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휴전선 바람편지>
사랑니
숨어서 나를 보던 그 머시매 어디 갔나
새침하게 돌아선 내가 이제 아프다
찔레꽃 가시를 물어 열꽃 피던 열아홉
지하철 노약자석 첫사랑이 코를 곤다
인중을 당기면서 찔레 향 맡고 있나
숨죽여 까치발 딛는다, 봄꽃 와락 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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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꽃
너와 나
정분으로
애끓이며 지샌 밤도
뻐꾹새
울음소리
산마을 흔드는 낮도
온 산이 튀밥 터지듯
향주머니 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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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바람편지
가칠봉 숲의 정령 말문을 닫아 건 날
혼절하는 시간 앞에 피로 쓴 한 줄 문장
검붉은 옹이로 박혀 차마 읽지 못합니다
아린 상처 훑고 가는 높바람 파고들어
적막 한 채 짊어지고 바라보는 지뢰밭에
엉겅퀴 곧은 뼈 세워 녹슨 철모 뚫습니다
육십년 삭혔다가 답을 쓰는 바람편지
아비 없이 자랐다고 행여나 책잡힐까
철책선 넘어온 바람 꽃잎 실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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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
동심원 퍼져간다
온천천이 숨을 쉰다
온종일 자맥질해도 젖지 않는 사랑 본다
소리도 흔적도 없이 외길 눈빛 흐르는
쉼 없는 물갈퀴가
고요를 떠받친다
드높은 향기 끼리 시를 쓰는 오리부부
세상 밖 걸어가는 수다 행간으로 흘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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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에게
접질린 생의 관절 함부로 자라난다
진창에 빠졌는가 한쪽으로 닳은 신발
물집도 자주 터지면 제 울음 듣지 못해
혹으로 머리 내민 네가 왠지 부끄러워
목욕탕 돌바닥에 끌고 온 길 갈아댄다
물불도 가리지 않고 절룩인 줄 모르고
피는 꽃 꺾으려고 별빛만 바라보다
뼈와 뼈 엮는 사설 듣지 못한 청맹과니
녹찻물 따끈히 우려 너의 외롬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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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무버
황혼도 꽃답다고
피어난 검버섯꽃
레이저로 싹 지우고
마스크로 산길 간다
거뭇한
바윗덩이가
실소하며
쯧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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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첩霞帔帖
1
안부 글 차마 못 쓰고 다홍치마 보냅니다
촉루 너머 강진 향해 글썽글썽 젖습니다
한숨 진 개밥바라기 머릿결이 하얗습니다
2
받은 치마 펼쳐 놓고 아픈 마음 오린다오
캄캄한 적소에는 달빛만 기웃하오
희뿌연 새벽녘에야 한 점 획을 긋는다오
3
서리꽃 아찔해도 물길 낸다, 아들아
만 갈래 뻗는 생각 하나로 묶는다면
첫울음 들을 수 있으리, 매운 시도 얻으리
* 하피첩 : 노을빛 치마로 만든 서첩. 강진에 유배중인 다산에게 부인이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를 보내옴. 다산은 그 치마로 서첩을 만들어 한양의 아들에게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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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벌레, 천년을 날다
- 황남대총 출토 말안장가리개* 앞에서
잎사귀를 갉을망정 품은 뜻은 높았다
천년을 날아와서 사뿐히 내려앉는
금록빛 광채를 보라
숨길 틔운 저 미라
대왕의 옷자락을 흠모한 여인인가
수천의 씨줄들이 날개를 짜고 있다
천마 탄 그대의 숨결 날줄인 듯 껴안고
차곡차곡 껴묻은 돌무지 털고 나와
비단필로 풀어내는 차마 못한 그날 얘기
한 천년 다시 난다면
그리움이 삭여질까
* 1973년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말안장가리개는 금동의 맞새김판 안에 비단벌레 날개를 촘촘히 깔아 붙여 황금판과 날개의 초록빛이 어울려 화려한 빛을 뿜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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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을 끓이다가
새알심 동동 뜨며 터지는 꽃봉오리
여차하면 튀는 것들 끓는 속 달래야지
눈맞춤, 그게 약이야 뭉근하게 저으며
김 오른 두레상에 그릇그릇 꽃잎 번다
동치미 살얼음에 부딪는 수저소리
웃음문 절로 열리네, 무릎 맞댄 눈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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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솥
아궁이 앞 꿇은 무릎, 죽은 불씨 살려놓고
'하안 많은 이 세-사아앙' 울 엄만 노래하고
부뚜막 올라앉은 넌
소리 내어 대신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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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
- 운보의 군마도
그림을 뛰쳐나온 푸른 말에 뛰어 올라
너와 나 깍지 끼고 삼천리도 십리처럼
옷자락 휘파람 몰아 북방으로 내닫는다
묵점을 흩뿌리면 흙먼지가 길을 낸다
얼음장 녹여내는 콧김을 내뿜으며
저 갈기 대륙을 흔든다
모듬북을 울린다
구멍 난 빨간 양말 아리랑표 흰 고무신*
눈뜨고 잃어버린 물소리 바람소리
속가슴 뜨겁게 찍어 수묵채색 펼친다
* 운보雲甫가 생시에 즐겨 신었던 양말과 신발로 청주 <운보의 집>에 전시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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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 주걱
치마폭에 받아 안은 대추알의 붉은 기도
희붐한 창을 연다, 푸른빛 뻗쳐온다
젖은 손 하루를 열어
무릎 꿇는 어머니
밥심의 더운 목숨 땀방울로 일어서는
모퉁이 돌아오는 식솔의 긴 그림자
갓 지은 꽃밥 한 솥을
고슬고슬 퍼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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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덕 향기
밤새워 달려온 꾸러미의 매듭 푼다
단양의 싸한 흙내음 훅, 하고 숨길 터져
차곡한 더덕뿌리가 환하게 눈을 뜬다
산골짝 돌아돌아 덤불숲 헤쳤겠네
긁히고 미끄러져 손톱 밑 까매져도
이 향기 놓치지 않으려 허우적였을 친구야
외딴 곳 들머리쯤 여린 풀 흔들리듯
달빛을 붙들고 선 희끗한 파마머리
거기서 너는 웃는데
나는 여기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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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유곽쟁웅遊廓爭雄*
꽃 속의 꿀을 빨던 그 기억 못 잊는가
강남의 룸살롱은 불도 켜지 않았는데 낮술에 불콰한 고관 제 집인 양 드나든다. 의사당 불빛 아래 삿대질은 감초인가 닦달하고 추궁해도 오리발이 대세라네 하나쯤 혼외 자식 바지춤에 감추고. 시상에 21C 대명천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이가 다시 왔나 ‘씨는 못 속인다우’ 죄 없는 판박이에 거품 문 입술들이 퍼 나르는 서울의 강
그믐달 물살에 밀려 물음표로 지고 있다
* 유곽쟁웅遊廓爭雄 : 혜원 신윤복의 그림(기생집 앞에서 사내들이 다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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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탕 정경
늙은 딸 무릎 위에
어머니 안겨있다
알맹이 다 빼먹어
물위에 동동 뜰까봐
자꾸만
품 안에 당겨
깍지를 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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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覺說理
정선장날 한 귀퉁이 눈꽃은 날리는데
얼의 씨 구하려나 얼씨구 저절씨구
여장한 붉은 치마 속 조롱박이 잘도 논다
찌그러진 냄비 보소, 허리춤에서 설법하네
휘모리 꽹과리에 왼 다리를 돌려대면
금이 간 가위소리는 죽지도 않고 또 운다
엿이야 사든말든 제 신명에 자지러진다
물구나무 세상얘기 질펀하게 풀어내다
터얼썩 주저앉는다, 노랫가락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