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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나래」를 한국 시조 발전의 디딤돌로 자부하는 이유.
1983년 3월 1일,『나래시조문학』11호를 펴낸다. 판형이 바뀌어서 12×20.4, 갱지, 168면의 아담한 동인지이다. ‘끝이 없는 마라토너’라는 석주의 권두언이 실려 있고, 곽영기, 이종훈, 이요섭, 이호광, 김공천, 최상남, 주강식 등의 1982년도《시조문학》지 천료 신예 시조시인들의 작품을 특집으로 싣고 있다. 이어서 동인 37명의 新作이 아침 이슬을 머금은 산나리꽃처럼 싱싱한 차림으로 흔들리고 있다. 후기에는 제38회《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된 김경자 동인,〈매일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된 필자,《시조문학》봄호에 천료된 강세화, 남전희 동인 등의 이름들이 보이고 있다. 사실 당시 「나래」에서는 해가 바뀔 때마다 올해는 누가 신춘문예에 당선될 것이며, 「월간문학」을 비롯한 각 문예지의 신인상에는 누가 당선될 것인지, 추천의 관문은 누가 통과될 것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신문과 문예지를 살피기에 바빴던 것 또한 뺄 수 없는 재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꼭 실현되는 사실이었다. 1982년 歲暮, 대구 동인 호텔 옆 우리의 즐겨 사용하던 여관이었다고 생각된다. 강세화, 허민홍, 그리고 필자가 모여 곧 개봉될 〈매일 신춘〉과 《월간문학》신인상에 누가 당선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한 적이 있었고 며칠 뒤 결과에서는 필자가 신춘문예에, 강세화, 허민홍 두 시인이 나란히《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기회에, 각 문예지에 추천 완료와 또는 신인상을 제외하고라도 신춘문예와 《월간문학》의 신인상에 당선된 동인들만이라도 정리해 봄으로써 왜 「나래」가 한국 시조 발전의 디딤돌임을 자부하기에 주저하지 않는가를 증명하고자 한다.
1981년 : 정석주(매일신문)
1982년 : 정석주(월간문학), 김경자(중앙일보), 남궁 영(조선일보)
1983년 : 리강룡(매일신문), 강세화, 허민홍(월간문학), 신진식(민족시 백일장 및 현대시조 백일장 장원)
1984년 : 이인식(중앙일보), 유승식(중앙일보 백일장 장원)
1985년 : 박영식(동아일보), 이창희(월간문학), 김민정(시조문학 백일장 장원)
1986년 : 오승희(중앙일보), 최길하(중앙일보 백일장 장원)
1987년 : 민병덕(매일신문), 김정희(? 신춘 문예)
1992년 : 권갑하(조선일보, 경향신문)
이 밖에도《시조문학》을 비롯한 각 문예지에 추천을 거친 동인, 위에 예로 든 《월간문학》이외의 문예지에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동인들을 합하면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든다. 이처럼 ’80년대 우리의 행진은 참으로 화려하였다. ’80년대를 마감하면서 전 동인이 등단의 과정을 완료하면서 신인 등단의 행진은 끝났다. 다만 우리의 젊은 동인 권갑하가 1992년의 벽두에는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의 양 신문 신춘문예에 동시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화려한 등단 행진의 有終之美를 이루었다. 필자는 이 자리를 통하여 우리 문단에 감히 묻고 싶다. 이 땅 어느 동인회가 한 십년에 걸쳐서 이만큼 끈질긴 생명력으로 시조단의 텃밭갈이를 위하여 매진해 온 실적이 있는가를. 그래서 우리는「나래」가 한국 현대 시조 발전의 한 큰 디딤돌이 되었음을 자부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12호에서도 새로 동행의 손길을 내민 두 분의 芳名이 보인다. 서옥선과 이인식 동인이다.
작품을 보기로 한다.
안으로 안으로만/ 먹혀 온 내 사랑이
한여름 볕살 아래/ 쓰러지는 연인이듯
거치는 한자락 이불/ 시린 마음 붙이네.
- 서옥선,「친구야」3/3 -
서옥선 동인의 ‘친구야’라는 작품이다. 徐 동인은 11호에서 첫선을 뵌 뒤 12, 13호까지 작품을 발표하고는 우리 곁을 떠나 버린 短命한 동인이다. 필자는 徐 동인을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약력도, 본적․주소도 알지 못한다. 겨우 서투른 걸음마만 시작하다가 떠난 동인이기에 작품 한 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한다.
황홀한 시간들이
영혼을 쌓아올려
玉冠을둘러쓰고
횃불을 비취이네
영혼들
무한 깊숙히
뿌리 박은 숲일레.
환상의 뼈대들이
금빛으로 짜여져서
바다의 옷고름들
바람 먹은 꾼을 꾼다.
빛이여
다음 세상을
불러와서재운다.
- 이인식,「산호초」전문 -
이인식의 첫 작품이다. 李 동인은 첫걸음부터 상당히 단단한 뼈대를 선보이고 있다. 산호초를 바라보며 /황홀한 시간들이/영혼을 쌓아 올려//玉冠 둘러쓰고/횃불을 비취/인다고 노래할 수 있는 詩的眼目을 가졌으니, 그는 분명 상당한 수련을 거친 뒤에 우리 앞에 나타났음을 감지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환상의 뼈대들이/금빛으로 짜여/졌다고 표현하는 데 와서는 이인식 동인의 시적 재질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크게 뜨게 하고 있다. 사실 이인식 동인은 「나래」에 동행하기 전에도, 아마추어 시절 필자와 함께 중앙일보 시조란을 부지런히 오르내린 일이 있어 낯설지는 않는 이름이었다. 이후 그는 1984년에는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되었고, 「한가람 문학회」를 이끌면서부터 「나래」를 떠난 분이다. 지금은 직장에서도 퇴임을 하고 月河선생님과 함께 「시조문학」지 편집위원으로, 그리고 중앙일보사에서『한국을 이끄는 인물들』편찬 팀의 일원으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 1983년에는 필자의 작품 하나를 正筆揮毫로 주실 정도로 꼼꼼하고 정이 깊은 분이다.
1983년 6월 1일,『나래시조』제12호를 상재한다. 책머리에는 ’83년 상반기 동인 활동의 실적을 정리하고, 8월에 있을 제5회 동인 작품전을 위한 석주의 간곡한 부탁이 실려 있다. 12×20.4, 갱지 122면의 소담스런 장정이다. 西崗 정덕채님의 멋진 예서체 題字가 동인지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26명의 동인이 100여 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12호에도 새로운 이름들이 보이고 있다. 김길원, 황인원 두 분의 芳名이다.
김길원은 이후 1986년까지 12-15, 17-23호에 걸쳐 여덟 번에 걸쳐 작품을 발표하며,《시조문학》에 초회천 관문까지 통과하고는 어찌된 영문인지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피로 뱉는 마음이사
무엇으로 메꿀 건가.
빛살고운 불티 날려
그늘로 지는 아픔.
한 세상 시름 굴리듯
꽃그늘을 굴린다.
오롯한 마음 하나
온 가지로 받쳐들고
세월도 달래보면
저 빛바람 향기런가
한 둘레 다 비워내듯
홀로 타는 열기여.
-김길원,「장미 곁에서」전문 -
김길원의 첫 작품이다. 紅薔薇 곁에 서서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속성을 여실히 묘사해 내고 있다. 선홍의 장미 색깔을 /피로 뱉는 마음/빛살 고운 불티/홀로 타는 열기/ 등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능력을 높이 사고 싶다. 또한 꽃대궁 위에 滿開한 장미 송이의 모양 묘사 또한 /오롯한 마음 하나/온 가지로 받쳐/든다는 식으로 표현의 묘를 살리고 있음은 그가 벌써 상당한 詩的 修鍊을 거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한 세상 시를 굴리듯/꽃그늘을 굴린다./와 같은 流音의 반복 사용을 통하여 부드러운 音感의 효과까지 거두고 있어 독자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 첫번째 걸음마부터 이렇게 감칠맛 나는 작품을 들고 나와 동인지를 빛내며 곧 바로 초회천까지 오르는 실력을 보이더니 佳人薄命이던가, 또 그만큼 빨리 하차해 버리고 영영 소식을 알 길이 없으니 못내 서운할 뿐이다.
다복솔 뿌리마다/햇살이 쏟아지고
가슴을 맑히면서/일어서는 길가엔
청포빛/스물다섯의/맥박이 앉는다..
쪽문 열면 다가드는/초록빛 숨결
스미는 체온 끝으로/淸明을 읽으며
가지에 걸린/휘파람 소리/풀언촣는 설레임.
빛 바랜 상처랑은/세월 속에 널어놓고
심상의 발자국에/턱을 괴며 앉은 고요
무너진/얘기를 세워/망울지는 소망이여.
- 황인원,「오솔길」전문 -
황인원의 작품이다. 황인원은 앞에 소개한 김길원보다 더 단명한 동인이다. 12호에 나타나 13호에는 거르고 14호에서 끝나고 있어 작품의 경향도, 작자에 대해서도 필자는 아는 바가 없다. 위 작품은 /다복솔 뿌리마다/햇살이 쏟아지/는 오솔길을 걸으며, /心象의 발자국에/턱을 괴며 앉은 고요/를 따라 상념의 나래를 편 작품으로 읽힌다. 떠오르는 심상을 비교적 무리 없이 잘 갈무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둘째수 초장 둘째구와 종장 첫 음보에서 시조의 율격을 놓치고 있다. /쪽문 열면 다가드는/초록빛 숨결/처럼 8․5조의 리듬을 타는 것과, /가지에 걸린/휘파람 소리/풀어놓는 설레임/처럼 종장 첫 구를 5음절로 배치하여 시조의 틀을 깨고 있는 것 등은 형식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끝수 종장도 非文이 되어 떫은 느낌을 주고 있다.
12. 때로는 바람처럼, 때로는 파도처럼
-동인 시화전 정리-
제13호 동인지를 열기 전에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동인 작품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1회 동인 작품전은 경상도 예천 땅 그 중에서도 풍양 산골의 시장통에 위치한 ‘반월 다과점’에서 막을 올린다. 참여 동인은 정석주, 유재희, 윤신근세 동인이 각각 4수씩을 출품하여 12수의 작품을 걸게 된다. 1966년 12월 22일부터 1967년 1월 3일까지, 歲暮에서 新年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택하여 창회 기념 시화전을 가진 것이다. 그 때 윤신근의 말을 빌리면 감자로 도장을 만들어 零下의 바람을 무릅쓰고 전봇대에 갖다 붙이며 문학에의 불을 지폈다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제1회 초대장에는 유재희의 글이 보이고 있다.
제2회는 1967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문경군 점촌읍(이후 점촌은 1986.1.1-1994.12.31까지 市로승격되어 점촌시라 명명하다가 1995.1.1.부터 市의 이름을 문경시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온’다방에서 갖게 된다. 윤신근, 정석주, 민병찬 세 동인이 5수씩 출품하여 15수의 작품을 걸게 된다. 초대의 시는 민병찬이 읊고 있다.
제3회는 1969년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점촌 ‘복’다실에서 가진 뒤, 이어 자리를 옮겨 문경군 신기리의 ‘연’다실에서 10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갖게 된다. 제3회 작품전은 방위성금 모금을 위한 행사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초대의 시는 민병찬이 쓰고, 출품은 민병찬이 9수, 정석주가 7수이며, 천재수라는 분의 찬조 작품 1수가 눈에 뜨인다.
제4회는 창회 제15주년 기념이란 의의를 부여하면서 장소를 옮겨 부산역 앞 ‘마차’다실에서 열게 된다. 때는 1981년 10월 9일부터 11일까지이다. 제4회 작품전부터 비로소 「나래」가 지역성을 탈피하고 전국을 향하여 깃발을 올리게 되었음을 표방하게 된 것이다. 장소만 부산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한국시조시인협회의 후원을 얻게 된 점과, 참여 동인의 수가 20명에 정완영, 박재삼 두 분 원로의 작품이 빛나고 있어 그 질적인 향상도 꾀하고 있다는 면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전이다. 초대의 변은 정석주가 쓰고 있다. 제4회 작품전에 참여한 동인의 芳名을 수록한다.
감충효, 권형하, 김두년, 김벽파, 김필곤, 남궁 영, 박명진, 신순애, 신후식, 윤신근, 리강룡, 장정애, 전향란, 정석주, 정애경, 최광순, 최상남, 허민홍, 허성욱, 고명진.
제5회 작품전은 1983년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다시 점촌 ‘정’다실에서 막을 올린다. 한국시조시인협회와 문경문화원의 후원을 얻고 있다. 정석주의 초대의 글과, 초대 작품으로 리태극, 정완영, 림영창, 정소파정재익, 김어수, 이정환, 김필곤, 김경자의 이름이 보인다. 참여 동인으로는,
유승식, 최지운, 정공량, 서옥선, 신후식, 이대영, 박수열, 신진식, 이인식, 강세화, 허성욱, 민병덕, 림혜미, 장정애, 정석주, 허민홍, 정광영, 민병찬, 감충효, 유윤희, 김인숙, 경규희, 이창희, 권형하, 김시현, 윤신근, 리강룡 등 27명이다.
제6회는 1985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제5회와 같은 장소인 점촌 땅 ‘정’다실에서 열게 된다. 정석주의 초대의 글이 있고, 제6회 작품전에서 특기할 것으로는 전시 작품의 작품집을 책으로 상재하여 배포한 점이다. 한국시조시인협회, 현대시조시인협회, 문경문화원의 후원을 얻고 있고, 정완영, 박재삼, 리태극, 정소파, 정재익 등 시조단 원로의 芳名과, 晩翠 최일환 선생의 초대 휘호 3점이 작품전의 격을 높이고 있다. 참여 동인 27명의 芳名을 기록한다.
강세화, 경규희, 김소내, 김영희, 김인숙, 리강룡, 민병찬, 박용찬, 박필상,
유승식, 육고수, 이상진, 이철화, 정광영, 정석주, 강호인, 김민정, 김시현,
김정희, 민병덕, 박영식, 신후식, 유윤희, 윤신근, 이재천, 장정애, 허성욱.
제6회 작품전에서는 한 동인이 2점 이상 출품한 분도 있어 작품의 수는 42점이었다. 문화, 그 중에서도 문학의 불모지인 광산촌 점촌땅에 數回에 걸친 동인 작품전릉 가짐으로써 문학의 불씨를 지피는 역을 우리 ‘나래’가 담당했지 않나 생각한다.
제7회는 석주가 가고 필자가 회장의 자리를 이으면서 대구 땅 동성로의 다실 ‘열림’에서 가지게 된다. 1988년 10월 1일-10월 3일까지 3일간이다. 석주가 가고 나서야 그의 빈 자리가 너무 큼을 실감해야 했다. 그러나 동인 제위와 대구문인협회 소속 문인, 그리고 많은 지인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성황리에 끝낼 수 있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영남시조시인협회의 후원을 얻어 대구 하늘 아래 文香과 墨香을 은은히 뿌린 3일간이었다. 초대 시인은 리태극, 정완영, 박재삼, 양원식, 류상덕, 김몽선 제씨이며, 참여 동인은 20명이다.
강호인, 권갑하, 김시현, 김인숙, 김정희, 남전희, 림혜미, 민병찬, 방성운, 성덕제, 신후식, 유윤희, 윤신근, 이대영, 이상진, 장세득, 정광영, 최길하, 허민홍, 리강룡
그리고 지금은 동행의 길을 걸은 지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지만, 박재숙, 안중식 두 분 동인이 그 때 후원 회원의 자격으로 작품을 출품하였다. 제1회-제6회까지의 방명록은 유실되어 알 수 없으나 제7회의 방명록은 필자가 보관하고 있어 지금 펼치니 감개가 무량하다. 필자의 초대시를 소개한다.
때로는 바람처럼
때로는 파도처럼
반도를 선회하는
한 무리 「나래」들이
은은히
墨香을 풀어
「열림」에서 만납니다.
여기 남도땅
달구벌 詩鄕에서
일곱 번째의 해를 치며
새벽을 두드립니다.
이 가을
상달 초하루
「열림」에의 초대입니다.
이후 10년이 흐르도록 아직 제8회 시화전은 가지지 못했으니, 이제는 성숙한 모습으로 飛翔의 辨을 펴 보일 때도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13.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지원 시작하다.
1983년 9월 1일,『나래문학』제13호를 펴낸다. 특기할 것은 13호에서 비로소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인지의 면모도 달라진 점이 눈에 뜨인다. 지질이 갱지에서 모조로, 지금까지 100여 면으로 발간되던 동인지가 224면으로 증면되었다. 책머리에는 정석주의 「상쾌한 고독을 위하여」가 보이고, 특집으로 <비화시조문학회> 동인과, 전라도의 <섬문학동인회>의 작품을 초대하고 있다. 특집 논단으로 박영교 시인의 「시조와 그 작법상의 諸問題」가 실려 있고, 민병찬, 정공량, 권형하, 허성욱 등의 동인 수필, 그리고 제5회 동인 작품전에 전시하였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책 뒤에는 창간호로부터 계속되는 총목차가 실려 있고, 면수의 기록은 13호의 면수와, 창간호로부터 계속되는 총 면수를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창간호로부터 제13호까지의 총 면수를 보면 1656면이다.
제13호에서 눈에 뜨이는 작품 하나를 들어 본다.
잎 지는 마당 가에
비워 둔 분(盆) 언저리
고여 흐르는 하늘도
차마 못 부침(浮沈)하는
뒷꿈치
야윈하늘이
잎 하나를 떨군다.
쓰르라미 지문(指紋) 놓아
툇마루를 긋고 올 즈음
탁본처럼 떠낸 달빛
문득 뵈올 울오메여
때없이
흐르는 구름
못 달래는 산 주름살
- 허민홍,「가을산이 내려와서」전문 -
아정 허민홍은 제2호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제13호를 끝으로 절필하고 속세로 돌아간 시인이다. 그러나 「나래」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서 석주가 간 뒤 필자가 회장을 맡고 그 상당 기간 동안,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동인지의 발간을 맡아 주었다.
예로 보인 그의 절필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하나를 발표해도 수수편편이 수준작이었다. 그러던 그는 약관에 등단을 마치고 벌써 출판과 서점을 경영하는 수완을 보이더니 마침내 시조단을 떠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다.
제14호『나래동인시조』는 1983. 12. 1에 상재한다. 정석주의 「한 해를 보내며」라는 권두언에서는 풍성했던 한 해의 수확을 정리하고 있다. 신춘문예 당선자 : 리강룡,《시조문학》천료자 : 강세화, 남전희, 리강룡, 윤신근,《시조문학》초회 추천자 : 허성욱, 전향란, 유승식, 김시현, 이인식, 신진식, 정광영, 황인원, 박용찬,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자 : 강세화, 허민홍, 정공량, 샘터 시조상 : 유승식(당선), 김광경(입선), 차정미(입선), 제8회 민족시 백일장 : 신진식(장원), 이대영(입선), 제3회 중앙시조 백일장 : 유승식(장원), 황인원(차하), 정공량(입선) 등을 정리하고 있다. 특집으로는 현역 여류 시조시인 신작과 시조 동인회 「素心」회원의 작품, 동인 특집으로서 강세화, 유승식, 정공량, 김소내, 신진싣, 오승희, 이대영, 민병찬, 정광영, 신후식의 송년 수필이 있고, 동인 신작에는 26명의 동인이 참여하고 있다. 제14호에는 새로운 이름이 세 분 보이고 있다. 박용찬, 오민필, 유광일이 그 芳名이다.
꿈속에도 흐느끼던
초승달 눈짓만큼
해종일 강심(江深) 밟고
목 축이던 꽃술인데
여며 논
터지는 가슴
갈바람에 띄우누나.
- 박용찬,「갈대」2/2 -
박용찬의 첫 작품 「갈대」이다. 박용찬은 부산 출생으로 동아대학을 졸업하고, 1978년에 벌써 경영연구소 주최 시 현상모집에 당선된 것을 비롯하여, 해기사 협회 시당선, 대학생 문예 시 당선, 경남 교원 예능 실기대회 시부 입상 등의 다채로운 수상 경력을 가진 시인이다. 나래에 들어온 뒤 곧《새교실》과《시조문학》에 천료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등단하자 곧 절필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경남 어디쯤서 교단을 지키고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소식이 묘연하다.
위 작품 ‘갈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박용찬의 제재를 다루는 솜씨는 범상치 않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산사(山寺)의 밤’, ‘남해에서’, ‘박꽃’ 등 세 수를 더 선보이고 있다. 4수가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그의 능력을 짐작하는 데 충분하다. /깨어진 기왓장에/ 은빛 싣고 내린 달빛//삼경/깊은 밤을/연꽃으로 피우면서//(山寺의 밤), /물빛 하늘빛/뒤엉킨 속살바다/(남해에서), /새도록 날을 갈아/흰 갈기 나부끼면//돌담장에 쓸리던 넋/고향 하늘 다가서고/생명을 깃으로 접어 눈망울에 차오르네//(박꽃) 이처럼 각 작품마다 뛰어난 묘사 능력 내지 소재 해석 및 분석력을 선보이면서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했던 동인이었다.
파도에 지치면
달빛에 잠이 들고
종교보다 성스런 의지
침묵에서 이제를 찾는
지금은
더 큰 빛으로
온 세월을 얽는다.
-오민필,「이견대」2/2 -
오민필 시인도 이제 갑년을 넘기셨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 정정하게 나래의 무거운 짐을 직접 지시면서 후학들을 위해 버팀목이 되어 주고 계신다. 그 동안 끊임없이 노력하셔서 국어교육학쪽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한편, 어려운 박사 학위까지도 취득하셨고, 늦게나마 승진의 기쁨까지도 누리게 되셨으니, 전 나래인의 이름으로 축하의 잔을 드린다. 하마 14,5년 전인가 보다. 석주와 필자는 시간이 있으면 보헤미안처럼 전국의 동인을 찾아 떠돌아다니곤 했었다. 겨울바다를 보러 가자는 석주의 청에 울산행 버스를 탔다. 강세화, 박영식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오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 처음이라고 기억된다. 신선한 고래 고기의 맛에 밤을 새우며 인생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하던 기억이 어제 같은데 벌써 세월은 우리를 여기까지 갖다놓고 말았다.
각설하고 오 선생님의 첫 작품「이견대」이다. 같이 선보인 작품「대나무」「동백」「흙」등을 통하여 아직 시조의 걸음과 이미 창출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지만 40대 후반에 시작하신 시조 공부가 그리 쉽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참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첫 작품부터 묵직한 역사적인 소재 선택과 시의 걸음이 그의 성실한 삶의 걸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옥살이 태형이라
장독이 슨 아픈 결
옷고름 무늬로 져
한 가슴 타던 불씨
꽃 숨결
사루던 하늘
하냥 그리 곱구나.
- 유광일「春香詞」3/3 -
유광일은 제14호에 단 한 번 참여하고 끝낸 분이다. 얼굴도, 주소도, 이력도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춘향사」니,「신 정읍사」니 하는 작품들을 보아서 전라도 어디쯤의 동인으로 생각되기도 하나 석주가 가고 없으니 알 길은 바이없다. 어쨌거나 이러한 끊임없는 새 동인의 영입으로 봐서 석주가 얼마나 발분망식했던가를 엿보게 하는 데 충분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새 동인의 영입에 대하여 논의도 일어나게 되어, 1984년 말 정기총회에서는 새 동인 영입에는 총회의 동의를 얻을 것을 가결하고 있다. 예로 보인 유광일의 작품은 춘향전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다. 첫 수 종장에서 /나는야 할배가 쓰던/북채 잡아 볼거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춘향전의 내용을 자신의 것화하여 작품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 돋보이고 있다.
제15호『나래시조문학』은 1984. 3.1에 발간한다. 152면, 모조, 12×20.2㎝이다. 권두에는 석주가 ’84 정기총회를 마치고 나서의 소감을 적고 있고, 특집으로 ’83《시조문학》지 출신 신작을 싣고 있다.
강세화, 이일향, 장병우, 박달수, 리강룡, 김근주, 전태익, 윤정란 등 8명이다.
동인 신작에는 30명의 동인이 참여하고 있다.
’84년 초 정기총회에서, “새로운 동인을 영입할 때는 작품의 수련 정도와 시조에의 애착도 등을 살펴서 금방 참여했다가 견디지 못하여 금방 떠나는 동인이 없도록 하자.”는 결의에 따라 동인지 제15, 16, 17호를 펼치면 새로운 동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제16호 동인지는 1984년 6월 1일, 114면 모조, 12×20.4㎝의 판형이다. “태양의 계절을 맞이하여”라는 석주의 책 머리글과 24명 동인의 참여로 꾸며져 있다.
14. 유실된 자료에 대한 아쉬움
1984년 3월 1일, “나래시조문학” 제15호를 점촌의 慶一印刷所에서 발간한다. 정석주의 정기총회를 마친 뒤의 辯이 있고 특집으로 1983년《時調文學》誌 출신의 新作을 초대하고 있다. 신인들의 이름과 작품을 적는다. 강세화 /눈 오는 날/, 이일향/서귀포의 아침/, 박달수/봄꿈을 트는 화분/, 리강룡/다듬잇돌/, 김근주/봄날 거리에서/, 전태익/첫눈이 오면/, 윤정란/연가/ 등이다.
동인 신작으로는 감충효 외 29명의 작품들이 실려 있고, 후기에서는「나래기록사진첩」 제작을 위한 자료를 모은다는 광고가 눈을 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한창 전국의 명승고적이나 시의 산실을 찾으면서 또는 전국 시조 백일장 현장에서의 생생한 기록들을 담은 필름들이 상당수 모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석주가 가고 그 가정마저 순탄치 못하여 그가 생명처럼 아끼던 나래에 관한 각종 기록을 비롯하여 서재를 꽉 채웠던 귀한 책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남은 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死者 앞에 서기 부끄러울 뿐이다. 차라리 그 때 욕심차린다는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필요한 책과 자료들을 우리 회에서 챙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5. 1984년의 신예 시인들
1984년 6월 1일, “나래시조” 16집을 펴낸다. 순백 모조 114쪽 분량에 24명의 동인들이 참여하였다. '태양의 계절을 맞이하여'라 題한 정석주의 권두언에서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등단의 방명을 보이고 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동시에 '시조문학'지에 천료된 이인식 동인,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고 동시에 '시조문학'지에 천료된 정공량 동인, '현대시조'지에 천료된 김정희 동인, 중앙시조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힌 뒤 '시조문학'지에 천료된 유승식 동인, 민족시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히고 역시 '시조문학'지에 천료된 신진식 동인, '시조문학'지에 천료된 박필상 동인, '현대시조'지에 천료된 김광경 동인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1984년도에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부터 동인지 발간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함께 실려 있다. 16집에서는 이들 새로운 시인으로 출발하는 7명의 동인 가운데 동인지에 작품을 싣지 않은 김광경, 김정희 두 분을 제외한 5명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휘둘린 목숨 한 금/ 벗어 둘 터도 없이
시퍼런 칼날 세워/ 난도질한 이승 뜰에
켜켜로/ 쌓이는 어둠/ 비질하는 저 소리
-박필상,「바람」2/3 -
햇살은 또 어디서/ 마름질로 스쳐가고
들녘 그 언덕에/ 고개 드는 갈대꽃들
사랑은/ 능금빛 웃음/ 네 가슴에 타오르는
-신진식,「空」2/3 -
뱃속을 채우려면/ 구름만 흘러가고
마음을 비워내면/하늘이 가득 찬다.
아버님 기침소리가/ 맴을 돌던 항아리
-유승식,「항아리」3/3 -
감감턴 세상 한 끝/ 작은 배로 닿아 들어
싣고 온 시간들을/ 넋 놓듯 보내누나.
가만히/ 딛어 오르면/ 갈대 새 순 뽑는 바람.
-이인식,「나 또한 어부되어」1/2 -
끝끝내 닿아 봐도/ 비워질 듯 밀려오는
수많은 탑 그늘로/ 쏟아지는 잔 메아리
떠도는/ 청명한 사연/ 목을 놓아 울고 있다.
- 정공량,「달빛 아래서」2/3 -
’84년도의 신춘문예 또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이나 시조 전문지에 추천의 과정을 거친 다섯 분 신예 시인들의 작품 중에서 각각 한 수씩을 골라 보았다. 지면상 전체 작품을 선보이지 못함이 아쉽지만 그런 대로 ’84년도 신예 시인들의 역량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의의도 있지 않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박필상의 ‘바람’은 밤에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의 실체, 그 바람이 휘젓고 있는 밤 뜨락을 바라보며 시인은 지금 /눈 닦고 귀 밝히고/ 바람의 속성을 성찰하고 있는 중이다. /휘둘린 목숨 한 금/ 벗어둘 터도 없이/ 지향 없이 떠도는 바람이 이 저녁에는 /이승 뜰에 켜켜로 쌓이는 어둠을 / 쓸어내고 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박필상의 홀로서기의 모습이다. 천지에 미만한 실체에 박필상 나름으로의 재해석을 가하고 있다. 함께 선보이고 있는「가을밤․벌레소리」「돌」에서도 그 능력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의 신진식의 詩作態度는 다분히 감각적이다. 앞에 보인 박필상의 ‘바람’이 실체가 없는 소재라면 신진식의 ‘空’은 우리의 五感으로는 느낄 수 없는 추상적인 제재인 바, 그 경향에서도 어쩌면 약간은 일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空’이란 추상적인 소재를 /햇살의 마름질, 고개 드는 갈대꽃/이나, 사랑을 /능금빛 웃음/등으로 감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마음속의 상념들을 우리 주변의 구체물들로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다음은 유승식의「항아리」이다. 시의 내용을 보아서는 작자 당대에서 구한 항아리가 아니라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항아리인 것 같다. 둘째 수 종장에서 /어머님 고운 손때도/ 향기 되어 고여 있다/라든지, 셋째 수 종장의 /아버님 기침소리가/ 맴을 돌던 항아리/를 보아서 그러하다. 사실 우리는 도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온갖 상념에 잠길 때가 많다. 만든 이의 손길을 느끼기도 하고, 그 도자기를 어루만지던 그리운 이를 생각하기도 하고, 바람이라도 지날라치면 우우우웅 소리를 내기도 하나 도자기는 그 소리를 담아두지 아니하고 곧 비워 버리는 속성을 바라보면서 주제넘지만 우주의 신비 같은 철학적인 경지까지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작자도 이 도자기의 속성을 잘 그려내고 있다. /뱃속을 채우려면/ 구름만 흘러가고/ 마음을 비워내면/ 하늘이 가득찬다./ 비우고 채우는 항아리의 속성에다 작자는 세속적인 어떤 먹을 것 따위를 채우려 하지는 않는다. 하늘을 채우고 마음을 비워내는 형이상학적인 작업을 꿈꾸고 있다.
다음은 松皐 이인식의 차례이다. 감감한 세상 한 끝에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한다. 그 배에 싣는 것은 시간이다. 제목은 작자 자신이 어부가 된다고 했으나 작자가 그리는 세계는 형이상학의 세계이다. 싣고 온 시간들을 넋 놓듯 부리면서 작자는 다소 어뚱하게 갈대 새 순 뽑아올리는 바람 소리에 귀를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도 /가슴 안 십리 풀밭에/ 보슬비 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침내 셋째 수에 가면 /문명을 앓던 골목/은 가마득히 멀리 가 버리고, /홀로 가꾸던 뜨락/에는 여울물이 감겨드는 景을 열고 있다.
끝으로 정공량이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 작자는 지금 어스름 달빛 아래 탑 그늘에 서 있다. /탑 그늘로 쏟아지는 잔 메아리/며, /목을 놓아 울고 있는, 떠도는 청명한 사연/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밤에 山寺의 주변에서 미물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이승에서의 생활이 어쩌면 무너지는 일순간의 허허로운 時空일진데 /적막을 불러 놓고 사운대는 층층으로/ 한 올씩 뽑아드는/ 우리의 詩語들도 /불을 지펴 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앓고 있는 언어들을 주어 모으는 일이 시인의 사명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다섯 분 ’84년 신예 시인들의 작품을 한 수씩만 들어 보았다. 전편을 소개하고 좀더 깊이 논의하고 싶은 마음이나 갈 길이 창창하여 이만 거두거니와 이 다섯 분이 등단한지도 어언 15년이 지나고 있다. 다섯 분 가운데 신진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외도한 경력이 있어 지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나래에서 그리고 대구 시조시인협회에서 활동을 개시하고 있지만 나머지 다른 네 분은 헛되이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어서 지금은 이 나라 시단에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同道의 한 사람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다.
16. 동인지 발간 5년, 등단 동인 정리
1984년 9월 1일『나래문학』제17집을 상재한다. 권두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창회 18주년을 맞으면서의 감회를 적은 정석주의 권두언이 간단한 시로 걸리어 있고, 월하 선생의「자하골의 밤」과 일묵 림영창 선생의「문경 새재」를 초대하고 있다.
특집으로는 등단한 동인들의 작품을 초대하고 있다. 창회 18년, 동인지 17집을 상재하는 동안에 등단한 동인만 해도 20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감개 무량한 일이다. 정석주[‘비구니’ 시조문학 1980 여름, ‘산창일기’ 1981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2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용진호[‘동경’ 시조문학 1980 여름], 허민홍[‘까치’ 시조문학 1981 봄, 1984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오승희[‘물오리고 싶다’ 1981 시조문학 가을] 권형하[‘들국화’ 1981 가을], 최광순[1980 민족시 백일장 장원, ‘청자를 보며’ 시조문학 1981 겨울], 남궁 영[‘지리산에서’ 1982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영상[‘세월’ 1982 시조문학 여름], 최상남[‘장미’ 1982 시조문학 가을], 강세화[‘저 물새를’ 1983 시조문학 봄], 남전희[‘石燈’ 1983 시조문학 봄], 리강룡[‘낙동강’ 1983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종소리’ 1983 시조문학 여름] , 정공량[‘어느 가을날’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1983 12월호], 윤신근[‘까치소리’ 1983 시조문학 가을], 김정희[‘길쌈 四季歌’ 1983 현대시조 겨울], 유승식[‘항아리’ 1984 시조문학 봄], 김광경[靑山道 外 1984 현대시조], 신진식[‘空’ 1984 시조문학 봄], 박필상[‘바람’ 1984 시조문학 봄], 이인식[吾園의 紅梅 1984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이 그 芳名들이다.
이어서 동인 23명의 작품이 실려 있고, 부록으로 각종 기념패 증정 현황, 총목차, 작품 수록 현황, 집필 동인 주소록, 후기와 연혁으로 17집을 꾸미고 있다.
17. 인연은 한 줄기 무지개로 남아 뜨고
1984년 12월 1일, 또 한 해의 송년호를 펴낸다. 보기 드물게 특집 없이 순수한 동인의 新作만으로 18집을 꾸미고 있다. 감충효 외 28명의 동인들이 신작을 발표하고 있고 책머리에는 회원 제명에 대한 정석주의 가슴 아픈 사연이 적혀 있다. “한 해에 한 번도 동행하지 않은 이들을 회칙 제19조 3항에 의하여 부득이 제명하게 됨을 알리고 있”으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기록하지 않아 지금 확인할 길은 없다. 언제나 동행의 길은 어렵고 자기희생이 뒤따라야 했으며, 나래의 품을 떠나더라도 시조단에서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낼 것과, 만남과 헤어짐이 다 인연으로 생각한다는 사실과, 이 조치가 회의 활성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임을 누누이 중언부언하고 있다.
눈에 띄는 작품 한 편 언급하고, 다음호로 넘어가련다. 박영식의「片片散調」이다.
④ 청산
하얀 혼 누운 자리 퍼붓는 진달래 꽃빛
눈물씨 풀로 자라 먹뻐꾸긴 억척으로 울고
내 설움 만월로 뜨면 청산 그도 울겠네.
⑨ 蘭
썩은 고목 밑에 살아 있는 난 한 포기
눈빛 씻는 파란 줄기 초승달도 휘어 떨고
물볕에 담근 꽃대가 천년 향을 사른다.
⑩ 봄 뜰
늙은 봄 뽀얀 뜰에 찰랑이는 시린 물빛
부러져 넘어진 바람 촉을 반만 틔우고
동백꽃 젖무덤 헐어 올올 타는 늦겨울
⑫ 초야에서
바람은 나를 불러 잡초처럼 살라 하고
시냇가 조약돌은 詩나 외며 흐르라네
말 없이 돋는 산달을 사립 열어 맞는 초가.
열두 수의 편편산조 가운데 네 수만 뽑아 실어 보았다. 어떤가. 이만 하면 지금 읽어도 다시 읽고 싶지 않은가. 짙은 서정 하며, 세련된 기교 하며, 시를 갈무리는 솜씨가 흠잡을 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시 세계를 확보하고 있지 않은가. 나머지 작품들도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대지에 뜨는 마을이 따라 출렁이누나/(6. 감밭)나, /구름장 돌팍틈 삼아 들락날락거린다./(7. 연)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음률면에서 난맥을 보이고 있음이 흠으로 지적될 정도이다. 그리고 위의 예 가운데서 「12. 초야에서」 같은 것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流水는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의 투를 원용하고 있음을 흠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이만 하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참 잘 살린 작품으로 어디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하지 않은가.
18. 봄이 오면 나무는 새로 촉을 틔운다.
19집 새 봄맞이『나래시조문학』을 1985년 3월 1일에 발행한다. 신국판 160면 초록색 장정이다. 책머리 회원 명단을 일람하면 새 이름들이 보이고 있다. 강호인, 이자영, 김영희, 육고수, 이철화, 이상진, 이재천 諸氏이다. 회칙이 실려 있고 강세화를 비롯한 회원 30명의 작품으로 동인지를 꾸미고 있다. 머릿글도 후기도 없아 책의 말미에는 주소 변경만 소개하고 있다. 일년에 네 번씩 석 달마다 동인지를 펴내자니 작품 쓰랴, 회원 작품 독려하랴, 인쇄소 들락거리랴, 거기다 일상의 생업을 꾸려 나가랴, 나래를 향한 뜨거운 열정 하나 아니면 어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권두언 쓰기도 한두 번이지 매호마다 쓰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각설하고, 앞장에서 나래의 품을 떠난 동인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술회했지만, 봄이 오면 묵은 등걸을 딛고 삼라만상이 새 촉을 틔우듯이 19호에서 새로 선을 보인 일곱 분의 면모를 살피는 일은 그나마 허전한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기쁜 일인 것이다.
애정도 익어가면/절로 속을 열어 뵈듯
알알이 다둑인 정/앵돌아져 옹근 가슴
소슬한 가을하늘이/훤히 뵈게 창을 여네
아무리 견고해도/헐고 보면 폐허의 성(城)
이승은 그 뉘라도/비워야 할 숙소인 걸
무심히 툭 지는 알밤/그를 보며 알겠네.
-강호인,「밤(栗)」전문 -
강호인은 경남 산청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문학 활동을 시작한 뒤 줄기차게 노력하여 등단, 대학원 수료, 경남 문협 사무국장을 역임하고『산천제에 신끈 풀고』라는 시조집으로 남명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더니 요 근년에는 소식을 알지 못한다.
위 작품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벌어진 밤송이와 그 속의 아람을 보며 밤의 속성을 여실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며, 벌어진 밤송이와 인간사의 애정, 나아가 인생길의 결국인 이․저승의 갈림길까지 시상을 확장해 나간 솜씨가 무리 없이 읽혀지고 있는 작품이다. 처음 보이는 작품이지만 상당한 성숙의 경지까지 올라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어둠이 까아맣게 산모롱이 접어들면
산마을 전기불이 꽃망울로 터진다.
온 밤내 한을 토하는
소쩍새의 슬픈 울음.
- 김영희,「산촌의 밤」전문 -
김영희는 경상도 문경 사람이다. 나래에 동행하면서 19호부터 시작하여 한 동안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하더니 곧 절필하고 생활에 전념하고 있는 동인이다. 지금은 문경 새재 아래 경북 8경의 하나인 진남교반에서 맛있는 쏘가리 매운탕집을 경영하고 있다. 조리사 자격증까지 획득하여 성업 중이니 이화령 터널을 넘어 새재 나들이 길이 있으면 들러 보시기 바란다. 위 작품 외에도 /그리워/수석/뜨개질/ 등을 선보이고 있다. 어둠을 動的으로 파악하는 눈이라든지, 까만 어둠 속에 전등불을 꽃망울로 유추하는 등 문학적인 재질을 보여주고 있다. 금방 시작한 동인에게 무리한 주문인 줄 알지만, 소쩍새의 울음을 이유 없이 한 밤내 한을 토하는 슬픔으로, 자기 것화하지 못하는 모습 등 아직 시상을 갈무리하지 못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꽃씨 한 낱 땅에 묻는/은근한 심정으로
골목에서 산길에서/인삿말 먼저 걸며
아침 샘/오르고 내리면서/물 한 초롱 나릅니다.
언제나 거부 않고/언제나 배웅 않고
티끌만큼 인색한 빛/내색할 줄 모르시며
좔좔좔/솟아납니다./덕천샘 그 맑은 물
바위샘 골바람이/산의 고요 에우르고
백자 빛 멋이 배인/한 모금 물맛인데
우러러/하늘을 보면/구름빛도 스며 있네.
- 육고수,「샘」전문 -
육고수 동인은 연세가 꾀 높으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동인회에도 몇 번 나오면서 활동하는 중 “현대시조”에서 등단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연전에 현대시조 동호인회지도 부쳐 오셔서 這間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여기 “샘”은 아침마다 덕천샘이란 곳으로 물 뜨러 가서의 감회를 작품화한 것이다. 첫수와 둘째 수는 스케치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이 작품의 전편을 소개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끝수에 와서는 그 샘의 물맛에 /백자 빛 멋/도 배어 있고, /구름빛도 스며/있다고 쓰고 있다. 다만 끝수 초장의 /에우르고/라는 낱말의 의미는 확실치 않다. 앞말의 연결로 봐서는 /빙 둘러싸다/는 뜻으로 쓴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에우다/이다. 시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시적 허용이라면 꼭 그렇게 써야 할 당위성을 획득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찔레꽃 한 아름 안고 고탑(古塔) 뒤에 숨던 유희
옥개석 층층마다 돌이끼 창연한데
어디서 목어 소리와 독경음의 청정심(淸淨心)
- 이상진,「追想」3/3 -
이상진은 현대맨으로 대구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래와 인연을 가진 동인이다. 천성이 성실한 분이어서 회사에 근무하는 중에 경북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와중에도 전국 시조 백일장에 입상하는가 하면 “시조문학”지를 통하여 등단의 과정까지 거쳤다. 나래에서는 필자와 호흡을 맞춰 총무의 일까지도 감당한 그야말로 멸사봉공의 정신이 투철한 동인이다. 지금은 성서 관리공단 안의 (주)한국큐엠아이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첫 걸음마의 모습이다. 어릴 적의 추억을 회상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깊은 의미를 캐기보다는 그저 스케치에만 열중한 모습이다. 함께 보인 /귀향/추석 성묘길에서/사모곡/ 등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스캐치에 충실한 출발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문학을 시작하면서 지극히 자연스런 출발일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이 동인은 곧 다음 단계로 발빠른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발갛게 녹슬은 태양이 뛰어들어
목욕하고 간 자리에 떠다니는 낮의 넋
만취한 도시를 꾀어 춤을 한 번 출까나.
-이자영,「밤바다」1/2 -
이자영은 동인 활동도, 문단 활동도 단명했던 분이다. 나래에 몇 번 작품을 발표하고는 정식 문단 등단의 길은 밟지 못하고 생활 속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그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많지 못하다. 제19집에서 첫선을 뵌 작품은 위 작품 외에 /鳶/가을밤/산바람/의 세 수를 더 보여주고 있다. 지는 해를 /발갛게 녹슬은 태양/으로 묘사해 내는 솜씨라든지 태양이 떠난 자리에 /떠다니는 낮의 넋/을 봐 낼 수 있는 능력을 높이 사지만, 몇수 되지 않은 곳에서 중복 사용한 낱말들, /여인의 엉덩짝/ 같은 다듬어지지 않은 시어들, 아직 馴致되지 않은 客氣들이 눈에 잡히고 있다. 아무튼 단명했던 동인이었으니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이 蛇足인 것 같다.
달동네 사람들을/은행에선 좋아한다.
일부 이자만 주면/그저 고마워할 뿐
은행돈 쓰는 재미를/모르기 때문이다.
- 이재천,「은행돈」전문 -
이재천 역시 앞의 이자영과 함께 그 활동이 단명했던 동인이다. 잠시 입문하였다가 곧 시조밭을 떠난 뒤 행방을 알지 못한다. 첫 발표치고는 많은 편인 6수의 작품을 선뵈고 있다. 위 작품 외에도 “직설법”이란 題目 아래 /부동산/산하/추곡 수매가/ 등의 참여시 네 수와 /귀향/雪日/ 등을 발표하고 있다. 제목부터 “직설법”이라 하였지만 위 작품에서도 보듯이 그의 참여시 네 수는 아직 시에서 거리가 멀다. /밑지는 장사를 해도/밑졌노라 말 못하고/알 것 다 알면서도/농심은 천심이라/백근 땀 등짐 부린 뒤/주는 대로 받는가/처럼 시적 여과를 거르지 못하거나 구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그에 비하면 “雪日” 같은 것은 재미가 있다
따르르릉―
여보세요?
…………
아, 여보세요?
…………
…………
…………
…………
벙그네
하얀 눈꽃이
뛰노네
어린
소년.
- 이재천,「雪日」전문 -
종장에서 시적 여과에 실패하긴 했어도 과감한 생략이 주는 눈온 날의 寂寥 같은 것은 참신하고 재미있는 표현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에 혼을 모아
가다가 돌아와도
비되어 떠날 것을
어차피 따돌림 인생
실컷 웃어나 볼거나
- 이철화,「뜬구름」3/3 -
이철화는 직업이 교도관이다. 작품 속에서도 “옥중 일기” 같은 것은 자신의 옥살이가 아니라 옥중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의 감회를 읊은 것이고 예로 보인 위 작품에서도 그의 직업의식이 보이고 있다. 그들의 눈물, 그들의 행적, 그들의 갈등 등이 언뜻언뜻 그려져 있다. 이철화는 시조보다는 자유시쪽에 눈을 더 많이 주고 있는 편이다. 이후의 이철화의 행보를 보면 몇 권의 자유시집을 내면서도 온전한 시조집은 아직 발간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시조는 운율과 시작법이 자유시법을 취하고 있어 지금까지 상당한 연륜임에도 불구하고 미안하지만 시조의 압축미 획득에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 시조단 중흥을 위한 쉼 없는 모색
『나래시조』제20집 여름호는 1985년 6월 1일에 상재한다. 신국판 206쪽 백색 모조 편집이다. 강영아를 비롯한 26명의 동인이 참여하였다. 책머리에는 정석주의 머리글과 회원 원고 청탁서가 있고, 제6회 회원 작품전 및 문학 강좌가 보인다. 연사로는 리태극, 임영창, 정완영 선생님을 초청하고 있다. 동인 시화전에 관하여는 앞장에서 정리하였거니와, 경상도 점촌땅 새재 아래 외진 곳에서 한국시조시인협회장(리태극)과 현대시조시인협회장(림영창), 그리고 백수 선생님 같은 분을 연사로 모시고 문학 강좌를 가지며 시화전을 연다는 것은 가히 획기적인 행사라 할 만한 것이다.
제20집 편집의 특징이라면 각 동인마다 색 간지를 넣어 찾아보기를 쉽게 하였다는 점이다. 제20집의 동인의 면모는 새 이름들이 보이지 아니하고 낯익은 동인들의 작품 세계를 다시 언급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어 과감히 줄이기로 한다.
『나래문학』21집 가을호는 1985년 8월 1일에 상재한다. 신국판 280쪽 백색 모조로 편집하였다. 책머리에는 1986년 10월 1일 창회 20년을 맞아 “나래20년사”를 간행하고자 축시, 논문, 대표작, 수필 기타 필요한 자료를 모은다는 會告가 적혀 있다.
차례를 보면 /詩가 있는 시대의 주인이기를/이라 題한 영주 박영교 시인의 특별 기고가 있고, 1985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점촌의 茶室 “靜”에서 펼칠 제6회 동인 시화전에의 초대 작품, 초대 휘호, 동인 전시 작품, 동인 新作의 순으로 책을 엮고 있다. 초대 작품의 방명으로는 김광수(씨얼문학회장), 박재삼(본회 고문), 양원식(부산시조문학회장), 리태극(한국시조시인협회장), 림영창(현대시조시인협회장), 정소파(호남시조문학회장), 정완영(본회 고문), 정재익(영남시조문학회장) 등이 보이고, 특별 초대 휘호로 晩翠 최일환 선생의 작품 3점「山居」「石井落槐」「詠粟」이 자리를 빛내고 있다. 시화전에 참여한 동인의 방명은 앞의 /동인 시화전/장에서 언급하였기에 생략한다. 동인 신작 편에는 강세화를 비롯한 26명의 이름들이 있다. 특별히 동인지 창간호로부터 20호까지의 통계가 재미있고 이채롭다. 총 발행 쪽수가 3,694쪽, 총 발행 부수 10,200부, 초대 시인은 16명 17편에 35수, 특집으로는 149명 161편 368수, 참여 동인은 511명 2,104편 4,490수, 합계 676명 2,282편 4619수를 기록하고 있다.
1985년을 마감하는 송년호로서『나래동인시조』22집을 1985년 12월 1일에 상재한다. 신국판 갱지 202쪽이다. 정석주의 송년사와 동인의 신작, 동인 송년 수필로 22집을 꾸미고 있으며 會告로 1986년 나래 창립 20년을 맞으면서 발간할 “나래20년사” 원고 청탁이 눈에 띈다. 강영아를 비롯한 23명 동인의 신작이 보이고, 민병찬, 이대영, 이재천, 김우정의 송년 수필을 싣고 있다. 지난여름 문경땅 진남교반에서 있었던 제6회 동인 시화전에서의 감격과, 찾아 주신 월하, 백수, 박재삼, 양원식, 소재순, 최일환 시인 등 전국에서 원거리를 개의치 않고 찾아주신 분들에 관한 감사의 변이 있다. 나래 후원회 발족의 취지를 이해하시고 동참해 달라는 간곡한 청원도 눈길을 끌고 있다. 입회할 때는 12월 20일까지 입회 원서와 원고를 제출해야 총회에서 인준을 받을 수 있음을 공고하고 있다.
민병찬의「진남강 추억」을 읊으면서 여덟 번째의 원고를 접으려니 점촌고등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매봉산의 밤호흡 소리가 내일을 준비하는 경북 북부 지역 수재들의 호흡과 한 데 어울려 쌀쌀한 3월의 三更이 자못 뜨겁기만 하다.
구랑강 휘휘 돌아 부채살로 펼친 모래
주흘산 내린 줄기 예쯤 와서 멈춰 서고
청솔숲 흔드는 바람은 가얏고를 고르네
처서절 저문 숲에 쓰르라미 자최고
천년 전 뜨던 별이 물에 폴폴 나릴 적에
들릴 듯 잦아질듯한 노시인의 젖은 가락
시절은 출렁출렁 골바람으로 흘러가고
강마을 먼 불빛이 세월 저편에 아득한데
이 길로 가고 또 가면 후백제가 보이랴.
- 민병찬,「진남강 추억」전문 -
20. 나이테의 의미(1)
1986년 새봄, 3월 1일에『나래시조문학』23호를 펴낸다. 1986년은 나래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는 해이다. 장회 그 고고한 성을 올린 1966년으로부터 꼭 20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석주도 책 머릿글에서 그 감회를 적고 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나래20년사』를 간행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책머리에 초대시는 백수 선생의「새재 영시」가 있다.
어차피 한 냥 빚도 빈 소매엔 무거운 것
괴나리 봇짐 벗어 솔가지에 걸어두고
정처도 없는 구름이 혼자 재를 넘고 있다.
- 정완영, ‘새재 영시’ 중「뜬구름」전문 -
이승 하늘 아래 살면서 한 냥 빚도 무거워하는 老詞伯의 대쪽같은 삶의 심사가 혼자서 재를 넘어가는 ‘뜬구름’ 한 조각에 실려 있다. 진실로 인생 70, 길어야 80년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버리는 공부를 하지 못해서 날마다 괴로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괴나리봇짐 벗어 솔가지에 걸어두고 정처도 없이 혼자를 재를 넘고 있는 저 한 채 뜬구름처럼 우리는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개인의 이야기여서 죄송하지만 필자는 지난 10월 26일 평소의 불효도 불효지마는 마침내 이승 하늘 아래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머님을 여의고 캄캄한 하늘 아래 앉은 불효자에게 멀리 또 가까이서 위로하시는 친지 동료들을 바라보며 베푸는 삶에 너무나도 인색했던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망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의 시집에 실었던 졸시 ‘어머니’를 읊으면서 다소의 속죄로 삼아보려 한다.
봄바람 가을비에 젖은/여든 일곱 마모의 계절
가끔은 이승 밖으로/떠났다 오신다는
어머니 담담한 말씀이/바늘이 되어 찌릅니다.
개인의 이야기를 적는 것이 예가 아닌 줄 알지마는 주간의 원고 독촉을 받은 상태에서 喪中의 경황을 간신히 넘기면서 책을 펴니 마침 백수 선생님의 시 한 수가 가슴을 파고들기에 감회를 적어 보았다.
한 쪽을 더 넘기면 ‘1985년의 償․薦 현황’이 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백자곁에서」로 추선된 박영식 동인,《시조문학》지에 천료된 박영식, 이대영, 김시현, 성덕제 동인, 초회 추천된 장정애, 박용찬 동인,《현대시조》지에 초천된 강호인 동인, ‘제47회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된 이창회 동인, ‘대문학지령300호기념지상백일장’에 장원한 강세화, 차상으로 입상한 강호인 동인, ‘부산문화방송창사기념문예작품현상모집’ 시부문에 당선된 이창희 동인, ‘시조문학창간25주년기념시조현상모집’에서 금상으로 입상한 김민정 동인, ‘제3회《현대시조》‘85백일장’ 주부부에서 금상으로 입상한 김인숙, 일반부 은상으로 입상한 권갑하, 대학생부에서 동상으로 입상한 장세득 동인 등이 그 방명이다.
한 해에 한 동인회에서 거둔 수확으로는 실로 엄청난 수확이 아닐 수 없다
‘86년 새 봄에 동행의 손길을 준 동인은 권갑하, 김선영, 성덕제, 장세득, 최길하 제씨이다.
사공이 되어 다시 이 세월의 사공이 되어
나룻배 한 잎에다 근심 하나 동여매고
무색의 이 일상 앞에 거울처럼 비춰 선 달(月).
- 권갑하,「겨울강가에서」3/3 -
권갑하의 첫 작품이다. 아시다시피 권 동인은 지금 한국 시조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표적인 젊은 시인이다. 제17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과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자로 선정되어 최근『단 하루의 사랑을 위해 천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이라는 시조집을 발간했는데, 한 달 여에 3쇄 발간에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등 시조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90년대 시조 동인 ‘역류’를 출범시켜 현재 대표를 맡아 시조를 독자와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근 국내 최초의 농협 비평서『농협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목이 메인다』라는 역저를 펴내 주위를 놀라게 하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직 창창한 연치이므로 한국 시조단의 대들보 역할을 감당할 시인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동인지에 첫선을 보인 작품 또한 만만치 않다. 우선 시조의 한 장에서 앞뒷구를 반복하는 기법은 시조 작품에서 흔치 않은 수사법이다. 그것도 단순 반복이 아니라 앞 구의 /사공이 되어/를 뒷 구에서 좀더 구체화하는 반복법이 독자에게 참신하게 다가온다. 사공은 ‘세월의 사공’이다. 한 걸음 비켜서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두 세월이란 흐름 속을 저어가는 사공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세월의 사공’이면서 사공인줄 알아차리는 안목이 소중한 것이다. 시적 화자는 누구일까? 초․중장에서는 작자인 듯 짐작하였으나 다 읽고 나면 문득 달로 변하여 있다. 주체를 ‘달’로 본다면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어쨌거나 작자는 겨울강가에 서서, 달처럼 바람처럼 서서 거울에 자신을 비추듯이 무색의 일상을 되비추고 있다. 첫수, 둘째 수에 비하면 셋째 수는 상당히 관조적이다. 첫선을 보이면서부터 상당히 시적 재질을 감지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활동을 시작한 권갑하는 날이 다르게 성장하여 2개 신문의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하였고, 나래의 회무에도 궂은일을 맡아 헌신하고 있다. 대성을 기대한다.
개펄엔
부서져 흩어진
여인의 비늘 조각
바람이
조개를 줍다가
파도에 쫓겨 가고
추억이
돌아간 바닷가
피어있는 꽃 한 송이.
- 김선영,「가을바다」전문 -
해수욕 철이 지난 바다. 그들이 다 떠나고 남겨 놓은 것은 무엇인가? 작자는 ‘여인의 비늘 조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쓸쓸하고 을씨년스런 바닷가에 혼자 남아 조개를 줍는 바다 바람과 파도. 떠나지 못하고 끝까지 지켜 앉을 수밖에 없는 본질은 ‘바람’과 ‘파도’ 뿐이라는 것을, 근원적인 남은 자끼리의 실갱이를 작자는 꿰뚫어보고 있다. 종장에 가면 문득 그 황량한 바닷가에 추억을 담은 꽃 한 송이를 피워 놓았다. 이처럼 김선영의 카메라 셔터는 첫선을 보이면서부터 상당히 예리하다. 짧은 단수 속에 ‘가을바다’ 한 컷을 예쁘게 찍어 놓고 담담히 의미도 부여해내고 있다. 하마 나래에서 함께 움직인 지 13년. 그동안 김동인은 자유시집도 발간하면서 끊임없이 휴전선 부근의 소식을 전해왔다. 동인회가 있는 날이면 휴전선 부근에서 밤을 도와 달려올 만큼 가슴이 뜨거운 동인이다. 이제는 그의 대성도 한 번 기대해 볼만한 시점이다.
잎새를
굴려보는
보도 위 바람소리
아득턴 회억으로
밀물이듯 밀려들면
고와라
하늘을 채우며
다가오는 얼굴이여….
- 성덕제,「가을서정」2/3 -
성덕제 동인은 작품 활동도 활동이려니와 시조 보급 활동에 적지 않은 공이 있는 동인이다. 장학사와 학교장을 거치는 동안 강원도 어린이들에게 쉬지 않고 시조를 지도하여 줄기차게 그 작품집을 발간, 보급하였다. 현직에서 은퇴하신 지금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는 노익장이시다. 위에 보인 ‘가을 서정’은 보도 위에서 잎새를 굴리는 바람을 보며 /하늘을 채우며/다가오는 고운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맑은 가을물 같은 작품이다. 성덕제 동인은 우리 나래에는 23호에 첫선을 보였으나 ‘85년 겨울《시조문학》에서 이미 천료된 기성시인이다.
차라리 소가 되어
논밭이나 깊이 갈아
흙에다 피땀 흘려
씨앗 뿌려 정성 쏟으면
내 가을
황금 들판에
참새떼나 벗하리.
- 장세득,「소가 되어」-
장세득의 첫 작품 「소가 되어」이다. 장세득은 첫선을 뵈면서 단수 8수를 선뵈고 있다. 소처럼 묵묵히 살면서 흙냄새 진한 작품들을 선보이더니 어느 날인가부터 흙 속으로 돌아가 다시는 문단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