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6학년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갑자기 집에 나타나셨다. 아무런 기별이나 기척도 없었다. 나에겐 연락이 없었지만 엄마하곤 연락을 하고 계셨는지 모를일이다. 아버지는 수척한 몸으로 집에 오셔서 바로 자리를 피고 들어 누우셨다. 겨울방학 시작부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아버지는 근처에 서울대학교를 세우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오셨다고 했다. 그러나 특별한 말도 없었고 식사도 잘 하질 못했다.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는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구정 전날에 돌아가셨다.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의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연락이 닫지 않아 장사를 치를 사람도 없었다. 주인집 아들과 형과 주변 사람들 4명이 관을 들었고 나는 그 앞에서 영정 사진을 들고 운구차로 향했다. 무척 춥고 쓸쓸한 날이었다. 명절전에 돌아가셔서 3일장도 못치르고 이틀만에 상을 끝냈다. 시간이 더 있었다고 해도 찾아올 사람도 없었을것 같다. 나는 아버지 운구 앞에서 영정 사진을 들고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눈 정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하는 기분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쳐다보는 바람에 너무 창피스럽기만 했다. 운구차는 열명도 채 안되는 상주들과 조문객을 태우고 벽제 화장장으로 향했다. 선산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혹 선산이 있다해도 먼 곳까지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질 않았다. 아버지의 유해는 화장되어 뒷산에 뿌려졌다. 이것으로 아버지와 인연은 끝이났다. 내가 처음 아버지의 형제들과 친척들을 만나러 경주에 내려 갔을 때 우리 친척들은 내가 태어 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친척들과 연을 끊고 살았다. 나는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겨울부터 신문배달을 하게 되었다. 학비와 용돈벌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조간신문인 조선일보를 배달했다. 나는 새벽 5시 쯤 일어나 보급소에 갔고 5시30분 정도 부터 배달을 시작했다. 배달을 하는데 두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번째로 내가 겁쟁이 였다. 태생이 겁이 많던 나는 무서운 귀신 얘기를 들으면 일주일 정도 혼자 잠을 자지 못했다. 나이가 60이 넘은 지금도 혼자 자는걸 무서워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게 싫다. 공포영화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양들의 침묵"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렇게 무섭지 않은 영화였음에도 나는 영화를 보고 와선 잠을 청하지 못했다. 조디 포스터가 혼자 범인 집에 찾아가 캄캄한 집안을 뒤질 때, 적외선 망원경으로 보는것 처럼 연녹색 스크린에 주인공이 보이고 카메라가 범인의 눈처럼 조디를 좇아가는 모습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공포스러웠다. 난 그 영화를 혼자가서 봤는데 왜? 그렇게 무서운 영화를 골랐는지 알 수가 없다. 겁이 많았던 나는 아무도 없는 컴컴한 새벽길을 배달 다니기가 너무 무서웠다. 어떤날은 상가집 등이 걸려 있는 골목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어쩔수 없었다. 무서웠지만 어쨌든 신문을 돌려야 했고 신문을 돌리지 않으면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 친구들 앞에서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또 한가지 어려움은 신문사절이란 명패를 집 문앞에 걸어 놓는것이었다. 신문은 처음 구독하기는 좋았지만 거절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신문을 안보겠다고 거절해도 나는 무조건 그 집에 신문을 배달해야 했다. 일단 신문이 배달되면 총무형이 어떡하든 신문 대금을 받아오는것 같았다. 그러나 신문을 배달하지 못한다면 대금을 누가 주겠는가, 간혹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나를 기다리는 구독자도 있었다. 내가 질기게 신문을 투입하니 나를 붑잡아 호대게 혼을 내고 신문을 더이상 집어 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새벽에 혼나기도 싫고 욕먹기도 싫은 나는 배달못한 신문을 집에 가지고 가서 쌓아놓았다. 서너집 신문을 한달정도 매일 쌓아놓으니 신문을 보관하기도 어려웠다. 꼬리가 길면 밣힌다고 마침내 보급소 소장이 알게 되었고 소장은 나를 앞세워 우리집을 찾아 갔다. 방으로 들어가 신문이 쌓여 있는것을 본 소장은 엄마를 닥달해 신문대금을 대신 내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손을 싹싹 빌며 용서를 구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런일이 자주 있어서인지, 아니면 우리 사정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소장은 용서를 해주었다. 그러며 앞으로는 배달을 못할 경우 보급소로 신문을 가져오라 했다.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새벽 신문 배달을 했다. 잘 한것도 없는것 같았지만 보급소 추천으로 장학금도 받았다. 힘이 들었지만 신문배달을 하며 중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데미안"을 만났다. 데미안은 그 시절 내 상황을 위로하는 소설이었다. 일탈하고 싶고 반항하고 싶은 데미안 처럼 나도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체격이 왜소하고 겁이 많다. 내가 체격도 크고 겁도 없었다면 비행 청소년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데미안을 통해 내 중학생 시절의 반항기를 누를 수 있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노력한다, 알은 세계다. 또다른 세계를 만나자고 하는 자는 알을 깨뜨리고 나와야 한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이다. 그 시절 나도 이 구절에 매료되었고 지금 현실을 부수고 나가면 또다른 세계가 열릴것이라고 믿었다. 데미안을 읽은 후 나는 헤르만 헤세의 또다른 작품을 많이 읽었다. "수레바퀴 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타르다" 를 읽었다. 헤세는 나의 중학교 시절 그리고 내 인생 철학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로가 있다. 50대 초반 다시한번 데미안을 읽어 보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확실히 책은 읽어야 할 시기가 있는것 같다. 힘들고, 외롭고, 고달팠지만 나는 데미안을 생각하며 또 다른 세계로 한발한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