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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발
이 병 순
언도는 입에 든 닭발을 삼키기도 전에 또 하나의 닭발을 욱여넣는다. 오늘 닭발 맛은 혀를 찧고 말(言)을 찧어대던 절굿공이 맛과는 다르다. 언도 안에 깃든 부정한 기운을 싹 긁어대던 갈퀴 맛만도 아니다. 언도는 목울대에 힘을 가해 닭발을 삼킨다. 쫄깃쫄깃한 채찍 맛이다. 오독오독 씹히는 닭발은 말발굽 소리 같다. 말(馬)들이 뛰고 달리며 언도 안을 휘저어 놓는 것 같다. 언도는 이마와 콧잔등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문지른다. 닭발이 뒤숭숭한 기분을 힘껏 걷어차길 기대하며 언도는 또 하나의 닭발을 집어 든다.
택시에서 내린 언도는 무작정 시내의 인파 속을 걸었다. 백화점 모퉁이를 도는데 포장마차 주인 여자가 언도에게 손짓을 하며 긴 나무 의자를 탁탁 쳤다. 포장마차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고 안줏거리가 든 유리 상자는 빛을 환하게 받고 있었다. 여자는 유리 상자를 보며 멈칫거리는 언도를 의자 쪽으로 잡아당겼다. 상자 안의 얼음 덩어리 위에는 우렁쉥이, 조기, 삶은 문어와 오징어, 새우, 닭똥집, 닭발 등이 있었다. 여자는 묻지도 않고 닭발을 한 움큼 집어 올렸다. 언도가 한참 들여다본 것은 닭발이었다. 닭발을 거머쥔 여자의 손은 장난감 뽑기 기계 안에 매달린 집게 같았다.
기말고사가 끝난 오늘은 교직원 단체 회식을 한다고 며칠 전부터 회람이 돌았지만 언도에게 요즘 공을 만나는 일 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언도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했던 여느 때와 달리 오늘은 공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이틀 연거푸 만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공이 오늘 또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어제 나눈 대화가 진척을 보는구나 싶었다. 공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시내 커피숍 부근에 다다랐을 때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저예요. 택시 기사가 프로야구 중계를 크게 켜놓았기 때문에 언도는 폰을 귀에 바싹 붙였다. 오늘 언도 씨 만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공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공에게는 3 년 째 깊게 사귀는 남자가 있다. 그는 공보다 열 살 많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 부모의 반대가 심하다. 그러던 중 언도를 만났다. 한두 번 정도만 만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1 년 여 가량까지 끌게 되었다. 요즘 계속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언도가 부담스러웠다. 어제 언도가 부모에게 인사할 날짜를 잡자는 말에 언도와의 관계를 너무 오래 끌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늦기 전에 판을 접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저한테 잘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공은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도는 얼른 발신 버튼을 눌렀지만 공의 전화기는 그새 꺼져 있었다. 대단한 민첩성이었다. 둘은 평소에도 존댓말을 썼지만 공의 말투는 여느 때보다 깍듯했다. 남녀사이일수록 존댓말을 써야지만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공의 제안은 맞았다. 공을 만날 때마다 첫 미팅 나간 듯 설렜던 까닭도 깍듯한 말투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공의 깍듯함은 잘 벼린 칼이었다.
“아줌마, 나도 닭발로 좀 줘 봐. 오늘은 닭발이라도 씹어야겠어, 씨발.”
야자수 무늬가 그려진 남방셔츠를 입은 중년 사내가 여자를 향해 외친다. 반대편 자리가 비었는데도 야자수는 언도 옆에 앉는다.
“매운 고추를 좀 다져 넣었는데 대게 매운가보네.”
여자는 야자수에게 눈길을 주며 언도 앞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놓는다. 언도는 화장지를 몇 겹 포개 뺨과 목 언저리를 꾹꾹 누른다. 접시에는 불그죽죽하고 반지르르한 닭발이 듬성듬성 포개져 있다. 조청과 식용유가 많이 들어간 것이다. 통깨와 다진 파도 뿌려졌다. 발가락이 두 개만 남은 닭발은 새총 같다. 언도는 새총을 입에 넣고 우둑우둑 씹는다. 콩알이 따끔따끔 입천장에 튄다. 엄마도 닭발을 씹을 때면 우둑우둑 소리를 냈다. 닭발이 명치를 으깨는 맛이란 걸 알기 시작한 때는 겨우 1 년여 전부터였다. 엄마가 죽고 나서부터였다.
엄마가 도계장에서 받은 품삯은 닭발이었다. 월급과 맞바꾼 격이었다. 도계라인의 닭다리에서 잘려 나온 닭발을 소쿠리에 챙겨 담는 것이 엄마의 주 업무였다. 좁은 집안에는 늘 생닭 비린내가 진동했다. 엄마는 닭발에 밀가루를 묻혀 빡빡 주물러 씻었다. 그런 뒤 가는 솔로 발가락 사이마다 샅샅이 문질러 씻은 뒤 술집이나 포장마차에 대주었다. 발목이 부러졌거나 발가락이 깨진 닭발들은 따로 모아 졸이고 볶아서 밥상에 올렸다. 언도는 닭발을 거의 손대지 않았다. 엄마는 무슨 음식이든 언도가 먹고 싶지 않다고 하면 한 번 이상 권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해선 헛말을 하지 않는 엄마는 상대의 말도 곧이곧대로 들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편의점 옆 건물 지하 노래방에서 새나오는 노래 소리는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다.
“아, 사랑이야 아무나 하지, 이별이 어려워 그렇지.”
야자수는 손목시계를 풀어 소주병 옆에 놓으며 혼잣말을 한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 뿐만 아니라 포장마차에서 켜놓은 텔레비전 소리와 편의점 옆에 설치된 장난감 뽑기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섞여 골목은 시끌시끌하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스마트폰 진동이 온다. 선배다. 언도는 스마트폰을 소주병 옆에 놓는다. 선배는 언도와 같은 재단의 중학교 체육교사로 고등학교 몇 년 선배다. 결혼하기 전에 여자들을 많이 사귄 선배는 여자를 보면 어떤 유형의 여자인지 잘 안다며 공을 꼭 한 번 보게 해 달라 했다. 언도는 오랜만에 가진 만남을 친구들의 너스레로 시간을 때울 수 없다는 공의 뜻에 따라 둘이 만날 때 선배는 물론이고 누구도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벌써 네 통 째 선배 전화를 묵살했다. 받지 않는 전화도 메시지다. 무슨 일로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하며 상대에게 갖가지 상상을 하게 하는 것도 이쪽의 의사표현이다. 언도는 선배 전화를 받고 싶지 않지만 전원은 꺼지 않는다. 어디엔가 전화를 했는데 전원이 꺼져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반품된 것 같은 허접한 기분을 잘 안다. 그래서 언도는 세상과 떨어져 있고 싶을 때가 아니라면 스마트폰 전원을 끄지 않는다.
“여태까지 나 몰래 딴 놈과 놀아났다 이거지? 나를 홍어 좆으로 봤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두고 봐!”
야자수는 스마트폰을 이손 저손 바꿔 쥐며 소리를 높인다. 전화기에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새 나온다. 야자수가 여자한테 이쪽으로 나오라고 하는데 여자는 안 나오겠다고 하는 것 같다.
“그놈한테 빠져 요새 홍야홍야 하는가본데 나를 엿 먹이는 연놈들 가만히 안 둬, 응?”
야자수의 팔꿈치에 스쳐 나무젓가락 한 짝이 바닥에 떨어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야자수 쪽을 힐끗 쳐다본다. 야자수는 스마트폰을 술병 옆에 툭 던지고 잔에 술을 따른다. 그의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뜬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 사진이 검은 액정 속으로 사라진다.
“아줌마, 이 선풍기 어떻게 좀 해 봐. 지 혼자 쇠꼬챙이에 대가리 처박고 획 돌아가 버리잖아, 사람 열불 나 죽는 줄 모르고 씨발.”
야자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셔츠 단추 하나를 끄른다. 선풍기가 쇠기둥에 닿을 때마다 따그르륵 소리를 냈다.
“감히 나를 바람맞혀? 딴 놈과 눈이 맞아서?”
야자수는 이죽거리며 술잔을 훌떡 비운다. 탁, 소리 나게 술잔을 놓고 다시 스마트폰을 든다. 그의 새끼손가락에 누리끼리한 반지가 끼어있다. 반지는 한쪽으로 밀려 난 약속처럼 옹색하다.
여자가 남자에게 한두 번 바람맞히는 것은 애교로 봐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선배는 공이 뭔가를 숨긴다고 장담했다. 공이 약속을 깰 때마다 이유는 늘 같았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급한 일이라는 데 어쩔 도리는 없었다. 처녀가 총각 만나는 것보다 급한 게 뭐 있어? 내가 볼 때 그 여자 양다리 걸치고 있는 게 분명해. 얼마 전에도 공이 약속을 깼을 때 선배는 단정 짓듯 말했다. 결혼 상대를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는 충고는 고마웠지만 선배가 공 얘기를 나쁘게 하는 것은 듣기 거북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여자 속은 알 수 없다며 선배는 여자의 앙큼함에 대해 계속 늘어놓았다. 언도는 저도 모르게 선배 이야기에 점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부정적인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그날은 저녁 내내 선배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선배가 여자의 앙큼함을 역설할 때 고개를 주억거렸던 것도 같았다. 남자 둘이 여자 하나를 뭉갠 것 같아 석연치 않았다. 공의 목소리라도 들어야 미안함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굳게 잠긴 철문 앞에 선 기분이었다. 철문을 두드리는 기분으로 문자메시지를 넣었다. ‘지금 쯤 강의 준비하느라 정신없지요? 오늘 따라 더욱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언도가 정작 쓰고 싶은 문자는 ‘오늘 당신 흉을 봐서 미안합니다’였다. ‘흉’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았다. 딱히 흉을 본 것은 없었다. 억측과 추측으로 누군가를 몰아세우고 난 뒤 켕기는 마음을 알맞게 전할 말과 글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학생들 말투로 하자면 ‘뒷담까서 미안합니다’였다. 재미삼아 여러 문장을 계속 작성했다 지웠다 해 보았다. ‘혹시 양다리 걸치십니까?’ ‘다른 남자와 나를 저울질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나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었다. 하트모양 이모티콘을 줄줄이 찍어 보았다. 붉은 하트모양은 언도를 놀리는 날름거리는 혀 같았다. 스마트폰을 훌쩍 밀쳐 던져 버렸다. 되도록 선배와 공 얘기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집밖을 나섰다. 싱숭생숭함을 달래주는 것이 너무 늦게 생각났다.
어딜 가나 닭발 집과 치킨 집이었다. 원룸 밀집 지역인 언도 집 부근에는 더욱 그랬다. 엄마가 죽은 뒤부터 제식을 치르듯 닭발 집 순례를 차례차례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죽기 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닭발 집이 아니었던가. ‘휘까닭’ ‘불타는 닭발’ '多닭多닭' 등의 간판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다. 언도는 ‘The Dakbal' 집에 들어갔다. 실내는 닭발볶음처럼 지글거렸다. 공기는 매웠다. 안내를 받은 자리는 구석졌다. 락스 냄새가 물씬 나는 물수건부터 나왔다. 제식의 첫 절차는 손을 소독하는 일부터라는 것을 닭발 집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물수건으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천천히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닭발을 젓가락에 꿰고 있거나 입에 물고 있었다. 저마다 닭발로 입안을 찧어야 할 사연들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언도도 닭발을 어금니 깊숙이 밀었다. 뭔가를 맹렬하게 씹고 있으면 혼자 앉은 머쓱함이 싹 달아났고 중대한 일에 골몰해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껌을 씹을 때의 무심한 몰입과 다르지 않았다. 공이 양다리를 걸친다는 선배 추측이 틀렸을 거라 믿으며 닭발을 질겅질겅 씹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언도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닭발을 입에 물렸다. 닭발을 채찍으로 삼아 입안을 후려치려는 의도였다. 티끌만큼의 선처도 없었고 예외도 없었다. 닭발을 물지 않으려고 도리질을 쳤던 어느 날, 발가벗긴 채 마당에 내쫓긴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중에 하나였다. 두고두고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느니 닭발을 무는 게 나았다. 그도 저도 하지 않겠다면 영원히 밖으로 내쫓을 거라는 엄마 말은 결코 헛말로 들리지 않았다. 축축하고 비린 닭발을 입에 물고 있으면 빽빽한 폐계 차에 갇혀 오물에 질척이는 닭발이 떠올라 구역질이 났다. 입에 문 닭발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입술에 힘을 주거나 혀로 눌려야 할 때도 있었다. 가늘고 뾰족한 닭발은 갈퀴처럼 혀를 긁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다시는 거짓말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들이 솟구쳤다.
숙제를 안 했으면서 했다고 한다든가, 학용품 가격을 부풀려 받아간다든가 하는 따위의 거짓말이었다. 들키지 않은 거짓말까지 다 합친다면 거의 사흘에 한 번 꼴로 닭발을 물어야 했다. 들키지 않는 거짓말이 쌓여갈수록 엄마 손에 들린 닭발 봉지는 무서웠다. 봉지 속의 닭발이 걸어 나와 언도 입을 짓밟을 것만 같았다.
언도 집은 소도시 변두리였다. 집 뒤 하천 길옆에 사료공장이 있었고 멀리 공장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천을 따라 끝까지 가면 도계장이었다. 집앞 도로에는 폐계 차들과 냉동 탑차들이 수시로 지나다녔다. 학교를 마친 언도는 주로 하천 옆의 좁은 공터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했다. 아이들 부모도 대부분 도계장이나 주변 공장에서 일했다. 도계장에서 일하는 부모들 중에는 도계라인은 물론이고 수의사나 주임부터 기획실 팀장과 경리부장도 있었다.
닭발라인? 닭발은 닭다리라인에서 잘려나가잖아. 예전에는 닭발을 그냥 버렸대. 그래서 지금도 닭발은 따로 취급한대. 정식 품목이 아니니까 마트나 백화점 식품코너에 닭발이 진열되어 있지 않는 거래, 우리 아빠가 그랬어. 아이들의 도계장 이야기는 천연덕스러웠다. 그렇지만 시장에서는 닭발이 잘 팔린다던데? 내장 팀 아들이었다. 내장 팀 아들은 도려낸 내장이 가축 사료로 쓰인다는 것부터 닭 부위별로 거치는 공정을 진지하게 설명했다. 내장 팀 아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도계장 안 시설을 대충 알았다. 회전칼날로 닭 내장을 도려내는 장면은 언도도 잊히지 않았다. 폐계 다리가 줄에 매달려 전기실신을 하고 난 뒤부터 닭은 곧바로 라인을 탔다. 도계와 탕모, 내장적출에서 포장까지 모두 컨베이어벨트에서 처리 되었다. 학교에서는 현장학습마저 도계장을 갔기 때문에 부모가 도계장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라도 닭 이야기라면 최소 몇 마디는 끼어들 수 있었다. 언도는 아이들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밖에서조차 비린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 닭발은 왜 라인 밖에 있어야 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버려지는 것이니까 그렇지, 하는 아이들 말을 또 듣고 싶지는 않았다.
“이 양반이 닭발을 맛있게 씹고 있어서 시켰더니 별로야. 맵고 비려. 아줌마 어서 조기 구이 올려 줘.”
야자수는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에게 외친다.
“형 씨는 이거 무슨 맛으로 먹어?”
“무슨 맛이긴, 오도독 씹는 맛이지요.”
여자가 석쇠에 입 바람을 불며 참견한다.
“자네는 입이 없나?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뚱해 갖고선, 사람이 그렇게 물정사나우면 못써. 이런 자리에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도 세상사는 맛이야, 불알 찬 놈이 좀스럽기는.”
야자수는 콧물을 훌쩍이며 언도에게 곁눈질을 한다. 닭발 맛은 입안을 사르는 불 맛이라고 넉살을 떨어도 괜찮을 자리다. 그러나 언도가 입을 뻥긋했다하면 야자수는 계속 말을 붙여 올 것이다. 그러다가 형 아우라 하며 술잔도 오고 갈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신 뒷날 속이 쓰린 것은 꼭 숙취 때문만은 아니다. 취중에 흘린 헛말들이 파놓은 허방 탓이다. 허방을 메우기 위해 헛말을 불러왔다. 제 말에 쫓겨 달아나는 꼴을 면하려면 술자리에서만큼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엄마는 심한 말더듬이었다. 정으로 돌을 쪼개듯 말을 힘들게 빚어냈다. 한 음절 뱉어내는 데 2, 3초는 소요되었다. 자음과 모음을 이어 붙이는 데만 최소 2초를 잡아먹었다. 말이 없어도 엄마와 언도의 소통에는 문제없었다. 벽에 못을 박으려면 못과 망치를 언도에게 건네면 됐고, 식사 때가 되면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수저만 들면 그만이었다.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봉지에 골라 담았을 때도 주인을 향해 눈만 크게 뜨면 됐다. 고추와 오이가 담긴 봉지를 받아든 엄마를 향해 채소장수 노파는 손가락을 쫙 펼쳤다. 세 개나 다섯 개. 펼쳐진 손가락은 닭발 같았다.
공터에서 노는 언도를 부를 때의 엄마 목소리는 우렁찼다. 어, 어, 어, 어, 언도야아아아아. 못들은 척 했다. 어, 어, 어, 어, 언도야아아아. 야, 닭발! 너희 엄마 저기 오시잖아. 엄마를 피해 하천 둔덕으로 내려갈까 사료공장 쪽으로 달아날까 고민하는 사이 아이들이 엄마를 가리켰다. 저만치 하천 길을 따라 엄마가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양팔에 들린 닭발 봉지는 가랑잎처럼 마른 엄마의 몸피에 추를 매단 듯 중량감을 주었다. 언도는 엄마와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달리다보면 그대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얼굴에 주근깨와 기미가 자글자글한 데다 말까지 심하게 더듬는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이 창피했다.
현금카드처럼 편리한 게 거짓말이었다. 입은 거짓말의 저장고였다. 늘 착용했던 거짓말은 술술 나왔다. 저 사람 내 친엄마 아니야, 사실 나는 저 사람 양자로 왔어. 우리 친부모님은 말이야……. 양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은 동화책에 얼마든지 많았다. 엄마가 사다 나른 동화책이 그렇게 요긴하게 쓰였다. 지어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나면 진짜 양자가 된 것 같았다. 잘 차려입은 어떤 부부가 검은 세단 승용차를 몰고 언도를 태우러 오는 상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부자인 언도 부모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식을 남에게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나면 엄마로부터 훌쩍 떠나버린 기분이었다.
“이 시간에 이런 데 혼자 앉아있으면 알쪼지. 자네 실연당한 게 분명하구만. 자, 한 잔 받어. 떠난 여자는 냉큼 잊고 어서 요것을 찾아야지.”
야자수가 새끼손가락을 까딱해 보인다.
“내가 자네 나이 때는 좀 날렸지. 여자들이 얼마나 들러붙던지, 그년들 떼 내는 게 일이었다니까. 지금은 요 모양 요 꼴로 외로운 꽃사슴 신세지만 씨발.”
허리를 펴며 머리를 젖히는 야자수 얼굴 표정은 흐뭇하다. 불콰한 얼굴에 네온 불빛이 얼룩덜룩 겹친다. 누구나 지나간 한때를 꽃 시절이라 했다. 엄마도 한 시절이 꽃이었노라 너스레를 떨 줄 알았으면 했다. 피다 만 엄마의 한때를 듣기 싫었다. 언도가 사생아라는 사실만 또 다시 인식하는 것뿐이었다.
서른 살의 처녀와 마흔 살의 사내가 벌인 로맨스는 짧았다. 마흔 살 사내는 탕뛰기 트럭기사(배송 횟수에 따라 임금을 받는 기사)였다. 그는 여러 도계장과 양계장을 드나들며 폐계나 육계를 실어 날랐다. 엄마가 임신을 하고 배가 불러오자 뜨내기는 엄마에게 발을 끊었다. 엄마는 몇 년에 걸쳐 뜨내기를 수소문 했지만 헛수고였다. 언젠가 한 번쯤은 뜨내기가 나타날 것이라 믿었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뜨내기의 지나친 붙임성과 넓은 오지랖은 어딘지 미덥지가 않았지만 끌리는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남에게 내세울 것은 없었으나 성실함에 끌렸다든가, 어느 기업체 노조위원이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막일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 정도는 지어낼 수 있을 터인데 엄마는 꼬박꼬박 솔직했다. 뜨내기가 도계장에 갖다 줘야 할 수금액을 갖고 달아나버렸다는 것까지 언도가 알아야 할 까닭은 없었다.
초등학생 때는 아버지 자리가 아이들 자리가 되기도 했다. 언도도 아버지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거짓말이 들통 나지 않으려면 아버지를 멀리 보내야 했다. 뜨내기를 외교관이나 기업체 외국지사장이라 한다면 농담으로 들을 것 같았다. 수위 조절이 안 된 거짓말은 개 짖음보다 못했다. 뜨내기를 선장으로 만들었다. 좀 쳐준 듯 했으나 그 정도는 거짓말이라기보다 휘파람에 가까웠다. 사춘기가 지날 무렵 뜨내기를 망망대해에 좌초 시켰다. 거짓말의 수몰이었다. 청년이 되면서부터 가족이나 개인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할 말은 많았다. 답답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를 안주 삼아 떠들었다. 뜬금없이 아버지가 화제에 오를 때가 간혹 있었다. 그럴 때면 흰 제복을 입고 상아 파이프를 입에 물고 갑판을 서성이는 마도로스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마저 거짓말을 했다.
여자는 목에 두른 타월로 얼굴을 꾹꾹 눌러 닦으며 텔레비전 앞에 털썩 앉는다. 아이스박스 위에 놓인 텔레비전은 한쪽으로 기우뚱하다. 텔레비전에서는 아홉 시 뉴스가 한창이다. 건물마다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까지 더해 골목은 찜질방이나 다름없다. 언도는 습자지처럼 등짝에 들러붙은 셔츠를 떼 낸다. 뇌물수수혐의로 조사를 받던 시의원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 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대목에서 여자는 텔레비전 볼륨을 높인다. 여자는 파국을 즐기는 쪽이라고 생각하며 언도는 닭발을 입에 문다. 단풍잎 같은 닭발이었다. 시의원 집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시의원의 자살로 검찰조사에 혼선과 차질이 생겨 수사를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 했다.
“뒈진다고 진심을 믿어줄 것 같으면 나는 골백번도 더 죽었어. 내가 지 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고, 씨발.”
야자수는 목청을 돋우며 소주병을 입에 꽂는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들것에 실려 가는 시의원의 아내 모습이 나온다. 아내는 실신 상태라 한다. 갑작스런 가족의 죽음이 얼마나 큰 충격인지 언도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충격으로 언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임종을 지키는 비장한 의식도 치룰 기회도 주지 않고 엄마는 언도를 후려치듯 급사를 했다.
작년 이맘 때 초복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밤 10 시가 살짝 지났을 쯤이었다. 선배와 함께 술집에서 나오던 중 전화를 받았다. 박점숙 씨 아드님 되십니까? 상대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드님 맞으시죠? 박점숙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전화기를 귀에 바짝 댔다. 여보세요? 들리십니까? 상대 목소리는 더 빠르고 다급했다. 박점숙 씨 아드님 맞으시죠?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묻고 싶었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언도는 전화기에 거친 숨만 내보냈을 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교풀을 잔뜩 삼킨 것 같았다.
아, 아, 아, 아저씨, 해, 해, 해, 행복 벼, 벼, 벼, 병원……. 택시기사한테 행복병원 영안실에 가자는 말을 하는데 한 나절이 소요된 것 같았다. 아, 아, 아, 아저씨……. 언도는 기사 뒤통수를 향해 더듬거렸다. 혀가 바위에 짓눌린 것 같았다. 아, 아, 아, 아저씨……. 다시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시트에 감은 팔에 얼굴을 묻었다. 거짓말을 하던 언도를 나무라고 나서 입을 홀쳐매며 칼질을 하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흔해빠진 게 말(言)이라도 흔하지 않은 것처럼 쓰지 않으면 말에 깨물리는 수가 있다며 오물거리고 달싹였던 입이었다. 다다다다다. 칼은 거침없이 도마 위를 달렸다. 그때 엄마는 깨지고 헐은 닭발을 모아 풋고추와 섞어 다져 전을 부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턱을 약간 치켜든 채 허공을 쪼아대듯 말을 빚던 엄마 모습을 또 한 번 떠올리며 언도는 젖은 얼굴을 팔에 푹 파묻었다.
대도시에 있는 언도 곁으로 오라고 했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 닭발을 매만지며 도계장 부근에서 살겠노라 했다. 같은 말을 한 번 이상 되풀이 하는 걸 싫어하는 엄마에게 또 권하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헛말을 하지 않는 엄마가 보증수표처럼 믿음직스러웠다. 엄마의 보증수표는 대도시에 있는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서 양자 같은 기분으로 살았던 미안함마저 덜어주었다.
도계장을 빠져 나가던 2톤짜리 냉동 탑차는 도로를 건너던 엄마를 보지 못했다. 삼복이 시작될 무렵이면 도계장을 드나드는 차들은 여느 때보다 눈에 띄게 많았고 모두들 쌩쌩 달렸다. 띄엄띄엄 다녀간 문상객은 몇 되지 않았다. 교직원들과 도계장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이거나 엄마가 닭발을 대주던 가게 주인들이었다. 닭발 가게에서 온 근조 화환은 유난히 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고 쓰인 검고 두꺼운 글씨 아래에 ‘씹고 뜯고’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이라는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엄마의 인맥은 닭발처럼 간출했다.
“쭉 가세요, 쭉!”
여자는 화장실에 가는 야자수 등을 향해 소리 지른다. 야자수는 그를 마주해 오는 젊은 남녀 사이를 뚫고 비틀비틀 걷는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는 남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야자수가 둘 사이를 가르자 꽃무늬는 얼른 남자의 겨드랑이에서 떨어졌다. 그 바람에 꽃무늬가 든 종이컵에서 커피가 쏟아졌다. 남자는 여자의 앞섶을 털어주며 야자수를 힐끗 돌아본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언도도 공과 함께 시내를 걸을 터였다. 손목시계를 자주 보는 공의 눈치를 보며 언도는 2차로 포장마차에 앉을까 말까 고민할지도 모를 터였다.
상실감도 배신감도 아닌 이 기분은 무엇인가. 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언도는 그녀에게 속았다. 공이 그토록 많은 말을 했지만 정작 언도가 알아야 할 말을 공은 하지 않았다. 공이 주도했던 화제로 이끌리다 보면 언도는 저도 모르게 학생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 대부분이 책에 뺨을 대고 자거나 딴청을 피웠다. 묵묵히 언도 길만 가야 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들을 야단치는 것보다 숫자와 기호를 칠판에 써 내려는 가는 게 말 더듬는 티를 덜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그, 그, 그러므로 에, 에, 에, 엑스는 마, 마, 마, 마이너, 스 1! 분필을 놓고 손을 털던 순간이었다. 서, 서, 서, 선생님, 때, 때, 때, 땡, 해, 해, 해, 했는데요. 종치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언도 말투를 흉내 내는 학생 말은 귀에 들어왔다. 모멸감 따위는 감수할 수 있었지만 칠판에 매달린 기분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학생들이 부엉이처럼 눈을 부릅뜨고 말을 쪼아대는 언도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봇대나 지하철 화장실 등에 간혹 붙어있는 ‘말더듬이 교정’이라는 글들을 유심히 살폈다. 신문 전단지에 섞여 있는 스피치 학원 광고지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수학 선생님이시네요? 말더듬이는 선천적인 것과 정신적인 충격에서 오는 경우가 있지요. 선생님의 경우에는 후자에 해당되겠네요. 꾸준한 상담을 통해 말문을 조이고 있는 올가미를 풀어야 합니다. 상담이래야 별 것 아니에요. 편안하고 솔직하게 질문에 대답하시면 됩니다. 스피치 학원에서 언도를 담당한 상담사는 공이었다. 차트를 보며 콧잔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는 공의 손가락은 희고 가늘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굴곡이 없었다. 자,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아버지는 무엇을 했으며 엄마는 또…….
더듬더듬 어린 시절을 되짚어 갔다. 공은 똑딱이던 볼펜 소리를 멈추고 언도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악취가 진동하는 동네, 먼지가 풀풀거리는 집 앞의 도로, 닭장 같이 다닥다닥 붙은 언도 집 등, 한두 마디만으로도 족했을 어린 시절을 꽤 긴 시간을 소요하며 늘어놓았다. 언도 얘기를 듣던 공은 차트지에 뭔가를 빠르게 적어나갔다. 그때 언도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났다. 상담 때마다 조금씩 털어 내다보면 마음이 헐거워지는 걸 느낄 거예요. 공은 차트를 닫으며 언도가 점차 풀어가야 할 것들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트라우마, 죄책감, 창피함, 사생아, 열등감 등의 어휘들이 공의 설명에 끼어 있었지만 알아듣기 어려웠다. 언도 귀에 명료하게 들어 온 말 한 마디는 ‘저랑 함께 저녁 식사하실래요?’였다. 그 후로도 계속 공과 따로 만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상담 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새삼스레 마음을 여미지 않아도 되어 편했지만 연인이 된 공에게 신비감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언도 씨에겐 이 닭발이 진실의 방망이란 말인가요? 언젠가 닭발 집에 갔을 때 공이 닭발을 집어 들며 언도에게 물었다. 그녀의 젓가락에 물려있는 닭발은 붉고도 촉촉했다. 공의 젓가락에 물려있는 것이 닭발만이 아니었다. 서른다섯 살까지의 언도 인생이 통째 그녀의 젓가락에 물려 있는 듯 했다. 공의 미소는 ‘나는 네가 누군지 잘 알고 있지’ 하는 득의만만한 표정이었다. 이게 콜라겐이 풍부해서 미용에도 그렇게 좋다면서요? 공은 젓가락에 물린 닭발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때 공의 전화벨이 울렸다. 공은 전화기를 귀에 바싹 대고 저만치 총총 걸어갔다. 언도가 닭발을 몇 개나 씹을 때까지 공은 자리에 오지 않았다.
“자네 벙어리지? 그것도 모르고 나 혼자 지랄 떨었잖아, 꺼억!”
야자수 혀는 좀 전보다 더 꼬였다. 딸꾹질 소리는 더 커졌다. 대신 말수는 줄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벙어리라 하는 것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부터 동료들은 언도를 벙어리라 놀렸다. 말문이 트이고 나서 붙은 별명이었다. 언도는 몇 달 전에 말문이 트였다. 벙어리, 자물통, 딱풀, 본드, 심지어 철학자까지. 그 모두는 말을 더듬을 때는 없던 별명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지 않으면 하루 종일 입도 뻥긋하지 않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3일 동안 시험 보느라 수고 많았다. 오늘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 내기를 바란다. 오늘 조회 때 언도가 반 학생들한테 들려준 말이었다. 담임으로서 교사로서 마지막 날 시험을 앞 둔 학생들한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말고 없었다. 진심을 전했으나 광고멘트처럼 식상한 말 같았다. 우리 담탱이 말이야, 다른 반 담탱이들처럼 꼬질꼬질하지 않잖아. 군말 헛말 싹 짤라 먹는 삼빡한 그 마인드 맘에 들지 않냐? 학생들은 언도가 조회와 종례를 빨리 끝내서 좋아했다. 언도가 말문이 트였지만 말을 더듬을 때보다 더 말을 아낀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 리가 없었다.
말문이 트이자 입속은 빈 꽈리처럼 홀가분했고 혀는 나비처럼 가볍고 유연했다. 공은 말문이 트인 걸 기념하는 뜻에서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 테니 마음껏 떠들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언제 어떻게 말문이 트였는지 묻는 이들에게도 우물우물할 수밖에 없었다.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말을 더듬었을 때도 할 말은 꼭 했다는 것만 새삼스레 생각났다. 교사들은 신기하다는 듯 언도에게 자꾸 말을 시켰다. 어떤 교사는 자기 아이가 말을 더듬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조용히 물어왔다.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간단했다. 어쩌면 아이가 말하기 싫어서 일부러 더듬는 척 할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여기 앉자고!”
지나가던 사내가 포장마차 의자에 앉아 제 무리들을 불러들인다. 사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서서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온다. 여자는 재빠르게 물수건을 꺼내 앞자리에 줄줄이 놓는다. 야자수 머리맡에 조기구이 살과 양념간장이 거무죽죽하게 흘려져 있다. 꾸깃꾸깃 접힌 담뱃갑은 접시 옆에 팽개쳐져 있다. 그 옆에 빈 소주병 두 개가 새침하게 서 있다. 세 병째 병도 술이 반가량 비워져 있다. 꺼지 않은 담배꽁초가 빈 소주병 안에서 뿌연 연기를 게워 낸다. 야자수의 중얼거림과 딸꾹거림이 아니어도 병 속의 연기는 말하고 있다. 야자수 속은 탄다.
“꺼억!”
야자수가 딸꾹질을 할 때마다 그의 등판의 넓적한 이파리들이 들썩인다. 등판에 야자수 한 그루가 쓰러져 있는 것 같다. 선배한테서 계속 전화가 온다. 데이트가 얼마나 즐겁기에 문자를 씹느냐는 메시지도 와 있다. 당분간 선배 전화를 받고 싶지 않고 선배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언도가 말하지 않아도 선배는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거짓말이나 헛말 없이는 공에 관한 말을 한 마디도 할 자신이 없다. (끝)
원고지 7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