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게 인생이다
이 분 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푸시킨 시의 한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여명에 일어나 나의 길을 간다.
딸이 초등학생, 아들이 병설 유치원에 들어가는 시점에 집안을 받치는 기둥이 되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살기 위해 어린 남매를 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누가 보면 남편이 없는 미망인인 줄 알겠다.
우리 집엔 남편은 있으나 가장의 자리는 내가 차지해야 했다.
남편은 이일 저일 저질러 놓는 데는 명수다.
무언가 일은 시작하는 데 마무리는 짓지 못한다.
감나무 밑에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게으름뱅이, 기회주의자다.
가정주부가 일자리를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몇 종류의 일 중 화장품 판매원을 선택했다.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고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자전거에 싣고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엔 내 모습이 을씨년스러워 어깨는 처지고 걸음은 무거웠다.
화장품 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입속으로만 웅얼거렸다.
이때 ‘화장품을 팔기 전에 자신부터 팔라!’고 하신 대리점 사장님의 가르침이 스쳐 지나갔다.
‘맞아! 그렇담 일상적인 이야기로 접근해서 나를 알리는 일부터 해야겠다.’
이렇게 행동 방향을 정하니 좀 접근하기 쉬워졌다.
고객이 될만한 이웃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말문을 열어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하고, 나의 처지를 얘기 하기도 했다.
이 작전이 적중해 차츰 고객이 늘어나게 됐다.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거래장에는 고객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큰돈은 못 벌어도 생활비는 벌 수 있었다.
나의 선한 인상과 부지런함이 이웃에게 믿음을 주게 되어 수입은 조금씩 늘어나게 됐다. 얼마간 적금도 넣을 수 있었다.
3년 만기 적금 통장을 만지면서 희망에 부풀었다. 조금씩 저축량이 늘어날 때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솟아났다.
고객을 만나고 집안일을 할 때도 신바람이 났다. 적금이 만기에 달하면 몽땅 찾아서 정기예금으로 묻어 놓고 또다시 적금을 계약하고….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겐 청천벽력이 떨어지게 됐다.
기어이 남편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두 달만 있으면 만기인 적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간 것이다.
머리가 핑 돌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지금에야 본인이 아니면 불가능했지만, 당시는 아내의 주민증과 도장만 가져가면 가능했다.
이 일을 어쩌나! 희망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남편에 대한 분노만 가득찼다.
남편은 그 돈을 유흥비로 탕진할 것이다. 경제력을 제로인 사람이 술을 즐기고 여자까지 좋아했으니 아내의 노력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아내와 자식을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안 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아이 둘을 바라보고 고객을 만나러 나갔다.
이제 단골고객도 늘어났고, 나를 기다리는 이웃이 나에게 음식을 제공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을 때면 아이들 생각에 목이 멘다.
어미 없는 빈집에 돌아와 식은 밥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어린것들이 눈에 밟혀 음식 맛은 모래를 씹은 듯 까칠하다.
남편에게 한 줌 양심이 있다면 집에 방치된 아이들을 돌볼 게 아닌가?
그런 걸 기대하는 것조차도 사치다. 그에게서 뭘 바라랴?
단지 아무것도 안 하고 사고만 안 치면 그게 바로 나를 돕는 것이다.
화장품 대금으로 곡식을 받아 자전거에 무겁게 싣고 오다가 균형을 못 잡고 넘어졌다. 넘어진 자전거를 억척스럽게 세워 곡식을 다시 싣고는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니 귀가 시간이 한참 늦었다.
집에 돌아온 나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허우대가 멀쩡한 남편이 술에 찌들어서는 큰방 문지방에 긴 몸을 걸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엄마 오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저녁을 굶은 아이들이 나에게로 달려와 안긴다.
“엄마! 배고파! 왜 이리 늦었어?”
눈물이 핑 돈다. 부엌으로 달려가 아이들 먹을 것을 후딱 해냈다.
아! 피곤한 하루가 또 지나가는구나!
잊을만하면 남편은 크고 작은 사고를 쳤다.
이번엔 느닷없이 소를 몇 마리 사 왔다. 소를 길러 수입을 얻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그렇담 소를 잘 기르면 문제가 없을 일인데 또 게으름을 피운다. 소는 팽개쳐 두고 밖으로 나돈다.
내 어깨엔 소먹이는 짐까지 지게 됐다.
남편의 몸에 꽉 차 있는 게으름은 이미 아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한 고질병은 고집불통이라는 것이다. 괜한 자존심만 내세우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랴! 내가 남편을 선택했으니, 부모님께도 말 못하고 나 혼자 모든 짐을 지고 간다.
남편과는 중매로 만나 45일 만에 결혼했다. 남편의 나이는 33살 내 나이는 24살이었다.
철지난 양복을 입은 신랑감은 얼굴이 야위어 보였다. 한마디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때 왜? 내 마음속에서 측은지심이 일어났을까?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사람은 선택하겠나?’ 딸 다섯 중의 셋째 딸인 나의 눈에 비친 남편은 애처로운 동생 같은 존재였다.
누굴 탓하랴! 일찍 헤어지지 못한 걸 후회할 뿐이다.
딸아이가 5학년이 되던 해에 시골에서 구미로 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간 시골에서 거래하던 고객을 정리하고 구미에서 새 터전을 잡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선산에 살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 때문에 당분간은 선산에서 구미로 출퇴근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자전거로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구미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런 생활을 3개월 하고 나니 체중이 8kg이나 빠졌다. 허리띠의 기존구멍으론 너무 커 안쪽에 3개의 구멍을 뚫고 허리띠를 단단히 조인다.
내가 택한 길,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무능한 남편도 내 등에 업고 단단한 띠로 묶는다.
‘그래 인생이란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