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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1. 30
나이가 들수록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마음에 와 닿는다. 한마디로 세상일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중국 변방에 살던 한 노인의 말이 국경을 넘어 도망치자 이웃들이 안 됐다고 위로했는데 노인은 태연했다. 몇 달 뒤 이 말이 암말을 데리고 돌아오자 이웃들이 축하했지만 노인은 담담했다. 어느 날 노인의 아들이 돌아온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이웃들이 노인을 위로했지만 역시 모를 일이라는 표정이다. 얼마 뒤 전쟁이 나 동네 젊은이들이 징집돼 대부분 전사했는데 다리를 못 쓰는 노인의 아들은 제외돼 살아남았다.
새옹지마는 지금 안 좋은 일이라도 반전이 일어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측면이 강하다(아무튼 해피엔딩으로 끝나므로). 그런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대체로 그 반대다. 즉 처음엔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사태가 이상하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그런 예다. 물을 끓이는 대신 초음파로 미세한 물방울(에어로졸)로 쪼개 내보내는 가습기는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박테리아나 곰팡이가 물통에 살게 되면 에어로졸에 실려 공기 중으로 퍼져 인체에 감염될 수 있다. 그렇다고 매번 세척하기도 번거로운데 이를 없앨 살균제가 나온 것이다(1995년).
그런데 2006년 봄 급성 폐질환 환자들이 무더기로 생겼다는 사실이 보고됐고 그 뒤 매년 이 패턴이 반복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원인을 추적해보니 살균제 성분인 계면활성제가 에어로졸과 함께 폐로 들어와 세포막을 교란한 결과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제조업체가 좀 더 일찍 대응했다면 이 정도로 큰 피해가 나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딱한 일이다.
가격 급락하며 식품첨가제로 쓰여
학술지 ‘네이처’ 1월 18일자에는 가습기살균제가 연상되는, 그럼에도 인과관계가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세상일이 이렇게도 돌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상황인데, 막상 결과를 놓고도 가습기살균제처럼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할 수도 없어 보인다. 이야기는 트레할로스라는 이당류에서 시작한다.
▲ 파스타, 아이스크림, 다진 고기 등 많은 식품에 트레할로스가 쓰이고 있다. / 사진=pixabay
보통 당은 탄소원자 대여섯 개로 이뤄진 분자를 기본단위로 한다. 이런 분자 하나로 이뤄진 당을 단당류라고 부르는데 포도당과 과당이 대표적인 예다. 음식에 들어있는 당은 소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단당류로 분해돼 흡수된다. 단당류 두 개가 결합된 게 이당류로 설탕(자당)과 젖당(유당), 맥아당이 있다. 단당류 여러 개가 결합된 게 올리고당이고 수백 개 이상이 결합된 다당류로 녹말과 셀룰로오스가 있다.
▲ 이당류 트레할로스 분자로 포도당 두 분자가 결합된 구조다. / 위키피디아 제공
트레할로스(trehalose)는 포도당 두 개로 이뤄진 이당류다(필자도 이번에 알았다). 동식물이나 미생물에 있는 천연물질로 새우와 곤충, 해바라기씨, 표고버섯에 많이 들어있다. 한편 소장에는 트레할로스를 분해하는 효소인 트레할라제가 있기 때문에 음식으로 섭취한 트레할로스를 포도당으로 바꿔 흡수할 수 있다. 한편 설탕에 비해 당도는 떨어져 고농도에서는 절반 수준, 저농도에서는 6분의 1도 안 된다. 따라서 설탕을 두고 당도는 낮고 칼로리는 비슷한 트레할로스를 감미료로 쓸 이유는 없다.
대신 트레할로스는 다른 장점이 있다. 물을 잘 머금고 설탕이라면 쉽게 분해되는 고온이나 산성 등의 악조건에서도 안정한 분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레할로스는 안구건조증을 완화하는 눈약이나 보습크림 등 약품이나 화장품에 쓰이는 유용한 원료다. 물론 식품업계도 트레할로스를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킬로그램 당 700달러(약 70만 원)나 하는 고가원료였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1990년대 말 일본의 하야시바라라는 회사가 녹말을 효소로 처리해 트레할로스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가격이 킬로그램 당 3달러(약 3000원)로 뚝 떨어졌다. 식품업계는 바로 트레할로스를 식품원료로 쓰고자했고 미 식품의약국(FDA)은 2000년, 유럽연합은 2001년 트레할로스를 ‘일반적으로 안전한(GRAS)’, 즉 사용량에 제한이 없는 식품첨가물로 승인했다. 그 뒤 파스타, 아이스크림, 다진 고기 등 많은 식품에 트레할로스가 쓰이고 있다.
▲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리 게놈의 트레할로스 오페론 구조로 전사억제인자의 유전자인 treR과 트레할로스 분해효소의 유전자인 treA로 이뤄져 있다. / ‘네이처’ 제공
병원 내 감염으로 환자 다수 사망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세계 곳곳의 병원에서 환자 수십 명이 고병원성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리(Clostridium difficile. 이하 클로스트리디움) 박테리아에 감염돼 다수가 사망하는 사고가 이어졌다. 사실 북미와 유럽에서는 항생제내성 클로스트리디움으로 매년 수만 명이 사망하고 있다.
원래 클로스트리디움은 정상인의 장에 서식하는 장내미생물의 하나다. 중증질환으로 몸이 쇠약해진 환자들이 감염질환으로 항생제를 복용하면 장내미생물 균형이 깨지면서 클로스트리디움이 우점종이 된다. 그 결과 장내면역계가 교란돼 염증이 생기고 설사, 발열, 식욕부진, 구토 등 다양한 증상을 겪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 한 병원에서 이런 환자들이 갑자기 많이 생기는 사고들을 조사하자 환자들의 시료에서 동일한 균주의 클로스트리디움이 검출되는 사례가 많았다. 즉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고병원성 클로스트리디움에 감염돼 일어난 일이다.
미국 베일러의대 등 미국과 네덜란드, 영국의 공동연구자들은 2000년대 들어 사고를 친 클로스트리디움 균주들을 조사하다가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RT027이라는 유형에 속하는 균주와 RT078이라는 유형에 속하는 균주가 주로 말썽을 일으켰는데 단순히 항생제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즉 2000년대 들어 발생빈도가 열배나 늘었고 병원성(사망률)도 훨씬 커진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유형은 진화적으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연구자들은 이 두 유형의 클로스트리디움의 증식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 먹이 선호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녀석들이 저농도의 트레할로스가 유일한 먹이인 배지에서도 증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염기서열이 알려진 클로스트리디움 게놈 1010개의 데이터를 분석해 이런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로 했다.
트레할로스 오페론 민감해져
그 결과 RT027 유형에 속하는 균주들은 모두 treR이라는 유전자의 특정 염기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결과 만들어진 단백질은 172번째 아미노산이 류신에서 아이소류신으로 바뀌었다. TreR 단백질은 전사억제인자로 게놈에서 바로 뒤에 있는 treA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한다. 변이가 일어난 TreR 단백질은 억제 능력이 뚝 떨어졌다.
한편 treA 유전자가 발현돼 만들어지는 단백질은 트레할로스를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효소다. 즉 treR 유전자와 treA 유전자는 ‘트레할로스 오페론(trehalose operon)’이라는 말이다.
오페론은 유전자 발현의 조절 단위로 1950년대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자크 모노와 프랑수아 자콥이 제안한 개념이다. 이들은 대장균의 특이한 생태에 주목했다. 평소 대장균은 설탕을 선호하는데 만일 설탕이 없고 젖당만 있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처음에는 잘 못 자라다가 다시 잘 자라기 시작한다. 젖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콥은 전사억제인자가 평소에는 필요 없는 젖당분해효소 유전자를 억제하고 있다가 환경의 변화(설탕 부재 젖당 존재)가 오면 억제가 풀리면서 필요한 유전자가 발현된 결과라고 가정했다. 두 사람은 이를 실험으로 입증했고 이런 유전자 조절 단위를 오페론이라고 명명했다.
트레할로스 오페론 역시 평소에는 TreR 단백질이 treA 유전자의 전사를 억제하고 있다가 주변에 트레할로스가 존재하면 억제가 풀리면서 treA 유전자가 발현돼 이를 포도당으로 분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험결과 일반적인 클로스티리디움은 트레할로스가 25밀리몰농도(mM)가 돼야 treA 유전자가 켜졌다.
그런데 RT027 유형의 경우 돌연변이로 TreR의 억제력이 약해져 트레할로스 농도가 500분의 1인 50마이크로몰농도(μM)만 돼도 treA 유전자가 발현돼 효소가 만들어졌다. 즉 트레할로스가 저농도인 조건에서도 먹이로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RT078 유형의 경우는 다른 유형의 클로스티리디움에는 없는 ptsT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다른 박테리아에서 유전자 수평이동으로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ptsT 유전자가 발현돼 만들어진 단백질은 세포막에 박혀 있으면서 바깥의 트레할로스를 세포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RT078의 경우는 트레할로스의 흡수도를 높여 트레할로스 오페론을 민감하게 만들었다. 결국 RT027과 RT078은 각각 독립적인 방식으로 저농도의 트레할로스를 먹이로 이용할 수 있게 ‘수렴진화’한 것이다.
▲ 2000년대 들어 여러 병원에서 감염 사고를 일으킨 RT027와 RT078 유형은 트레할로스가 저농도일 때도 오페론이 켜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 메커니즘은 달랐다. 즉 RT027은 treR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 전사억제력이 떨어진 결과이고 RT078은 ptsT 유전자를 획득해 트레할로스를 흡수하는 능력이 향상된 결과다. / ‘네이처’ 제공
트레할로스 대사 과정에서 독소 많이 만들어져
그렇다면 트레할로스에 민감한 클로스트리디움의 고병원성은 정말 트레할로스를 먹이로 섭취한 결과일까. 사람으로 실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동물실험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먼저 treA 유전자를 없앤(따라서 트레할로스를 소화할 수 없는) RT027을 만든 뒤 생쥐에 감염시켜 유전자가 있는 RT027에 감염된 생쥐와 사망률을 비교했다. 생쥐들은 트레할로스가 5밀리몰농도 들어있는 물을 공급받는다. 관찰 결과 treA 유전자를 없앤 RT027에 감염된 생쥐의 사망률은 33.3%로 유전자가 있는 RT027에 감염된 생쥐의 사망률 78.6%보다 훨씬 낮았다.
한편 treA 유전자가 있는 RT027에 감염된 생쥐라도 먹이나 물에 트레할로스가 들어있지 않을 경우 사망률이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연구자들은 생쥐의 대장에 사는 RT027의 개체수를 조사해봤는데 뜻밖에도 먹이에 트레할로스가 있다고 해서 숫자가 늘어나지는 않았다. 대신 클로스트리디움이 내놓는 독소(toxin B)의 농도는 두 배 이상 높았다. 즉 트레할로스를 대사하는 과정에서 독소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 모른다.
그렇다면 트레할로스가 식품첨가물로 쓰인 이래 사람들의 장 속에 RT027이나 RT078이 먹이로 이용할 만큼 충분한 트레할로스가 존재하게 된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의 소장에는 트레할로스를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소화효소인 트레할라제가 있다. 따라서 설사 트레할로스가 들어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소장을 거치는 사이 소화돼 클로스트리디움이 사는 대장에서는 거의 없는 것 아닐까.
그러나 사람의 소장에 트레할라제가 있더라도 음식 속 트레할로스의 상당 부분이 소화되지 않은 채 대장으로 넘어간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즉 식품첨가물로 쓰인 트레할로스의 일부는 대장까지 이동해 그곳에 사는, 트레할로스에 민감한 유형의 클로스트리디움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 일상적인 식사를 한 입원환자 세 명의 회장루(소장의 말단인 회장을 인공항문으로 만든 구조) 분비물에 클로스트리디움을 배양한 결과 RT027은 두 곳에서 treA 유전자가 발현했다.
논문을 보면 클로스트리디움 RT027과 RT078로 인한 병원 내 감염 사건이 표시된 연대표가 있는데 정말 2000년 이후에 사건들이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RT027의 경우 2007년 우리나라에서도 감염 사례가 보고된 것으로 나와 있다.
▲ 클로스트리디움 RT027(위쪽)과 RT078(아래쪽)의 병원 내 감염 사례를 기록한 연대표로 트레할로스가 식품첨가물로 쓰이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사건이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2007년 우리나라에서도 RT027의 감염사례가 있었다. / ‘네이처’ 제공
항생제내성균이 문제가 되면서 ‘병 고치러 병원 갔다가 병을 얻어(감염돼) 죽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연구로 그런 사례 가운데 일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영역의 변화가 촉발한 결과일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이 결과로 트레할로스를 식품첨가제로 쓰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당장은 병원들이 입원환자들에게 되도록 제철식재료와 천연조미료로 만든 식사를 제공하게 유도하는 게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길 아닐까.
1990년대 말 일본의 회사가 트레할로스를 싸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수백 명이 허무하게 병원에서 목숨을 잃을 일은 없었을 거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