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是非非] ‘공천 쇄신’ 아닌 ‘공천 학살’로 부르는 이유

[이코맨]

2020. 03. 16

공천 물갈이, 그 명암의 정치사…계파적 권력투쟁 산물이었던 경우 많아

‘공천 학살’이라는 살벌한 말의 효시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때였다. 그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당 장악력을 키우기 위해 김윤환·이기택 등 주요 계파의 보스들을 포함한 현역 의원 43명을 공천에서 탈락시켜 큰 파장을 낳았다. 이는 공천 물갈이를 통해 당을 장악해 ‘이회창 당’으로 만들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그 뒤로 총선 때면 여야 정당에서 ‘학살’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곤 한다. 

2016년, 공천 학살이 패배 부른 대표적 사례

‘공천 학살’은 한나라당-새누리당-미래통합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 쪽에서 주로 행해져 왔다. 이는 민주당 쪽과는 달리 당의 주도세력이 교체되곤 했던 보수정당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2008년 총선 때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당권을 쥔 친이계가 친박계 핵심들을 대거 물갈이하는 ‘친박 학살’ 공천을 단행했다. 공천 탈락자 가운데는 김무성·서청원·홍사덕·박종근·김재원·유기준 등 당시 박근혜 전 대표의 핵심 측근들이 망라돼 있었다. 이때 충격을 받은 박 전 대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탈당한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고, 상당수는 신당과 무소속 연대를 결성해 실제로 당선돼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 뒤 당권은 친박으로 넘어갔고, 2012년과 2016년 총선에서는 거꾸로 친박에 의한 공천 학살이 진행된다. 특히 2016년 총선에서는 이한구 공관위원장이 총대를 메고 친이계뿐 아니라 유승민계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를 했다. 이는 유승민 의원을 ‘배신자’로 규정한 박근혜 대통령의 뜻이 실린 것으로, 그는 결국 ‘진박(진짜 친박)’들의 공천을 위한 불법 여론조사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까지 받게 되었다. 4년 전 새누리당에서 있었던 진박 공천 파동으로 당은 아수라장이 됐고, 결국 새누리당은 총선 승리를 민주당에 헌납한 셈이 됐다. 현역 의원에 대한 공천 물갈이를 내세웠지만 유승민계에 대한 박 대통령의 보복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총선 패배를 낳은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박 대통령은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보복을 위한 물갈이가 자신과 당을 망친 대표적 사례다.

친박 학살-친이 학살-유승민계 학살로 이어지던 보수정당의 공천은 이번 21대 총선을 맞아 미래통합당에서 친박과 비박의 기존 세력을 사실상 해체시키는 김형오 공관위원장의 물갈이로 이어진다. 황교안 대표 체제에서 당의 중추세력이 아직 세력화되지 않은 환경을 비집고 들어갔기에 공관위원장이 전권을 휘두르며 친박과 비박의 핵심 인물들은 물론, 홍준표·김태호 같은 대선주자급 인물들까지도 컷오프시키는 상황이 가능했던 것이다. 기존의 당내 권력질서를 사실상 해체시키는 수준의 그 같은 공천은 자기 중심의 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 세력들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는 황교안 대표의 이해관계와 절묘한 접점을 찾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당내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이를 의식했음인지 황 대표가 공관위의 일부 공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김 위원장이 공관위원장직을 전격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공천 학살에 불복하는 무소속 출마가 이어지고 있어 통합당 공천의 최종적 성패는 더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 김형오 미래통합당 공천관리위원장이 3월9일 국회에서 열린 공천관리위원회에 참석해서 마스크를 쓴 채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물론 현재의 더불어민주당 쪽에서도 공천 물갈이는 계속 있어 왔지만, 그 폭과 강도에서 보수정당에는 미치지 못했다. 보수정당 쪽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집권 시기를 거치면서 내부 권력질서의 향배에 따라 권력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난 반면, 민주당 쪽에서는 노무현 정부 이래로 줄곧 당의 주류세력이 교체되지 않고 지속된 이유가 컸다. 그래서 민주당의 물갈이는 문제가 되는 인물들을 걸러내고 쇄신의 모습을 보이는 수준, 그 이상을 크게 넘지는 못했다. 

한나라당에 친박 학살이 있었던 2008년 총선 때 통합민주당에서는 박재승 공심위원장이 물갈이를 이끌었다. 그는 박지원·김홍업·이상수·이용희·신계륜·설훈 등을 포함해 호남권에서 30% 이상을 물갈이하면서 ‘저승사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집권 초기라는 환경 탓에 민주당의 물갈이는 빛을 보지 못한 채 한나라당에 크게 패하고 만다.

민주당에서 주목받은 물갈이는 4년 전 20대 총선 때 김종인 비대위원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문재인 대표에게서 전권을 넘겨받은 김 위원장은 민주당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칼을 들이대 친문·친노 핵심 인물을 대거 탈락시켰다. 현재 민주당 대표인 이해찬 의원도 그 칼을 피해 가지 못했고, 노영민·정청래·강기정 등이 공천에서 배제됐다. 당시 이러한 친문·친노 물갈이 공천에 당내 반발도 적지 않았지만, 민주당은 위기를 넘기고 총선에서 123석을 확보하며 제1당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총선이 끝난 뒤 김 위원장은 떠나고, 그가 쳐냈던 인물들은 문재인 정부의 집권과 함께 주인으로 돌아오는 뒤바뀐 풍경이 전개된다. 당시 컷오프 대상자였던 이해찬 의원이 지금은 민주당을 이끌고 있고,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던 김 위원장은 현재 미래통합당의 선대위원장으로 거론되는 광경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우리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기득권 포기 아닌 계파적 이익 위한 위장술

9년 만에 다시 집권여당이 된 민주당의 21대 총선 공천은 그동안 확산된 민주당에 대한 민심의 불만을 감안하면 기대에 못 미치는 소극적 물갈이에 그쳤다. 민주당의 물갈이 폭과 강도가 미래통합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민주당의 시스템 공천 자체가 인위적인 물갈이를 제약하는 장치가 됐다. 정무적 고려와 판단에 따른 물갈이가 제한받게 됨으로써 충격적인 결과가 적은 편이었다. 둘째로, 민주당의 경우는 당내 주류세력 질서에 변화가 없어 굳이 큰 폭의 쇄신 의지를 갖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친문’과 586 세력의 건재가 이를 말해 준다. 당의 주류세력에 대한 이 같은 안전보장 공천은 그동안 민심이 켜온 경고등을 안이하게 본 것 아니냐는 시선을 받고 있다.

공천 물갈이에 대한 평가는 숫자의 규모만 갖고 얘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내용까지 들여다봐야 물갈이의 성격이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 물갈이에는 쇄신을 위한 좋은 물갈이도 있지만, 과거 사례에서 보듯이 계파의 권력 장악을 위한 나쁜 물갈이도 있다. ‘학살’의 사전적 의미는 “가혹하게 마구 죽임”을 말한다.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용어다. ‘공천 쇄신’보다는 ‘공천 학살’이라는 용어가 흔히 사용되는 이유는 우리 정치사에서 있었던 공천 물갈이가 계파적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던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불신이 계속되는 환경에서 유권자들은 언제나 정치권의 쇄신을 원하며 그 집약체가 공천 물갈이로 나타난다.

그래서 공천 물갈이는 정당들이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국민의 쇄신 요구에 답하겠다는 결의로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쇄신이라는 양의 머리를 내걸고 계파 패권이라는 개고기를 파는 일들이 종종 있어 왔다. 공천 물갈이가 쇄신을 위한 기득권 포기인지, 아니면 계파적 이익을 위한 위장된 방편인지를 가려낼 사람은 결국 유권자들이다. 

유창선 / 시사평론가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