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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 100년 기념, 계간 《나래시조》설문조사 결과
시조시인 100인이 선정한 “내가 좋아하는 시조”50편(문단 등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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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구룡폭포 / 조운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느냐.
* 1920년 동아일보에 시 발표
석류 / 조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젖힌 이 가슴
* 1920년 동아일보에 시 발표
난초 / 이병기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 1925년 <조선문단> 시조 발표
백자부 / 김상옥
찬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純朴)하도다
* 1940년 <문장>지 등단
봉선화/ 김상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 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라
* 1940년 <문장>지 등단
개화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그만 눈을 감네.
* 1940년 <문장>지 등단
달밤 /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淨化(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 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1940년 <문장>지 등단
바람벌/ 이 호 우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 보자고 아아 살아 보자고.
辱이 祖上에 이르러도 깨다를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를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江山이 눈물겹다.
벗아 너 마자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旗幅인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
단 하나의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祖國의 밝음을 기약함에 아니던가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福되기도 했어라.
1940년 <문장>지 등단
살구꽃 핀 마을/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은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 1940년 <문장>지 등단
보리고개/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 1954년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 출간
내 사랑은 / 박재삼
한빛 황토(黃土)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 1955년 <현대문학> 등단
고무신 / 장순하
눈보라 비껴 나는
―全―群―街―道―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 나
둘
세 켤레
* 1957년 <현대문학> 당선
산처일기 / 이우종
한 십년 살다 보면 가난도 길이 들어
열두나 다랑이가 줄이 죽죽 금이 가도
당신이 웃는 동안은 청산 위에 달이 뜬다
장마루 놀이 지면 돌아올 낭군하고
조금은 이즈러진 윤이 나는 항아리에
제삿날 울어도 좋을 국화주나 빚어야지
아직은 두메 산골 덜 익은 가을인데
사랑이 응어리로 터져 오는 밤이 오면
보리를 쌀이라 해도 묻지 않는 양이어라
* 1961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風磬 / 김제현
댕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조국 /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부자상/ 정완영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 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 오는 아버님 여일 위에
꽃으로 비춰 드릴 제 마음 없사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릴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고향생각 /정완영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 위
내 고향 하늘 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동구 밖 키 큰 장승 십리벌을 다스리고
푸수풀 깊은 곳에 시절 잊은 물레방아
추풍령 드리운 낙조에 한 폭 그림이던 곳
소년은 풀빛을 끌고 세월 속을 갔건만은
버들피리 언덕 위에 두고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잊어 봄을 울고 갔더란다
오솔길 갑사댕기 서러워도 달은 뜨네
꽃가마 울고 넘은 서낭당 제 철이면
생각다 생각다 못해 물이 들던 도라지꽃
가난도 길이 들면 양처럼 어질더라
어머님 곱게 나순 물레줄에 피가 감겨
청산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뿌리고 거두어도 가시잖은 억만 시름
고래등 같은 집도 다락 같은 소도 없이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더라
빙그르 돌고 보면 인생은 회전목마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밖에 저문다
*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암의 봄/정완영
내가 사는 초초(艸艸) 시암(詩庵)은 감나무 일곱 그루
여릿여릿 피는 속잎이 청이 속눈물이라면
햇볕은 공양미 삼백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놓은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은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
*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감/정완영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의 권속은 아니다
두메산골 긴긴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은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 상천(上天)을
등불로나 밝힌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내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하는
한국 천년의 시장기여
세월도 팔짱을 끼고
정(情)으로나 가는 거다.
*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신전의 가을 / 이상범
하늘이 만판 내려와 빛을 빚는 가을걷이
무슨 영을 받드는지 햇살은 눈을 굴리고
불 쓰는 제단의 손을 힐끔힐끔 돌아봤다
물소리 가슴을 흘러 고요가 눈을 뜨면
법의자락에 끌려 빠지지 타는 생각
신전이 잠시 뜨는 걸 곁눈질로 보곤 했다
가을빛 들끓는 곳 번득이는 갈겨니떼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지상에 버는 꽃잎
그 꽃빛 밤이면 별로 숨 쉬는 걸 나는 봤다.
*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어떤 경영/서벌
木手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角木
어느 古典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生涯의 무늬
물 젖는 듯 선명하네.
어째 나는 자꾸 깎고 썰며 다듬는가.
톱밥
대팻밥이
쌓아가는 赤字 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
* 1964년 <시조문학> 천료
땅끝/ 윤 금 초
반도 끄트머리
땅끝이라 외진 골짝
뗏목처럼 떠다니는
전설의 돌섬에는
한 십년
내리 가물면
불새가 날아온단다.
갈잎으로, 밤이슬로
사쁜 내린 섬의 새는
흰 갈기, 날개 돋은
한마리 백마였다가
모래톱
은방석 위에
둥지 트는 인어였다.
象牙質 큰 부리에
선지빛 깃털 물고
햇살 무등 타고
미역 바람 길들여 오는,
잉걸불
발겨서 먹는
그 불새는 여자였다.
달무리
해조음
자갈자갈 속삭이다
십년 가뭄 목마름의 피막 가르는 소리,
삼천년에 한번 피는
우담화 꽃 이울 듯
여자의
속 깊은 宮門
날개 터는 소릴 냈다.
몇날 며칠 앓던 바다
파도의 가리마 새로
죽은 도시 그물을 든
낯선 사내 이두박근…
기나긴 적요를 끌고
훠이, 훠이, 날아간 새여.
*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주몽의 하늘/ 윤금초
그리움도 한 시름도 발묵(潑墨)으로 번지는 시간
닷되들이 동이 만한 알을 열고 나온 주몽
자다가 소스라친다, 서슬 푸른 살의를 본다.
하늘도 저 바다도 붉게 물든 저녁답
비루먹은 말 한 필, 비늘 돋은 강물 곤두세워 동부여 치욕의 마을 우발수를 떠난다. 영산강이나 압록강가 궁벽한 어촌에 핀 버들꽃 같은 여인, 천제의 아들인가 웅신산 해모수와 아득한 세월만큼 깊고 농밀하게 사통한, 늙은 어부 하백(河伯)의 딸 버들꽃 아씨 유화여, 유화여. 태백산 앞발치 물살 급한 우발수의, 문이란 문짝마다 빗장 걸린 희디흰 적소에서 대숲 바람소리 우렁우렁 들리는 밤 발 오그리고 홀로 앉으면 잃어버린 족문 같은 별이 뜨는 곳, 어머니 유화가 갇힌 모략의 땅 우발수를 탈출한다.
말갈기 가쁜 숨 돌려 멀리 남으로 내달린다.
아, 아, 앞으로 가로막는 저 검푸른 강물
금개구리 얼굴의 금와왕 무리들 와와와 뒤쫓아오고 막다른 벼랑에 선 천리준총 발 구르는데, 말채찍 활 등으로 검푸른 물을 치자 꿈인가 생시인가, 수 천년 적막을 가른 마른 천둥소리. 천둥소리…문득 물결 위로 떠오른 무수한 물고기․자라들, 손에 손을 깍지 끼고 어별다리 놓는다. 소용돌이 물굽이의 엄수를 건 듯 건너 졸본천 비류수 언저리에 초막 짓고 도읍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四神)도 포치(布置)하는, 광활한 북만대륙에 펼치는가 고구려의 새벽을…
둥둥둥 그 큰 북소리 물안개 속에 풀어놓고.
*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겨울강/박시교
오늘 이 아픔들을 말로 다 못할 것이라면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을 가 보아라
은밀히 숨죽여 우는 겨울강을 가 보아라
짙푸르던 강줄기는 얼붙어 멈추었고
산도 굴릴 것 같던 그 몸부림도 멎었노라
누군가 이 뜻 알겠노라면 죽어서 묵도하라
귀기울이면 선한 소리, 내심의 너 겨울강아
근심의 잔뿌리랑 잔기침의 매듭꺼정
이대로 잠보다 긴 꿈, 꿈에 갇힌 겨울강아
이제 우리네는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슴 속은 임의로 문신한 햇덩이가 탄다지만
가진 것 다 뿌려 준 후에 가득차는 이 절망아
한숨의 이 씨날에 날줄은 무얼 넣나
없는 것은 다 좋고 하나쯤 있었으면 싶은
뜨거움 숨의 뜨거움을 빙판 눕힌 겨울강아
보겠는가, 눈뜨고 눈감고 보겠는가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을 보겠는가
상류로, 상류로부터 걱정만 쌓은 겨울강아
* 197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팽이 /이우걸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 1972년 <현대시학> 등단
비/이우걸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 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 빛날 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 1972년 <현대시학> 등단
물총새에 관한 기억/유재영
작자 미상 옛 그림 다 자란 연잎 위를
기름종개 물고 나는 물총새를 보았다
인사동 좁은 골목이 먹물처럼 푸른 날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 있는
그 여름 흰 똥 묻은 삐딱한 검정 말뚝
물총새 붉은 발목이 단풍처럼 고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
* 1970년 <시조문학><현대시학> 등단
장국밥 /민병도
울 오매 뼈가 다 녹은 청도 장날 난전에서
목이 타는 나무처럼 흙비 흠뻑 맞다가
설움을 붉게 우려낸 장국밥을 먹는다.
5원짜리 부추 몇 단 3원에도 팔지 못하고
윤 사월 뙤약볕에 부추보다 늘쳐져도
하교 길 기다렸다가 둘이서 함께 먹던…
내 미처 그때는 셈하지 못하였지만
한 그릇에 부추가 열 단, 당신은 차마 못 먹고
때늦은 점심을 핑계로 울며 먹던 그 장국밥.
*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자목련 산비탈/ 이정환
자목련 산비탈 저 자목련 산비탈 경주 남산 기슭 자목련 산비탈 내 사랑 산비탈 자목련 즈믄 봄을 피고 지는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원에 관하여 / 이정환
1. 강강술래
더는 모날 수 없는 정정에 이르러서야
자못 둥글대로 둥근 저 붉고 아득한 둘레
온 누리 죄이었다 풀고 풀었다가 다시금 죄이는
2. 떡살
몸을 살찌우랴 썩을 몸을 살찌우랴
살뜰히 새겨 넣은 온갖 마음의 무늬
도무지 떨어지지 않을, 끝내 썪어지지 않을
3. 절구통
수근의 절구통은 반쯤 기울어져서
둥글 대로 둥근 허기 가득히 채우고 있다
누군가, 설움의 모양을 이리 빚어 놓은 이는
4. 대바구니
산비알 서늘한 기운 촘촘히 배어 들어
모든 것 받아 안는 오지랖 넓은 여인
한 자락 대숲바람이 푸르게 머물고 있다
5. 기와
햇살과 바람, 구름과 비, 퍼붓는 드센 눈발
조선의 머리에 얹힌 저리 푸르른 천년
기오사장 서넛쯤 놓인 그런 가슴을 봤는가
6. 박
넉넉함이 깃드는 더딘 꿈을 바라본다
오랫동안 기다린 것은 둥글 대로 둥글어져서
불현듯 한 마을을 들어올리는
저 열 나흗날 밤의 만월!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 / 이정환
한밤중 한 시간에 한두 번쯤은 족히
찢어질 듯 가구가 운다, 나무가 문득 운다
그 골짝
찬바람 소리
그리운 것이다
곧게 뿌리내려 물 길어 올리던 날의
무성한 잎들과 쉼 없이 우짖던 새 떼
밤마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일순 뼈를 쪼갤 듯 고요를 찢으며
명치 끝에 박혀 긴 신음 토하는 나무
그 골짝
잊혀진 물소리
듣고 있는 것이다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백꽃, 지다 / 이 승 은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엽서 한 장
말은 다 지워지고 몇 점 얼룩만 남아
이른 봄 그 섬에 닿기 전, 쌓여있는 꽃잎의 시간
벼랑을 치는 바람 섬 기슭에 머뭇대도
목숨의 등잔 하나 물고 선 너, 꽃이여
또 한 장 엽서를 띄운다. 지쳐 돌아온 그 봄에
* 1979년 전국민족시 백일장 장원
구절초 詩篇 / 박기섭
찻물을 올려 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 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紅流洞
박 기 섭
홍류동 단풍물에 말은 죄 저당 잡히고
그 저당 풀 생각마저 덤으로 저당 잡혀
눈 뜬 채 추레한 입성을 감출 데가 없구나
억새가 될 말들은 억새로 흐드러지고
붉나무 될 말들은 붉나무로 타붙는데
지친 내 근시안 밖에 목숨이야 한 벌 진솔
지상에 남은 술은 구름 위에 부어 놓고
아주 알몸으로 물가에나 나앉을까
이 저승 환한 돌문을 누가 밀고 올 것처럼
*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새 / 박기섭
저 가뭇한 하늘가에 발을 오그린 채 숨을 멈춘 한순간에 비상은 완성 된다 그제사 새가 새로서 현현하는 것이다
가장 높이 날으는 찰나의 절정을 위해 새는 쉬임없이 부리를 닦아내고 바람에 죽지를 씻으며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솟구쳐 오를 적마다 새의 눈은 깊어져 텅 빈 고요 속에 세속의 뼈를 묻고 애굽은 그 하늘 길을 바스라져 가는 것이다.
*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사고 싶은 노을 /오승철
제주에서 참았던 눈 일본에 다시 온다
삽 자루 괭이 자루로 고향 뜬 한 무리가
대판의 어느 냇둑길 황소처럼 끌고 간다
파라, 냇둑 공사 다 끝난 땅일지라도
40여 년 '4.3' 땅은 다 끊긴 인연일지라도
내 가슴 화석에 박힌 사투리 쩡, 쩡, 파라
일본말 서울말보다 제주말이 더 잘 통하는
쓰루하시, 저 할망들 어느 고을 태생일까
좌판에 옥돔의 눈빛 반쯤 상한 고향 하늘
'송키, 송키 사압서어' 낯설고 언 하늘에
엔화 몇 장 쥐어 주고 황급히 간 내 누님아
한사코 제주로 못 가는 저 노을을 사고 싶다
*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송당 쇠똥구리 1 / 오승철
겨울 송당리엔 숨비소리 묻어난다
바람 불지 않아도 중산간 마을 한 녘
빈 텃밭 대숲만으로 자맥질 하는 섬이 있다
대한에 집 나간 사람 찾지도 말라했다
누가 내 안에서 그리움을 굴리는가
마취된 겨울 산에서 빼어낸 담낭결석
눈 딱 감고 하늘 한번 용서할 수 있을까
정월 열사흘 날, 본향당 당굿마당
4 ․ 3땅 다시 와 본다, 쌀점 치고 가는 눈발
그렇게 가는 거다, 신의 명을 받아들면
징 하나 오름 하나 휘모리장단 하나
남도 끝, 세를 든 세상, 경단처럼 밀고 간다
*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비비추에 관한 연상/문무학
만약에 네가 풀이 아니고 새라면
네 가는 울음소리는 분명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울고 말거다 비비추 비비추
그러나 너는 울 수 없어서 울 수가 없어서
꽃대궁 길게 뽑아 연보라빛 종을 달고
비비추 그 소리로 한번 떨고 싶은 게다 비비추
그래 네가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떨면서
눈물나게 연한 보랏빛 그 종을 흔들면
잊었던 얼굴 하나가 눈 비비며 일어선다
* 1982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해남에서 온 편지 / 이지엽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거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 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그러냐 안.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데 팥이란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 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주) 내가 있는 학교의 제자 중에 수녀가 한 사람 있었다. 몇 해 전 남도 답사길에 학생 몇이랑 그 수녀의 고향집을 들르게 되었는데 다 제금 나고 노모 한 분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생전에 남편이 꽃과 나무를 좋아해 집안은 물론 텃밭까지 꽃들이 혼자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흐드러져 있었다.
*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장엄한 꽃밭 / 정수자
1
오체투지 아니면 무릎이 해지도록
한 마리 벌레로 신을 향해 가는 길
버리는 허울만큼씩 허공에 꽃이 핀다
그 뒤를 오래 걸어 무화된 바람의 발
雪山을 넘는 건 사라지는 것뿐이지
경계가 아득할수록 노을 꽃 장엄하다
2
저물 무렵 저자에도 장엄한 꽃이 핀다
집을 향해 포복하는 차들의 긴 행렬
저저이 강을 타넘는 누 떼인 양 뜨겁다
저리 힘껏 닫다 보면 경계가 꽃이건만
오래 두고 걸어도 못 닿은 집이 있어
또 하루 늪을 건넌다, 순례듯 踏靑이듯
* 1984년 세종대왕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빈 들 / 정수자
일을 마친 소처럼 순하게 엎드린 들판
지친 숨소리에 하늘만 가만 내려와
더불어 등을 쓸면서 끄덕이고 있다
반추의 안개 속에 반쯤 풀린 눈빛이여
여름내 바삐 달린 잔도랑물 뉘어주고
집 놓고 떠돈 낱알들 품어주는 큰 집이여
미꾸라지 샅에 들고 새떼 먼 길 갈 동안
진기 빠진 흙 당겨 촘촘히 다질 동안
타관의 춥고 멍든 발 하마 올까, 귀 모은다
* 1984년 세종대왕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목욕을 하며/ 정일근
마흔 해 손 한 번 씻겨 드리지 못했는데
아들의 등을 미시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병에서 삶으로 돌아온 내 등 밀며 우신다.
벌거벗고 제 어미를 울리는 불혹의 불효,
뼈까지 드러난 몸에 살과 피가 다시 살아
어머니 목욕 손길에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까르르 까르르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어머니의 욕조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이 되어
회귀의 강으로 돌아가는 살찐 새끼가 되고 싶다.
*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따뜻한 슬픔/홍성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 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세한(歲寒)의 저녁 / 권갑하
공원 벤치에 앉아 늦은 저녁을 끓이다
더 내릴 데 없다는 듯 찻잔 위로 내리는 눈
맨발의 비둘기 한 마리 쓰레기통을 파고든다.
돌아갈 곳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눈꽃 피었다 지는 부치지 않은 편지 위로
등 굽은 소나무 말없이 젖은 손을 뻗고 있다.
간절히 기댈 어깨 한 번 되어주지 못한
빈 역사(驛舍) 서성이는 파리한 눈송이들
추스린 가슴 한 쪽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 1992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종 / 권갑하
제 몸을 때려 고운 무늬로 퍼져나가기까지는
울려 퍼져 그대 잠든 사랑을 깨우기까지는
신열의 고통이 있다,
밤을 하얗게 태우는.
더 멀리 더 가까이 그대에게 가 닿기 위해
스미어 뼈 살 다 녹이고는 맑고 긴 여운을 위해
입 속의 말을 버린다,
가슴 터엉 비운다
* 1992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천마총.13 / 박 권 숙
천년을 쉬는 어깨 위로 이팝나무 꽃 뿌리며
구름의 층계를 오르는 햇살처럼
봄하늘 차고 오르는 무덤 속 말 한 마리
가슴 깊이 잠자던 어둠의 덫을 열고
날개를 다친 빛이 몸을 일으켰을 때
내 안의 골짜기들이 갑자기 환해졌다
* 1991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 당선
봄날도 환한 봄날 / 이종문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간다
우주의 넓이가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
*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장롱의 말 / 이달균
안방에 놓인 장롱은 고집으로 가득 차 있다
비녀를 빼지 않은 어머니의 팔십 평생
오늘도 오동나무는 안으로 결을 세운다
손이 귀한 집 손자는 언제 보냐고
벽오동 한 그루를 담장 아래 심었을
외갓댁 어른들 한숨이 손끝을 저며온다
대동아 전쟁이란 흉흉한 소문 속에
감춰둔 놋그릇마저 기차에 실려가고
처녀는 장롱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일곱의 탯줄을 끊은 가위며 실꾸리며
눈치보며 세들어 산 좀들의 흠집들과
닦아도 추억이 되지 않는 삭아가는 소리들
딸들은 내다버리자고 무심코 말하지만
피란 간 식구들을, 아버지의 임종을
묵묵히 지키고 기다리며 예까지 왔노라고…
솜씨 있는 장인이 만든 오래된 악기의
만가지 소리와 만가지 사연들을
너희가 어찌 알겠냐고 안방에 앉아 일러준다
*1993년 <시조시학> 신인상 당선, 시집 <장롱의 말> 등
길 / 강현덕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도 길이 되었다
햇살 잘 들던 내 방으로 버스가 지나가고
채송화 붙어 피던 담 신호등이 기대 서 있다
옛집에 살던 나도 덩달아 길이 되었다
내 위로 아이들이 자전거를 끌며 가고
시간도 그 뒤를 따라 힘찬 페달을 돌린다
* 1995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 등
현대시조 100년 특별기획 설문조사 결과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50선 작품 해설(1)
나래시조는 현대시조 100년 특별기획으로 시조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시조집, 고시조”를 추천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현대시조” 50편을 아래와 같이 선정하고 이번 호부터 매호 5편씩 작품해설을 싣는다. 금호에는 「백자부」(김상옥), 「어떤 경영」(서벌), 「팽이」(이우걸), 「장엄한 꽃밭」(정수자), 「따뜻한 슬픔」(홍성란) 등 5편의 작품을 해설과 함께 싣는다.
시조시인 100인이 선정한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다수 추천 시조 50편(등단년도 순, 다수 추천 순이 아님)
「가고파」(이은상) /「구룡폭포」(조운), 「석류」(조운) /「난초」(이병기) / 「백자부」(김상옥)/ 「봉선화」(김상옥) / 「개화」(이호우), 「달밤」(이호우), 「바람벌」(이호우),「살구꽃 핀 마을」(이호우) / 「보리고개」(이영도) / 「내 사랑은」(박재삼) / 「고무신」(장순하) /「산처일기」(이우종) / 「풍경」(김제현) / 「조국」(정완영),「부자상」(정완영), 「고향생각」(정완영), 「시암의 봄」(정완영), 「감」(정완영) / 「신전의 가을」(이상범) / 「어떤 경영」(서벌) / 「땅끝」(윤금초), 「주몽의 하늘」(윤금초) / 「겨울강」(박시교) / 「팽이」(이우걸), 「비」(이우걸) / 「물총새에 관한 기억」(유재영) / 「장국밥」(민병도) / 「자목련산비탈」(이정환), 「원에 관하여」(이정환),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이정환) / 「동백꽃, 지다」(이승은) / 「구절초시편」(박기섭), 「홍류동」(박기섭), 「새」(박기섭) / 「사고 싶은 노을」(오승철), 「송당쇠똥구리1」(오승철) /「비비추에 관한 연상」(문무학) /「해남에서 온 편지」(이지엽) / 「장엄한 꽃밭」(정수자), 「빈들」(정수자) / 「목욕을 하며」(정일근) / 「따뜻한 슬픔」(홍성란) / 「세한의 저녁」(권갑하), 「종」(권갑하) / 「천마총 13」(박권숙) / 「봄날도 환한 봄날」(이종문) / 「장롱의말」(이달균) / 「길」(강현덕)
■ 시조 시인 100인이 뽑은 “내가 좋아하는 시조 50선”
白磁賦
김상옥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작품해설>
이 작품 1수에서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고 있는, 백자에 덧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으로 아름다운 외양을 제시하고, 2수는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술을 담아 오는 데 사용된다는 기능 제시로, 백자에 대한 찬사가 눈부시게 드러난다. 그리고 1수에 이어 3수에서 선경을 펼쳐 놓고, 4수에서는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이라며 폐부 깊이 울어나는 찬탄의 점층법을 구사한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시조 미학의 요체라면 초정의 이 작품이 그렇지 않은가. 초정의 우리 것에 대한 탐닉은 시조와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으로 작용한 것이니, 그의 삶과 작품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그의 작품은 삶과 자가 텍스트성의 그물망을 형성하면서 완성도를 더해간 것이다.
초정은 당시 알아주지 않던 우리 미의식의 결정체인 골동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씩 수집하지 않았던가. 그 가운데 인구에 회자하는 에피소드 한 토막이 2천만원 전세를 살고 있을 때 4천만원을 선뜻 지불하고 이조백자를 샀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의 콘텍스트로 강하게 작용하는 초정의 삶을 읽고나면, 이 작품이 단순히 백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이 작품에서 백자는 우리 것에 대한 애정과 관심, 나아가 자부심의 환유가 아닐 수 없다. (이상옥)
■ 시조 시인 100인이 뽑은 “내가 좋아하는 시조 50선”
어떤 경영 1
서벌
목수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각목
어느 고전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생애의 무늬
물젖는 듯 선명하네
어째 나는 자꾸 깎고 썰며 다듬는가
톱밥
대팻밥이
쌓아 가는 적자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
<작품해설>
이 작품은 시골 출신인 서벌 시인이 시재 하나 달랑 지니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때로는 막노동을 하면서도 한순간도 시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모두 시조에 불어넣는 치열한 예술가적 삶을 살다간 그를 추억하게 한다. 시조라는 이상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현실적 삶은 다소 서툴렀지만, 평생을 시조에 헌신하던 서벌의 열정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시조 창작뿐만 아니라 비평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전통적인 시조 미학 지키기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창작에서나 비평에서 일관되데 보여준 것이 시조 미학을 서정 미학의 본질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가 순수 창작만을 고집하지 않고 시조 비평에도 뛰어든 것은 그만큼 시조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서정적 비전이 세계의 자아화라고 서정시의 전범이 될 만하다. 1수에서 화자는 목수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각목을 보면서 어느 고전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던 나무가 각목이 되어 목수의 손에 잡히게 되었는가라고 생각에 잠긴다. 대패로 깎아 속이 환히 드러난 각목에서 생의 무늬가 물젖은 듯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2수에서는 그 나무의 생이 화자 자신의 삶과 동일성을 이루면서 화자는 목수가 되고 나무는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톱밥, 대팻밥이 쌓이는 것이 적자더미의 화자의 삶이 되고 그런 지경에서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워 있는 각목은 화자의 실존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서정적 비전의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옥)
■ 시조 시인 100인이 뽑은 “내가 좋아하는 시조 50선”
팽이
이우걸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작품해설>
우리 시대에 왜, 시조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단시조의 미학이다. 3장 6구의 정제된 형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시조 미학의 본체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시대가 너무 풍요로워서 몸이든 정신이든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하면, 단시조야말로 자유시의 자유분방함과는 달리 정제된 형식이기 때문에 절제미로 시대적 요구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통제, 자기 절제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 시대의 안티 정신의 미적 양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 단시조의 절제미가 아닌가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우걸의 <팽이>다. 이 작품은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는 절제된 미의식이 잘 드러난다. 팽이의 속성을 빌어서 삶의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무수한 고통을 건너서 피워나는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가혹한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매를 맞아서 아름다운 접시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고통이나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팽이는 생의 알레고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강렬한 의지의 남성적 목소리를 유의해야 한다. 이는 강렬한 저항 의식과 연결되는 것이다. 화자인 팽이가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는 다짐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드러나는 ‘너’의 다의적 상징성은 이 작품이 단순한 교훈적인 생의 알레고리를 넘어서는 것임을 일깨운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의미의 중층 구조로써 정제된 형식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는 것은 자유시와 다른 단시조만의 미학이 아닐 수 없다.(이상옥)
■ 시조 시인 100인이 뽑은 “내가 좋아하는 시조 50선”
장엄한 꽃밭
정수자
1
오체투지 아니면 무릎이 해지도록
한 마리 벌레로 신을 향해 가는 길
버리는 허울만큼씩 허공에 꽃을 핀다
그 뒤를 오래 걸어 무화된 바람의 발
雲山을 넘는 건 사라지는 것 뿐이지
경계가 아득할수록 노을 꽃 장엄하다
2
저물 무렵 저자에도 장엄한 꽃이 핀다
집을 향해 포복하는 차들의 긴 행렬
저저이 강을 타넘는 누 떼인 양 뜨겁다
저리 힘껏 닫다 보면 경계가 꽃이건만
오래 두고 걸어도 못 닿은 집 있어
또 하루 늪을 건넌다, 순례듯 踏靑이듯
<작품해설>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순례자가 아닌가. 오체투지 아니면 무릎이 해지도록 한 마리 벌레로 신을 향해 가는 길이 생이 아니던가. 순례하는 한 사람 한 사람 피운 꽃이 모여서 장엄한 꽃밭을 이루는 것이다. 이 세상 너머의 저 세상으로 향하는 여정에 다름 아닌 것이 생일 터이다. 노을 꽃은 장엄하다. 왜냐 하면 노을 꽃은 사람들이 버린 허울들이 모여서 허공에 피운 꽃이기 때문이다.
“무화된 바람의 발”이나 “雲山을 넘는 건 사라지는 것 뿐이지” 같은 이미지가 생의 덧없음을 환기하기도 하지만, “경계가 아득할수록 노을 꽃 장엄하다”라는 이미지로 말미암아 허무주의로 추락하지는 않는다.
1수의 철학적 인식이 2수에서는 삶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저물 무렵 ‘집’으로 향하는 차들의 긴 행렬이 누우떼의 그것처럼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경계의 강을 건너 집으로 향하는 포즈가 장엄한 꽃밭이기 때문이다. 저물녘이면 지상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오래 걸어도 못 닿은 집은 죽음의 강을 건너서야 도달할 수 있을 터이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물녘이면 지상의 집으로 돌아오는 반복적 행위는 궁극적으로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한 순례의 길이다. 그래서 장엄한 꽃밭이 아닌가. 이 작품은 시조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형이상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이채롭다.(이상옥)
■ 시조 시인 100인이 뽑은 “내가 좋아하는 시조 50선”
따뜻한 슬픔
홍성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
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
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작품 해설>
시조가 현대에도 유효하기 위해서는 황진이 같은 걸출한 여성 시조인의 등장이 끊임없이 등장해야 한다. 황진이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로맨스와 문향으로 시조를 시대의 중심 담론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던가. 오늘 시조의 여러 문제도 황진이 같은 시조인이 등장하면 일거에 해소되지 않을까.
이 작품은 황진이의 절창 시조의 맥을 잇고 있는 듯해서 주목을 요한다. 제목에서 슬픔은 슬픔인데, 따스한 슬픔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황진이는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고, 님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었지만 홍성란은 사랑한다, 혹은 그립다라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침묵의 언어를 선택한다.
황진이의 시조에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다. 그래서 동짓달 기나긴 밤에 부재하는 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사랑의 봄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성란은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을 깨우쳐버렸음을 노래한다. 홍성란에게 사랑의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짓달 빈 가지 사이에서 가슴만 저미며 침묵한다. 그 침묵의 언어를 중장의 사설에서 속울음으로 슬픔을 진탕 풀어놓기만 하지 끝까지 터트리지는 않는 것이다.
도를 도라고 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라는 도덕경의 가르침처럼, 말로써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 이미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탓인지, 홍성란은 숫눈길 딛고 오는 따스한 슬픔만을 취한다.(이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