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국민학교를 1971년3월5일에 입학하였고, 그때는 제법 공부가 쉬웠고 재밌었다.
2학년에는 교실이 모자라1반2반을 통합하여 한교실에서 수업을 했다.
3학년때는 담임선생님이 배구팀을 만든다하여 친구인 병기와함께 배구부에 들어가 무릎과 팔꿈치가 다까지는 상처투성이였고 체육복도 다 떨어지는등 힘들게 운동을 하였는데 다음해에 담당선생님은 다른곳으로 가시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의 배움으로 직장에서 높은 수준의 선수가 된것도 좋은일이다.
6학년에는 전교회의 어린이 회장도 하였고.담임성생님의 방과후 수학문제 풀이에서 난 항상 1등으로 하교하는 영광을 갔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급의 상위권의 학생들을 선생님의 집(사택)에 저녁에 모여놓고 과외같은 공부를 시켜주었는데 우리들은 하루에 학교를 아침에한번 저녁에한번 두번가는 이러한 추억도 만들어 주셨다.그시절의 추억들은 너무많아 글로는 다 쓸수가없고 나의 추억으로만 간직하련다.
중학교시절에는 그저 평범한 생활을하며 처음으로 자취생활이라는것을 해보았다.
3학년에 금산에 방을얻어 자취생활을 하려고 엄마와함께 연탄을 피우고 잠들었는데, 엄마가 나를 밖에서 등짝을 두드리며 동치미 국물을 억지로 먹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깨어나지를 않아서 엄마가 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한다. 결국 난 죽었다 다시 태어난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등학교는 공고로 가고싶었다.
기술을배워 독맆하고 싶어서 대전 인문계고 진학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5째형이 공고는 안된다며 극구 말리고 반드시 인문고를 지원하라하여 뒤늦게 지역학교인 금산고등학교로 지원하게되었다.
1학년에는 학업에 열중하여 성적도 좋았으나, 2학년에 킥복싱체육관을 다니게 되었다. 취미로하려했던것이 점점 주위에서 놔두질않았다. 자기들 클럽에 가입하라는 강압에 집단구타를 당하였는데도 난 가입에 반대를하였고, 극기야는 나중에 복수한다는 영화같은 꿈을 꾸기도 하며 칼날을 갈기도 하였지만, 3학년이 되어서야 정신차리고 공부를 하였는데 결국 학럭고사에서 패배의 쓴맛을 봤다.
난 재수하리라 마음먹고 전에있는 청산학원에 등록하여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학력고사에서 그래도 높은점수를 받았다.
그리고는 한양대학교 공대에 진학하려 했는데 또 5째형이 충남대 공업교육대에가서 교사를 하라는것이다. 나와는 적성이 맞지않아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달래봤지만 몰락해진 가정형편을 생각도해야하고, 결국 형의 말대로 충남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병치료관계로 부유하던 우리집은 기울어져 있었기에 대학의 학비도 바로위의 형이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2학기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내가 만들었고 자취방 월세는 엄마한테 졸라서 바로위의 형이 많이 도와주었다. 군에갔다 제대후 이삿짐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그렇게 살다보니 너무힘들어 지금의 아이들 엄마와 함께 쪽방에서 동거를 시작하고 방학이면 광산의 아르바이트를하며 간신히 버티며 살았다.
그러던중 4학년에 첫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생겨난 교사임용고시 준비로 독서실에서 밤을새며 공부하여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지금생각하면 힘든시절 고생하며 함께해준 애들 엄마가 고마울뿐이다.
그렇게 학창시절은 흘러만 갔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학창시절이 다시온다면 좀더 짜임새있게 그리고 알차게 계획적으로 살것이라 생각한다.