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5. 02.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새로 돋은 세쿼이아 푸른 이파리가 눈에 어둡다. 등나무가 꽃을 매달고 은사시나무가 바람의 흐름에 이파리를 맡겼다. 봄 햇살에 몸이 가려워 잎이 돋아난다는 억지마저 수용할 만큼 연둣빛 봄 잎은 아름답다. 하지만 지금 식물의 잎에서는 아마 광합성 공장이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온대지방의 겨울에는 광합성 공장이 가동을 멈추지만 아마존과 사하라 이남의 열대우림과 사바나에서 전 지구적 탄소 고정을 지속하는 덕분에 지구는 일 년에 약 100기가t이 넘는 양의 탄소를 고정한다. 탄소를 고정한다는 말은 식물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탄수화물을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는 식물이 고정한 탄소의 일부를 곡물의 형태로 소비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인류가 일 년에 소비하는 곡물의 양은 25억t이다. 여기에는 가축이 소비하는 곡물의 양도 포함되지만 그 곡물도 고기 형태로 인간의 소화기관에 들어온다고 치면 우리는 일 년에 일인당 약 230㎏의 곡물을 소비하는 셈이다.
광합성을 통해 고정한 곡물 혹은 곡물을 먹은 가축의 고기가 입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이를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고 부산물인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른바 ‘소화’라고 불리는 이런 생물학적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입에서 항문에 이르기까지 음식물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 첫 번째 단계이고 다음 단계는 세포가 몸통 ‘안’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분해하는 과정이다. 비록 몸 안에 있는 듯 보이지만 혈관을 타고 전신에 공급되기 전까지 소화된 음식물은 여전히 세포 바깥에 있다. 따라서 소화기관의 빈 공간은 아직 밖이라고 간주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소화기관을 ‘내 안의 밖(Inner outside)’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삼킨 음식물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약 30초 정도 입에서 씹은 음식물은 25㎝ 길이의 식도를 내려가 위에 도착한다. 소화효소와 뒤섞여 고르게 으깨진 죽 같은 음식물은 25㎝의 십이지장, 2.5m의 공장, 약 3m의 회장을 거치면서 한 방향의 움직임을 이어간다. 소장을 구성하는 십이지장, 공장, 회장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얼추 6m이다. 그러나 소장의 특징은 길이보다는 그 표면적에 있다. 소장에는 오돌토돌한 손가락 모양의 융모가 무수히 자리 잡고 있어서 표면적이 한정 없이 커진다. 어떤 사람들은 소장의 표면적이 거의 테니스장 넓이에 육박한다고 계산한다. 소장과 닿아 있는 대장은 길이(대략 2m)가 길어서가 아니라 통의 지름이 크기 때문에 대장이라 불린다. 대장에서는 소장에서 흡수되지 않은 거친 음식물을 할 수 있는 만큼 분해하고 나머지를 적당한 양의 물기가 포함된 대변으로 형상을 빚어 밖으로 내보낸다.
소장의 표면적이 넓은 까닭은 짐작하다시피 소화된 영양소를 남김없이 흡수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 인간 소화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불을 이용해서 조리한 음식물을 다룬다는 사실이다. 이런 화식으로 인해 인간의 이나 턱은 작고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근육의 씹는 힘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변화는 뇌의 크기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추론하기도 한다. 화식이 음식물의 흡수를 촉진했다고 해서 소장의 표면적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이 사실은 인간이 진화해왔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음식물이 풍부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소장의 주름은 영양소가 흡수되지 않은 채 허투루 대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우리 몸의 생물학적 철저함이 자아낸 결과다.
한국 사람들이 먹는 곡물의 양이 앞에서 살펴본 인류 전체의 평균보다 적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양 말고 질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 입에 들어오는 음식물은 대개 이런저런 가공을 거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형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의 진열대를 상상해보자.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면 가공한 음식물이란 곧 우리 소화기관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거나 아니면 소화기관의 부담을 한껏 덜어줄 부드럽고 달콤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거기에다 상대적으로 소화가 한결 쉬운 단백질이 주성분인 고기가 식단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과거라면 생존에 유리했음에 분명한 테니스장 넓이의 철저함이 지금은 인류의 건강에 걸림돌이 된다고 힐난한다. 라면으로 대표되는 공장제 음식물이 인류의 역사에 대거 편입되면서 소화는 쉬워진 반면 흡수된 영양소는 적절한 노동으로 해소되지 못하면서 인류가 살찌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식품에 설탕세를 부과하면 비만 인구가 줄어든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아직 가공과 첨가물 식품 공학 및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적응 진화를 마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으로 들어와 소화될 식재료의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있는 오월은 더욱 그렇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