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군
왜 한림항 매립지에 공습을 하였는가?
이는 일본군들이 외정말기에는 제주도를 최후의 격전지로 정하여 군대를 주둔 시키려하여 한림항에 미리 군대가 이용할 군량미를 운반하여 쌓아둔 것이다.
미군들이 이 군량미의 정보를 수집하여 비행기 한대는 매립지를 폭격하고 다른 비행기 한대는 군량미 주변을 돌면서 기관총을 난사하니 피할 길이 없어 겨우 살아났다고 그 당시를 보고 겪은 사람이 말한다.
그 후 폭격을 맞은 매립지를 복구하느라고 그 주변사람들은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알수가 없다.
포탄에 맞아 죽은 군인은 또 몇 백명인지 모르지만 그 시체들을 금능 모래밭으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발견된 시체는 즉시 운반하였으나 바다에 빠져죽은 시체는 몇 개월 있다가 부근바닷가로 올라오기도 하고 고기가 뜯어먹은 시체는 군복만 올라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1년도 채 못되어 협재 앞바다와 비양도 사이에 구축함1대와 호위선2척이 와서 정박하였다.
이 배에는 만주에서 훈련받은 일본군인 중 제일 강한 관동군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배가 어디서 출항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미군이 이를 발견하고 추격하니 비양도 앞바다에까지 들어와 정박하였다.
이때가 1945년 4월 14일(음력 3월 3일 새벽)이었다.
따스한 봄날 천둥벼락 치는 소리처럼 지진이 난듯 우르릉 거리더니 유리창이 흔들리고 집방안 마루에 있는 유리병이 구르면서 떼구루루 뒹구는 소리를 낸다.
작년에 매립지를 폭파한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겁이 나서 밖으로 뛰어나가 보았다.
마을 높은 동산에 올라가보니 협재리 앞바다와 비양도 섬 사이에서 시커먼 연기가 온 하늘을 뒤덥고 있었다.
해변사람들은 전쟁이 났다고 하면서 보따리를 싸들고 산으로 올라온다.
아침 새벽에 우리 마을까지 여러 사람이 올라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양도 앞바다에 섬인지 군함인지 상상치도 못하는 큰 일본구축함(수산마루 4000톤급)1척과 호위선(노우미호 940톤, 해방함 745톤) 2척이 들어왔었는데, 구축함에는 군인을 가득 싣고 호위선에는 군수물자와 양식을 잔뜩 싣고서 비양도 앞바다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배들은 미군정찰기에 포착되어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2차 대전이 발발 4년 뒤 4월 14일 새벽에 미 해군(티란데 잠수함 SS420)은 이 정보를 수집하여 바닷물 속으로 교라이(어뢰)를 발사하여 이 배들을 침몰시킨다.
침몰되기 바로 전 날 구축함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거의 하선하고 일부는 남았었는데 모두 불에 타죽었다.
호위선 2척도 완전히 침몰되고 말았다.
구축함에 불이 붙으니 불꽃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며칠 동안 꺼질 줄 몰랐다.
사진 위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비양도 해역 침몰위치, 사진 왼쪽 아래 능미함, 오른쪽 아래 제31해방함 출처 : 뉴제주일보
당시 협재리에는 죽은 시체와 부상당한 군인들로 주변마을이 대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죽은 시체는 모래사장에서 화장도 하고 마차로 어디론가 싣고 나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1945년 4월 15일 아침새벽에 마차 끄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차는 철로 된 쇠바퀴다.
내키 만큼이나 높다. 마차 하나에 말 3마리가 끌고 비포장 길로 군사물자를 잔뜩 싣고서 힘차고 요란스럽게 줄을 지어 올라온다.
우리는 토종말(馬)만 보다가 처음으로 일본말(馬)을 보았는데 그 크기가 조랑 말(馬) 2배쯤 되는데 이를 ‘호마’라고 하였다.
나는‘이렇게도 큰 말(馬)이 있는가!’ 하고 감탄하였다.
말이 크니까 힘도 세다. 마차를 끌고 가는 말들 중 가운데 말에는 군인 한사람이 올라앉아서 운전을 하면서 계속 온다.
처음으로 보는 일본군 기마병이 멋있게 보였다.
큰 말위에 앉은 대장군인은 반짝이는 계급장을 붙이고 긴 칼을 옆에 차고 붉은 가죽으로 된 장화를 신고 있었다.
말고삐를 잡고 덜커덕 덜커덕 거리면서 대열을 끌고 가는데 소대장은 일률적으로 구령소리를 낸다.
“호초 도래!, 사이 개래!, 나오래!”
(차렷, 경례, 바로)하는 구령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러한 광경을 처음 보니 멋있게 보였다.
일본군은 그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해방될 줄은 모르고 제주도에서 3년 동안 살 것으로 계산하여 군수물자와 먹을 식량과 비품일절을 한라산 앞까지 말 구루마(마차)로 싣고 올라가서 땅을 파고 돌담을 쌓아서 쌀가마니를 쌓아놓고 천막을 덮었다.
이로써 완고한 야적장이 되는 것이다.
이런 야적장이 수십 곳이나 있었다.
해방이 되고 가보고 나서 알았다.
사병들은 배가 고파서 풀을 뜯어 먹어도 삼년 먹을 군량미라고 하면서 썩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사병에게 배불리 주지 못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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