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김형진
잔잔한 수면에 머리 내민 찌가 가물거린다. 물결 따라 가물거리던 찌가 깜박깜박 한동안 애를 태우더니 조금 솟아오른다. 꾼은 낚싯대 손잡이를 감싸고 챌 순간을 노린다. 찌에 온 신경을 모으고 챌 순간을 기다리는 긴장감. 몸 안의 세포란 세포가 뾰족뾰족 촉을 세운다. 드디어 찌가 곱게 죽 솟아오른다. 손잡이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살짝 치켜든다. 끝대가 활처럼 휘고 줄이 팽팽하다. 손으로 전해오는 짜릿짜릿한 감촉. 긴 기다림도, 뾰쪽뾰쪽 촉을 세우던 긴장감도 짜릿한 감촉에 말끔히 녹아내린다.
세월을 낚는 태공망이 아닐 바에야 낚시의 묘미는 짜릿한 손맛에 있다. 그 묘미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 채비가 완벽해야 하고, 낚시터에 대한 정보가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자리를 잡는 일이다. 첨대낚시를 선호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낚시터에 당도하여 첫 대면하는 수면에는 월척越尺 의 은린銀隣 이 퍼덕거린다. 그렇다고 마음이 앞서서는 낭패다. 우선 진중하게 낚시터의 형국을 살핀다. 봄철 저수지 낚시일 때에는 상류의 수초가 무성한 곳을 탐색한다. 수로水路 낚시일 때에는 둑이 휘어들어 유속이 느린 곳을 찾는다.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수양버들이 몇 그루 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낚시할 곳을 정하면 우선 앉을 자리를 닦는다. 파고, 메우고, 괴어 의자가 기울어지거나 가라앉지 않게 단단히 다진다. 다진 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아 낚시 드리울 수면을 한동안 응시한다. 잔잔한 맑은 수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월척에 대한 집착이 차츰 희석된다. 비로소 낚시터에 와 앉은 내가 마음에 잡힌다.
낚시 가방을 열어 장비를 꺼내놓고 낚싯대를 설치하기 시작한다. 세 칸, 두 칸짜리 첨대를 편다. 대가 하나면 심심하고, 셋 이상이면 분주하다. 수심에 맞추어 찌를 고정하고 콩알 떡밥 미끼를 끼워 낚싯줄을 드리운다. 설렘이 서린 눈으로 찌를 응시한다. 한참 기다려도 어신魚信이 없다. 지루함도 달랠 겸 주위를 살핀다. 앞에 야트막한 산이 있고 그 산 위에 하얀 구름이라도 떠 있으면 찌에 어둑어둑하던 눈이 시원하다. 거기에 산새의 노래까지 더해지면 마음까지 시원하다.
한번 자리를 잡았으면 진득이 기다리는 것이 자리에 대한 예의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물 항아리 속일 때도 있고, 잡어의 방정맞은 입질에 팔 고생만 할 때도 있으며, 멋진 찌 올림에 고춧잎이 팔랑일 때도 흔하다. 그것을 못 견디고 벌떡 일어서서 첨벙점벙 밑밥을 던지고 그래도 입질이 없으면 다른 자리를 물색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 그래서 자기를 잃고 떠다닌다.
떠 있는 마음이 어딘들 흡족할 수 있으랴. 그들은 수시로 장비를 거두어 들고 자리를 옮긴다. 어떤 이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나중에는 물이 들어 질척거리는 곳에 쪼그리고 앉기도 하고,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자리의 소중함도, 자기 일의 즐거움도 모르는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또 여러 개 묶은 낚시에 왕방울만한 떡밥을 달아 첨벙첨벙 물소리를 내는 멍청이 낚시에 재미를 붙은 이들도 있고, 릴 대를 일렬횡대로 벌여놓고 쌩쌩 쇳소리를 뿌리며 줄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옆 자리에 앉은 꾼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쯤 개의치 않는다. 세세細細한 마음 씀 없이 월척에 눈이 먼 사람들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불문不問한다. 이런 이들이 어찌 낚시의 즐거움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런데도 요즈음에는 낚시터마다 멍청이와 릴이 득세하고 있다.
옴짝 않고 서 있는 찌에 고추잠자리가 와 앉기도 한다.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펴고 꼬리는 살짝 들고 앉은 자세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눈이 팔려 있을 때 찌가 움찔 움직일 때도 있다. 반사적으로 첨대 손잡이를 움켜쥐려 하는 순간 찌는 움직임을 멈춘다. 고추잠자리는 낚시꾼의 방정맞은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앉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앞산에 눈을 준다. 부드러운 능선 아래 초여름 녹음이 눈에 가득 차온다. 산 위에 떠 있는 솜털구름에 해찰도 한다. 그러다 눈길을 낮추니 다시 찌가 움직이고 있다. 조급증 이는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찌를 주시한다. 아니, 고추잠자리를 주시한다. 찌의 움직임이 미미하면 옴짝도 하지 않다가 크게 움직이면 줄타기하는 광대 짓을 시늉하며 춤을 춘다. 그러다 찌가 주욱 솟아올라 기울어질 즈음에야 사뿐히 날아오른다.
꾼은 그때서야 낚싯대를 채지만 헛손질이다. 빈 낚싯대를 치켜들고 고추잠자리의 행방을 찾는다. 그러나 눈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에 쓴웃음을 문다.
'이렇게 살아서야 어디…?' 시방 내 자리는 안녕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