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5. 29
한국이 미국과 본격적인 ‘원전동맹’을 시작한다. 한·미 정상회담을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내세우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양자 협력 구상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원 팀을 구성한다. 미국은 원천기술·자본·외교력을 제공하고, 우리는 부품·설계·시공·운전을 담당한다. 국제 원전 시장을 겨냥한 절박하고 현실적인 동맹이다. 첨단 신형 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개발하고, 제3국에 수출하는 것이 목표다.
첨단기술의 이전과 수출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도 체결하고, 2018년 8월 이후 중단되었던 원자력고위급위원회(HLBC)도 다시 가동한다. 사용후 핵연료의 관리, 원전의 수출 진흥, 핵연료의 공급은 물론 핵 안보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협의하는 공식 채널을 갖춘 본격적인 동맹으로 승화시키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SMR의 책임 있는 사용을 위한 기반사업(FIRST)’에 우리도 참여한다.
원전 시장에서의 패권 경쟁
나날이 절박해지는 기후위기 극복과 전 지구적인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붕괴에 의한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위기)의 먹구름이 원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원전은 한 톨의 온실가스도 배출하지 않으면서 대량의 전기를 안정적이고 연속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 진정한 탄소중립 전원(電源)이다. 원전의 안전한 건설과 가동을 위한 기술과 제도에 대한 자신감도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실제로 동일본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지진해일)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주춤했던 원전 시장이 되살아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56기(61.7GW)의 원전이 건설 중이다. 건설을 계획 중인 원전이 95기(95.3GW)에 이르고, 건설을 검토 중인 원전도 335기(369GW)나 된다. 중동·동유럽·동남아시아는 물론 남미와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원전 건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원전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국제 원전 시장의 상황이 묘하다. 2027년까지 완공 예정인 50기의 원전 중 절반 이상인 27기를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차지해버렸다. 원전 시장의 후발 주자인 중국이 15기를 수주했다. 국제법을 무시한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를 퍼펙트스톰의 불안에 떨게 만든 러시아도 12기나 차지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수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고, 세계 최고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원전 종주국인 미국과 원전 10기 수출을 목표로 ‘원전 최강국’을 지향하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헛물만 켜고 있다. 2009년 UAE에 한국형 원전 4기를 수출한 것이 우리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원전 수출이었다. 특히 2018년 영국의 무어사이드 원전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잃어버린 것은 뼈아픈 경험이었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밀어붙인 탈원전 정책이 문제였다.
미국의 원전산업은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사고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안전과 환경을 지키겠다는 사회적 규제가 강화되면서 120기의 원전 건설이 취소되어 버렸다. 원전 부품산업이 붕괴되고, 현장 경험을 갖춘 시공인력도 사라져버렸다. 2008년까지 253기의 원전을 건설했던 미국이 지난 10여년 동안 고작 2기의 원전을 완공했을 뿐이다. 현재 조지아주에서 진행 중인 7기의 원전 건설도 부품산업 붕괴, 예산 초과, 공기 지연 등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소인수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 뉴시스
그런 미국이 안전성과 경제성을 인정받은 한국형 원자로(APR1400과 APR1400+)를 가지고 있고, 설계·시공·가동의 모든 부문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우리나라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도 지난 5년 동안의 탈원전 정책으로 상처를 입은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고, 원전 수출에 절실하게 필요한 자본(파이낸싱)과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과의 적극적인 동맹이 꼭 필요한 형편이다. 원전동맹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확실한 이유다.
전망은 절대 나쁘지 않다. 특히 미국과 우리가 모두 탐내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체코가 한·미 원전동맹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 한국이나 미국 중 어느 나라가 수주에 성공하든 상관없이 양국이 모두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게 된다. 한·미 원전동맹은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상생(相生)의 시도라는 뜻이다. 우리는 한·미 원전동맹을 통해 ‘원전 최강국’의 꿈을 추구하고, 미국은 국제 원전 시장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확실하게 견제하게 된다.
한·미 원전동맹은 우리에게 2015년의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의 성과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4년 8개월의 긴 협상으로 우리는 사용후핵연료 연구와 핵연료 생산을 위한 우라늄 농축에 대한 제한적인 권리를 확보했다.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가동되었지만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무력화되어버린 원자력고위급위원회도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양국 기업들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지식재산권(IP)에 대한 불필요한 갈등을 선제적으로 해결하고, 우라늄 농축과 같은 민감 기술의 연구개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열리는 SMR의 시대
소형모듈원자로(SMR)는 기존 대형 원전의 원자로·증기발생기·냉각펌프 등의 기기를 하나의 용기에 넣어 일체화한 것이다. 안전성·효율성·경제성을 극대화한 새로운 개념의 차세대 원자로다. 300MW 규모로 생산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SMR은 도서·산간 지역은 물론 해상에도 설치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대형 원전 건설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부지 확보의 어려움과 심각한 사회적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원전동맹으로 우리는 미국과 SMR의 개발과 전 세계적 배치를 가속화하는 일을 함께 추진한다. 원천기술의 개발에서부터 제3국 수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이미 SMR의 개발에서는 양국 기업들 사이에 활발한 협력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 아이다호주에 12기의 SMR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뉴스케일파워의 사업에는 이미 두산중공업을 비롯한 우리나라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도 SMR의 전신인 스마트(SMART) 원자로를 개발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97년부터 37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개발한 스마트는 2012년 7월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SDA) 인가를 받았다. 온전하게 우리 과학기술계의 독자적 노력으로 완성했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공동개발 협약을 맹목적인 탈원전 정책으로 실종시켜 버린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한·미 원전동맹은 과학기술계의 입장에서 몹시 감격스러운 성과다. 석탄화력조차 지을 기술도 없었던 우리가 1958년에 창립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한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런 우리가 이제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당당하게 기술동맹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덕환 /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