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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통섭(統攝)과 분절(分節)
- AI 출현에 따른 창작 활동의 새로운 모색
김호운(소설가·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 들어가는 말
먼저 한국문학의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는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사)한국문인협회 강북지부에 감사 말씀드립니다. 코로나19 신종 바이러스 창궐로 3년이 넘도록 방역 차원에서 인적 교류와 집합 문화 활동을 일부 제약함으로써 사회·경제·문화 등 생활 활동 전반이 위축되면서 모두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우리 문학은 집합 문화가 아닌 개인 중심으로 창작하는 터라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예부터 인류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주옥같은 세계 명작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살펴보면 누구든 위기에 이르면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발휘하는 게 우리 삶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이런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는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 사회는 전반에 걸쳐 다양하고 새로운 발전 동력들이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이제 방역 규제가 완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재확산에 대한 경계, 새로운 변이바이러스 등장으로 방역 당국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문학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원고는 인문학 연구를 바탕으로 준비한 게 아니라 창작자로서 또 문단 행정 실무자로서 문학 창작 현장에서 체험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엮은 자료입니다. 맥락을 잘 연결한다고 했습니다만, 다소 미비한 부분도 있을 줄 압니다. 이를 마중물로 삼아 관련 분야 학자들께서 앞으로 한국문학 발전을 위한 문제들을 심도 있게 연구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나와주기를 희망합니다.
2. 문학의 통섭(統攝)과 분절(分節)
문학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면서 발전해야 합니다. 그 변화의 주체는 물론 문학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독자(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의 여러 물리적인 문제를 개선 발전시키는 일 또한 창작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먼저 이 글의 주제인 문학의 ‘통섭’과 ‘분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통섭(統攝, consilience)’은 여러 갈래를 하나의 큰 줄기로 모아 총화(總和)로 잡는다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단어 그대로는 ‘큰 줄기를 잡는다’라는 뜻인데, 학계에서 여러 학문을 서로 융합하여 새로운 덩이의 학문을 생성한다는 의미로 정의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교수의 저서 『Consilience』를 최재천 교수(이화여자대학교)가 이를 ‘통섭’으로 번역하여 새로운 문화어(文化語)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취지로 생성되었지만, 여기에서 다시 우리 문학에 대입하여 ‘서로 다른 장르 문학을 한데 묶어 문학의 큰 줄기를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해 보고자 합니다.
‘분절(分節)’은 말 그대로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나눈다는 것’은 나뉘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본래의 형태, 그러니까 분절을 이해하자면 분절 이전의 그 본래의 형태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통섭이든 분절이든 본래의 모습이 있기에 통섭과 분절이 생긴 겁니다. 여기서 문학을 두고 따져보는 말이기에 이것은 분명 ‘문학의 본래 모습’을 말합니다. 문학을 나누고 합치고 하는 일이 통섭이고 분절이라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문학을 인위적으로 나눌 수 있는 형식인가가 의문이 생깁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통섭과 분절은 문학 그 자체를 합치고 나누는 게 아니라, 문학을 대중(독자)에게 전달하는 여러 물리적 행태의 통섭과 분절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문학의 한 부분들, 우리가 ‘장르’로 분류하여 문학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특화하였으나 이젠 이를 본래의 문학인 큰 그릇에 담아서 새로운 형태로 독자에게 다가가자는 것입니다. 문학은 있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누고 뭉치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학 이외의 예술 분야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러한 통섭 예술을 받아들여 새로운 형식의 예술로 발전시켜 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타 예술과 융복합하면서 제3의 예술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문화(Culture)와 경제(Economics)를 결합하여 ‘컬처노믹스(Culturenomics)’가 탄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결과적으로는 변화하는 사회환경과 이를 향수(享受)할 대중들이 요구하는 형태로 예술을 비롯한 문화가 변화 발전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든 학문이든 문화든 여러 갈래로 존재하기 때문에 용어의 뜻으로만 살펴보면 ‘분절(分節)’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갈래’와 ‘분절’은 개념상으로 크게 다릅니다. 여러 갈래는 낱낱이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며 분절은 하나의 개체로 존재해야 하는데 어떤 물리적 영향으로 갈라진 것을 뜻합니다.
한국문학의 문제점을 굳이 ‘분절’에서 성찰해 본다고 한다면, 그 의미를 찾을 수는 있을 듯합니다. 장르별로 나뉘는 형태가 그것입니다. 장르 고유의 예술성 유지 발전을 위해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형태입니다. 아무러하든 이 장르 형태 문학의 통섭과 분절이 한국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변곡점을 지닌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게 순서일 듯싶습니다.
3. 한국문학 장르를 넘어 통섭하자
우리 문학이 좀 더 발전하고 사회로부터 독자로부터 예술로 사랑받기 위해서는 장르를 넘어 문학을 통섭(統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통섭’이라는 단어를 새삼 언급하는 건 우리 문학을 새로이 발전 모습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각 장르가 벽(壁)을 넘어 서로 융합하며 새로운 문학의 꽃을 피우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얼마 전 어느 문인이 한 독자에게서 “문학이 왜 예술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며, 쓴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예술이 무엇인지 알면서 “문학이 왜 예술이냐?” 하고 물은 건 아닐 것입니다. 예술을 모른다고 해서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예술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나름나름 잘 삽니다.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 예술을 폄훼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와 예술을 모르는 채 각자 자기 삶의 길을 가는 경우는 다릅니다.
이 글을 읽고 걱정한 건 문학을 ‘왜 예술인지 모른다’라는 사실 하나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문학 작품을 잘 읽지 않는 새로운 원인을 여기에서 발견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체 원인은 아닙니다. 일부분이긴 하지만 우리 문인들이 이 부분을 여태 놓치고 있었다는 데서 반성과 함께 우리 문학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이 통섭입니다.
문학이 예술이니 아니니 하는 말이 생활 속에서 등장하는 데는 우리 문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문학이 예술인 줄 잘 알며 또 창작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으나 일상에서 문학 작품을 예술로 누리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문인들도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생활인입니다. 문학 작품 창작자(생산자)이면서 동시에 독자(소비자)이기도 합니다. 자기는 먹지 않는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맛있다며 먹으라고 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솔직히 질문하고 대답해 봅시다. 한 달에 문학 작품을 몇 편 또는 몇 권 읽습니까?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나무랄 때 ‘그 사람들’ 가운데 ‘나’는 끼지 않았는지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평소에 시인이 수필이나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든지 수필가가 시나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든지 소설가가 시나 수필을 잘 읽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장르 문인들도 그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장르에서조차도 다른 문인의 작품을 잘 읽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아동문학’은 어린이들만 읽는 문학 작품인 줄 아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문인들, 심지어 아동문학가들 가운데도 그렇게 알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동시와 동화는 어린이들만 읽는 문학이 아닙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가 읽고 감상하는 문학 작품입니다. 아동문학 개론을 보면 제일 먼저 우리 장르 문학이 어느 정도 폐쇄적인지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볼 겁니다. 아동문학은 어린이와 성인이 함께 읽는 문학 작품입니다.
아동을 독자로 하는 문학이 반드시 아동문학은 아니다. 아동을 독자로 하는 성인문학-아동도 성인 소설을 읽을 수 있으니까-도 있고 성인을 독자로 하는 아동문학-훌륭한 아동문학은 성인도 즐겨 읽는다. 메델링크, 안데르센, 와일드 등-도 있다.-조지훈
아동문학이 동심문학이므로 아동들은 생활하는 동심을 표현하는 문학이요, 성인들은 잠재한 동심을 발굴하는 문학이다.-박목월
아동문학이란 아동이나 동심적 성인에게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한 동요(童謠)·동시(童詩)·동화(童話)·아동소설(兒童小說)·아동극(兒童劇) 등의 총칭이다.
위 인용한 내용처럼 아동문학 독자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입니다. 아동문학가의 독자가 어린이들이라고 한정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시인도 소설가도 수필가도 모두 아동문학 독자입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장르 문학에 우리는 매우 폐쇄적이며 자기 장르에만 몰입하는 문인들을 많이 봅니다. 이런 폐쇄된 모습으로 일반 독자들에게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인은 모름지기 광의(廣義) 해석으로 문학 예술인이며 그러하므로 다른 장르 문학을 넘나들며 통섭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과도 통섭한다면 더욱 바람직 한 일입니다. 시인이며 화가일 수도 음악가이면서 수필가일 수도 소설가이면서 연극배우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다 통달하는 능력을 갖출 수는 없으나 적어도 다른 장르 예술을 이해하기만 해도 ‘예술’이라는 그릇에 함께 담깁니다.
장르의 벽을 넘어 문학을 통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문학을 총화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문학을 존중하고 문인을 존경할 때 독자들도 문학을 사랑합니다. 문학을 자기 장르의 좁은 울타리에 가두지 말고 그 벽을 허물고 통섭의 광장으로 나아갈 때 더 많은 독자가 우리 문학을 사랑할 것입니다.
4. 문학의 역할과 기능
문학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그 기능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즉 삶을 이끄는 가장 큰 에너지는 ‘관계(關係)’입니다. 이 관계가 풍성하면 삶의 질 또한 웅숭깊어집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일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난 관계 때문입니다. 형제자매와 동무들과의 관계, 사회에 진출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그뿐만 아니라 사건과 사물과의 관계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관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대상과의 만남이 힘이 되어 우리의 삶은 넓고 깊게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관계’는 한계가 있습니다. 평생 돌아다녀도 지구 전체를 볼 수 없으며 전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만나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삶의 질량(質量)이 다릅니다.
우리는 부족한 이 ‘관계’를 문학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한 편의 문학 작품에는 새로운 세상과 낯선 사건과 인물들이 있으며, 이를 읽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환경을 간접 체험하게 됩니다. 문학책 한 권을 읽으면 낯선 세상에 한 번 여행가고, 친구 한 명을 사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현실에서 채우지 못하는 체험을 이렇게 문학 작품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따라서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은 그만큼 삶의 질량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 읽는 일을 공부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물론 책을 읽으면 지식은 물론이고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책읽기의 목적은 공부가 아닙니다. 즐기는 오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여행하면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영화와 음악과 여행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즐긴 뒤 얻는 것이지 처음부터 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책 읽기는 미리 공부라 여깁니다. 그래서 책 읽기를 지겨워합니다. 올바로 독서를 즐기기 위해서는 책 읽기에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낯선 세상을 여행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을 먼저 찾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러면 책 읽는 일이 즐거울 겁니다.
이제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물으면 문학인들도 쉬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교양을 높인다, 삶의 질을 높인다는 등의 말은 막연한 개념 정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든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교양을 높이며 어떻게 삶의 질을 높이는지 구체적인 현상, 또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학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개념 정리 이상의 그 무엇을 눈앞에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학의 효용 가치를 쉬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문학은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예술 장르이면서 음악이나 미술처럼 쉽게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숙명을 안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에게 동화책을 사달라고 한 적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그 책에서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하면서 사주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며 돌아서서 한참 울었습니다. 책 한 권보다 쌀 한 됫박이 더 귀하던 시절을 당시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뒷날 내가 소설가가 되고 난 뒤 『한국문학의 위상』(김현, 문학과지성사, 1976)이라는 책을 읽고 어머니의 그 말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은 이 책에서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문장 들머리에 ‘역설적이게도’라고 미리 적은 건 ‘써먹지 못하는’ 그걸 써먹는 게 문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입니다. 문학은 당장 무엇을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되거나 힘이 될 수는 없지만, 쓸모없는 것이기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억압하거나 노예로 만드는 건 모두 쓸모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로 만드는 그 ‘쓸모 있는 것들’ 뒤에 감추어진 허상을 쓸모없는 문학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억압의 사슬을 풀고 자유 공간으로 나오게 합니다. 이게 문학의 힘이며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에 대해 해답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줄 압니다. 문학은 바로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비타민과 같은 존재입니다. 삶을 통해 얹게 되는 정신적 영양소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그런 비타민입니다. 우리가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면서 일일이 영양소를 찾고 재어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필요한 영양소를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 행위는 이처럼 우리가 하루에 세 끼 식사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당장 무엇이 내게 도움을 주는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행위가 쌓이면서 우리의 정신은 건강해집니다. 그렇게 건강해진 정신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자 문학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문학은 이렇듯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비타민과 같은 영양소를 줍니다. 문학 작품을 읽고 사랑하면서 여러분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희망합니다.
5. 문인의 몸만들기
하고 싶은, 또는 즐기는 일을 직업 삼아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문청(文靑)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꼭 이런 잣대만으로 행복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분들은 참 행복할 거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희망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얼마 전 어느 매체와 인터뷰에서 “선생님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문학은 나의 삶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할 터인데, 그러고 보면 낡고 입버릇처럼 하는 대답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는 이 말이 참 자랑스럽고 나를 치장하는 말로는 최상급이라 여깁니다.
27살 때 나는 철도대학을 나와 철도청에 다니다가 소설가가 되겠다며 느닷없이 사표를 냈습니다. ‘느닷없다’라는 표현을 쓴 건 무슨 계획이 있었거나 가족들과 한 번이라도 의논한다든가 그런 절차 없이 멀쩡하게 출근한 사람이 퇴근하면서 사표를 낸 겁니다. 직장 생활이 어려웠던 것도 아닙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소설을 쓸 수 있음에도 당시에는 ‘소설가’라는 직업이 따로 있는 줄 알 정도로 문학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면서 소설 쓰는 걸 마치 문학을 여기(餘技)로 여기거나 훼손하는 것쯤으로 인식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치기이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하지만, 당시 나는 그런 소설가가 되어 딴눈 팔지 않고 소설만 쓰면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설가가 되는 꿈은 이루었지만, 소설 쓰는 일이 나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걸 소설가가 된 뒤에야 알았습니다. 그래도 소설 쓰는 일과 동떨어지지 않으려고 출판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며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이때도 나는 누가 직업을 물으면 꼭 ‘소설가’라고 대답했고, 서류 같은 데 직업란에 꼭 ‘소설가’라 적었습니다. 그러고는 매일 200자 원고지 3장을 쓰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냥 넘기면 이튿날은 6매를 써야 합니다. 지금도 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맨토는 농부입니다. 매일매일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작가는 매일매일 작품을 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농부이듯이 작품을 써야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내 건강이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나는 그런 작가로 살아갈 것입니다.
문인은 어떤 장르의 작품을 창작하든 그 문학 작품을 창작해 내는 몸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작가의 몸만들기’라 이름붙였습니다. 소설을 써서 작가가 된 게 아니라 작가가 되어서 소설을 쓴다는 등식을 만든 겁니다. 시, 수필, 아동문학을 비롯한 모든 장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문인은 그 장르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몸만들기’가 먼저 이러우져야 합니다. 문청(文靑) 시절 소설 쓰는 방법을 얻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했는데, 이것이 뒷날 좋은 작품을 쓰는 데 오히려 방해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시인이 되어서 시를 쓰고, 소설가가 되어야 소설을 쓰며, 수필가가 되어야 수필을 쓴다는 정신을 우리 문인들은 가져야 합니다. 문학은 기술이나 방법으로 창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 AI 챗지피티(Chat GPT) 출현과 문학의 위기 문제
AI 챗지피티(Chat GPT)가 등장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어떤 분야는 두 손을 들고 환영하는가 하면, 또 다른 분야에서는 우려 속에 이 희한한 ‘문명 물질’의 출현을 잔뜩 긴장하며 경계합니다.
우선 이 ‘챗지피티’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Chat GPT란,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가 개발한 언어 모델 이름입니다. ‘수다 떨다.’ 또는 ‘담소하다.’라는 뜻인 chat(우리가 핸드폰에서 이용하는 ‘채팅’이 이것이다)이란 단어에서 보듯이, 사용자와 주고받는 대화를 인공지능이 그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 아키텍처(Architecture)를 기반으로 OpenAI가 개발한 AI 언어 모델이 ‘AI 챗지피티’입니다. 아키텍처는 컴퓨터 시스템 또는 구조를 말하는 전문용어이며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공지능(人工智能)으로 인간처럼 학습 능력을 갖춘 컴퓨터 과학의 한 분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OpenAI는 2015년 12월 11일 미국에서 샘 울트먼 등 여러 명이 설립한 단체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본사가 있는 비영리법인입니다. GPT-1로 출발하여 현재 GPT-5가 개발되었으며, 앞으로 계속 진화할 것입니다. 비상장 기업인데 불구하고 2023년 7월 현재 연매출 290억 달러(우리 돈 약 34조 8천억)를 달성한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AI 챗지피티는 참 복잡한 개체라 컴퓨터 시스템을 잘 모르는 일반인은 그 구조를 쉬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AI 챗지피티가 인간이 하는 두뇌 활동을 초인적 능력으로 다 해낸다는 정도까지만 알아도 됩니다. 현재 GPT-5는 문학 작품을 집필하고 음악을 작곡하며 그림을 그리는 수준입니다.
우리 문인들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 일본에서는 이 AI 챗지피티가 생산(의도적으로 집필이란 단어를 피했습니다)한 문학 작품이 공모전 예선을 통과했다는 뉴스도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 AI 챗지피티 출현으로 사회문화가 새로운 구조로 바뀔 거라는 건 예상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술 작품 창작에는 적극 활용할 수는 없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물론 그러한 기능은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그 행위를 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고 판단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문학은 인간이 인간을 탐구하는 예술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산 능력을 뛰어넘는 메타 기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간 지능이 사유(思惟) 시스템을 가진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세상이 온다면, 이 지구에는 인간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불행이 닥칠 겁니다. 인간 스스로 인간이 존재하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195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채택된 세계저작권협약과 1988년에 협약한 베른조약 해석에 따르면 저작권은 인간이 창작한 저작물에만 해당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 법원에서 인공지능 창작물은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으며, 미국 특허청에서도 특허등록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또한 침팬지가 촬영한 훌륭한 사진에 저작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도 AI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인간’이라는 시스템만 가지고 왔습니다. 이 상태로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일부 신체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설 수도 돌아누울 수도 없으며 사물의 인식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다가 사회현상의 낱낱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필자가 주관적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대개 이 나이가 7살부터입니다(6살까지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시스템 이외의 행위를 단독으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녀 7세 부동석(不同席)”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면서 받아들인(input) 지식, 지혜, 체험 등을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자신의 시스템으로 연산하여 표현(output)합니다. AI 챗지피티가 바로 이것을 컴퓨터 시스템으로 옮긴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가 가진 시스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스템을 갖춘 게 AI 챗지피티입니다, 처음 개발하여 세상에 내놓은 AI 챗지피티는 신생아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하나의 시스템에 불과 합니다. 받아들인(input) 지식, 지혜, 체험이 없으면 온 오프(on, off) 불만 번쩍이는 컴퓨터 시스템인 기계 덩어리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생산한 지식과 예술인들이 창작한 예술품의 패턴을 인식(input) 시켜야만 비로소 연산작용을 시작해냅니다(input). 이 구조가 우리 인간을 그대로 닯았습니다. 시 한 편, 수필 한 편 읽지 않고 인문학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느닷없이 시를 쓰고 수필을 쓰지는 못합니다. AI 챗지피티 역시 이러한 학습을 거쳐야만 문학 작품을 생산하는 기계로 탈바꿈합니다. 따라서 AI 챗지피티가 학습한 문학 작품에 대한 저작권 사용에 대한 인허가 제도가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AI 챗지피티의 예술 작품 창작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국내에서도 관심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제도가 정리되면 문인들의 창작 작품이 AI 챗지피티에 밀려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극단적 우려는 사라질 것입니다. AI 챗지피티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분야에 인간을 위해 유용하게 쓰여지는 고도의 도덕성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7. 마무리
몇 개의 단락으로 문학의 통섭과 분절, 문학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흐름을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문학이 존재하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를 전제로 건전한 유통과 독자층을 형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리 문학 발전을 위해 중요합니다. 이는 문학인 개인, 또는 지역 문학 활동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학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창작자와 출판사 및 잡지사, 그리고 독자층이 잘 형성이 될 때 우리 문학의 활성과 발전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정부와 사회, 그리고 문학단체와 문인 모두 힘을 합쳐 이루어야 할 공동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