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하던 관포대구 어디 갔노?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겨울철이 되면 대구(大口)잡이 동네하면 관포(冠浦)였었다. 지금처럼 조그마한 어촌에도 방파제가 잘되어 있어서 고기잡이 어선들이 크고 작은 태풍에 피할 곳이 많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하였었다.
장목면 관포리는 가덕도를 마주보는 진해군항기지 출입관문에 위치한 작은 어선들이 태풍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보금자리와 같은 조그마한 어촌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의 옥포대첩과 칠천패전의 전장기지의 외곽지역으로 활용되었으며 노일전쟁의 포진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해전의 요충지이기도 한 곳이다.
일제강점 시기에 관포어업조합을 설치하여 관포에 대구어판장을 개장하여 마산어시장의 대구공급원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해방 전후와 6.25동란 시기에 대구가 많이 잡혀 150여호 되는 마을에 대구어선이 7~80여척이 있어 온 동네 집집마다 지붕과 담벼락을 연결한 대구말리는(건조하는) 대나무 장대가 가로 세로 얽혀 있어 야트막한 담벼락을 다니다 보면 마치 대구들로부터 사열을 받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요즈음 같이 생대구 소비량도 많지 아니하고 운송할 교통수단도 발달되어 있지 아니한 관계로 한꺼번에 많이 잡을 때에는 겨울철 해풍에 말려서 저장했다가 팔기도 하였다. 적당히 말린 대구를 초고추장에 찍어 막걸리와 먹는 맛은 일품이고 설날에 세배 오는 사위들에겐 생대구떡국과 함께 술안주 감으로도 인기 짱이었었다.
관포가 다른 동네에 비하여 기와집이 많고 일찍이 통영, 마산, 진해, 부산 등지로 상급학교 유학을 많이 가게 된 것도 대구 덕택이고 현금 유통도 많았던 것도 대구어장 때문이었다.
대구잡이는 현해탄을 바라보는 이수도 앞바다에 가덕도 등대 끝(동머리 끝이라고 불렀음)에서 장승포로 가는 뱃길 사이에 대구먹이가 풍부한 낙동강 해류가 대구산란에 알맞은 진해만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한번 들어가면 못 빠져 나오도록 만들어진 그물(정치망)을 쳐 놓고 하루 또는 이틀 기다렸다가 대구 잡이 배(당시는 노를 젓거나 바람이 불면 돛을 이용)를 타고 어장을 쳐 놓은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걷어 올리면 그 큰대구를 하루에 몇 동이(1동이는 100마리)씩 잡아오면 그 배는 만선 깃대를 달고 어부 3명이 힘차게 노를 저어 동네포구로 들어오곤 하였다. 많이 잡는 배는 겨울 한철에 한접(1,000마리) 또는 두접(2,000마리)씩 잡는 해도 있었다. 그런 집은 그해부터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관포동네는 부자가 많았다.
그렇게 많이 잡히던 대구가 구룡포, 묵호, 속초 등 동해바다에서 줄어든 꽈메기 대신 어미대구가 되기 위해 진해만에서 북해도와 캄차카반도로 계절 따라 오르내리는 새끼대구를 마구 잡아들이고 마산, 창원 공장지대에서 마구 쏟아내는 공장폐수 등으로 진해만 수온이 올라가고 대구먹이 또한 그전처럼 풍부하지 아니한 관계로 대구의 고향인 진해만에 산란하러 오는 대구 숫자가 줄어들어 급기야는 멸종 위기에까지 이르렀었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거제해양수산연구소에서 수억만 마리의 수정란과 치어를 방류하고 동해바다에서 새끼대구 마구잡이를 단속하여온 노력으로 관포 앞바다에 대구어장이 생기게 되어 동지와 음력 설날이 가까워지는 이맘때가 되면 유달리도 맛이 있는 고향대구떡국 맛을 보게 되면 새삼 어린 시절 대구부자동네에서 뛰놀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대구의 본산인 관포는 어업조합도 없어지고 대구 잡이 어선이 겨우 5~6척뿐인 반면 대구어선도 많고 태풍 피항도 할 수 있는 방파제도 잘되어 있고 어판장도 설치되어 있는 외포가 대구 주생산지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관포든 외포든 대구 주생산지는 거제이고 그것도 장목면이기에 섭섭함이 다소 위로는 되지만 그래도 옛날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있어 뜨근뜨끈한 대구떡국을 후후 불어가면서 먹던 그 시절 그때를 그리면서 이 세상만사가 하나도 변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이치를 되 새겨보면서 “그 흔하던 관포대구 어디 갔노?”하고 넉두리나 해본다.
2009년 12월 20일 서울연구실에서/ 양 명 생 보건학박사
(전 부산지방식약청장/건강보험심사평가원 평가담당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