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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칼과 국자
홍칠은 이번엔 정말 제대로 걸렸구나 생각하면서도 짐짓 얼굴에 웃음을 띠고 다섯 사람을 향해 말했다.
"소씨는 거렁뱅이 출신이고 보다시피 나도 거렁뱅이입니다. 소씨의 '강산이개' 요리가 뛰어나다고들 하지만 내가 만든 요리도 그에 못지않구요. 소씨도 나도 같은 거렁뱅이인데 뭐가 달라 내가 소씨 거렁뱅이가 아닌지 말해 보십시오."
묘수인주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옆에 서 있던 둘째 나으리가 입을 열었다.
"형님, 이 놈 영 마음에 안 드는데 혼쭐을 내줍시다."
홍칠은 둘째 나으리가 이가 갈리도록 미웠다.
'이 녀석, 이 홍칠 할배가 어떤 사람인지 네까짓 놈이 어찌 안단 말이냐? 먹고 놀기 좋아하는 것과 제멋대로 하길 즐기는 것을 제외하곤 이 칠공은 천하에서도 제일 훌륭한 호인이란 말이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홍칠은 온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둘째 나으리한테 말했다.
"이분은 틀림없이 둘째 나으리군요. 황궁의 다섯 나으리가 모두 대단한 분들이란 소문을 듣고 난 꼭 이곳에 와서 다섯 나으리들을 뵈려 했었지요."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기 좋아하게 마련이다. 둘째 나으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기를 추켜 주는 말을 듣자 내심 흐뭇하여 얼굴 근육이 절로 풀어지면서 한 가닥 웃음이 피어났다. 그는 홍칠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비록 황궁의 요리사이긴 하지만 강호의 동업자들은 모두 우리 체면을 봐 준다. 네가 누구인지 어서 말해라."
홍칠은 썩 내키지 않았으나 자기 이름을 알려 주고 말았다.
"난 거지 무리에 속하는 사람인데 이름은 홍칠이고, 모두들 홍칠공이라 부릅니다."
홍칠의 이름을 듣자 다섯 사람은 깜짝 놀랐다. 홍칠공이라면 거지 무리의 장로(長老)로서 나이는 젊지만 강호에서 꽤나 명망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는 거지 무리에서 유일하게 젊고 재능 있는 자였다. 강호의 인물들은 모두 마대를 여덟 개나 달고 다니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진짜 홍칠공이라면 명성이 소씨 거렁뱅이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을 텐데 하필이면 소씨로 가장할 건 뭐란 말인가?
셋째 나으리가 한마디 물었다. 훨씬 온화해진 말투였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소씨로 가장했소? 그리고 강산이개 요리 솜씨는 어디서 배운 거요."
홍칠은 솔직히 말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나의 사부요. 난 사부님한테서 배웠소."
다섯 사람은 내심 몹시 감탄했다. 소씨만한 스승이라면 홍칠과 같이 뛰어난 제자가 나오게 마련이지!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과연!
홍칠은 구양봉을 힐끔 보고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예실력은 보잘것없지만 그는 시종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무예는 시답잖지만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대단하군. 게다가 이 사람은 무엇이든 빨리 깨치는 총기가 있어! 이후 적당한 기회를 만난다면 필시 무림의 기재(奇才)가 될 수 있겠어?'
이때 줄곧 말이 없던 다섯째 나으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홍칠이라 했지요?"
홍칠은 그를 눈여겨보고 나서 그가 다섯 사람 중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홍칠이오."
"나도 당신이 홍칠이란 걸 믿소. 홍칠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같이 훌륭한 실력을 갖고 있겠소?"
네 사람 모두 머리를 끄덕이면서 다섯째 동생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홍칠이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렇게 완벽한 솜씨를 갖지 못할 것이다. 강산이개 요리를 만들 때 몇 가지 동작은 상당히 높은 기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섯째 나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소씨 거렁뱅이처럼 요리 만들기에만 마음이 끌린 사람 같지 않구려. 당신은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사람이 아니라서 한 자리에 오래 붙박여 있지 못할 거요, 안 그렇소?"
"다섯째 나으리, 난 정말 요리 기술을 배우러 왔소. 이건 거짓이 아니오."
이 말을 하면서 홍칠은 내심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들에게 들통이 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차마 음식을 훔쳐 먹었다고 사실대로 말한단 말인가?
총명한 다섯째 나으리는 그의 의중을 꿰어 보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로 우리의 요리 솜씨를 보러 왔다면 몰래 숨어 들어 올 필요가 없었지요. 한마디 말만 했어도 우리들이 모셔 들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이 발견했을 때 당신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으니 이해가 안 가는군요."
다섯째 나으리의 말은 분명 홍칠을 공격하는 말이고 홍칠도 그것을 빤히 알고 있었으나 짐짓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물었다.
"다섯째 나으리, 그 말이 무슨 뜻이오?"
다섯째 나으리는 되받아 말했다.
"제 말은 당신이 이곳에 음식을 훔쳐 먹으러 왔단 말씀입니다. 홍칠공의 식탐이 대단하다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소?"
이 말을 듣고도 홍칠은 성을 내기는커녕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다섯째 나으리, 당신 말대로라면 천하가 이 홍칠이 먹보라는 걸 안단 말이오?"
"그럼요. 당신은 먹는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니 황궁의 요리를 탐내는 게 당연하다 이 말이오."
"하하하! 그렇게 다 알면서 뭘 자꾸 캐묻는 거요?"
홍칠은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묘수인주는 혼자 생각했다.
'이 놈은 먹을 것이 탐나서 이곳까지 왔구나. 어선방에서 음식을 좀 훔쳐먹었을 뿐이라면 대단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이 놈이 다른 심보를 품고 왔다면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지.'
어쨌든 자기들 다섯 명을 안중에 투지도 않고 쥐새끼처럼 어선방까지 기어들었다는 생각을 하자 그는 이가 갈릴 정도로 분했다. 게다가 그 정도의 무공을 가진 자라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이 뻔했다.
둘째가 묘수인주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홍칠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날락한 모양인데, 우리 다섯 사람을 죽은 자로 생각한 모양이구려."
홍칠은 걸려든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얼굴을 붉혀 가며 그들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노여움을 사면 더 이상 좋은 말로 구슬리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홍칠은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 나으리, 둘째 나으리, 당신들 하고픈 대로 말해 보시오. 내가 다 받아들일 테니까."
홍칠은 다섯 사람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여야겠다고 각오했다.
'에이, 구양봉을 안 데려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 나 혼자라면 다섯 놈뿐만 아니라 황궁 놈들이 모두 달려든대도 두려울 게 없어! 내가 손을 쓰기만 하면 네깟 놈들이 바람을 타고 줄행랑을 놓는다 해도 도망가지 못할걸!'
그러나 그는 처음에 약속한 대로 구양봉을 돌봐 주어야 했다.
이때 다섯 사람의 주의가 구양봉에게 돌려졌다. 다른 것은 제쳐놓고 황제의 요리를 훔쳐먹으러 황궁에 들어온 것만 봐도 보통이 넘는 담력의 소유자였다. 홍칠은 말할 것도 없고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는 이 사람도 천하제일의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둘째 나으리가 말문을 열었다.
"홍칠, 잔말 할 필요 없소. 당신이 우리 형제의 관문을 넘으면 보내 드리지. 어떻소?"
홍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깟 놈들 손에서 벗어나는 게 무슨 대수냐? 네 놈들과 맞붙기만 하면 될 일인걸! 못 당해 내면 내빼면 되고. 하지만 이 멍청이는 혼자 몸을 뺄 수 없을 게 분명하니 내가 무슨 방도로 구해 준단 말인가?'
홍칠은 잠시 주저하며 궁리를 해 보았다. 그는 자기가 손을 쓰면 구양봉에게 해가 돌아가리란 걸 알고 있었다.
둘째 나으리가 또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은 누구요?"
홍칠은 구양봉이 서역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내막을 알려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구양봉과 붙으면 그의 실력이 드러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구양봉과 맞붙지 못하게 하려면 자신이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분은 내 친구인데, 내가 이분을 청해 궁중의 음식을 맛보게 한 것이오. 당신들이 죄를 따져 사람을 죽이려거든 날 죽이시오. 이 사람과는 상관이 없소."
그러나 구양봉은 홍칠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얼른 말했다.
"난 구양봉이라고 하고 서역 백타산 출신이오."
묘수인주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은 서역에서 맛좋은 음식을 입에 대 보지도 못한 모양이군?"
그는 매우 득의양양하게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둘 모두 별 볼일 없는 놈들이야. 한 놈은 거지에 불과하고 다른 한 놈은 황야에서 온 야만인이잖아.'
셋째 나으리가 음흉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홍칠, 난 당신이 강호에서 유명한 사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소. 하지만 황궁에 들어오면 아무리 날고 뛰는 재주가 있어도 소용없지. 당신이 이곳에서 영웅 행세를 하려는 생각이라면 부질없는 짓이야."
그들과의 입씨름에 싫증이 난 홍칠은 가벼운 기합 소리를 내며 다섯 사람을 향해 덮쳤다. 대번에 다섯 사람 앞에 이른 그는 큰 나으리를 치는 척하다가 둘째 나으리를 향하여 주먹을 날렸고 곧이어 셋째 나으리에게 손을 뻗치는 동시에 넷째 나으리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다섯째를 한 방 먹였는데 이번에는 손을 좀 심하게 쓴 편이었다. 한마디로 그들 다섯 사람을 한주먹에 때려부술 기세였으니 네까짓 놈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었다.
평소에 거들먹거리고 우쭐대는 데 익숙한 다섯 사람은 화가 나서 얼굴이 창호지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홍칠을 대번에 죽여 버릴 기세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묘수인주는 칼과 국자를 능숙하게 다루었는데 그것은 그가 수년간 요리를 만들면서 익힌 재주였다. 그는 왼손에 칼을 들고 오른손에는 국자를 잡고 있다가, 칼을 휘둘러 홍칠의 살점을 도려내고 국자로는 그것을 건져 담으려 했다.
그가 칼을 빨리 휘두를 때면 국자가 느리게 움직였고 국자를 빨리 휘두를 때면 칼이 느리게 움직였다. 칼을 빨리 쓸 땐 힘이 무진장했고 국자를 빨리 휘두를 땐 그 힘의 쓰임이 정화했다.
과연 황궁 제일의 요리사다운 솜씨였다.
둘째 나으리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무기를 휘둘렀는데, 그가 쓰는 것은 이상하게 크고 긴 솔이었다. 이 솔에는 서른여섯 갈래의 가는 철사가 꽂혀 있었다. 이 철사는 남쪽 변강에서 나는 적철로 만든 것으로서 굳고 질기기가 말할 수 없었다. 이 솔로 사람의 몸을 후벼 놓으면 죽진 않는다 해도 크게 상했다. 둘째 나으리가 휘두르는 솔이 쉭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연신 홍칠의 몸에 와 닿으려 했다.
셋째 나으리는 아무런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주먹으로 홍칠을 때려눕히려 했다. 그의 괴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가마솥에 대고 한 방 먹이면 가마솥이 오그라질 정도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아무말 없이 주먹만 휘둘렀다. 주먹이 공기를 스치는 소리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넷째 나으리도 그에 못지않은 괴짜였다. 손을 뻗고 다리를 차는 하나하나의 동작이 매우 굼떴는데, 동작을 하면서 그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어디 한번 맞아 볼래?"
이 소리는 홍칠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소리에 맞춰 자기의 동작을 조화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는 자기 동작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먹을 뻗을 때마다 꼭 자기 주먹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모양이 자신의 실력에 대해 매우 자신만만한 듯 보였다.
다섯째 나으리도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 옷에 서서 갈고리로 마른 낙엽을 건지는 모양을 지어 보였는데, 그 낙엽이란 다름 아니라 홍칠이었다.
이 다섯 사람은 저마다 무예가 비범했고, 평소에 함께 싸운 적이 많아 손발이 척척 맞았으며, 동작이 세련되어 있었다. 다섯 사람이 동시에 손을 쓰는 데다 병기까지 사용하니 홍칠은 마치 철벽에 둘러싸인 듯했다.
홍칠은 자기가 선수를 치면 크게 이득을 볼 것으로 계산했었는데 실은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다섯 사람과의 첫 번째 싸움에서 그는 우세를 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나 위험에 봉착했다.
쇠솔이 쉭쉭 뱀 소리를 내며 어찌나 악착스럽게 달라붙는지 하마터면 쇠솔에 머리를 긁힐 뻔했다.
다섯 사람은 그때까지도 구양봉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가끔 옆 눈으로 흘끔 건너다볼 뿐이었다. 만약 구양봉이 달려들면 그때는 두 패로 갈라져 구양봉과 싸울 작정이었다. 아직까지 구양봉이 대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이때 구양봉이 급하게 소리 질렀다.
"여러분, 그만들 하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이다!"
그는 그때까지도 자신과 홍칠이 이 다섯 사람을 잘 구슬리기만 하면 자기들을 놓아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홍칠보다 머리가 훨씬 명석했으므로 사태를 손금 보듯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들 다섯 사람이 큰소리를 내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고 있지만,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모여들 게 뻔했다. 일단 사람들이 몰려들면 홍칠은 몸을 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구양봉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다섯 사람은 홍칠을 기어이 때려눕혀 고분고분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지금 그들은 전력을 다해 홍칠을 대적할 일념뿐, 다른 것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만약 구양봉의 무예가 높았다면 대처하기가 퍽 쉬웠을 것이다. 그가 손을 써서 다섯 사람의 힘을 분산시킨 다음 일부를 자기 쪽으로 끌어 오면 될 것 아닌가?
구양봉은 몇 차례나 달려들었지만 다섯 사람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쫓겨 나왔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섯 사람이 한데 어울려 치고받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홍칠은 이미 자기와 구양봉이 몸을 빼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온몸에 경상을 입어 붉은 피가 도포자락을 적시고 있었고 발길질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으나 다섯 사람 누구도 그와 죽기살기로 싸우려 들지 않고 거리를 두어 애만 먹일 뿐이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홍칠에게 빈틈을 보여 얻어맞게 되면 나머지 네 사람이 달려들어 그를 구해 내곤 했다.
홍칠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구양봉도 목숨을 걸고 다섯째 나리한테 달려들었다. 주먹이 다섯째의 갈고리에 걸러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섯째와 넷째에게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그의 뚝심은 대단했으나 무예가 여물지 못한 탓으로 주먹이 사람 몸에 떨어지면 살가죽이 아픈 정도에 머물 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구양봉 자신이 다섯째 나으리의 갈고리에 걸려 옷이 죄다 찢어지고 피와 살이 범벅이 되어 버렸다.
크게 상한 데는 없지만 보기에 끔찍스러웠다.
구양봉은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앞뒤 가리지 않고 다섯째를 향해 덤벼들었다. 다섯째는 구양봉의 야수같은 모양을 보고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는데, 그 바람에 그만 구양봉에게 길을 내주게 되었다.
구양봉은 홍칠이 옆으로 달려가 두 사람이 서로 도우면서 다섯 사람과 싸웠다.
홍칠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생각했다.
'이번에 내가 정말 망신했구나! 큰 강과 바다도 어렵지 않게 건너던 배가 황궁에 와서 시궁창에 뒤집힌 꼴이 되었으니, 이 소문이 새어 나가는 날에는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이 홍칠이 식탐을 부리다 결국 음식 가마 옆에서 개죽음했다고 욕할 텐데, 이 창피를 어이할꼬?'
어쨌거나 다섯 요리사의 솜씨도 워낙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큰 나으리와 둘째 나으리는 내공에 정통하여 국자를 뒤흔들면 말 그대로 바람 샐 틈 없이 잽쌌고 동작 또한 현묘했다.
음흉한 셋째와 넷째는 연신 냉소를 머금으며 홍칠을 도륙하려 들었고, 다섯째는 언제나 틈을 노리다가 진공해 왔는데 그가 멀찌감치 서서 뿌린 갈고리에 걸려 드는 것은 낙엽이 아니라 사람의 살과 피였다.
이들이 어디 밥 짓고 요리하는 요리사란 말인가? 사람을 잡아 지옥에 보내는 악귀 들이지.
홍칠과 구양봉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간파하고 나니 그만 맥이 탁 풀렸다. 홍칠이 풀쩍 뛰어 탁자 가장자리로 올라서서 외쳤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난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싶소!"
다섯 사람은 홍칠이 잔꾀를 부리려 한다는 걸 알아챘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홍칠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그래도 강호에서 이름값을 한다는 인물들인데, 너절한 거지와 타지에서 온 미욱한 사람을 때려죽여 봐야 좋을 게 뭐요? 그러니 나를 내보내 주시오. 난 나대로 계속 거렁뱅이짓을 하고, 당신들도 여전히 요리사 노릇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좋게 끝내는 게 어떻소?"
묘수인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홍칠, 자네가 거지 무리의 장로라니까 하는 말인데, 황궁의 어선방이 그다지 대단한 곳은 못 되지만 당신이 제멋대로 행패를 부릴 곳은 아니오."
둘째 나으리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홍칠, 우리 형제들의 술안주로 한쪽 귀를 남겨 놓고 가구려."
그러자 한켠에 섰던 다섯째가 홍칠과 구양봉을 동정하는 척하며 참견했다.
"귀를 베다니요? 거렁뱅이가 오관마저 온전치 못하면 얼마나 꼴불견이겠소? 차라리 손가락을 한 개 끊어 놓는 것이 낫지요."
그러자 홍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구양 형을 보내 준다면 당신들과 결판을 내겠소."
구양봉은 속으로 몹시 놀라며 한탄을 했다.
'재주도 시답잖은 내가 무슨 정신에 홍칠을 따라 황궁에 뛰어들었을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도망갈 수도 없고 남아 있을 수도 없고…….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서역의 사막에서 잔뼈가 굵은 구양봉 역시 세상의 어려움을 겪을 만큼 겪었고 세속의 비바람도 맞을 만큼 맞은 사람이었으므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구양봉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홍칠에게 읍하며 말했다.
"홍칠공, 나와 당신은 서로 생판 모르는 사이였으나 오늘 이 일을 겪고 나서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죽는다면 나 구양봉은 꼭 이 다섯 사람을 죽여 버릴 것을 맹세합니다!"
홍칠은 구양봉이 이렇게까지 의리 있는 사람이리라곤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얼마간 감동되었으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만둬요! 당신은 여기서 나가기나 하시오. 미욱스럽긴 하지만 마음씨 하나만은 바르게 가졌군. 하지만 그까짓 재주를 갖고는 죽을 때까지 배워도 이 다섯 사람을 이기지 못할 거요!"
묘수인주가 입을 열었다.
"홍칠, 결단을 내리시오. 귀를 내놓겠소, 아니면 손가락을 내놓겠소? 그리고 당신은……."
그는 구양봉을 가리키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홍칠과 똑같이 해야 하오!"
다섯 사람은 구양봉과 홍칠을 에워싸고 끝없이 지껄여 대고 있었다.
바로 이때 삐걱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모두들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누가 열지도 않았는데 어선방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귀신이 와서 미는 듯했다.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으므로 사람들 모두 놀랍고 무서워서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둘째 나으리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누구냐? 나와라!"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를 돌려 보니 탁자 위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머리에 기름때가 번질번질한 모자를 쓰고 머리카락은 몹시 길었으며, 수염을 세 가닥 길렀는데 입고 있는 두루마기는 너무나 때가 끼어서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지는 두 가닥 푸대자루 같았으며 발목은 아예 신 속에 묻혀 있었다.
그 사람은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손에 곰방대를 들었다.
"사부님!"
홍칠이 그에게 넙죽 절을 했다.
다섯 요리사는 곧 그를 알아보았다. 바로 그 유명한 홍안루의 요리사 소씨 거렁뱅이였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껄껄 웃어대면서 손뼉까지 쳤다.
"역시 황궁이 다르긴 다르군! 황제한테 요리를 해주면 사람마저 인정머리 없이 변하는 모양이지? 이봐, 그 동안 잘 지냈나?"
소씨 거렁뱅이는 다섯 나으리들을 한 사람씩 짚어 가면서 꾸짖었다.
"첫째 네 놈은 아직도 날마다 사람의 생고기를 달달 볶는 수작을 하고 있겠지? 둘째 네 놈은 날마다 칼놀이를 하면서 뼉다구를 찍는 버릇을 기르고 있겠고? 셋째 너 이 놈, 삼 년 전에 네 놈이 흑풍의 어깻죽지로 불고기를 만들었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그리고 다섯째, 너는 남의 물건을 잘 탐내지? 사람 고기를 삼키고 뼈도 안 뱉어 낼 녀석 같으니라구! 너희들 자신 있으면 나와 결판을 내보자!"
다섯 사람은 소씨 거렁뱅이를 보자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구양봉은 별로 특이하게 생기지도 않은 늙은 거렁뱅이를 다섯 사람이 무서워하는 꼴을 보고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씨는 홍칠을 보고 외쳤다.
"홍칠아, 너는 뱃속이 허전하면 홍안루에 와서 한 끼 먹을 일이지 왜 이곳까지 들어왔느냐? 너도 알겠지만 이 다섯 사람은 개에 불과하다. 그것도 어디 평민 집의 개들이더냐? 황제의 문지기 개지! 개란 워낙 흉악스러운 법이거늘, 황제의 개야 더 말할 여지가 있느냐? 어쩌자고 개들을 건드린 게야?"
소씨 거렁뱅이는 입을 열자 다섯 사람을 마구 욕해 댔다.
다섯 사람은 부아가 치밀었으나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소씨는 다섯 사람이 침묵을 지키자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섯 마리의 개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나는 너희들을 당장에 없애 버릴 수 있어. 몽둥이로 말이야!"
다섯 나으리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오늘 일은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 소씨 거렁뱅이와 결판을 내지 않는다면 이후 어떻게 강호에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다섯 사람은 곧 마음을 합치고 말했다.
"좋다, 소씨! 우리 오늘 결판을 내 보자!"
소씨는 키들키들 웃었다.
"네까짓 놈들이 감히 나와 한판 붙겠다구?"
자정이 넘은 어두운 밤에 황궁의 어선방에서 생사를 건 혈투가 벌어질 찰나였다. 묘수인주는 침착한 표정으로 아궁이로 걸어가더니 이글이글 타고 있는 난로 안에서 빨갛게 타는 숯덩이를 꺼내 두 손에 하나씩 올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숯덩이가 손바닥의 살을 태우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온 방에 고기 타는 냄새가 풍겼다. 묘수인주가 두 손을 지켜 보는 중에도 연기는 끊임없이 피어올랐고 숯덩이도 점차 꺼멓게 변해 갔다.
여러 사람이 다시 묘씨의 손을 보니 그의 손바닥은 온통 울퉁불퉁한 물집이 잡혀 보기에도 끔찍했다.
묘수인주가 두 손을 가볍게 틀어쥐자 숯은 금방 가루가 되어 손가락 틈새로 푸시시 흘러내렸다.
구양봉과 홍칠의 표정에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남과 실력을 견주려면 진짜 실력을 겨뤄야지, 이거야 자신을 학대하고 못 견디게 구는 격이니, 이럴 필요야 있는가?
묘수인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씨, 당신도 해 보시오!"
소씨 거렁뱅이는 여전히 히죽거리며 소리쳤다.
"아이구, 야단났네! 거렁뱅이가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제일 불쌍한 것이 바로 이 두 손이 아니겠나! 귀한 물건이라곤 쥐어 보지도 못한 이 손으로 오늘은 불타는 숯덩이까지 쥐라고 하니, 이야말로 날 태워 죽일 셈이 아닌가."
입으로는 이렇게 지껄이면서도 그의 몸은 어느새 난로 옆에 가 있었다.
그도 묘수인주처럼 불타는 숯덩이를 집어 들고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두 눈엔 여전히 장난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 의아스러웠다. 소씨의 손아귀에서도 숯이 타고 있는데 우선 살이 타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고, 연기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깍지 낀 두 손의 손가락 살이 숯과 닿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나으리가 그걸 알아채고 큰소리로 질책했다.
"소씨 어른, 당신처럼 명성이 높은 인물이 속임수를 쓰면 되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어쨌기에 그 야단이냐? 이 숯이 이상해서 내가 아무리 쥐어도 손에 닿지 않는단 말이야. 자, 보라구!"
화가 치민 다섯째 나으리가 소씨의 두 손을 꽉 움켜쥐어 살을 숯불에 지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소씨의 손을 힘껏 쥐어도 숯은 여전히 소씨의 손바닥을 태울 수 없었다.
묘수인주가 큰소리로 외쳤다.
"다섯째, 그만 물러나게!"
다섯째는 기가 꺾여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묘수인주가 말을 이었다.
"이보시오, 소씨. 우리 다섯 사람은 이제까지 당신을 강호의 선배로 존경해 왔으니 더 이상 난처하게 굴고 싶진 않소. 비록 황궁에 기탁한 몸들이지만 우리 역시 강호에서 세력이 있는 패거리란 말이오. 당신들 거지 무리와 내왕할 때 우린 이제까지 조심스럽게 일처리를 해 왔소. 하지만 사람마다 일처리가 공정해야지, 어찌 당신만 이득을 볼 수 있겠소?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소씨 거렁뱅이는 엄숙하게 말했다.
"좋소! 그럼 어떻게 처리하면 공정한지 당신이 말해 보시오!"
묘수인주를 비롯한 다섯 사람 모두 자기들의 실력이 소씨보다 한수 아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쑥덕공론을 하더니 둘째 나으리가 말했다.
"우리 일동은 금년 추시(秋時) 8월에 소 선배, 홍칠 형과 숭산에서 만나기로 결정했소. 그때 가서 이 일을 결판내려 하니 두 분께선 기일을 어기지 말기 바라오!"
소씨 거렁뱅이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마고 대답했다.
소씨가 앞장서자 홍칠은 구양봉을 옆구리에 끼고는 천천히 몸을 날려 황궁의 지붕으로 뛰어올라 단숨에 서까래를 넘었다. 다섯 사람은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았으나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가 스치는가 싶더니 곧 사라지고,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길이 없었다.
황궁을 벗어난 세 사람은 큰 거리를 나는 듯이 지나가 버렸다.
그들은 성벽을 미끄러져 내린 다음 다시 경공을 써서 성 밖으로 벗어났다. 거의 반 시간 동안 달린 뒤에야 숲에 당도하여 쉴 수 있었다.
홍칠은 소씨 거렁뱅이 앞에 공손히 서서 그의 꾸중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씨 거렁뱅이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함구무언이었다.
홍칠은 겁이 나서 조심조심 물었다.
"사부님, 무슨 가르침이 있으시든지 제자 꼭 명심하겠습니다."
소씨는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홍칠, 자네도 이젠 거지 무리의 장로가 아닌가? 어찌하여 아직도 음식을 탐하는 습성을 고치지 못하나? 황궁을 들락거리면서 우리 거지 무리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다니……."
구양봉은 말없이 그들 사제 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입을 열자마자 홍칠을 훈계하고, 홍칠은 또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 하도 딱해서 그가 나섰다.
"소 선배님, 선배님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소?"
구양봉은 중원에 와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동해 도화도 주인 황약사와 일속이라는 중이었고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이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인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중원 무림의 최고 실력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무림의 호걸들을 통틀어 보아도 그들 네 사람과 실력을 견줄 만한 이가 몇 안 된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강호의 인물이 모두 홍칠이나 소씨 거렁뱅이처럼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만 낙심하고 말았다.
기백 있는 사나이로 자처하던 자기가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 인형처럼 끌려갔다가 끌려 나왔으니 그야말로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사정이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에게 말했다.
"소인은 비록 황량한 곳에서 왔지만,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았고 예절도 다소 알고 있습니다. 소 선배께서 칠공에 대해 불만스럽게 여기고 계시지만 이번 일은 칠공만 탓할 게 아닙니다. 소인이 칠공에게 황궁의 정경에 대하여 물으면서 따라갔기 때문에 그만 부담거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제가 따라가지 않았다면 칠공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양봉이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별안간 커다란 괴성이 들렸다. 점잖게 앉아 있던 소씨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이 녀석, 너 방금 홍칠을 뭐라고 불렀느냐?"
소씨 거렁뱅이는 화가 나서 발을 탕탕 구르고 홍칠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큰소리로 욕했다.
"빌어먹을 녀석!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 할애비 행세를 해! 네가 칠공이면 난 뭐냐?"
소씨는 손가락으로 홍칠의 코를 찔러 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홍칠은 이거 야단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얼굴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저 미련퉁이가. 정말 귀찮게 구는 군! 하필이면 우리 늙다리 앞에서 칠공이라고 부를 게 뭐야?'
속으로는 이렇게 씨부렁거리면서도 그는 온 얼굴에 웃음을 듬뿍 띠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사람들이 저더러 칠공이라 부르는 건 제 얼굴이 늙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부님이야 암만 해도 늙지 않으시니……."
소씨 거렁뱅이는 더욱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이제 보니 네 놈은 내가 빨리 늙어 죽길 고대하고 있었구나!"
소씨는 다짜고짜 홍칠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거지 무리 장로들의 전통적 무예인 강룡십팔장의 제1초 항룡유회 수법으로 냅다 갈겼다. 손바닥을 곧게 세운 다음 앞으로 내밀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초목들이 우수수 흔들리는 것이 마치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놀라서 얼굴색이 밀랍처럼 질린 홍칠이 훌쩍 몸을 솟구쳐 두 장도 넘게 뒤로 물러섰지만, 강룡십팔장 힘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 소리와 함께 기절하고 말았다.
구양봉은 깝짝 놀라 소씨 거렁뱅이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야, 이 영감탱이야! 범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거늘 넌 어쩌자고 자기 제자를 때려눕히는 거냐?"
소씨 거렁뱅이가 고함을 쳤다.
"네 놈이 감히 날 훈계해? 내가 한 번만 손을 쓰면 네 놈은 뼈도 못 추릴 거다!"
말을 마치자 소씨는 곧 손을 앞으로 모으고 길게 호흡하더니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한밤의 교교한 달빛 속에 살기가 번뜩이는 구양봉의 눈빛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자식, 괜찮은 놈이군. 기골이 장대한데다 담력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니 잘 가르치면 필시 큰 인물이 되겠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방금 전까지 치밀던 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구양봉에게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보게, 구양봉, 나한테 무예를 배울 생각 없나?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자네의 스승이 되어 주지!"
그때까지도 분이 사그라지지 않은 구양봉은 씩씩거리며 되물었다.
"당신에게 무슨 무예가 있소?"
그 말을 들은 소씨 거렁뱅이는 다시 화가 났다.
"무슨 무예가 있냐구? 좋아, 그렇다면 이 어른이 네 눈을 번쩍 뜨게 해주지!"
때는 남송 효종 연간으로 조정은 밤낮 가무에 파묻히고 권세가들은 흥청망청 술만 들이키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선 백성들의 원성이 그칠 새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갖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평민들은 자신을 지킬 방도가 없었으므로 억울한 일이 생기면 강호의 무리들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거지 무리도 한때 온 세상을 쩡쩡 울리는 강호의 큰 실력파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이 소씨 거렁뱅이가 바로 거지 무리 중에서 가장 실력 있는 장로였던 것이다. 거지 무리의 장로 겸 장문인 역할을 하던 사도의(司徒義)가 병으로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무리의 백사(百事)는 모두 소씨에 의해 처리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자연히 무리에서 가장 위엄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도 교만해져서 남이 자기 허물을 잡으려 하면 펄펄 뛰었다. 그는 자존심이 이만저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남을 쉽게 용납하는 성미가 아니었지만 그때는 스스로 구양봉에게 문예를 가르치겠다고 했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런데 구양봉이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감히 무예가 있냐고 물으니 누그러졌던 화가 다시 치밀었다.
'네까진 놈이 내 제자가 되든 안 되든 그게 무슨 대수냐? 너 같은 바보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간 내 속을 무던히도 썩여야 할 텐데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냐 말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소씨 어른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어야지! 네 놈의 눈에 똥이 피어 태산을 못 알아보니 내 오늘 너의 눈을 번쩍 뜨게 해주겠다!'
여기까지 생각한 소씨 거렁뱅이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놈, 내가 솜씨를 보일 테니 눈깔을 똑똑히 뜨고 봐라!"
소씨 거렁뱅이는 바른 자세를 취한 다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에 무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지만 각 패거리마다 자기의 장기를 갖고 있다. 우리네 거지 무리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두 가지 재주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강룡십팔장이고 다른 하나는 타구봉법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무예이니 잘 보아 두어라!"
말을 마치자 소씨 거렁뱅이는 천천히 자세를 바꾸면서 강룡십팔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동작들은 보기에도 강한 힘을 갖고 있어, 손을 쓰자마자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소씨를 에워싸고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가 갑자기 손바닥을 곧게 세워 앞으로 내밀자 정면에 서 있던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뚝 부러지고 나뭇잎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 방금까지 멀쩡히 서 있던 나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말했다.
"봐라! 방금 한 동작은 아까 한 동작과 다르지 않느냐? 이건 '견룡재전(見龍在田)'이라는 동작이지! 멋지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구양봉은 그가 손바닥만 한 번 펼쳤는데 굵은 나무들이 뚝뚝 부러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무도 막 부러뜨리는 실력이니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뼈가 부서지고 피가 쏟아져 죽고 말았을 거야!'
구양봉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말을 하기도 무서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장난삼아 부려 본 솜씨에 구양봉이 기가 질린 것을 보자 득의양양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내 실력을 모르니 내가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 턱이 있나. 그래, 이젠 알 만하냐?"
구양봉이 대답했다.
"당신이 방금 한 동작은 정말 위력이 대단하군요. 그렇지만 헛기운을 쓰는 것 같아 그저 그런데요, 뭐."
소씨 거렁뱅이는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생각에 잠겼다.
'바보 같은 녀석! 이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진 동작을 보고도 헛기운을 쓰는 것 같다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보아하니 이 놈은 이처럼 날카롭고 맹렬한 동작에는 흥미가 없고 유연하고 날랜 동작을 즐기는 모양이로군! 내가 이제 타구봉법의 몇 가지 동작을 보여 주면 이 녀석도 입을 딱 벌리고 말걸!'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타구봉법은 남에게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될 보배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 두 가지 무술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밀이므로 다음 세대의 장로에게만 전수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이 점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만두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서역에서 온 이 사람에게 중원의 높은 무예 실력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다시는 중원의 인물들을 얕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좋아, 그럼 자네에게 놀랄 만큼 날랜 재주를 보여 주지!"
그때 정신을 차리고 구석에 서 있던 홍칠은 사부가 지금 선인들이 지켜 오던 계율을 깨뜨리려는 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사부님, 저 사람은 우리 거지 무리 사람도 아니고 방회(幇會)의 장로 계승자도 아닌데 왜 그것을 보여 주려고 하십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이 감히 내 일에 참견하려고 들어? 난 오늘 저 놈에게 절묘한 타구봉법을 보여 줄 테다. 넌 저리 비켜라!"
구양봉은 소씨 거렁뱅이가 자기에게 타구봉법을 보여 주겠다고 부득부득 우기자 그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번 보는 것도 괜찮지! 타구봉법이라! 이름만 들어도 별로 신통한 무예 같지 않은데, 뭘! 그까짓 재주 하나 갖고 우쭐거리긴.'
소씨 거렁뱅이는 구양봉의 얼굴을 흘끔 보고 나서 그가 타구봉법을 대단찮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꽥 소리쳤다.
"이 놈, 똑똑히 보아라!"
소씨 거렁뱅이는 나뭇가지 한 대를 뚝 꺾어 손에 쥐었다. 활등같이 휜 나뭇가지는 대단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손에 들고 나서니 병기가 된 셈이었다.
소씨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 타구봉법은 거지 무리의 먼 선조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옛날부터 거지들은 고난을 많이 겪어 왔느니라. 사람들은 눈을 흘기며 그들을 멸시했고, 어떤 놈들은 흉악한 개까지 몰아서 물게 했단 말이다. 우리 거지한테 개새끼를 때려죽이는 무예가 없다면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 그런 연유로 이 타구봉법이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무예가 생겨난 것이다. 네 놈은 오늘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무예를 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복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다!"
말을 마치자 소씨 거렁뱅이는 타구봉법의 시범 동작들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소씨가 손을 흔들자 나뭇가지에 눈이라도 박힌 것처럼 한 가지 동작마다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무예가 펼쳐졌다. 소씨가 사용하는 술법은 일명 전(纏)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무수한 물건들이 나뭇가지에 들러붙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이 점차 느려지고 동작이 굼떠지더니 한참이 걸려서야 일련의 동작들을 끝냈다. 구양봉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 동작들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홍칠이 황궁에서 다섯 요리사들과 싸울 때 사용하던 변화무쌍한 동작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타구봉법의 동작에 비교하면 그건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일 그때 소씨 거렁뱅이가 나타나 '풀을 뽑고 뱀을 찾는' 그 동작을 했더라면 그 다섯 요리사들은 감히 덤벼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구양봉은 타구봉법의 묘리를 보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손발을 움직여 소씨
거렁뱅이의 동작들을 따라 해 보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구양봉이 이 어려운 동작들을 흉내도 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막 깨우치고 있는 걸 보자 그만 더럭 의심이 나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 큰소리로 물었다.
"구양봉, 이 늙다리 거렁뱅이의 재주가 어떠냐?"
구양봉은 몽둥이를 다루는 이 무예들이 확실히 비범한 위력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당신의 실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만 난 아직도 당신에게 무예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군요."
소씨 거렁뱅이가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냐?"
"제 형님은 서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인데, 형님의 무예도 대단하답니다. 하지만 전 무예 배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만일 제가 배우려고 들었더라면 형님이 진작 가르쳐 줬을 겁니다."
소씨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뭐라구? 그럼 나한테 안 배우겠단 말이냐?"
"예, 싫습니다."
소씨는 별안간 고함을 질렀다.
"아이구 분해라! 내 오늘 기어이 네 놈을 죽이고 말 테다!"
소씨의 번개 같은 주먹이 날아오자 구양봉은 대번에 나가떨어졌다. 그는 주먹을 구양봉의 머리에 갖다 붙이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배울 테냐, 안 배울 테냐?"
구양봉은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안 배울 거예요!"
"좋아, 그렇다면 네 놈을 죽여 주지!"
소씨는 구양봉을 번쩍 들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팔다리를 확 뻗은 구양봉은 혼이 구천으로 날아갈 지경이었다.
"홍, 잘도 뻗는구나! 내 몽둥이에 맞아 널부러진 개새끼처럼 말이야!"
구양봉은 벌떡 일어나 죽기살기로 그에게 덤비려 했다. 그러나 간신히 일어나 보니 방금 전까지 있던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거무칙칙한 수림이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하늘로 치솟았는지 땅으로 꺼져 들었는지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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