고 눈물자국 말라간다
어미의 눈시울에 얹혀 있는 내 아들아
코리아 그 먼 곳 향해 굽은 등을 세운다
2
살 떨리는 총성 앞에 눈물도 얼어붙어
턱까지 차오르는 희디흰 눈이불 속
잠들면 돌아가겠어요, 식탁 환한 곳으로
핏물이 흥건한 땅 황홀한 슬픔 속을
계절은 식어가고 메아리는 흩어져요
어머니 등불을 켜요, 주름살이 보여요
* 11월 11일 오전 11시 (한국시간) 1분간 전 세계인이 동시에 부산 UN기념공원을 향하여 6·25전쟁 중 전사한 용사를 추모하며 묵념하는 행사로, 당시 종군기자였던 캐나다의 빈센트 커트니가 제안하여 매년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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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을 기다리다
아슬한 물방울이 암반에 홈을 파듯
적벽의 소나무가 바위를 쪼개내듯
결박된 봉두난발이 한 시대를 깨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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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심더
내사 마 갱상도 보리문디 아입니꺼
독립군 할배 덕분에 가이드하고 있지예
청산리 집안에서는 우리말이 철칙이라예
나라는 찾았지만 땅뙈기는 없었심더
돌밭에다 그리움을 삭이고 일궜지예
움푹 팬 할배 눈빛은 우물보다 깊었심더
고향 분 만나니까 입도 귀도 뻥 뚫리네예
제니스 아이파크 그게 뭔지 아는가예?
우짜꼬 거기 산다고요!
대왕님요, 미안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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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돌못
명의가 찔러넣은 신령한 장침이다
팔딱이는 맥을 따라 석축이 숨을 쉬면
어둠을 베어낸 달빛
경혈 찾아 꽂는다
천년의 디딤돌로 세상의 뼈가 되어
돌 안에 길을 여는 어둠 속 빛살 따라
묶어둔 향낭을 연다
침묵으로 꽃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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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항, 3월
쾌자를 펄럭이는 버선발의 붉은 해안
난달의 몸부림에 울며 간 우리 아재
이승 문 열어젖히고 절며 절며 오고 있다
반버버리 손가락질 가슴에 박혀있어
출렁이는 바닷물에 말의 비수 씻어내다
빗장 푼 꽹과리채가 제 가슴을 찍는다
난바다 채낚기에 제 몸부터 낚은 죄
맺힌 사연 토설하며 신대 아래 흐느낀다
한바탕 얽힌 매듭을
훌훌 푸는 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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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환수
눈과 눈 마주친 날 말더듬이 되었어요
손과 손 스치는 날 심장 콩콩 뛰었어요
두 입술 스르르 풀려 뼈와 뼈가 녹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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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세속의 잣대로 그대여 보지 마라
손대지 않고서도 수십 번 얼굴 바꿔
찰나의 승부 세계를 노려보고 있다네
미소 띤 얼굴에 부드런 몸짓으로
그대 심장 겨누는 양날의 칼을 보라
벼랑 끝 바람쯤이야 소리 없이 자르지
세상의 북소리는 귓결로 듣는다네
가면 속 민낯의 패 손바닥에 감추는 날
그대의 역사쯤이야 연극처럼 뒤집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