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선생님, 멘토가 되다.
2011년 10월 17일 정은이를 만났다. 나는 멘토링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학기 중에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멘티 정은이를 10월에 만나게 되었다. 정은이는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어린이었다. 처음 만나러 가는 날, 되게 떨렸다. 한번도 다문화 가정 아이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겼을까’부터 시작해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정은이는 그냥 천진난만한 귀여운 5학년 아이였다. 멘토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오히려 정은이가 더 잘 알고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항상 과외만 했던 나는 사실, 처음에 멘토링은 어색했다. 단지 아이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정은이는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한 달 째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정은이와 더 많이 친해지고 아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한층 나도 편하고 아이도 편한 멘토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름 순조롭게 멘토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11월 토요문화체험으로 모든 다문화 멘토링 사람들과 함께 지리산 부근으로 1박 2l일의 하나로 캠프를 가게 되었다. 멘토링을 시작할 때부터 정은이가 캠프에 대해 이야기 했던 터라 잔뜩 기대를 하고 갔다. 새벽 7시에 정은이를 데리고 동래지하철역에 가서 주최 측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지리산을 등반하면서 천방지축인 정은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지리산 등반을 시작으로 밥을 먹지 않고 과자만 먹으려 한다던 지, 걷지 않으려 한다던 지 정은이와 계속 부딪히는 부분이 생겼다. 이럴 때마다 나보다 훨씬 어린 아이 한 명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이튿날부터는 전날을 생각하여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꾸중하기도 하면서 잘 지냈다. 지리산 등반, 낙안읍성 체험, 순천만 걷기 등의 활동을 1박 2일 동안 하고 부산에 왔을 때 정은이와 나는 많이 친해져 있었다. 비록 캠프 중에는 아웅다웅 하였지만 하룻밤, 1박 2일 동안 분신처럼 꼭 붙어 다닌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은이가 본격적으로 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들과의 고민거리를 털어 놓고, 교회에서 힘든 점을 이야기 하고 이전의 그냥 표면적인 멘토링 수업이 아니라 진짜 정은이와 소통하는 수업이 이루어 졌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와 선물을 교환하였다. 정은이가 수면양말을 선물해 주었다. 활짝 웃으면서 어설프게 포장된 양말을 주는 정은이가 너무 예뻐 보이고 고마웠다. 나는 벙어리장갑을 선물해 주었다. 너무 좋아하는 정은이가 너무 고마웠다.
이제 멘토링 활동 시수가 4시간, 2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멘토링을 중간에 이어받아서 다른 멘티와 멘티에 비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절반 밖에 되지 않아 누구보다 특히 아쉬운 만남이었다. 그래도 어색한 첫 만남부터 골판지 공예, 하나로 캠프, 영화보기, 햄버거 먹기 등등 짦은 기간 동안 함께 많은 일을 했던 것 같아 뿌듯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초등학생을 가르쳐 보고, 함께 해본 경험이라 미숙하고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항상 웃으며 ‘선생님-’하던 정은이에게 미안하고 고마움이 크다. 그리고 이때까지 단순히 가르치기만 하는 과외만 해 오다 멘토링을 해보니 ‘아 이게 진짜 선생님이구나!’하고 느꼈다. 3개월 동안 정은이를 만나면서 때로는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선생님으로써 정은이를 혼내기도 하면서 학생의 눈높이에서 학생과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세는 멘토링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선물이 아닌 가 싶다. 비록 3개월 동안 힘든 적도 있었지만 함께 웃고 즐거웠던 시간이 더욱 많았기에, 그리고 멘토링을 통해 오히려 내가 배운 게 더 많았기 때문에 더욱 보람차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내 인생의 소중한 체험, 멘토링
멘토링을 시작하게 된 9월 어느 날, 멘티 하은이와 연락이 안 되어 달랑 주소 한 줄 들고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번지와 호수만으로는 찾아갈 수 없다며 ‘대충 이 주위니까 내려서 찾아봐라’는 택시기사 아저씨의 말에 낙담을 하고 처음 가본 동네 골목을 여기저기 물어가며 길을 헤매고 있었다. 그 때 혹시나 해서 하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처음으로 연락이 닿았다. 내가 있는 근처로 마중 나오겠다는 말에 잠시 기다리니 ‘선생님!!’하며 귀여운 여자아이 두 명이 뛰어오고 있었다. 하은이와 하은이 동생 예은이였다. 순간 지치고 포기하려던 마음이 사그라지고, 아이들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듣는 ‘선생님’이라는 칭호에 설레였고 해맑게 뛰어오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순조로울 것 같은 하은이와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끔직히도 못했던 나에게 초등학교1학년 하은이와 7살 예은이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나의 멘티는 하은이지만, 예은이도 잘 따르고, 워낙 사이가 좋아서 거의 같이 보는 식이었다. 둘이 같이 있으면 계속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는 것은 기본, 하루에도 열 댓번씩 다툰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 지금은 요령이 생겼지만, 처음 영화 보러 간 날은 아직도 끔찍한 하루로 기억되고 있다. 집 안에서 뛰어다니는 건 어느 정도 주의를 줄 수 있지만, 남포동 한 복판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두 아이를 잡으러 다니는 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뛰어다니는 건 그저 ‘영화를 보러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영화 시작 전, 조용히 해야 한다는 말은 금방 잊었는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쉴 새 없이 얘기를 하고, 영화관 의자에서 시소타기?를 한다거나, 에어컨이 너무 빵빵해 추워서 영화를 못 보겠다는 투정에 상영관을 몇 번씩 들락날락 하는 등 제대로 영화를 본 것이 아니었다.
가끔 말을 안 듣는 하은이에게 화가 나서 꾸중하여 삐지기도 하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하은이를 억지로 앉히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아이들도 나에게 익숙해져, 서로 장난도 많이 치고 공부할 땐 잘 따라온다. 특히, 쓰기 능력이 또래에 비해 부족했던 하은이가 받아쓰기 90점을 받아 온 날은 내가 더 뿌듯하고 기뻤다. 이 외에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우루과이에서 오신 하은이 어머니에게 의사소통이나 한국문화에 대해 도울 기회가 주어져 예비교사로서, 또 아직은 많이 부족한 멘토로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하은이와 매일 카톡, 페북으로 연락할 정도로 친해졌다. (카카오톡 배경화면을 뽀로로로 바꿔주던 순간 하은이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예은이는 매번 자기 집에서 자고가라는 호의(?)를 베풀어 준다. 몇 시간 뒤 있을 멘토링 수업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들고 가면 아이들의 반응이 어떨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