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에 걸린 고라니
김덕남
콩밭을 작살내고 고구마 밭 으깨더니
속이 찬 알 배추를 해작질 하였구나
그렇지!
울타리 치면 네 한계를 알겠지
유려한 몸짓으로 울타리 훌쩍 넘어
이제는 주인인양 밥상을 즐기다니
옳거니!
올무 아님 덫으로 너를 보복하리라
희붐한 새벽녘에 몸부림치는 너를 보러
울을 따라 덫을 찾아 한 바퀴 돌았더니
아이쿠!
콱 찍은 발등 내가 바로 고라니!
남편이 퇴직 후의 일을 생각하며 몇 년 전에 텃밭을 하나 마련하였다. 승용차로 20분 정도의 거리라 매일이다시피 드나들며 정성을 들이고 있다. 개울을 낀 밭은 언덕이 쓸모가 있다. 그 언덕에 나무를 심기로 했다. 처음엔 벚나무를 심었으나 태풍으로 몇 그루 남지 않고 지금은 매화나무, 자두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엄나무, 보리수, 복숭아나무, 호두나무, 소나무, 밤나무, 능소화, 인동초 등이 한 살림을 차리고 잡풀과 더불어 어우렁더우렁 살아가고 있다.
밭엔 콩을 심었다. 날마다 들여다보아도 싹 틔울 기미가 없어 가만히 살펴보니 비둘기란 놈이 까치까지 데려와서 파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수아비를 세웠다. 요즘 새는 어찌된 셈인지 허수아비도 친구로 아는 모양이다. 그래도 몇 포기의 콩이 남아 있어 정성을 들이는데 콩잎을 하나 남김없이 누군가가 다 뜯어먹고 대궁만 남겨놓았다. 한숨을 쉬다 그 자리에 고구마를 심었다.
부지런히 물도 주고 두런두런 얘기도 주고받으니 하루가 다르게 줄기가 잎을 달고 뻗어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고구마 잎이 군데군데 뜯겨나가고 없었다. 산 밑이라 고라니가 출몰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구나. 이 일을 어찌할까? 그렇지, 울타리를 쳐야지. 그러면 제 한계를 알고 돌아가겠지. 대나무를 구해 일정한 길이로 잘라 말뚝을 2~3m 간격으로 박았다. 그리고 그 둘레를 초록색 그물로 빙 둘러쳤다.
다음 날 텃밭에 도착한 순간, 밭 안에서 윤이 반지르르한 고라니가 후다닥 울타리를 훌쩍 넘어 계곡의 풀숲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젠 무시로 찾아와서 제 밥상인양 고구마 잎과 자라기 시작한 배춧잎을 돌아가며 입맛대로 먹는다. 위치가 바로 산 밑이니 제 안방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땅이 밭이 아니었을 때는 제 영역이 아니었겠는가? 그래 같이 나누어 먹자. 그러다 보면 제 놈도 양심이 있어 조금은 남겨주겠지.
지난겨울, 밭은 얼어붙었고 서릿발이 선 사이사이로 시금치가 자라고 있었다. 밤에는 얼고 낮에는 녹으면서 자란 시금치는 나물을 무쳐 먹으면 달짝지근한 맛이 여간 아니다. 아껴 먹는 그 시금치를 한 포기 남김없이 고라니란 놈이 몽땅 먹어치웠으니. 아, 참을 수 없어. 그래, 덫을 놓자. 울타리 옆 발자국이 있는 곳에 조그마한 덫을 놓았다. 걸렸다하면 꼼짝없이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야 할 걸. 회심을 미소가 절로 난다.
이튿날, 몸부림치는 고라니를 보러 희붐한 새벽녘에 울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순간, 아이쿠! 콱 찍은 발등, 내가 바로 고라니! 염라대왕님 살려주이소!
김덕남(6·25전쟁 유족이며, 시조시인.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최근 시조집 『젖꽃판』을 펴냈다.)
- 〈나라사랑신문〉 2013. 12. 1. 국가보훈처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